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갑자사화(1504)의 만행으로 수많은 신하들의 피를 흘린 연산군. 이해 4월 인수대비도 숨을 거두고, 이제 연산군의 만행을 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제부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그로부터 2년 뒤 연산군은 장녹수와 노닐다 말고 권좌에서 내려와 유폐되는 신세가 됩니다. 왕좌는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중종)에게 물려주게 되죠.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연산군은 왜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2년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됐을까요.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도 다뤄지지만 연산군이 폐위될 때 거론된 수많은 죄 중에는 '패륜'이 으뜸입니다. 패륜 중 하나는 앞글에서 얘기했다시피 병중인 할머니 인수대비를 '이마로 박치기 해' 충격으로 사망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큰어머니고 아버지 성종의 형수인 월산대군부인(승평부부인) 박씨와의 사통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 (1506, 정덕1)  7월 20일(정유)
 
월산 대군의 처 박씨의 졸기
 

월산 대군 이정(月山大君李婷)의 처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 박씨와의 관계는 - 일단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 연산군의 폐위에 매우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중종반정의 핵심인 박원종이 바로 승평부부인의 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날이 7월20일, 연산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것이 9월2일입니다. 그러니 정말 직접적인 동기가 아닐 수 없죠. 아무튼 연산군과 박씨를 둘러싼 추문 묘사는 실록에서도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항상 대궐안에서의 연회에 사대부(士大夫)의 아내로서 들어가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고, 미모가 빼어난 이는 녹수를 시켜 머리 단장이 잘 안되었다고 핑계대고 그윽한 방으로 끌어들이게 해서는 곧 간통했는데, 혹 하루를 지난 뒤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시 내명(內命)으로 인견(引見)하여 금중(禁中)에 유숙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부인은 세자의 양모라는 핑계로 항상 금내(禁內)에 머물게 하였고, 성종의 후궁 남씨(南氏)도 대비의 이어소(移御所)에 있으면서 자못 총행(寵幸)을 입어 추한 소문이 바깥까지 퍼졌다.

常於內宴, 士大夫妻人參者, 皆令書其夫姓名, 付諸衣領, 有姿色者, 令綠水, 諉以梳粧不整, 引入幽房, 卽通焉。 或經日後出, 或復以內命引見, 留宿禁中者, 亦數有之。 月山大君夫人, 稱爲世子養母, 常留禁內。 成宗後宮南氏, 亦在大妃移御所, 頗見寵幸, 醜聲聞外。

 

'녹수를 시켜'의 녹수는 당연히 장녹수. 또 다른 기록.

 

중종 5년 경오(1510,정덕 5) 4월17일 (임인) 
 평성부원군 박원종의 졸기
 
원종은 순천(順川) 사람이며, 무과로 출신(出身)했는데 풍자(風姿)가 아름다웠고, 폐주(廢主) 말년에 직품이 정2품에 이르렀다. 원종의 맏누이는 월산 대군 이정(月山大君李婷)의 아내로 폐주가 간통하여 늘 궁중에 있었는데, 폐주가 특별히 원종에게 숭정(崇政)의 가자를 주니 원종이 분히 여겨 그 누이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 하였다.


元宗, 順天人, 由武擧進, 美風姿。 廢主末年, 位至正二品, 元宗之姉, 乃月山大君婷妻也, 廢主通焉, 長在宮中。 廢主特授元宗崇政加, 元宗憤之, 語其姉曰: “何爲忍生, 飮藥而死。

 

이 주장에 따르면 박원종이 누이의 죽음을 강요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연산군과 박씨의 관계가 사실이겠느냐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의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박씨의 나이. 박원종이 1467년생이고, 맏누이인 승평부부인은 1455년생으로 전해집니다. 그럼 박씨는 죽을 때 만 51세...연산군이 1476년생이니 21세 연상입니다.

 

뭐 나이가 사랑의 장벽이 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51세도 아니고 15세기의 51세에 과연 임신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시절의 51세면 사실상 할머니에 가까운데 도대체 무슨 마술로 연산군을 미혹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좀 의심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남녀관계였는지, 양어머니와 아들 관계였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연산군이 매년 수백필의 비단과 수십석의 곡식을 박씨에게 내린 것이 사실이고, 불교를 숭상하던 박씨의 집에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풍기문란으로 미운털이 박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연산군과 함께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 것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당초의 궁금증으로 돌아가서. 연산군은 왜 최대의 라이벌인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일설에는 정현왕후(자순대비)가 키워준 공 덕분에 진성을 친동생처럼 아꼈다고 하지만 지난번 글에서 '그날 밤(성종의 후궁들을 죽이던 1504년 3월20일)'의 기록에 연산군이 자순대비 침전 앞에 칼을 빼들고 난입해 당장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는 걸 보면 이런 설명은 그닥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5card.tistory.com/1012 참조.)

 

자신의 권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심복 신수근의 딸과 혼인한  진성대군이 '딴 마음'이 없다고 확신한 걸까요. 이런 설명도 신통치 않은 것이, 진성이 아무리 다른 마음이 없어도 그가 살아 있는 한, 모든 반란 세력은 일단 그를 옹립하고 일어난다고 봐야 합니다. 반대로 연산군이 죽이려고 결심만 했다면, 반란 사건하나를 조작하고 진성대군을 그 수괴로 조작하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죠.

 

무엇이 이유였을까요. 마침 며칠 전 '인수대비' 종방연 자리에서 정하연 작가를 뵌 김에 여쭤봤습니다.

 

- 대체 연산군은 왜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정: 허허. 죽일 새가 없었던 것 아닐까요?

 

- 왕위에 12년이나 있었는데요.

정: 인수대비가 살아 있는 동안은 꿈도 꿀수 없는 일이었죠. 조선왕조의 이념은 충보다 효가 항상 우위에 있었어요. 대비가 살아있는 한 어떤 왕도 그 대비를 넘어설 수 없었으니까요. 광해군이 쫓겨난 가장 큰 이유도 패륜, 바로 모후는 아니지만 선왕의 정궁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이었죠. 그러니 기회가 있었다면 인수대비 사후 뿐이에요.

 

- 인목대비 사후에는...

정: 의미나 시간이 없었죠. 이 정권은 갑자사화와 인수대비 사망 이후에 급격히 무너집니다. 사람을 죽이면 권력이 강화될 수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 할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할머니를 핍박해 죽게 했다는 것은 연산군에게 치명적이었던 겁니다. 박원종 아니라 누구라도 뒤집어 엎었겠죠. 연산군 스스로도 이미 민심과 신심이 모두 자신을 떠나 자신이 왕위를 오래 보전할 수 없을 것임을 눈치챘습니다.

 

(연산군이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다는 내용은 실록에도 전해집니다. 1506년 8월23일, 왕위에서 밀려나기 대략 열흘 전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8월23일 (경오)
 
후원에서 나인들과 놀며 불의의 변고를 예감하다. 전비와 장녹수 두 계집이 슬피울다
 

내거둥이 있었는데, 왕이 후정(後庭) 나인을 거느리고 후원(後苑)에서 잔치하며 스스로 초금(草笒) 두어 곡조를 불고, 탄식하기를,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는 것
하며, 읊기를 마치자 두어 줄 눈물을 흘렸는데, 여러 계집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고 유독 전비(田非)와 장녹수(張綠水) 두 계집은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으니, 왕이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하며, 각각 물건을 하사하였다.

