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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영화 '해적'에 나오는 옥새 장면이 매우 굴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주권을 인정받기 위해 이웃 나라의 군주로부터 '그대들의 나라를 인정하고, 그대 나라의 국새를 보내 그것을 증명하노라'라는 칙명을 받는다는 건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연원을 생각해 보면, 당시의 동아시아 상황에서 국새를 받는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모욕적인 일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각에서는 과거 조선이 명에 대해 취했던 자세와 마찬가지로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에 대해 굴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 국경을 함부로 넘어 조업하는 중국 어부들 하나 단속하지 못하고, 이를 가로막던 해경 요원이 중국 어부에게 살해당해도 속시원한 조치를 하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 - 심지어 수많은 인권/재야 단체들 또한 여기에는 입을 다무는 현실을 보면, 대체 누가 어느 시대를 향해 사대주의적이고 종속적이었다고 욕할 자격이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옥새의 의미와 그 전달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봤습니다.

 

 

 

 

 

 

옥새

[명사] 玉璽. 나라의 권위를 상징하는 국왕의 인장. 흔히 국새(國璽)라고도 불린다. 각종 문서에 국가의 약속을 대신해 사용된다.

 

개인이 도장을 사용하듯 나라에는 국권을 대신하는 도장이 있다. 한자로 새()라는 글자 자체가 가장 높은 권위의 도장을 뜻하며, 굳이 옥으로 만들지 않아도 흔히 옥새라고 쓴다. 이는 아마도 국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전국옥새(傳國玉璽)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국새라고 불리는 이 옥새는 한비자에 나오는 화씨의 구슬[和氏之璧]수명우천, 기수영창(受命 于天 旣壽永昌,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은 영원하리라)’의 여덟 글자를 전서로 새긴 것이다. 진에 이은 한()나라에서도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보물로 사용됐고, ‘삼국지연의에서 원소와 손견이 궁중 우물에서 발견된 이 전국새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에피소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후에도 전국새를 가진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라는 통념 때문에 수,당 시대까지 권력의 상징으로 존중받았다. 오대십국 시대의 후당 이후 전국새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고, 이후에는 모조품이 몇 차례 등장했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진짜 전국새를 사용한 사람은 진시황 한 사람 뿐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찍이 진시황이 천하를 순시하던 도중 동정호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위태로워지자 옥새를 물에 던져 잔잔하게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황제의 권위로 동정호의 용을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왕은 노인으로 변신해 황제에게 다시 옥새를 전달했다고 한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에겐 이 모두가 황제를 신격화하려는 이벤트로 보일 수도 있다.

 

한반도의 여러 왕조에게 중국으로부터 국왕에 책봉되어 칙명과 국새를 받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매우 중요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삼국시대 이후 책봉례가 끊인 시절은 없었다.

 

고려는 원과의 오랜 전쟁 끝에 굴복하고 사위의 나라가 된 뒤, 부마국왕(駙馬國王)의 칭호로 옥새를 받았다. 반면 새로 건국한 명은 고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1370,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 새겨진 국새를 보내왔다.

 

1392년 개국 직후 태조 이성계는 명에 사신을 보내 새 나라의 국호로 화령(和寧)’조선중 어느 것이 좋으냐고 질의했다. 화령은 함경남도 영흥의 옛 이름으로 이성계의 고향이다. 청을 받은 명 태조 주원장은 옛날부터 쓰던 이름이요, 불러서 아름다운 이름이라며 조선을 골라 줬다.

 

이로써 일단 정권의 정통성은 인정받은 셈이나 정식 책봉이 되려면 옥새 수령은 필수였다.  이성계는 1393년 고려 국새를 반납한 데 이어 1395년 태학사 정총을 사신으로 보내 옥새를 재촉했다. 하지만 당시 명은 정도전이 주도한 조선의 군비 확충을 우려 하던 터라 쉽게 국새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태종 1(1401) 612일에야 명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국새를 지닌 사신들이 도착했다(국왕이 직접 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영화 해적에 나오듯 조선 사신이 대신 받아 가져올 수는 없었다). 태종은 매우 기뻐하며 두 사신에게 각각 7언절구를 지어 답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2년 뒤인 1403 48일에도 역시 금인(金印)과 칙령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2년만에 또 국새가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진짜 고래가 삼켰는지도.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대단히 굴욕적인 일로 느껴질 수 있으나 당시 중국의 책봉은 중화라 불리는 동아시아 문명의 일부에 편입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시각을 달리 하면, 책봉 여부는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기준으로 볼 수도 있다.

