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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이라는 대본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이 드라마가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그 다음은 불치병이라는 소재를 전혀 무겁지 않게 다뤘다는 점이었습니다. 작가와 톱스타라는 남녀 주인공의 구도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암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드라마 중에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자세를 유지했던 드라마는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판타스틱'의 주인공 이소혜는 인기 드라마 작가. 어렵다는 장르 드라마에서 연속 히트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에게는 '갓소혜'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 소혜는 드라마 속 시한부 인생 대목의 자문을 위해 암 전문의 홍준기를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러던 와중에 자신이 바로 유방암 말기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소혜.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돈도 꽤 벌고 직업인으로서 기반은 굳혔지만, 버는 족족 돈은 가족들에게 들어갔습니다.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는 언니네가 들어가 살고 있고, 자신은 작업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죠. 결혼은 커녕 연애도 언제가 마지막인지 가물가물.

 

이렇게 인생을 끝낼수 없다고 결심한 소혜는 마지막 나날을 화려하게  불살라 보기로 결심합니다. 10년 넘게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찾아내고, 평소 전혀 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에 도전합니다. 그러는 사이, 오래 전 뭔가 관계가 맺어질 뻔 했던 류해성이 드러내놓고 자신에게 대시해 오고, 주치의인 홍준기도 "우리 사귀는게 어떠냐"고 제안해 옵니다. 심지어 홍준기는 현재의 삶을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암 환자입니다.

 

진작들 나타났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무튼 인생이 마지막 나날이 외롭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 아무튼 이렇게 해서 두 남자와 썸 타랴, 자신의 유작이 될 것 같은 드라마 집필하랴, 소혜의 분주한 나날이 이어집니다.

 

어쩌면 작가 본인의 판타지로 보이는 이 내용(연출자 조남국 감독은 이성은 작가에게 "본인이 하고 싶었던 연애 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 거냐"고 대놓고 얘기하십니다 ㅋ) 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라는 점에서 볼 때 김현주와 주상욱은 최상의 조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따질 땐 따박따박 따지고 바늘끝처럼 신경이 예민한 여자이면서도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는 소혜 역이라면 누가 봐도 김현주가 적격입니다. 나이는 먹었지만 마음 속은 어린이인 철없는 한류 스타 역할을 주상욱만큼 해낼 수 있는 사람도 드물죠.

 

특히나 팬들 앞에서는 허세 가득한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과시하지만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에게는 애교 덩어리. 겉으로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마음 속은 히트맨 아닌 '히타맨'인 남자의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면 더욱 그럴 겁니다.

 

 

 

캐스팅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지만(누군가 말했습니다. "캐스팅만 안 해도 되면 드라마 프로듀서는 신의 직업"이라고), 어쨌든 두 주인공이 결정된 뒤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습니다. 왕년의 거칠 것 없는 여고 퀸에서 지금은 거대 로펌 오너의 아내로 숨 죽여 살고 있는 백설 역을 박시연이 맡게됐고, 백설로 하여금 답답한 현실을 박차고 역시 자기의 삶을 찾게 하는 연하의 남자 상욱 역에 지수가 캐스팅됐습니다.

 

사실 순서상으로 가장 먼저 캐스팅된 사람은 의사 홍준기 역의 김태훈입니다. 무시무시한 연기력 덕분(?)인지 그동안 이상성격의 인물들 역할을 자주 맡는 바람에, 저는 이 배우의 진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동안 보여지지 않았던 엉뚱한 김태훈의 면모가 드러날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캐릭터들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한 영상. 저 다섯 주인공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깨알같은 "이거 너무 잘생긴거 아니야?" ㅋㅋㅋ

 

 

 

 

 

 

생각해 보면 올해만큼 사회 각계에서 '여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해도 별로 없었던 듯 합니다. 각종 혐오 범죄와 여혐 논란, '미러링'이라는 생소한 단어와 함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고, 그런 가운데 미국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이어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가 등장한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사회 전반에서 '유리 천장'에 대한 언급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을 예견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저희는 올해 '여성'이 뭔가 중심에 오는 이야기들에 계속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여성, 세상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여성,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여성,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이야기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것이 '욱씨남정기'의 욱다정 이요원이었고, 배경이 조선시대이기는 합니다만 '마녀보감'의 연희도 저주와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당당한 여성상을 보여줬습니다. '청춘시대'의 다섯 주인공 역시 아직 미생의 존재인 여대생들이 부딪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 눈치 채셨겠지만 '죽음을 앞두고서야 생활로부터 해방된 여자'의 이야기는 '여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한국 사회의 모든 성인들은 사회에 나서는 순간 주위를 둘러 볼 여유 없이 '앞으로 앞으로' 자전거 페달 밟기를 강요당합니다. 다리를 멈추는 순간 자전거가 쓰러지고 너는 낙오된다는 교훈 속에서 수십년간 훈육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시한부 진단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물론 자녀 있는 분들에게는 큰일 날 얘기죠.^^) 

 

 