 

有內擧動, 王率後庭內人, 宴後苑, 自吹草笒數闋, 嘆曰: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吟訖淚數行下, 諸姬共竊笑, 唯田、張二姬, 悲噓飮泣, 王手撫其背曰: “今太平日久, 安有不虞之變, 然脫或有變, 汝必不免。” 各賜物。

 

정하연 선생의 말대로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정치력은 극도로 악화됩니다. 언문으로 연산군을 욕하는 벽보가 붙은 사건은 연산군이 민심을 잃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고, 그 측근 중에는 무력으로 정국을 끌고 갈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연산군의 측근 중 하나고 두 차례의 사화에서 모두 승자였던 노련한 총신 유자광이 어느새 중종반정의 주역으로 변신했다는 것은 연산군의 총신들 중에도 정권 보위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연산군 집권 말기 그 측근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구화사적(構禍事蹟)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병인년(1506)에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과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반정을 하려 할 때에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을 시켜 비밀리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생각을 떠보게 하였다. 이에 수근이 말하기를,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것이니 나는 말할 수가 없소.” 하였다. 곧 연산(燕山)의 비(妃)는 수근의 누이요, 중종(中宗)의 전 왕비는 수근의 딸이기 때문이다.

(守勤曰。廢妹夫立女婿。吾所未能言。蓋燕山妃乃守勤之妹。而中廟前妃守勤之女故也)

 

귀손이 마침 등극사(登極使)로 명 나라 서울에 가는데 일이 발각될까 스스로 의심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이 되어 길에서 죽었다. 원종 등은 귀양가 있는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과 더불어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기일을 당겨서 먼저 거사하려 하였다. 그런데 9월 초이튿날에 마치 연산군이 장단(長湍)의 적벽(赤壁)에서 놀이를 하게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초하룻날 저녁에 원종 등이 장사들을 훈련원(訓練院)으로 모으기로 약속을 하니 그날 모인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에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 유자광(柳子光)을 부르고 그의 계책에 따라 두터운 유지(油紙)를 오려 표신(標信)을 만들어서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죄수와 역부(役夫)를 몰아 돈화문(敦化門) 앞 수백 보쯤 되는 곳에 나가서 말을 세워 진을 치고, 운천군(雲川君)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의 저사(邸舍)를 호위하게 하고, 변수(邊修)ㆍ최한홍(崔漢洪)ㆍ심형(沈亨)ㆍ장정(張珽)을 시켜 궁 내성(內城)을 지키면서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쌓아둔 꼴더미에 불을 질러 뜻밖의 변에 대비하게 하고, 또 신윤무(辛允武)를 보내어 용맹한 장사 이조(李藻)를 거느리고 신수영(愼守英)ㆍ신수근(愼守勤)ㆍ임사홍(任士洪)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끌어내어 쳐 죽이게 했다. 그리하여 초이튿날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전지를 받들어 관원을 보내어 종묘에 고하고, 왕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喬桐)으로 옮기게 했다.

 

좌의정 신수근은 연산군의 매부이며 심복 중 심복입니다. 그런 인물에게 '난이 일어나 진성대군을 세우면 누구 편을 들겠느냐'고 물어봤는데도 음모가 누설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인물의 대답이 '매부와 사위 중 누구를 고르란 말이냐. 난 못 고른다'라는 것은 당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권의 핵심 인물조차도 '까짓, 난이 실패하면 내 매부가 왕, 난이 성공해도 내 사위가 왕이 되는데 나를 어쩌겠어'라는 식으로 양다리나 걸칠 생각이었으니, 누가 연산군을 지키기 위해 나섰을까요. 반정이 성공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신수근은 그의 판단과는 달리 사위가 왕이 된 덕을 전혀 보지 못했고, 중종은 공신들의 등쌀에 왕비 신씨를 사가로 돌려보내고 새 왕비를 맞아야 했습니다. 박원종 등 중종반정의 주도세력들은 신수근과 새로운 권력을 나눌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이죠.

 

신수근은 커녕 유자광조차도 '박쥐' 취급을 받아 반정 핵심세력에 의해 곧 처단당합니다. 유자광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도 반정에 이용만 당한 것이죠. 그야말로 비정한 권력의 속성입니다.

 

 


 

아무튼 드라마 '인수대비'에 따르면 인수대비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죽음이 연산군의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예상했고, 그 예상대로 '할머니를 해친 패륜아'의 낙인이 찍힌 연산군은 2년만에 왕위를 내주고 유폐당하는 몸이 됩니다.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4대에 걸쳐 정권을 농단했던 인수대비. 여걸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좋은 팔자는 아니었던 듯 합니다. 어쨌든 마지막 가는 길마저도 한 임금의 권좌를 좌우할 정도였으니 그 그림자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산군이 물러나던 날의 자세한 풍경을 남겨 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 (1506, 정덕1) 9월 2일(기묘)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서로 만나 시사를 논할 적마다 ‘이제 정령(政令)이 혼암 가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종묘 사직이 장차 전복될 것인데, 나라를 담당한 대신들이 한갓 교령(敎令)을 승순(承順)하기에 겨를이 없을 뿐, 한 사람도 안정시킬 계책을 도모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은 함께 성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천명과 인심을 보건대 이미 촉망된 바 있거늘, 어찌 추대하여 사직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큰 계책을 정했는데 모사에 참여할 자가 있지 않았다.

부정(副正) 신윤무(辛允武)는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이로서 평소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를 ‘일조에 변이 있게 되면 화가 장차 몸에 미치리라.’ 생각하고, 원종 등에게 가서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원망하여 배반하고 왕의 좌우에 친신(親信)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떠났으니, 환란이 조석간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이장곤은 무용과 계략을 가진 사람인데, 이제 망명하였으니 결코 헛되이 죽지는 않으리다. 만약 귀양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군읍(郡邑)에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 들어온다면, 비단 우리들이 가루가 될 뿐 아니라, 사직이 장차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니, 일이 그렇게 된다면 비록 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게 될 것이오.’ 하니, 원종 등이 뜻을 결정하였다.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하고, 그 계획을 말하자 따르므로 이어 장정(張珽)·박영문(朴永文)을 불러 윤무(允武)와 더불어 무사를 모을 것을 언약하였다. 또 용구(龍廐)의 모든 장수들과 각기 응군(鷹軍)을 거느리고 오기로 약속하였다.

 

최측근들이 이렇게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윽고 무인일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희안이, 김수동·김감에게 달려가 함께 가자고 하니, 감은 즉시 따랐고 수동은 두려워 망서리다가 결국 따랐다. 또 유자광이 지모가 많고 경력이 많다고 하여, 역시 불러 함께 하는 한편 용사들을 임사홍과 신수근·신수영의 집에 보내어 퇴살(椎殺)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신수겸(愼守謙)을 개성부에서 베니, 이를 들은 도중(都中)의 대소인들이 기약도 없이 모여 들어 잠깐 동안에 운집하자 즉시 모든 장수들을 편성하고 용구마(龍廐馬)를 내어 주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에워싸고 지키게 하였으며, 또 모든 옥에 있는 죄수들을 놓아 종군하게 하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윤형로(尹衡老)를 금상(今上)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그 사유를 아뢰고 그대로 머물러 모시게 하고, 이어서 운산군 이계(雲山君李誡)와 무사 수십 명을 보내어 시위하여 비상에 대비하게 하였다. 희안 등은 모두 돈화문 밖에 머물러 날새기를 기다리니, 숙위(宿衛)하던 장사와 시종·환관들이 알고 다투어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가 잠시 동안에 궁이 텅 비었다.