 

일본에는 중국 한나라 광무제가 내린 한왜노국왕(漢倭奴國王)의 인장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조선초인 1401년엔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가 외교적인 노력 끝에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지인(日本國王之印)이라는 국새를 받고 명의 왕위 책봉을 받아들였다. 막부의 권력을 인정받고 조공을 통한 명과의 무역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명이 청에게 대륙을 내준 뒤 청도 조선에 새로 국새를 보냈고,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는 글자체를 만주체로 바꾸어 새로 보내기도 했다. 서유문은 무오연행록에서 이 국새에 대해 금으로 만들어졌고, 위에 거북이를 앉혔다. 안남(베트남)이나 유구(오키나와)에는 은으로 만들고 낙타를 앉힌 인장을 내린 것을 보면 우리(조선)와 대접이 다름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소중화(小中華)의 자존심이 눈길을 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지나간 역사를 매도하기보다는 과연 그 시대의 사대(事大)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G2시대의 한반도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이 이미 중국을 상대로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과연 오늘날의 후손들이 자주성 운운 하며 조상들을 매도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P.S. 제발 옥쇄라고 쓰고 오타라고 우기지 말 것.

 

 

 

 

 

영화 '해적'에 잠깐 스쳐 등장한 국새의 모습입니다만, 실제로는 봉황이 아닌 거북이가 새겨져 있었던 듯.

 

 

 

 

명이나 청으로부터 받은 옥새는 외교 문서용으로 고이 간직하고, 내정용으로는 수시로 국새를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청의 영향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판단한 고종이 즉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기존의 조선국왕지인 대신 황제어새를 새로 만들어 사용한 것을 보면 자주성에 대한 인식이 분명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단지 조선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실력의 뒷받침 없이 자주성이며 주권, 대의를 부르짖었던 댓가가 어떤 것인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입으로 자주와 자유를 외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주성을 주장하고도 뒷탈이 없기 위한 대비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잠시 기분은 유쾌할 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역사는 자존심 한 번 제대로 지킨 댓가를 그 이후의 몇 세대가 치렀던 일이 적지 않았음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시선으로 조상들을 함부로 비웃지 맙시다.

 

P.S. 이와는 별도로 '해적'은 참 유쾌한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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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이 흥행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있습니다. 예견됐던 일입니다. 방학 시즌에 가족 관객들이 동반 관람할 만한 안전한 선택이라는 점은 큰 이점입니다. 게다가 그 어느때보다 리더십이 화두에 올라 있는 상황, 모든 비난과 고난을 한몸에 담고 묵묵히 실천을 통해 아랫사람의 분발을 이끄는 명장 이순신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명량'을 보면서 여러 차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김한민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에서 보여졌던 많은 강점들이 실종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영웅'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고,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도 '성웅 이순신'에 대한 감동을 소감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과연 '명량'이 그 '영웅 만들기'에 성공한 작품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성공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 개인적으로는 매우 아쉽습니다. 그 아쉬움에 대한 내용입니다.)

 

 

 

 

 

많은 평자들이 '명량'의 강점을 '정공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영화를 재미있게 하기 위한 많은 장치들을 배제하고, 그저 '위대한 영웅 충무공 이순신'으로 승부를 걸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동시에 이 '정공법'이라는 말 안에는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굳이 교과서 텍스트 이상을 표현하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이 영화의 알파요 오메가는 바로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어떻게 그릴까' 입니다. '난중일기'를 읽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뜻밖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놀랍니다. 특히 통제사 해직 - 고문과 백의종군 - 칠천량의 패전 - 통제사 복직 - 명량해전에 이르는 참담한 기간의 일기에서는 고뇌하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괴로워하는 인간 이순신의 면모가 가슴을 때립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는 조정, 말도 안 되는 상황, 말도 안 되게 강한 적, 그 절망을 뚫고 나가려는 초인적인 의지.