아무튼 '판타스틱'은 넓게 보아 남자든 여자든 '생활로부터 벗아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작은 판타지입니다. 어떤 계기에서든 조금 여유를 가지고, 그 지긋지긋한 생활의 쳇바퀴에서 살짝 내려온 사람들의 이야기이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잠시 즐겨 보는 것이 힘든 일상에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P.S. 이 드라마 1,2회를 보시고 나면 옛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질 겁니다. 문득 한참 떠올리지 않았던 이름들을 찾아 보고, 전화번호가 011이나 016으로 되어 있어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다들 살기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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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청춘시대' 티저에 쓰였던 윤동주 시인의 시 '병원' 입니다. 이미 대본을다 읽은 뒤였기 때문에, 티저에 들어간 저 싯구절이 더욱 적확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사실 '청춘시대'를 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예상대로, '너무 자극이 약하지 않느냐' '전개가 느리다' '대체 누가 남자 주인공이냐'는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일정 정도의 기간이 지나고, 서서히 이 드라마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가 폭발력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굳이 주인공이 있다면 주인공일' 윤진명, 즉 한예리의 지독한 불행입니다. 그 불행이 단적으로 나타난 장면은 지긋지긋한 알바와 그 생활을 더욱 힘들게 만든 매니저의 갑질이 아니라, 어느날 급한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 윤진명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병원 복도. 바닥에 주저앉은 어머니는 "수명아, 그동안 엄마 불쌍해서 못 간 거지? 내가 안다. 우리 아들. 6년 동안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를 되뇌며 주위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다음 장면, 어디선가 다가온 의사는 말합니다.

 

"걱정마십시오. 안정됐습니다."

"...?"

"바이탈이 안정됐습니다."

"예?"

"원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침묵하는 어머니. 어떤 어머니들에게든 '아들의 죽음'보다 절망적인 상황이 무엇이 있을까요. 하지만 '청춘시대' 4회의 이 장면은 아들의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던 어머니가 '아들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말에 고개를 떨궈야 하는 무서운 상황입니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윤진명은 어머니의 시선을 외면하고 돌아서 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박재완(윤박)에게 '날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던지고 집(벨 에포크)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눈물을 보입니다. 우는 이유는 "삶이 고달파서"가 아니라 "손톱이 빠진게 너무 아파서".

 

스물 여덟의 대학 졸업반. 세 군데 알바를 뛰어야 간신히 이어갈 수 있는 삶. 항상 바라보고 있는 두 사채업자의 그림자. 병원에 누워 있는 식물인간 남동생. 그 손을 놓지 못하고 빚만 쌓아 가고 있는 어머니. '절망적'이란 말 하나로 설명하기 힘든 한 여자의 상황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는 사람의 어깨를 눌러 옵니다.

 

어쩌면 이런 무게를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그 이유로 이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자신의 현실은 그래도 윤진명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람들이라야 이런 드라마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도 있겠죠. 아무튼 그 '절실함'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때립니다.

 

 

 

 

 

 

 

또 하나의 동력은 막내 유은재(박혜수)의 첫사랑입니다. 은재가 은근히 좋아하는 복고풍 미남(대본의 표현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런 유은재가 귀여워 미치겠지만 그 눈치없음에 환장할 것 같은 선배 윤종열(신현수). 이 구도가 너무나 깜찍했습니다.

 

과연 요즘의 스무살 안팎 청년들이 아직도 저렇게 깜찍하게 연애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 유은재와 윤종열의 모습은 '요즘 대학생'이라기 보다는 한 10여년 전 대학생들의 모습과 더 닮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아직 철이 덜 든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처음 다가가 보여주는 동작이 상대에겐 '시비 걸기' 내지는 '사소한 일로 꼬투리 잡아 괴롭히기'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특히나 상대가 경험이라곤 저혀 없는 초짜 중의 초짜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둘의 연애는 시작하기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을 시청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술에 취해 콧물 흘리는 모습조차도 귀여운 박혜수, 그 박혜수를 자기도 어찌할 줄 몰라 바라보지만 어쨌든 너무 귀여워서 죽을 것 같은 신현수. 두 배우의 매력이 이 드라마를 살린 원동력 중 하나라는 건 아마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사실 이 드라마가 얼마나 '리얼한지'에 대해서는 큰 자신은 없습니다. 아마도 이 드라마는 2016년의 진짜 대학생들 이야기이기 보다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진짜 순수했던 그 시절'의 그림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의 젊은 배우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아마도 매우 중요한 한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드라마를 떠올릴 때마다 그 배우들은 시청자들과 함께 시공을 넘어 누구에게나 있을 '젊은 날'의 기억을 공유하게 됐을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태곤 감독의 세심한 연출은 그 공감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서 몇 회 남지 않은 '청춘시대'. 일단 이 드라마는 12회로 끝나지만 이 끝이 그냥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어디 가서 이만한 완성도의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정확히 언제가 될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언젠가 어디서든 윤진명, 강이나, 정예은, 송지원, 유은재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될 날을 은근히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부터는 한껏 웃으면서 현실 세계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판타스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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