승지 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이우(李堣)가 변을 듣고 창황히 들어가 왕에게 사뢰니, 왕이 놀라 뛰어 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장(璋)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채 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하여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

원종 등은 내시를 시켜 장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왕에게 가 옥새를 내놓고 또 동궁에 옮길 것을 청하였으며, 전동(田同)·심금손(沈金孫)·강응(姜凝)·김효손(金孝孫) 등을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여명(黎明)에 궁문이 열리자 원종 등이 경복궁에 나아가 대비에게 아뢰기를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 대군에게 돌아갔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의지(懿旨)를 받들어 진성 대군을 맞아 대통(大統)을 잇고자 하오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니, 대비는 전교하기를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경 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순정이 전지를 받들고 즉시 금상의 사제로 가 아뢰니, 상이 굳이 사양하기를 ‘조정의 종묘 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재삼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순정이 호종 시위하여 경복궁에 들어가니, 길에서 첨앙(瞻仰)하는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모두들 ‘성주(聖主)를 만났으니 고화(膏火)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시(申時)에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해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李)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베니, 도중(都中)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전비, 녹수, 백견은 연산군을 모시던 기생 출신의 총희들. 결국 '난리가 나면 너희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던 연산군의 예측대로 된 것이죠.


책공(策功)을 의정(議定)하게 하자, 원종 등이 여러 종실·재상들과 공을 나눔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니,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유순(柳洵) 등 수십 인이 다 정국 공신에 참여되었다. 당초에 원종 등이 돈화문 밖에 모여 순(洵)에게 사람을 보내어 순(洵)을 부르니, 순이 변이 있는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나와 문틈으로 엿보다가 도로 들어가기를 너덧 차례나 하였으며, 또 문틈으로 말하기를 ‘나는 구항(溝巷)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 이번 일이 가하오. 마음대로 하오.’ 하고, 오랫동안 다른 일이 없음을 알고서야 나왔다. 그리고 구수영(具壽永)은 당초 원종 등이 거의(擧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훈련원에 달려가 제장들을 보았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랬지만, 벌써 와 몸바치기를 허하였으므로, 마침내 훈적(勳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단 반란이 성공하고 나면 어정쩡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을 일부러 공신에 포함시켜 정국을 안정시키는 수법이 엿보입니다. 구항이란 길가의 도랑을 말하는 것인데, 일국의 재상이 '마음대로 하라, 나는 모른다'고 벌벌 떠는 모습은 참 안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폐부(廢婦)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중종반정이 마무리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 블로그의 인수대비 관련 글 모음입니다.

 

1. 계유정난은 어떻게 진행됐나  http://fivecard.joins.com/964
2.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http://fivecard.joins.com/1003
3. 폐비 윤씨, 사약을 마시고 정말 피를 토했나? http://fivecard.joins.com/1004
4. 폐비 윤씨 사약이 남긴 공무원의 숙명 http://fivecard.joins.com/1007
5.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fivecard.joins.com/1012
6. 인수대비 사후, 연산군은 어떻게 몰락했나 http://fivecard.joins.com/1015

 

 


조 아래쪽 네모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쓰고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조선 왕조 최악의 군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廟號)를 받지 못한 한심한 왕이 두 사람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죠. 자의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신하들에 의해 끌려내려왔기 때문에 시호와 묘호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역사적 사실이 곧 무능한 군주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두 사람 중 광해군은 20세기 이후 재조명에 의해 - 비록 선왕의 정궁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그 소생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도적적인 흠결은 있지만 - 실질적으로 임진왜란 동안 국가를 경영한 능력이나 중국 명-청 교체기를 버텨낸 탁월한 국제감각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폭군'이라는 딱지를 어느 정도 뗀 느낌입니다.

 

반면 이런 치적이 없는 연산군은 보호망도 없이 패륜의 제왕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선왕의 후궁들을 직접 때려 죽이고(여러분이 '인수대비'에서 보고 계신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 소생인 동생들을 살해하고, 큰어머니를 범하고, 할머니를 머리로 받아 결국 사망하게 하고,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럼 연산군은 저런 광기의 제왕이었을까요? 혹시 달리 볼 요소는 없을까요?

 

 

 

 

일단 집권 4년째(1498)에 무오사화를 일으킬 때까지 연산군의 '만행'은 크게 상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4대 사화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만치 피를 본 군왕이 한둘은 아닙니다.

 

하지만 폐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연산군의 행적은 정상적인 사고를 벗어난 모습을 보입니다. '연려실기술'이 모아 들인 여러 사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성종이 함구령을 내린 폐비 윤씨 문제가 어떻게 연산군의 시대에 문제가 되었는지, 그 과정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하겠습니다.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그런데 궁금한 건 연산군의 준비 과정입니다. 이미 연산군은 즉위 2년째인 1496년에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를 확장하자는 의견을 냈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철회했고, 이해 10월 21일, 대신 윤씨의 어머니인 장흥부부인 신씨(즉 연산군의 외할머니)에게 곡식과 의복을 내리라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廢妃母申氏, 依領敦寧, 歲賜米三十碩、黃豆二十碩).

 

하지만 공식적으로 갑자사화의 시작은 연산군 10년인 1504년 3월20일이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이날 연산군은 그동안 감춰졌던 분노를 폭발시키며 만행의 시작을 알립니다. 연산군에게 적대적인 사관들이 상당 부분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인간성을 잃은 듯한 모습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인 엄귀인과 정소용을 끌고 나간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래 나오는 안양군과 봉안군은 모두 정소용이 낳은 자신의 동생들이죠.

 

그 동생들을 동원해 어머니의 복수(?)를 시키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장면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목: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전교하기를, "안양군 이항(安陽君李㤚)과 봉안군 이봉(鳳安君李㦀)을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숙직 승지 두 사람이 당직청에 가서 항과 봉을 장 80대씩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라. 또 의금부 낭청(郞廳) 1명은 옥졸 10인을 거느리고 금호문(金虎門) 밖에 대령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항·봉을 창경궁(昌慶宮)으로 잡아오라.”
하고, 항과 봉이 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모두 다 내보내라” 하였다. 항과 봉이 나오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항과 봉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기를 매우 급박하게 하니,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愼氏)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젓갈(醢)로 만든다는 것은 시체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최악의 형벌입니다. 일찌기 한고조 유방이 반란의 혐의를 씌워 맹장 팽월을 죽인 뒤 해(醢)로 만들어 제후들에게 맛보라고 돌렸다는 바로 그 형벌이죠.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선 누구에게 먹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리고 나서 열흘 동안 엄씨와 정씨 친정 가족들을 참살하고, 안양군과 봉안군을 귀양보내고, 이미 다른 죄(그 전해 9월, 잔치 자리에서 임금이 내린 술잔을 몰래 따라 버린 죄..^^)로 위기를 맞고 있던 이세좌를 처단합니다. 그리고는 4월 1일, 마침내 조정에 정식으로 명을 내립니다. 

  

왕이 춘추관(春秋館)에서 상고한, 폐비(廢妃)에게 사약 내린 전말의 단자(單子)를 내려보내며 이르기를,
“도승지가 의정부·춘추관 당상 및 예문관(藝文館) 관원과, 함께 다시 그때 옛일을 인용하여 일이 되게 한 자와, 폐위함이 불가하다고 간하다가 죄를 받은 자, 사약을 내릴 때 간하지 않고 명대로 가서 일 본 자를 유(類)대로 뽑아 아뢰라”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 있으면 의문이 듭니다. 대체 왜 연산군은 즉위 10년 뒤에서야 어머니의 복수를 시작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10년 뒤에서야 외할머니 신씨를 만나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 분노했다고 보지만, 일단 연산군이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된 시점이 분명치 않습니다. 