 

그런데 영화 '명량'의 이순신은 아쉽게도 매우 단선적인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옳고 바른 영웅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우선 이 인물에게는 소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그를 믿고 의지하던 부하 안위조차도 퇴각을 주장하지만 영화 속 이순신은 단 한번도 그들에게 왜 여기서 싸워야 하는지 설득하지 않습니다. 전략은 내 머리 속에 있고, 너희는 싸워야 한다는 식입니다. 혼자 고뇌하고, 혼자 불면의 밤을 보내고, 탈주자를 엄벌에 처할지언정 누구와도 공감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영웅입니다.

 

 

 

 

다음. 12대 133(또는 300)의 치명적인 열세 상황에서, 그래도 부하들은 이순신이 홀로 앞에서 혈투를 벌이며 북을 치자 달려나와 호응하고 전선에 합류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고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의 솔선수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장선이 공격당하는 순간 뱃머리를 돌려 달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데에도 주목해야 합니다(물론 대장선이 격침당했다면 바로 다들 달아났겠죠). 이런 상황에서 부하들이, 그리고 백성들이 그를 믿고 달아나지 않은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명량'에서처럼 '소통' 조차도 하지 않았다면, 대체 왜 그들은 그를 믿고 따를 수 있었을까요.

 

이 영화의 가장 주된 텍스트인 '난중일기'에는 그 이유까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보면, '난중일기'에 그런 설명이 있었다면 충무공은 지금까지 이렇게 추앙받는 영웅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있었다면 그건 자화자찬이었을테니 말입니다.^^)

 

충무공이 혼자 힘으로 분투할 때 부하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앞으로 치고 나와 전투에 합류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할 수 있었던, 백성들이 피난을 가기는 커녕 열두척의 전선 뒤에서 군선을 가장하고 허장성세를 펼쳐 전투를 도울 수 있었던('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항복이나 윤휴가 쓴 충무공 행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일부러 백성들의 배를 뒤편에 배치해 우리 편의 수가 많은 것 처럼 꾸몄다" 이 때문에 명량해전을 다룬 일본 쪽 기록은 조선 수군의 전력이 열두척 뿐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인, 바로 충무공과 아랫 사람들 사이의 절대적인 신뢰가 이 영화를 봐선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에선 어느 정도 상상력이 발휘되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명량, 실제 역사와는 어떻게 달랐나. http://fivecard.joins.com/1268

 

 

 

 

 

하지만 지나치게 '곧이 곧대로' 표현된 이 영화의 이순신은 고집불통의 노장으로 보일 뿐이고, 희대의 지략가라기보다는 그저 불굴의 투사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최민식이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이 역할을 맡음으로써 그나마 어느 정도 입체적인 인물 상이 그려질 뿐, 배우의 역량을 빼 놓고 본 '명량'의 이순신 캐릭터에게선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역사나 바른생활 교과서에서 뚝 떼어낸 듯한 재미없는 인물일 뿐입니다.

 

 

 

 

이순신이 그렇게 되고 나니 다른 인물들은 차마 말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류승룡, 조진웅, 김명곤, 진구, 이정현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에 남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뭐라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이순신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루시마 역의 류승룡이 '나, 왜장. 당신들이 생각하는, 임진왜란 사극에서 늘 보던 바로 그 왜장. 잔혹하고 피에 굶주린 그런 왜장' 에 그쳤고 보면 말입니다. 나오는 장면 장면이 모두 인상적이었던 '최종병기 활'의 쥬신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심한 캐릭터입니다.

 

 

(그 외의 배우들은 더더욱 할 말이... 한 영화인은 "소년 수봉 역을 맡은 신인 박보검 하나 외에는 모두 명량에 수장됐다"고 농담을 던질 정도입니다.)

