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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 고메스, 혹은 제시카 고메즈라는 이름이 이제 친숙하게 느껴지십니까? 비키니폰으로 시작해 이민호와 함께 촬영한 2X 맥주 광고, 여기에 케이블 TV에서 하고 있는 뉴욕 생활 탐방 프로그램까지, 이제 거의 한국 연예인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 합니다. 몸매 하나는 정말 국내 연예인으로는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죠.

(특이하게도 이 사람은 Jessica Gomes라는 이름을 씁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Gomez라는 스펠링을 쓰기 마련인데... 물론 그 경우에도 실제 발음은 고메즈 보다는 고메스에 가깝습니다.)

물론 고메스는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지명도가 있는 모델입니다. 일단 인기 모델의 척도 중 하나인 미국 스포츠 전문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수영복 특집(Swimsuit Issue - 매년 이 특집은 평소의 두배 이상 많이 팔린다고 하죠)에 2008년에 이어 2009년에도 초대됐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CF 모델에 대한 대우가 좋기로 소문난 나라죠. 또 한번 뜨면 끝장을 보는 의리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고메스 외에도 이런 사례들이 꽤 있습니다. 해외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다가, 한국에서 열렬한 성원을 받고 아예 한국 연예인 취급을 받게 된 스타들에 대한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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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생인 제시카 고메스는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싱가포르계 중국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호주 서쪽의 중심지인 퍼스. 흔히 미국 사람들이 호주 사람들 대할 때 벽지에서 온 사촌 보듯 하는 경향이 있죠. 한국 사람들이 접하는 미국 사람들이 대략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 사람들이 보는 호주인들은 좀 뭔가 느리고 순박하면서 약간 게으른 데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한 듯 합니다.

한국 활동 초기의 제시카 고메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도 비슷합니다. "참 순박하고 의외로 외모에 비해 검소했다"는 얘기더군요. 물론 스타 대접을 받고 있는 요즘은 좀 변했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신장 1m77, 동양적인 외모가 퍽 친근감을 줍니다. 의외로 호칭 사이즈는 33-23-35. 한마디로 새가슴이라는 뜻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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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호주에서 발탁된 고메스는 모델로 각광을 받아 뉴욕으로 진출합니다. 그 과정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LG 비키니폰 모델이 되어 한국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죠.

물론 이때만 해도 아주 열심히 정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나 알려진 이름입니다. 오히려 한국 핏줄이 조금 섞였다는 빅토리아스 시크릿 모델 제라 마리아노가 조금 더 유명한 정도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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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름 한국과 가까워 지려는 듯 여러 가지 제스처를 취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발빠르게 고메스를 영입한 것이 테이 쪽이었죠. 고메스와 가장 먼저 키스한 한국 남자 연예인은 이민호가 아닙니다. 그 전에 테이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 한국 관련 일들이 본격화됐습니다. 케이블 TV에서는 고메스의 일거수 일투족을 촬영했고, 미국 뉴욕 집까지 따라가서 생활을 밀착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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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편으로 진행된 것이 한창 물이 오른 이민호와의 X2 CF 촬영이었죠.

한국 모델이었다면 상당히 악플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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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딱 여기까지가 제시카 고메스가 한국에서 현재까지 이룩한 업적입니다. 어쩌면 제시카 고메스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어 한 마디 못하는 외국인으로서 지금까지 할만큼 했다고 생각됩니다. 과연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을까요? '패밀리가 떴다'나 '1박2일'에 나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지금부터 한국어를 배우지 않는다면 여기까지가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아무튼 언젠가 연기를 해 보고 싶다고 하니 혹시 또 모르죠. 한국어로 말하지 않는 역으로 한국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을지.

문득 제시카 고메스 생각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 유난히 각광받았던 또 다른 제시카가 떠오릅니다. 이 노래를 들어 보시면 아마 누군지 생각나실 겁니다.