 

(위에 인용한 '기해록'의 기록으로는 인수대비가 죽고 나서 알게 되어 피바람이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분명 사실과 다릅니다. 갑오년 3월20일이 피바람의 시작이었고, 인수대비는 그 한달 넘게 뒤인 4월27일 숨을 거둡니다.)

 

 

 

 

정황으로 볼 때 연산군이 1504년에 와서야 모든 것을 알게되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알 것은 다 알고 있었고,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 적당한 때란 언제일까요. 바로 자신의 힘이 인수대비와 비등해졌다고 판단한 때일 것입니다. 즉위 4년 째인 1498년(무오년), 연산군은 조의제문 사건을 이용해 김종직의 제자들을 참살합니다. 명분은 이유 없이 할아버지 세조를 사림이 욕보였다는 것이고, 당연히 인수대비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왕에 대한 도전을 권력으로 제압하고 나면 왕권은 강화되는 것이 당연한 일. 무오사화를 통해 힘을 한껏 키운 뒤에도 연산군은 6년을 더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갑자년 1월, 고령의 인수대비가 병석에 눕게 됩니다.

 

이제서야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연산군은 그 전부터 파악되어 있던 외할머니 신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시커멓게 변한 금삼(피를 토했든, 약을 토했든 어쨌든 20여년이 흘렀으니 검은 색이었겠죠^^)을 전달하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의식'은 온 조정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 이제부터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테다. 그리고 당시의 일을 철저하게 규명할 것이다. 당시 아버지 편에 섰던 놈들은 모두 각오해라.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큰 잘못이 없는 자들은 지금부터 병석에 누운 대비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내 편에 설 것인지, 잘 생각해 보고 입장을 정하라.'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정리했겠죠.

 

 

 

게다가 갑자사화의 이면에는 연산군을 중심으로 무오사화 이후 권력을 보위하던 임사홍, 신수근 등의 친위세력과 세조-성종대를 지나오며 공신전을 독점하고 기반을 구축해 온 신권 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있습니다. 친위세력을 동원해 권신들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엿보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감안하면 연산군은 미친 왕이라기보다는 대단히 전략적인 야심가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비록 음탕하고 무능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런 기록들은 당연히 중종반정의 중심세력이 서술했을테니 그대로 믿기에는 약간의 의심이 듭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의 저변에는, 지난번 글에서 잠시 다뤘듯 자신의 최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진성대군(뒷날의 중종)을 해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역시 이건 이번에도 다음 글에서 다뤄야 할 듯.^^

 

 

이 블로그의 인수대비 관련 글 모음입니다.

 

1. 계유정난은 어떻게 진행됐나  http://fivecard.joins.com/964
2.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http://fivecard.joins.com/1003
3. 폐비 윤씨, 사약을 마시고 정말 피를 토했나? http://fivecard.joins.com/1004
4. 폐비 윤씨 사약이 남긴 공무원의 숙명 http://fivecard.joins.com/1007
5.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fivecard.joins.com/1012
6. 인수대비 사후, 연산군은 어떻게 몰락했나 http://fivecard.joins.com/1015

 

 

 

728x90

처음 '각시탈'의 남자주인공으로 주원이 캐스팅됐다고 했을 때 상당히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원이 주목받는 신인이라 해도 '제빵왕 김탁구'를 빼면 경험이 너무 일천한 편이죠. 물론 '제빵왕 김탁구'의 주인공이었던 윤시윤도 베테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각시탈'이라는 원작의 지명도로 볼 때 주원이 타이틀 롤을 맡는 것은 다소 어색해 보였습니다.

 

물론 그 뒤로 들려온 소문은 좀 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각시탈'이 항일 독립운동을 다룬 드라마이기 때문에 소위 'A급' 남자 배우들이 출연을 기피한다는 거였죠. 이미 한류스타가 된 주연급들은 고사하고(사실 이 드라마에 투입된 다른 물량을 셍각하면 한류스타급을 캐스팅하기는 애당초 힘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하면 전체 제작비가 너무 올라가죠), 미래의 한류스타를 꿈꾸는 연기자들도 고개를 저었다는 얘깁니다.

 

업계 사람들에게는 이미 널리 퍼진 얘기였지만 이 이야기는 얼마 전 신현준이 '각시탈' 제작발표회장에서 입을 열어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참 씁쓸한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각시탈'이 처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동안 '한류'의 힘은 알게 모르게 한국 드라마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수익성만 놓고 보면 당연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일본 드라마 '나와 스타의 99일'에 출연한 김태희를 놓고 일본 내에서 혐한류 파문이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바람에 김태희를 모델로 썼던 일본 화장품 회사는 "김태희를 쓰지 말라"는 협박까지 받는 등 가볍지 않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마도 '각시탈'의 기획안을 본 연기자들은 극중에서 신나게 일본 순사며 헌병을 때려눕히는 자신의 모습이, 먼 뒷날 일본에 진출해 '아이시테루'를 외칠 때 올가미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일본에서의 한류 인기가 엄청난 수입의 원천이다 보니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배용준 주연의 한류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기억하신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실 일입니다.

 

요즘 드라마 '광개토태왕'을 봐도 당연한 얘기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광개토대왕의 가장 큰 적은 후연을 비롯한 북방민족 계열의 국가들입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5호16국 시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명멸했던 왕조들이죠.

 

 

 

 

하지만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대왕 담덕의 가장 큰 적은 최민수가 거느리는 '화천회'라는 정체 불명의 초국가적 범죄단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태왕사신기' 방송 당시만 해도 중국이 상당히 중요한 한류 시장이었습니다. 또 이른바 동북공정과 관련, 중국은 한국 드라마 속의 중국 묘사에 매우 민감한 입장이었죠. 그 때문에 주인공 광개토대왕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내용이 '태왕사신기'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중국의 눈치 때문에 줄거리를 바꾸거나, 중국 내 촬영을 위해 대본을 두개 만들거나 하는 일들이 상당히 흔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태왕사신기'는 광개토대왕의 업적 중 하나인 왜군과의 전투를 삭제해 버렸습니다. 내물왕 때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든 내용이 드라마에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 역시 우연은 아니었죠.

 

심지어 '태왕사신기'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대결 또한 광개토대왕이 외적과 싸우는 내용이 아니라 같은 고구려인인 호개(당시 윤태영이 이 역할을 맡았죠)가 이끄는 반란군(?) 집단과의 내전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식의 서술이 바로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뒷심을 빼 놓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례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연기자들이 '각시탈' 출연을 꺼렸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히 이 역을 차지하고 열연을 펼치고 있는 주원을 칭찬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반대로, 드라마 속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쪽으로 가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일본에 대한 과거사 문제, 혹은 독도 문제에 대한 한 한국인이라면 분명한 입장을 취해햐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현세 원작 '남벌' 같은 정신나간 국수주의 역시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일본에 살면서 귀화한 것도 죽을 죄고, 일본인에게 성폭행당한 여동생이 자결하지 않은 것도 죽을 죄고, 그 시체를 썩을 때까지 메고 다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식의 비정상적 마초 분위기는 '한류를 위해 항일 드라마에는 출연하지 않겠다'는 기회주의보다 더 위험합니다.