 

물론 '명량'의 최대 강점은 해전 장면의 스펙터클에 있습니다. 바다 위를 수놓는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면서 '명량'은 비로소 기지캐를 켭니다. 전투의 세세한 상황이 실제 역사와 부합하는가를 따지기에 앞서, '명량'의 전투 신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배우들과 엄청난 물량이 투입된 결과가 현재의 '명량'이라면, 아무래도 아쉽다는 느낌이 앞서게 됩니다.

 

하긴 현재 상태에서도 많은 관객들이 '명량'을 본 뒤 '애국의 열정이 샘솟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가슴이 뛰었고, 영화의 진정성을 깊이 느꼈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런 평가를 내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평가의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한민족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장'과 그 명장의 위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화 '명량'에 대한 평가는 이런 관중의 대대적 호응과는 조금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로빈 윌리엄스 주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앞부분에는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유명한 문학 교과서의 첫 페이지를 찢어 버리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시의 이해 Understanding Poetry' 라는 이 교과서에서는 한 시 작품의 위대성을 판단하기 위해 두 가지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시가 얼마나 예술적으로 완성도 있게 쓰여졌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시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키팅 선생님은 바로 이 설명을 찢어버리게 합니다. '중요한 대상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면 위대한 시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얼마나 헛된 것이냐는 이유 때문입니다.

 

'명량'은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그린 작품으로는 한국 영화사에 충분히 기억될 만한 그런 영화입니다. 하지만 '성웅 이순신'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그만한 평가를 받기 힘들 듯 합니다. 스필버그의 '링컨'이나 TV 사극 '뿌리깊은 나무', '정도전' 처럼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진 영웅을 다룰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있어 각각 다른 방식의 전범을 보여준 작품들을 생각한다면 '명량'이 그려낸 이순신의 모습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입체적이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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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의 주된 텍스트는 '난중일기'입니다. 특히 해전 당일의 진행은 난중일기에 기록된 1598년 음력 9월16일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본인과 아들 이회, 그리고 송희립 나대용 안위 김억추 등 당일 전투에 참여한 부하 장수들은 물론이고 승려 혜희, 정찰꾼 임준영, 항복한 왜의 무사인 준사 등등 조연급의 인물들도 모두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 실제 역사는 역사,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차이가 있어서 '명량'이 나쁜 영화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단 '명량'을 실제 역사로 착각하는 일을 방지하거나, 혹은 그저 호기심에서 '명량'과 역사상의 기록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이순신(1545~1598)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충무공 이순신의 일생을 간략하나마 한 페이지로 정리한다는 것은 감히 저지를 수 없는 불손한 짓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화 명량에 기록된 ‘1598 9이란 제한한 시간 안에서, 각종 기록에 담긴 이순신의 전적을 다뤄보고자 한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개전 한달만에 일본이 조선의 수도 한양을 빼앗는 등 파죽지세의 면모를 보였으나 이후 명의 원군이 참전하고 강화 논의가 시작되며 긴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화의가 깨지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격분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시작됐다.

 

그해 3, 모함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난 이순신은 7월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전사함에 따라 통제사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남은 전선은 겨우 열 두척. 뭔가를 해 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난중일기 9월은 우울하기만 했다. 가까스로 남해의 서쪽 끝, 벽파진에 본부를 차렸지만 언제 적이 쳐들어올 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말단 병졸은 물론 지휘관들도 공포에 질렸다. 92, 전체 조선 수군의 서열 2위라고 할 수 있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전투를 피해 탈영할 정도였다.

 

97일에는 왜 수군의 척후대가 방어 태세를 살피기도 했다. 14, 왜군이 마침내 한줌 남은 조선 수군을 섬멸하고 한양으로 진공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결전이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음력 916일의 기록도 평소보다 길지 않다. 130여척의 일본 함대는 명량해협으로 직진했다. 해류의 불리함이고 뭐고 압도적인 규모를 이용해 뭉개 버리겠다는 자세. ‘명량에서 류승룡이 연기한 구루지마가 선봉에 섰다.