제시카 폴커(Jessica Folcker),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제시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가숩니다. 다른 히트곡은 꼽기 힘들지만 이 곡, 'Goodbye'는 박신양 전도연 주연의 영화 '약속'에 삽입되면서 엄청나게 히트했습니다. 한국에도 두어번 왔다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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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는 스웨덴 출신의 어머니와 세네갈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1975년 태어났고 고향은 스톡홀름입니다. 흑-백 혼혈의 이국적인 외모 덕분에 1994년에는 미스 스웨덴 대회 본선에도 나갔다는군요. 굳이 아바 얘기를 하지 않아도 스웨덴은 대단한 팝 강국입니다. 묘하게도 단조 위주의 단순한듯한 선율인데도 착착 감기는 데가 있어서 몇해에 한번씩은 꼭 세계를 휩쓴 히트곡이나 히트 가수가 나오곤 하죠.

스웨덴에서 발굴된 제시카는 1998년, 원래 에어 서플라이가 불렀던 이 노래를 리메이크합니다. 세계 최고의 히트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 포스터 선생의 곡입니다. 희한하게도 이 음반은 영-미권보다는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이런 경우는 마이클 런스 투 록 등 꽤 많은 경우에 볼 수 있죠). 제시카가 대만이나 필리핀에도 왔었다느 걸 보면 아마도 제작사의 감이 '이건 동남아 용'이라는 쪽으로 꽂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에서 대박이 났습니다. 당시 이 음반의 라이센스 담당자 말로는 "전 세계에서 나간 음반의 2/3가 한국에서 나갔다"고 하더군요. '사실상 한국 가수'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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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시카는 그리 한국에 대해 크게 애정어린 제스처를 하거나, 그 기회에 아예 '한국 연예인'으로 전업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저 자기 잘난 덕에 히트한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그 결과 후속 앨범에 대한 반응은 거의 없었고, 제시카는 그냥 잊혀진 스타가 되어 갔습니다. 요즘은 뭘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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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서 진흙 장난(?)을 했던 제시카 고메스입니다. 두 명의 제시카만 훑어봤는데도 꽤 길어졌습니다. 이밖에도 '어쩌다 보니 한국 연예인이 돼 버린 외국 연예인' 얘기를 하자면 거론하고 싶은 사람들이 꽤 있는데,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다음편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다음편입니다.



http://www.egotastic.com/image?path=0811/jessica-gomes-topless-gq-italy-01.jpg&info=Jessica%20Gomes%20Topless%20Pictures%20from%20GQ%20Italy

 

http://www.egotastic.com/image?path=0811/jessica-gomes-topless-gq-italy-06.jpg&info=Jessica%20Gomes%20Topless%20Pictures%20from%20GQ%20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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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섀힌 자파골리(Shaheen Jafagholi)입니다. 그냥 '샤힌'이라고 쓰는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군요. '브리튼즈 갓 탤런트 2009'는 거의 한국 오락 프로그램이 될 전망인 모양입니다. 벌써부터 수잔 보일에 이어 두번째 스타, 샤힌 자파골리에 대한 뉴스가 온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샤힌 자파골리는 12세. 이름으로 보아 아랍계인 듯 합니다만 어쨌든 현재는 웨일즈의 스완시(Swansea)에서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소년입니다. 뒤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자파골리는 이미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아무튼 자파골리는 등장한 뒤로 한번 퇴짜의 위기를 넘기게 되더군요. '브리튼즈...'에서 이전에 다른 출연자에게도 노래를 중간에 끊고 다른 노래로 바꿔 부르게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무대에 나온 자파골리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Valerie'를 조금 빠르게 편곡해서 부릅니다. 하지만 까칠이 사이먼 코웰은 즉시 노래를 끊고, "이건 아니다"를 외치더군요. 그래서 자파골리는 마이클 잭슨이 소년 시절 형들과 함께(Jackson 5) 부른 'Who's loving you'를 다시 멋지게 불러 제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심사위원 홍일점인 아만다 홀든은 흥미로운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심사위원 하면서 소름이 끼친게 세번째다. 첫번째는 폴 포츠, 두번째는 조지 샘프슨,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다." 포츠와 샘프슨은 각각 2007년과 2008년의 우승자들입니다. 그러니 '내가 소름끼치면 바로 우승인데, 너도 그럼 우승 감'이란 뜻일까요? 수전 보일 때에는 기립박수를 보냈지만 소름까지 끼치지는 않았나 봅니다.