 

 

 

 

한국 연예인들을 '항일 연예인'으로 몰아가며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세력이 일본 내에서 다수파가 아니듯, 한국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이는 세력 역시 기를 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일부 할일 없는 사람들 중에는 최홍만이 일본 드라마에 출연한 일까지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는 걸 보면, 결코 기우는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한민족 우수성의 상징'인 장훈 선수도 일본 드라마(1982년작 '료마가 간다')에서 일본 사무라이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득 일본에서 김태희를 놓고 '반일 연예인'이라고 주장했던 근거가, 지난 2005년 김태희가 펼쳤던 독도 사랑운동 때문이라는 사실이 생각납니다.

 

당시 김태희는 동생 이완과 함께 스위스 홍보대사였는데, 그 기회에 스위스를 방문해 사람들에게 독도 사랑 티셔츠를 나눠주며 독도 홍보를 한 적이 있었죠.

 

어쩌면 이런 사실들이 앞으로 독도 사랑 운동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무서운 상상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야, 안돼. 나 다음 달에 일본에서 방송될 CF가 몇갠데." 만약 그런 한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정말로 있다면, 예전에 배용준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발언한 뒤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진정한 팬이라면, 자기가 사랑하는 스타의 소신을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한국 연예인이면 한국의 입장을 당당하게 옹호하는 것이 중요하듯, 내한하는 일본 연예인들을 붙잡고 "독도가 어디 땅이야, 응? 독도가 어디 땅이냐고?" 하고 시비를 걸어 봐야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만큼이나, 국제 사회에서 한국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니 말입니다.

 

 

 

 

728x90

올 여름 최대의 기대작 중 하나였던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프로메테우스'가 국내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라고 '프로메테우스'가 박스 오피스 1위를 하고 있지는 않더군요.

 

솔직히 '프로메테우스'를 기대하면서도 이 영화가 제임스 카메론 풍의 액션 블록버스터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점, 다시 말해 '아바타'같은 영화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짐작했을 것입니다.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을 수록, '프로메테우스'는 '글래디에이터'보다는 '블레이드 러너'에 가까운 작품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샘솟았습니다.

 

마침내 영화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웅대한 시각적 파괴력을 앞세워 개봉했습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는 역시 논란이 한창입니다. 이 영화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 자체가 불경스럽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입니다. 반면 지나간 스코트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젊은 관객들은 '뭐야 이게'라는 반응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도 다양한 층위의 관객들이 있습니다.

 

대체 이 영화의 어떤 점이 이런 다양한 반응을 낳고 있을까요.

 

 

 

 

간략 줄거리. 우주 어딘가의 별에서 한 외계인이 자신의 몸을 흩뜨려 검은 씨앗(?)을 전파시키는 장면이 프롤로그로 주어집니다.

 

2085년, 웨일랜드사의 탐사선 프로메테우스가 먼 우주로 떠납니다. 목적은 인류 문명의 외계 기원을 탐사하기 위해서. 수년간의 수면 비행에서 깨어난 비행사들은 그들이 잠든 동안 우주선을 지켜 온 안드로이드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를 만납니다.

 

비행의 책임자인 비커스(샤를리즈 테론)는 이 미션에 대해 어딘가 시니컬하고, 엘리자베스 쇼(노미 라파스)를 비롯한 탐사 팀의 학자들과 회사의 목적이 분명히 다르다는 선을 긋죠. 어쨌든 미지의 행성에 발을 디딘 이들은 지구라면 피라미드에 해당할 거대 유적(혹은 시설물)을 발견하고, 거기서 놀라운 문명의 흔적과 마주합니다.

 

 

 

 

개봉 전부터 에일리언의 프리퀄이네 아니네 말이 많았지만, 프리퀄의 정의를 뭘로 하건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1979년작 '에일리언'의 앞 이야기 인 것은 맞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말 많던 스페이스 자키의 정체는 무엇인지, 우리의 뒤짱구 에일리언은 어떻게 해서 탄생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 별이 '에일리언'에서 화물선 노스트로모 호의 승무원들이 갔던 그 별이냐, '프로메테우스' 첫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별이 지구냐 아니냐 등에는 논란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리들리 스코트는 좀 반칙을 합니다. 원작자는 작품을 던졌으면 그만이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 놓고 해석 A와 B에 대해 '내 의도는 ....였다'는 식의 인터뷰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이건 창작자의 역할은 독자나 관객 앞에 작품을 던져 놓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시는 움베르토 에코 선생이 봤다면 혼찌검이 날 일입니다. (심지어 그닥 독창적이라고 볼 수도 없는 외계인의 예수 파견설까지...)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오함'이라든가 '철학적' 이라든가, '화제작'이라든가 하는 변설에 이끌려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아예 안 보시는게 낫습니다. 이 영화는 매우 특이하고 야심적인, 놀라운 규모의 SF입니다. 처음부터 이 장르와 스코트에 애정이 없는 분들은 아무 감흥이 없을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진입장벽이 꽤 있는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2012년에 무슨 영화가 있었나...하고 회고할 때 이 영화가 빠진다면 좀 부끄러울 수도 있을 그런 영화죠.)

 

이하는 스포일러가 쑥쑥 튀어나올 겁니다. 하긴 뭐, 보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는 분들이 많은 걸 보면 오히려 스포일러가 감상에 도움이 될지도.

 

 

 

 

사실 리들리 스코트의 '에일리언'에 대해서는 몇가지 오해가 둥둥 떠 다니고 있습니다. '스코트가 만든 에일리언 1편은 쫄딱 망하고 혹평에 시달렸는데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2편이 대박을 치면서 프랜차이즈가 살아났다'고 믿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흥행 성적만 보더라도 1979년작 '에일리언'은 1천만달러 살짝 넘는 제작비로 6천만달러 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약 2천만달러를 투입해서 8천만달러를 벌어들인 1986년의 '에일리언2(Aliens)'에 비해 낫다고도 할 수 있는 성적입니다. 쫄딱 망하거나 욕을 먹었다면 카메론이 굳이 속편을 만들겠다고 하지도 않았겠죠.

 

아마도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와 '에일리언'을 혼동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생긴 일인 듯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에일리언2'가 아무 사전 정보 없이 개봉했다가 호평을 받고, 여기 필 받아서 뒤늦게 개봉한 '에일리언'은 '뭐 이딴게 다 있어'라는 평을 얻었기 때문에... 국내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죠. 저도 개인적으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재미 면에서는 '에일리언2'가 훨씬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어두운 우주선 안에서 승무원 일곱명이 차례 차례 잡아먹히는 내용은 단조롭고 지루하죠.

 

 

 

 

어쨌든 카메론이나 데이빗 핀처(에일리언3) 등의 노력으로 에일리언 시리즈는 전설의 흥행 시리즈가 됐고 비록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원조집 사장인 스코트 옹은 뿌듯해집니다. 그리고 다른 레스토랑으로 잇달아 대박을 낸 터라, 이 기회에 '에일리언 원조집'을 대대적으로 오픈할 결심을 했습니다.