 

전날 밤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를 부르짖어 투지에 불을 질렀지만, 막상 일본의 대함대를 마주한 장졸들은 겁을 먹고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특히 이순신이 일기에서 저런 자가 어떻게…”하고 한탄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800미터(두 마장)나 뒤쳐져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 최전방에 선 이순신은 대장선의 앞선 화력을 이용해 공격해오는 왜선들의 접근을 막으며 꿋꿋하게 버텼다. ‘명량에선 그리 강조되지 않았지만, 조선의 전투 과학 기술은 이순신의 전술과 울둘목의 해류 못잖게 이날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판옥선은 일본의 주력함인 세키부네에 견고함이나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고, 조선의 천지현황 총통도 사정거리나 파괴력에서 조총을 압도했다.

 

일본 수군은 갈고리를 걸어 상대 배에 뛰어드는 전술에 능했으나, 조선군은 현대전의 크레이모어를 연상시키는 대인살상병기 조란탄(鳥卵彈, 작은 탄두 수십개를 동시에 산탄처럼 쏘아 보내는 포탄)를 활용해 접근전을 원천봉쇄했다. 이순신의 눈부신 투지에 물러섰던 부하들도 하나둘씩 전선에 합류, 기적 같은 승리를 합작해냈다.

 

일본 수군은 구루지마가 전사하는 등 31척을 잃고 후퇴했다. 임진왜란 7년을 통틀어 다이묘(大名, 지방 영주)급 지휘관이 전사한 것은 명량의 구루지마가 유일하다. 반면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잃지 않았고, 대장선에서는 사망자가 2, 부상자가 3명 나왔을 뿐이었다(이런 피해라면 대장선에선 명량에 그려진 백병전이 펼쳐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명량대첩의 개략적인 결과다.

 

 

 

1. 백병전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영화 '명량'은 매우 충실하게 '난중일기'의 당일 기록을 재현하고 있습니다만 이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납니다. 위에서 밝힌 대장선의 피해 규모를 볼 때, 백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물론 대장선이 아닌 안위의 배에서는 백병전이 펼쳐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장선이 혼자 앞으로 나가 왜 수군 전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대장선과 왜 수군 선발대의 원거리 타격 능력이 이지스함과 일반 함선 정도로 차이가 났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조금 더 들어가면, 조선 수군의 승리 뒤에는 조선의 뛰어난 선박 제조술과 화포 기술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명량'에서는 명량해전 후반에 조선 배가 일본 배를 들이받아 부수는 충파(衝破) 장면이 나오는데, 본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어는 당파(撞破)입니다(충파라는 용어는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기존의 많은 사람들은 이 당파를 '조선 배로 일본 배를 들이받아 깨뜨리는 전술' 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최근의 해석으로는 이 당파가 직접 배와 배가 들이받는 것이 아니라는 쪽입니다. 일찌기 1985년 드라마 '조선왕조500년-임진왜란' 편에서는 원균이 이 당파전술의 창시자(?)이며,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 배보다 훨씬 견고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었던 전술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각종 문헌에서 사용된 '당파'를 해석해 본 결과 원거리 병기로 적함을 격침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결론입니다. ]

 

이 시기 해전의 전투 방법이라면 1) 배와 배끼리 동반 침몰을 각오하고 들이받는 것 2) 화포나 활 등 원거리 병기로 공격하는 것 3) 갈고리를 걸고 상대 배로 넘어가 백병전을 펼치는 것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을 듯 합니다.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일단 2)에서 압도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꼽겠습니다. 반면 일본 수군의 당시 주된 전법은 3) 쪽에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으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육전에서는 왜군의 조총이 핵심 병기 역할을 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군의 화포가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천지현황 총통과 위에서 말한 조란탄 같은 대량살상병기, 그리고 유명한 비격진천뢰처럼 목표물에 적중한 뒤 2차 폭발을 가져오는 신형 포탄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2. 거북선이 동원될 수 있었나?

 

명량해전을 앞두고 거북선을 새로 건조중이었다거나, 배설이 그 배에 불을 질렀다거나 하는 것은 본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물론 실제로 거북선을 건조하려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설은 그저 전투가 두려워 혼자 탈영을 했고, 뒷날 육지에서 체포되어 참수됐다는 기록만 전해집니다.