(아무튼 그 바람에 goosebump가 '소름'이란 뜻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사이먼은 왜 첫 노래를 중간에 끊었을까요. 원곡을 들어 보시면 느낌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파골리의 편곡 버전이 원곡의 맛을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마이클 잭슨 리메이크는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사실 완벽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 자파골리는 이미 마이클 잭슨 리메이크에는 이력이 나 있다고 봐야 합니다.

아바에게 '마마 미아'가 있듯 마이클 잭슨에게는 'Thriller Live'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자파골리는 이 뮤지컬의 해외 투어 팀에서 어린 마이클 잭슨 역을 맡았던 소년 스타입니다. 그런 만큼 이 분위기의 노래에는 충분히 훈련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뮤지컬 가운데 나오는 잭슨5의 모습입니다. 아래 사진 맨 앞에 나오는 것이 혹시 자파골리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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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대목에서 어린 마이클 잭슨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자파골리와 같은 노래, Who's Loving You입니다.



어떻습니까. 어떤 동영상의 댓글로 누군가 "마이클 잭슨보다 낫다"고 써 놓은 걸 봤습니다만, 과연 이 분이 마이클 잭슨을 안다면 이런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58년생인 마이클 잭슨의 7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노래하는 천사의 강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노래 잘 하는 어린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흔합니다. 그런데 가끔씩, 어린이이면서도 성인의 감정을 갖고 있는 천재들이 태어납니다. 대체 무슨 인생의 경험이 있어서 이런 재능을 갖추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업지만, 아무튼 가끔씩 그런 이상한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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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5는 마이클 잭슨의 가수 경력의 시작입니다. 당초 조 잭슨의 아들들인 재키, 티토, 저메인과 두 명의 사촌으로 구성됐던 잭슨5는 나중에 말론과 마이클이 들어서면서 다섯 명의 친형제 그룹이 됩니다. 그리고 마이클이 8세가 되면서 리드 보컬이던 저메인이 뒷전이 되어 버리죠.

60년대 후반 각종 아마추어 콘테스트를 휩쓴 잭슨5는 마침내 모타운의 베리 고디에게 발탁돼 수프림스와 함께 핵심적인 달러 박스로 키워집니다. 그 수많은 스타들 중에서도 고디는 어린 마이클에게 주목해 1971년부터 13세의 나이로 솔로와 그룹 활동을 병행하게 되죠.

이 형님의 일생을 훑자면 역시 일주일을 떠들어도 모자랄테니 여기까지만.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로 잘 알려진 I'll Be There입니다. 마이클의 12세 때.



더구나 이런 재능을 성인이 되어서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오히려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 바로 그가 King of Pop으로 불리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문득 신동 자파렐리 때문에 마이클 잭슨으로 넘어갔습니다. 뭐, 매번 나오는 신동들마다 마이클 잭슨이 될 수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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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골리의 재능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 쇼의 분위기로 봐서는 인간승리적인 감동의 요소가 좀 적다는 약점도 눈길을 끕니다. 아무튼 보일의 대항마로서는 손색이 없군요. 이미 선수로 뛰고 있는 신동 소년과 인간승리의 주인공인 시골 아줌마, 과연 누가 승자가 될까요?