 

(뭐 중간 중간 '이건 에일리언 원조집(prequal)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하기도 했지만, 아니면 뭐겠습니까. 이런 게 바로 허세...^^)

 

 

 

 

물론 백전노장 스코트 선생이 아무 준비 없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그럼 뭐겠습니까'에 대한 답으로 준비한 것이 바로 '인류의 시원을 찾아가는 대우주 파노라마'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엄청난 규모의 세트와 함께 수만년을 오르내리는 웅대한 플롯이 마련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것만으로 감동할만큼 현대 관객들이 순진무구하냐는 데 있습니다. 인류의 외계 기원설이라는것이 그렇게 새로운 시각도 아닐 뿐만 아니라, 특히나 '신이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관념을 수천년 동안 유지한 서구 기독교 사회가 아니라면 '야, 인간은 알고 보니 신이 만든 게 아니라 외계인이 뿌린 씨에서 태어난 거였어. 깜짝 놀랐지?'라는 말에 과연 얼마나 큰 정서적 타격을 입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그 창조자는 누가 만들었을까?'하는 말 역시 뭐 그닥 큰 울림이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비 기독교 문화권 사람들(더 정확하게는 유일신 신앙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인간을 신이 만들었건, 외계인이 만들었건, 우연히 단백질이 가득 찬 연못에 번개가 떨어진 뒤 수억년에 걸쳐 진화했건 별 큰 감회가 없는게 보통이죠. '뭐, 그랬나보지...'  

 

 

 

 

다만 여기에 스코트 감독은 또 하나의 층위를 보탭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보여줬던 인간의 피조물, 바로 안드로이드죠. 이미 인간보다 기억력, 분석력, 체력, 근력, 심지어 외모까지도 모두 우월해진 데이빗 같은 안드로이드는 서서히 생각하게 됩니다. '대체 왜, 이렇게 훌륭한 내가, 나를 창조했다는 이유로 인간 같은 보잘것 없는 존재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관념은 이 영화를 지배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빗에게는 일단 웨일랜드 본인과 회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동기가 있고, 그 밖에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달성한다는 동기가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이용해 제법 위험해 보이는 외계 생물을 지구로 가져가려 하는 것은 이 두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것이죠.

 

아무튼 데이빗은 상당히 흥미로운 발언을 많이 합니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지 않나요?' 같은. 우주선이 수년을 날아오는 동안 혼자서 지구의 상고 문명을 모두 연구하고, 갖가지 고대 문자를 비교 분석해서 지구 최고의 석학이 된 데이빗에게 '생명'이란 사실 귀찮고 부담스러운 관념입니다. 그래서 외계인의 골이 터지는 장면을 보면서도 '쳇. (너조차도) 불멸의 존재는 아니었어' 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이죠.

 

 

 

 

이 영화 최대의 떡밥은 웨일랜드와 데이빗이 잠에서 깨어난 '엔지니어'와 만나는 장면입니다. 대체 데이빗은 웨일랜드의 감격적인 인삿말을 어떻게 전달한 것일까요. 웨일랜드의 뜻대로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인지, 그리고 왜 엔지니어는 그런 파괴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지는 참 궁금합니다.

 

이 대목에서 유일한 단서는 제목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신들의 입장에서는 주고 싶지 않았던' 불을 주는 바람에 바위벽에 매달리게 된 티탄 신족입니다. 이 영화와 관련해 이 신화를 인용하시는 분들이 1.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는 다른 신족이고 2. 프로메테우스가 절벽에 묶인 것은 사실 불을 줘서가 아니라 제우스의 예언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이고 3. 정작 프로메테우스는 절벽에 묶이지만 불을 전달받은 인류는 대홍수로 절멸의 운명을 맞는다는 점을 간과하곤 합니다.

 

대체 왜 엔지니어가 지구인들을 싫어하느냐는 질문도 자주 나오지만, 그건 신화에도 나오듯 '저깟 것들이 뭔데 불(혹은 지성)을 사용해?'라는 간단한 불쾌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나 '에일리언' 등의 인간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같은 외양, 때로 인간보다 뛰어난 지성을 보이는 것을 경멸하곤 하죠. 자신들의 피조물에 대한 무시는 때로 몇날 며칠을 공들여 만든 성냥개피 집을 자기 손으로 휙 허물어 버리거나, 늘 흥미롭게 지켜보던 개미집 표본에 물을 부어 수많은 개미들이 익사하는 광경을 즐거워하는 어린이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든 건데 어때? 죽이건 살리건 무슨 상관이야. 또 만들면 되지."

 

 

 

 

사실 '프로메테우스'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 상념에 젖게 하는 것은 이 영화가 철학적이고, 심오하고, 압도적이어서 아니라(물론 비주얼은 진정 압도적입니다)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빈 칸이 많은 상태로 관객 앞에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리들리 스코트는 그의 진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공 지능과 인격이라는 것이 과연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헤어지는가에 대한 폭넓은 통찰을 보여 줬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블레이드 러너'의 설정 곳곳에 있는 여백(노골적으로 말하면 '구멍')에 얼마나 마니아들이 열광하는지, 그리고 그 열광이 얼마나 자신을 더 위대한 감독으로 만드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에 남겨진 여백들은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보다 훨씬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리들리 스코트가 관객들에게 하는 말이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와 웅대한 설정, 압도적인 비주얼, 그리고 한 3년 너희끼리 치고 받을 수 있는 풍성한 떡밥을 주마. 나는 가끔씩 인터뷰를 통해 '나의 진정한 의도'를 흘려 주지."

 

 

 

 

새로운 리플리 역을 맡은 노미 라파스(Noomi는 누구나 '누미'라고 읽고 싶어지는 스펠링이지만 독일이나 북유럽권에서 oo는 '우' 보다는 '오'의 장음에 가깝다고 합니다. '특전 유보트'라는 한국어 제목으로 소개된 영화 'Das Boot'는 '다스 부트'가 아니라 '다스 보트'죠^^)는 강인하긴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초인적인 캐릭터라서 현실감이 떨어집니다(배를 절개한 뒤 스테이플러로 박고도 날아다니는 인간이라니...그거 참). 또 하나의 여성 캐릭터인 비커스는 샤를리즈 테론의 낭비였다는 여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련되고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악당 데이빗(...사실 이런게 사이코패스가 아니면 뭐가 사이코패스겠습니까^^)는 이미 성공이 예견된 캐릭터였고, 이미 패스벤더는 매그니토 역을 통해 보여준 악역 잠재성을 유감없이 이 영화에서 펼칩니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77년생 치고는 노안이라는... 그런데 블레이드러너의 시대는 2019년. 이때 이미 넥서스들이 그렇게 발달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80년대의 데이빗, 2130년대의 비숍은 좀 발달이 정체된 느낌이 있습니다. 웨일랜드사가 타이렐 사의 기술을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P.S. 스코트 형님의 입장은 '반드시 속편을 만든다' 는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속편은 정말 예상대로 엘리자베스가 우주 괴물들을 데리고 엔지니어들을 멸종시키는 내용일까요.^^ 매우 궁금합니다. 어쨌거나 이제 뒤짱구 에일리언은 다시 못 보게 될 것 같으니 좀 아쉽습니다. 사진은 H.R.기거의 오리지널 디자인.

 


조 아래쪽 네모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조여정 노출'이라는 검색어로 몇주째 인터넷 여론을 이끌고 있던 영화 '후궁: 제왕의 첩'을 조금 빨리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후궁'은 표면적으로 사극이고 조여정이 주인공이라는 점 외에는 '방자전'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영화지만 워낙 마케팅 차원에서 '방자전'이 강조되다 보니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는 같은 감독의 영화로 착각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노파심에서 강조하자면, '방자전',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과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누', '후궁'의 김대승 감독을 혼동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름이 비슷하긴 하군요.)

 

제목에 저렇게 써 놓고 본문은 '조여정이 주인공...'이라고 시작하니 이게 또 뭔 헛소리인가 하실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조여정만 주인공이 아니고, 김동욱, 박지영도 주인공이었다'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느끼실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스타일'이라는 괴물입니다.