 

더구나 거북선은, 갑판 위에 창칼을 꽂은 지붕이 덮여 있어(이것이 철갑이든 아니든^^) 왜군이 3)의 전법을 아예 시도할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왜군들의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원거리 화력에서 뛰어난 조선 수군이 굳이 적의 강점인 백병전의 위협을 불사하고 배와 배끼리 들이받는 근접전을 선택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다만 거북선의 경우에는 적의 승선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보다 근접해서 화약무기를 활용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명량'에서 배 만드는 노인이 감동에 찬 목소리로 "구선(龜船: 거북선)이 돌아왔다!"고 외치는 것은 사실 좀 공허합니다.

 

 

3. 일반 백성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

영화 '명량'이나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항복의 '고 통제사 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나 윤휴 등이 작성한 이충무공의 행장에는 "백성들이 어선을 동원해 조선 수군이 일자진을 친 뒤에서 허장성세로 우리 함대의 수가 많은 것처럼 꾸몄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피란민들이 달아나지 않고 함대의 뒤에서 응원했다는 것은, 이 피란민들이 충무공에 대해 갖고 있던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줍니다.

 

연전연승하는 스타라서 그루피처럼 따라다닌 것이었다면 이렇게 수세에 몰렸을 때에는 백성들부터 달아났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명량'에서 백성들이 어선을 동원해 난류에 휘말린 대장선을 끌어 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런 기록을 기초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76년작 영화 '난중일기'에는 울돌목 수중에 긴 쇠사슬을 설치하고, 수천명의 백성들이 이 사슬을 잡아 끌어 해전을 돕는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철쇄설'이라고 해서 한때 유행했던 전설입니다. 기원은 알 수 없으나 - 아마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쇠사슬 수전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만 - 오랫동안 생명력을 갖고 있던 이야기이지만, 근래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강 싸움이라면 모를까, 울돌목에서 사용했을 만한 거대한 쇠사슬을 만들어 전투에 썼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합니다

 

4.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마다시인가?

 

'난중일기'에는 항복한 왜군 준사(영화에도 나옵니다)가 물 위에 뜬 비단 옷 입은 왜장의 시체를 보고 "저게 마다시(馬多時)"라고 했으므로 시체를 건져서 내걸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목을 잘라 높이 건 시체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것입니다.

구루지마는 임진왜란을 통틀어 전쟁 중 전사한 왜군 지휘관 중 최고위급의 지위관 (다이묘 전사자는 구루지마 뿐) 이므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마타시가 이 구루지마의 별칭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역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장 간 마사카게(菅正陰)의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마사카게의 별명이 마타시로(又四郞)였다는군요.

 

 

5. 이순신은 왜 명장인가?

 

그럼 판옥선과 거북선이 우수하고, 조선의 화포가 뛰어나서 이건 거냐? 그게 다냐?

 

이런 질문을 하실 분들이 반드시 있을 듯 해서 덧붙입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충무공의 진정한 위대함은 비슷한 전력의 전투선단을 이끌고 용맹과 지략으로 적을 물리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비해 장기간에 걸쳐 이처럼 적과 비대칭의 전력을 구성하고, 교전시에는 압도적인 화력을 이용해 학살 수준의 전투를 벌여 적의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전략가의 면모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피난민 구제에도 힘써 백성들이 정보 제공과 식량 및 자원 조달에 자진해서 나서게 하는 총체적인 역량을 고려할 때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기간의 시스템 구축, 단기전에서의 역량은 물론 심리전과 정훈병과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그냥 명장'들과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전략가이면서도 인간적으로도 휘하 장병들과 백성들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얘기죠. 그런 의미에서 '명량'의 이순신 묘사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나중에 따로.

 

명량, 영웅만들기에 성공했나. http://fivecard.joins.com/1266

 

 

 

난중일기 130척으로 기록된 왜적 함대 규모는 점점 부풀려져 19세기의 이긍익은 “600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전투에 참여한 장군들이 당시 거느렸던 병력 규모로 볼 때 다 해봐야 고작 수십척이라고 맞선다.