 

 

 

 

대략 조선 초기 정도로 추정되는 시대. 왕의 배다른 동생 성원대군(김동욱)은 우연히 사냥길에 나섰다 머물게 된 참판(안석환)의 집에서 참판의 딸 화연(조여정)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대략 화연과 그 집의 아들처럼 대접받는 식객 권유(김민준)가 예사롭지 않은 관계지만 성원대군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원대군의 모친이며 왕의 계모인 대비(박지영)는 대군의 마음을 알면서도 간택령을 내려 화연을 왕의 후궁으로 들이고, 권유와 함께 도망쳤던 화연은 권유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로 아들을 낳아 중전의 자리에 오릅니다.

 

5년 뒤, 병약했던 왕이 급사하고 성원대군이 왕위에 오릅니다. 대비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선왕비 화연과 화연이 낳은 왕자는 권력자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왕이 된 성원은 여전히 화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상황에서 거세당한 권유가 내시가 되어 입궐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이 정도까지의 줄거리는 이미 각종 기사나 TV 영화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훨씬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작진이 굳이 오마주라고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찌기 신성일 윤정희 주연, 신상옥 감독의 '내시(뒷날 이두용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됩니다)'에서 오만석 구혜선 주연의 TV 사극 '왕과 나'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에게는 상당히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양가집 규수와 서로 사랑하던 젊은이가 여인을 궁에 빼앗기고 자신은 남성을 빼앗긴 몸이 되어 내시로 입궁,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는 옛 연인을 바라보는 이야기' 말입니다. 물론 '후궁'은 이 익숙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주체를 '내시'에서 '왕'과 '여자' 족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결말도 크게 달라집니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고전의 극복 혹은 재해석'이라는 강점을 갖고 시작합니다. 보는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깔고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맛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왕의 여자를 사랑한 왕' 부분에서 조금은 무리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성원대군의 욕망이 성취될 가능성 정도는 열어놓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선왕의 여자를 탐한 왕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측천무후도 당태종의 후궁이었지만 그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되었고 광해군도 선조의 후궁이었던 개시 김상궁을 총애했습니다. 하지만 '아들까지 낳은 형의 정궁'을 어찌 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죠. 며느리였다가 시아버지의 여자가 된 양귀비도 최소한 아이는 없었습니다.

 

 

 

 

뭐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도 형의 아내였던 캐서린을 첫 왕비로 맞기도 합니다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형사취수가 일반적이었던 고구려 시대 이후로는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혹시 이런 기록을 보신 분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고려 때만 해도 부계만 다르면 남매끼리도 혼인을 하고, 이모나 삼촌과 결혼한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지만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경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작진의 의도는 아마도 성원의 욕망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일 때 극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것이었겠지만, 반대로 '너무 어처구니없는 욕망'이기 때문에 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왕(성원대군)에 대한 공감이 뚝 떨어지는 부작용도 낳을 수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이쪽 생각입니다). 물론 막장드라마에 익숙한 현대인들이라면 다를 수도 있을 것이고, 결국은 관객 개개인의 취향 문제입니다.

 

 

 

 

굳이 성원대군의 욕망이 아니더라도, 이미 '혈의 누'에서부터 김대승 감독에게 '조선시대라는 배경의 고증과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의 완벽한 균형' 같은 것은 전혀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사극 영화의 예고편 배경음악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쓰일 때부터 짐작됐죠^^)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사소한 딴지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관객들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도입부에 얘기했듯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예사롭지 않은 비주얼입니다. 도저히 조선시대 의상으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의상과 공간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하는 이야기로 일각에서는 왜색 의상설^^까지 나왔다고 합니다만, 이건 좀 무리한 얘기고, 오히려 이 비주얼에서 김대승 감독의 의도가 좀 더 분명해진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 속의 낯선(?) 고전 의상들을 보다 보면 와다 에미('란', '영웅')나 '와호장룡'의 섭금첨(葉錦添, 티미 입)이 만들어 낸 탈국적적 내지는 범 동양적인 고전 세계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특히 섭금첨이 미술을 맡고 풍소강 감독이 '햄릿'의 재해석을 시도했던 '야연'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듯 합니다. '후궁'에서는 국내 최고의 미술감독으로 불리는 조상경씨가 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런 의상과 장중함이 강조된 궁 세트는 자연스럽게 관객을 지배합니다. 이 글의 제목을 정할 때 '스타일이 주인공'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감독의 거대한 야심이 발현되고, 배우들의 연기를 압도하는 스타일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일반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반면 셰익스피어적인 조건을 갖췄으되 셰익스피어 등장인물들의 독백이나 방백을 빼앗긴 배우들에겐 이 영화 속 등장인물로 동화되는 것이 상당히 힘든 과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배경 설명이 필요없는, 너무나 선명한 인물인 대비 박지영이 돋보인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 같고 반대로 다소 무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매력을 잃지 않았던 김동욱의 호연에도 큰 칭찬이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누드 연기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은 조여정의 열연은 굳이 새로 거론할 이유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 화려한 세트와 의상을 능가하는 존재감이랄까요(오히려 이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듣는 것이 부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아무튼 이 영화를 보는 이유 1번이 '조여정'인 분들이라면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P.S. 이하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궁금증입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여기서 발길을 돌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줄거리에 큰 영향이 없으니 스포일러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목이 '후궁'이지만 사실 영화에 나오는 중요한 후궁은 조은지 한명 뿐입니다. 물론 조여정이 처음 입궁할 때 계비로 입궁한 것인지, 후궁으로 입궁한 것인지(아마도 후자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분명치 않지만, 후궁으로 입궁했다 해도 그 시절은 영화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후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후궁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비전 지하의 그 비밀스러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것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친절하게 제목에 '제왕의 첩'이라는 해설까지 붙어 있고, 영어 제목도 'cocubine'으로 붙어 있고 보면(영화 제목에서 이 단어를 보는 건 '패왕별희' 이후 처음입니다), 충분히 제기될만한 의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왜 제목이 '후궁'인 걸까요.^^

 

 

 

728x90

폐비 윤씨가 마침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드라마 '인수대비' 속의 이야기입니다.

 

1482년, 윤씨의 나이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성종보다 2세 연상설과 12세 연상설이 있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가 12세 연상설을 따르고 있으니 성종이 25세, 윤씨는 37세로 추정됩니다. 성종 임금은 한창 피어나는 나이였던 반면 윤씨는 서서히 시들어가는 나이였던 셈이죠. 두 사람 사이에서 1476년 태어난 원자(뒷날의 연산군)는 갓 여섯살. 당연히 어머니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정현왕후(당시의 숙의 윤씨, 뒷날 중종이 된 진성대군의 어머니)를 친 어머니로 알고 성장합니다.

 

연산군이 왕이 되면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어쨌든 '폐비를 사사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이상 이 임무는 누군가 집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세좌라는, 임무에 충실했을 뿐인 한 공무원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만약 세자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전하라는 조직의 결정이 내려지고 그 책임이 내게 맡겨질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종 13년 임인(1482, 성화 18) 8월 16일 (임자)

이세좌에게 명해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말하기를,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부인은 죄가 없는데도 한()나라 무제(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曹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만한 것이 없습니다.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말에,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으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후일을 염려해서 한 것일 듯하다. 그런데 전날 임금이 권경우의 아룀으로 인하여 돌아보며 물었을 적에는, 한명회가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면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둘 수 없는데, 하물며 국모(國母)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무람없게 거처하는 것을 혐의(嫌疑)함이고 후일을 염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앞뒤가 어찌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가?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하는 염려가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것이 운명의 8월16일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세좌가 처음부터 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느냐는 데에는 이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 허종, 허침 형제가 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는데 '지혜롭게' 그 운명을 피해 갔다는 것입니다.