 

일본 측 해석에 따르면 명량해전은 대첩도 아니요, 전체 판세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 교전이다. 비록 일본이 선봉을 격파당했지만 조선 수군은 명량에서의 교전 직후 후퇴했고, 다음날 일본의 본진이 명량을 지나 서해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전략적으로는 일본이 승리한 전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순신은 전투 직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군산 앞바다까지(921) 일시 후퇴했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 군세를 회복해 이듬해 2월에야 고금도에 진을 치고 전남 서부 해안을 확보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명량해전 이후 일본 수군이 서해를 통해 한양에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는 점, 이후 단 한번도 이순신 수군을 박멸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재개하지 못했다는 점 등은 이런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이순신의 전적은 한일간의 역사적 자존심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는 부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역시 한국 측은 승한 반면 충무공이 유탄에 맞아 서거했다고 보는 반면 일본 극우 세력은 이순신이 죽었고 일본군의 주력이 한반도 탈출에 성공했으니 일본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전혀 좁혀지지 않을 해석의 차이가 한-일간의 심리적 거리를 대변해 주고 있다. [끝]

 

일본이 생각하는 이순신에 대해선 나중에 짬을 내서 자세히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개는 일본의 억지가 돋보입니다만,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와 넬슨을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라고 했다는 얘기는 사실 여부를 놓고 논란이 꽤 거세더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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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엄청나게 덥네요.

 

시작합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8월의 문화가이드 (2014)

 

 

8월은 자연스럽게 공연 비수기. 이럴 때면 절로 런던의 PROM이나 에딘버러의 프린지 같은 8월의 공연 천국이 그리워지네. 대신 서울의 8월은 대신 락 페스티발의 물결이야. 프레디 머큐리는 없지만 퀸이 슈퍼소닉 페스티발(8.14), 오지 오스본과 마룬5가 현대카드 시티브레이크(8.9~10), 레이디가가가 AIA리얼뮤직(8.15~16)에 내한하네. 여유만 있다면 돈 쓸 기회는 정말 많아.

 

물론 우리의 모토는 그런게 아니지? 고개를 돌리면 일단 821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부천 필하모닉 유럽 투어 프리뷰 콘서트가 보여. 말 그대로 올 가을 유럽 투어를 앞두고 국내 팬들에게 그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기회야. 지휘는 계관지휘자 임헌정. 브람스 교향곡 4번과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1번도 관심이 가지만 특히 한국 현대음악인 전상직의 관현악을 위한 크레도초연이 포함돼 있는 공연이야. 신예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도 주목. 모처럼 3만원으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의 R석에 앉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다음. 우리가 항상 셰익스피어를 교양의 표상으로 거론하지만 사실 셰익스피어극을 책 말고 실제 사람이 공연하는 모습으로 보기는 쉽지 않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지.

 

아쉽게도 실연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 극을 그 본고장인 영국 국립극단의 공연으로 볼 기회가 생겼어. 바로 NT라이브라는 이름으로 영국 국립극단의 공연을 실황으로 녹화해 전 세계의 다른 극장에서 보는 행사인데, 요즘 극장에서 보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연상하면 될 거야. 올초 서울 국립극장에서 워 호스를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아실테고.

 

830일과 31, 두 날에 걸쳐 코리올라누스리어 왕이 하루 한 차례씩 상영돼. ‘코리올라누스는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그리 자주 공연되지 않아 친숙하지는 않은 작품이야. 뭐 베토벤의 코리올란서곡을 아는 사람이라면 줄거리를 대략 아는 정도지.

 

 

 

 

2011년에는 레이프 파인즈와 제라드 버틀러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어. 그런데 이번 연극 코리올라누스가 주목을 끄는 건 영화 토르어벤저스로 국내에도 팬이 많은 배우 톰 히들스톤이 타이틀 롤을 연기하기 때문이야.