 

서울 경복궁 입구에는 종침교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종침교 터'라는 비석이 서 있을 정도로 꽤 유서깊은 다리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 다리는 연산군 및 폐비 윤씨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허씨 문중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1482년, 폐비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시절 허종과 허침 형제는 조정의 중신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들 형제의 누님(혹은 고모라고도 함)인 '백세 할머니'라는 지혜로운 여성이 "오늘은 조정에 어떻게 해서든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형제가 이유를 묻자 백세 할머니는 '이미 조정에서 폐비의 일을 결정할 참인데 지금 입궐하여 폐비를 핍박하는 일에 관여하면 나중에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형제는 입궐하다가 종침교(물론 당시엔 다른 이름을 썼을 것으로 추정)에 이르러 일부러 말을 다리 아래로 몰아 떨어져 부상을 이유로 입궐하지 않았다.

 

결국 허종 형제가 없자 조정에서는 숙질간인 이극균과 이세좌를 시켜 사약을 받들고 폐비에게 가게 했다. 뒷날 갑자사화가 일어나 연산군이 이극균과 이세좌의 집안을 멸문시킬 때 허종 허침 형제는 화를 피해 사람들이 백세 할머니의 지혜를 칭찬했고, 다리에 형제의 이름을 붙여 종침교라 불렀다...

 

는 것이 이른바 '종침교'의 고사입니다. 이것이 조선 왕조 500년을 지나면서도 미담으로 남았고,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처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칭찬할 일은 아닙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벼슬에 올라 임금의 뜻이 옳지 않다 생각되면 목숨을 걸고 간하고, 그래도 소용이 없으면 벼슬을 던지고 죄를 청하는 것이 사대부의 도덕률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폐비에 반대해 처벌을 받았고(물론 그중 많은 사람들은 원자 즉위 후의 '뒷일'을 걱정해 보험에 들어 둔 것일 수도 있지만), 지난번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온 선비의 기상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종침교의 고사는 결국 일신의 안위를 위해 직무유기를 시도한 공무원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 고사가 사실이라면(후세에 윤색된 것일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되려 임금의 명에 충실했던 이세좌만 고지식한 바보일 뿐이고, 잔머리를 굴리지 않은 죄로 뒷날 멸문의 화를 당한 셈입니다.

 

왠지 이 대목에서 6.25 당시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킨 죄(?)로 그해 9월 총살당한 최창식 공병감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물론 종침교의 고사는 역사에 전하는 바는 아니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해도 실제로 두 사람이 말에서 굴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허침은 이미 형 허종과 함께 덕이 높은 선비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성종이 세자의 스승으로 삼은 인물입니다. 폐비에 반대한 인물이라 세자의 스승이 되었건, 세자의 스승이라는 의리 때문에 폐비에 반대했건, 아무튼 태도의 일관성을 보인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런 일관된 입장 때문인지 갑자사화 때에는 당시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찬성한 사람들을 벌 주라고 앞장서서 외치는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실록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45 (을축)

유순·허침 등이 폐비의 일을 상고하여 아뢰다

 

 유순(柳洵)·허침(許琛)·이집(李諿)·김수동(金壽童),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아뢰기를,

회릉(懷陵)이 폐위당할 때, 언문 글 쓴 자는 나인(內人)이기 때문에 상고할 수 없으며, 《실록》이 오르지 않은 것은 상고할 근거가 없습니다. 나인으로서 그 일에 간섭한 자는 권 숙의(權淑儀)·엄 숙의(嚴淑儀)·정 숙원(鄭淑媛)이며, 일을 의논한 사람은 전에 벌써 상고하여 아뢰고 빠진 자는 없습니다. 다만 언문을 가지고 온 자는 노공필(盧公弼)·성준(成俊)이었습니다.”

 

회릉이란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모신 능의 이름으로, 폐비 윤씨를 능호로 부른 것입니다. 즉 '폐비 윤씨'라는 뜻이죠. 언문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당시 삼전이라 불렸던 세 대비(세조비, 덕종비, 예종비를 말함)가 폐위와 사사의 당위성을 말한 언문 편지를 전달한 것을 말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준과 공필의 죄는 윤필상(尹弼商)과 벌이 같을 것이다.”

하였다. 순 등이 아뢰기를,

필상은 그 일에 참여하여 의논하였으니, 준과 공필은 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회릉이 폐위되어 사삿집에 거처할 때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그것이 불가함을 간했습니다. 그리고 성종께서 의논하여 그 죄를 다스리고자, 공필을 명하여 가서 삼전(三殿)께 아뢰게 하니, 삼전께서 언문 편지를 붙여서 성종(成宗)께 아뢰게 하였으며, 준은 대사를 다 정한 후에 명을 받들어 삼전께 고하니, 삼전께서 언문 편지를 준에게 주어 아뢰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다만 삼전 및 성종의 명으로 왕복하며 회계(回啓)했을 뿐이요 건의한 일이 없으니, 그 죄는 필상과 차이가 있습니다.”

 

채수가 폐비가 곤궁하고 살고 있으니 양식과 옷을 대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죽을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는 전에 한 바와 같습니다. 나머지는 윗글에 대한 보충.

 

하니, 전교하기를,

그 죄가, 필상과 함께 벌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역시 경하게 논할 수 없는 일이니, 그들의 죄를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순 등이 아뢰기를,

준과 공필은 직첩(職牒)을 거두고, 외방에 부처(付處)하며, 그 아들도 함께 직첩을 거두소서. 또 공필은 전에 벌써 외방에 부처하였으니 먼 고을로 옮겨 정배하소서.” (이하 생략)

 

이처럼 허침은 그저 '지혜롭게 난을 피한' 수준이 아니라, 갑자사화 때 가해자 측에서 폐비를 찬성하거나 방조한 대신들을 죄 주는데 주된 역할을 합니다. 그리 아름다운 행동은 아닙니다.

 

반면 이세좌는 역시 숙질간인 이극돈과 함께 연산군 즉위 후, 무오사화의 주역으로 역사에 나쁜 이름을 남깁니다. 뒷날 갑자사화 때 이세좌가 임인년의 일(폐비 사사)을 이유로 죽음을 당한 것은 억울하다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날의 평가가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은 이른바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과오를 후세의 사림들이 잊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허종, 허침 형제가 '지혜롭고 곧은 인물'로, 이세좌가 '운 없는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단지 그때 한 순간의 대처가 어땠느냐만으로 가려진 것은 아니고 그 사람들의 평생 삶이 두고 두고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받은 결과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허종과 허침 형제가 평생 청백리로 이름을 남겼다는 것도 가산점을 받은 요인이겠죠.

 

물론, 아무래 그래도, '종침교에서 굴렀다'는 이야기가 마치 '좋은 처세'의 본보기처럼 전해지는 것은 역시 문제 있는 시각이라는 생각입니다. 사극의 진짜 교훈은 드라마 밖에서 찾아야 한다고나 할까요.

 

 

 

P.S.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된 뒤 연산군의 보복은 참으로 집요하고도 광기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은 어머니를 몰아낸 주역으로 윤필상을 꼽아 처단했으면서도, 윤필상의 집안(파평 윤씨)이며 어머니를 '밀어내고'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에 대해서는 아무 보복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기까지 했죠.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이건 혹시 연산군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일까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