 

리어 왕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작품이지. 타이틀 롤을 맡은 사이먼 러셀 빌은 그리 지명도 높은 배우는 아니지만, 이번엔 연출을 샘 멘데스가 맡았다는 데 눈길이 가. 멘데스는 영화 ‘아메리칸 뷰티 ‘007 스카이폴로 유명한 감독이지만 본래 연극 연출 출신이라는 건 다들 알지? 어쨌든 가격은 1만원~15000. 두 작품 모두 보는 걸로 알고 있을게.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831일까지 열리고 있는 백자예찬을 권하고 싶어. 백자 그 자체뿐만 아니라 백자의 미감에서 영향을 받은 수많은 한국 현대 미술의 일품들을 소개하는 전시야. 9000. 기획전과 상설전시를 모두 볼 수 있는 가격.

 

8월에 권하고 싶은 책은 아무래도 무더위를 날려 버릴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겠지. 이쯤에서 슬쩍 중앙일보 임주리 기자의 일상방황을 추천하고 싶기도 한데, 이 책이 비록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는 20~30대 여성들에게는 꽤 유용하면서 심지어 재미도 있긴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기엔 좀 낯간지러운 책이기도 해.

 

그래서 진짜 추천할 책은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 작가 이름을 보고 스칸디나비아 느낌을 받았다면 정확해. ‘밀레니엄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은 스웨덴 출신,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 출신이지만 두 작가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 라르손이 2004년 사망해 밀레니엄시리즈는 더 볼 수 없게 됐지만 대신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가 전 세계 스릴러 마니아들을 사로잡고 있어.

 

해리 홀레는 신장 1m90에 비쩍 마른, 절대 미남은 아니지만 특유의 시니컬한 매력으로 여자가 끊이지 않는(소설이잖아. 이해해) 엘리트 형사야. ‘스노우맨은 그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여자들을 죽이는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얘기지. 북유럽의 긴 겨울, 냉기가 뿜어나오는 스럴러가 더위 쫓기에도 제격일 거야. 624페이지 부담스럽다고? 곧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워질 걸. 1만원 정도.

 

 

 

윤현승의 뫼신사냥꾼’. 6권이나 되는 시리즈인데 일단 첫권을 사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 아마 34일 정도 여정이라면 휘딱 다 읽어 버리고 내가 왜 한권만 사 왔을까 애달복달할 지도 몰라. 조선을 모델로 한 가상국가를 무대로, 각 산을 차지하고 있는 괴력을 가진 뫼신(산신)들을 노리는 자들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그려 낸 판타지 소설이야. 검술을 기본으로 하는 무사들,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무당들, 그리고 본래는 동물이면서 초자연적인 힘을 얻게 된 뫼신들이라는 세 축을 놓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엇갈림이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어. 일단 첫권 12천원 정도.

 

9월 초면 좀 시원해 지려나? 냉면 콩국수 빙수는 하루에 한번씩만 먹고, 배탈 조심해. 바이.

 

부천 필하모닉 유럽투어 프리뷰 콘서트         R 3만원

NT라이브, ‘코리올라누스’ ‘리어 왕             15000

서울미술관, ‘백자예찬                         9000

요 네스뷔, ‘스노우맨                          1만원

윤현승, ‘뫼신 사냥꾼                          12000

 

                                           91000

 

 

 

 

 

요 네스뵈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스티그 라르손을 잇는 북유럽 출신의 인기 작가라는 평을 듣고 있는데, 여담이지만 전에 들은 얘기로는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꽤 사이 나쁜 이웃이라고 하더군요. 구체적으로 두 나라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알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무튼 그 춥고, 겨울이면 밤이 길고, 여름에는 백야가 찾아온다는, 인구도 얼마 안 되는 나라에서 이런 작가가 나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는 게 참 놀랍기도 합니다. 소수 언어 작가의 경우 영역본이 히트한 이후에 세계적인 붐이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에서도 언젠가는 이런 작가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겠죠.

 

 

 

 

해리 홀레 (하리 홀레?) 시리즈는 현재까지 10권 정도 나와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대로 가면 10권을 다 보게 될 듯. 흡인력이 장난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순서대로 모두 번역되어 있는 게 아니라서 '시리즈의 맨 처음부터' 한글로 정주행하시는 건 현재로선 불가능합니다. 일단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는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라 함께 읽으셔도 무방할 듯.

 

당연히 엔딩은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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