물론 수잔 보일은 먼저 보고 오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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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MBC 스페셜-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는 오랜만에 보는 잘 만들어진 스타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그동안의 소위 '스타 다큐멘터리' 들이 스타의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간판을 내걸고서 실제로는 가장 바깥쪽 표피조차 뚫지 못하는 제한된 모습을 보여준 반면, 이번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는 꽤 충실한 제작기간,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 다각도에서의 접근 등으로 인물 다큐멘터리의 표본 역할을 해 냈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개구리 삶은 물'입니다. 아버지 박성종씨의 말이었죠. "개구리가 좋다고 해서 개구리를 잡아 왔는데, 요리법을 몰라서 엄마가 그냥 삶으니까 내장 같은 데서 냄새가 심하게 났어요. 그런데도 얘가 군말 없이 그걸 먹더라구요."

양념도 하지 않은 개구리를 삶은 물의 냄새,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그만큼 박지성은 성공에 목말라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쯤해선 '대체 성공이 뭐길래...'라는 생각도 잠시 스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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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 90%에게 '박지성'이라는 이름의 장편 극화는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전, 결승골을 터뜨리고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반짝 안긴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2002년 이전에도 박지성은 분명히 존재했고, 최선을 다해 뛰었습니다.

박지성을 가장 가까이서 본 건 2005년, 난데없이 팔자에 없는 축구 기자 생활을 하게 됐을 때였습니다. 그해 6월, 박지성은 월드컵 대표팀의 일원으로 우즈베키스탄-쿠웨이트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때 저도 취재단의 한 사람으로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 기간 중 박지성은 인터뷰를 두 번 했습니다. 기자들이 아는 박지성에겐 특유의 화법이 있습니다. 약간 무거운 내용을 물으면 "제 생각에는 ...... 라고 생각한다고 ..... 생각합니다." 혹은 "가장 중요한 것은 ......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난히 '생각'이라는 말을 한 문장에서 두 번 이상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아무도 웃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한국 축구의 지존이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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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박지성은 아인트호벤 소속으로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랐고, 7월 이적 소문이 돌았습니다. 옮기는 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설이 처음 제기됐을 때, 축구를 맡은 경력이 긴 기자들은 "에이, 설마~~~"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금도 축구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고, 당시에는 더더욱 몰랐던 저로선 맨유라는 팀에 대해서도 '베컴이 뛰던 명문 팀'이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축구에 빠삭한 후배에게 물었습니다.

나: 박지성이 맨유 가면 주전 뛸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
후배: 거의 없죠. 형 같으면 긱스를 쓰겠어요, 박지성을 쓰겠어요?
나: 긱스...가 그렇게 잘 하냐?
후배: ...라이언 긱스 몰라요?
나: 몰라.

(이런 제가 EPL 주요 선수들을 알아 보게 된 것도 다 박지성의 덕입니다.^)

물론 지금도, 당시 축구 기자들의 "에이, 설마~~~"라는 말이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지성 본인도 어제 MBC 스페셜에서 맨유에 처음 합류했을 때의 심정에 대해 "내가 놀러온게 아닌데, 선수로 온 건데, 구경꾼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그의 축구 인생은 결국 그 "에이, 설마~~~"를 현실로 바꿔 온 과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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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스페셜을 보다 보면 '참 저런 선수가 어떻게 2002년 무대에서 뛸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을 개최한다고 결정을 했으면 당연히 그 대표팀에 들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뽑혔을 겁니다. 그런데 박지성이 축구선수로서 걸어온 길은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문제의 개구리 에피소드가 나온 건 수원공고 이학종 감독이 "몸 불리라고 자주 집에 보냈다"고 말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아버지 박성종씨가 직장을 때려치고 '아들 잘 먹이기 위해' 정육점을 차렸다던 바로 그 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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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방송의 주요 내용은 "이렇게 최고의 선수인 박지성도 2002년 이전엔 국내에서 번번히 외면을 당했다"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박지성의 인복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학에 못 갈때 만약 김희태 명지대 감독이 현역이 아니었더라면, 김희태 감독과 절친한 허정무 감독이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아니었더라면(그럼 굳이 명지대와 문제의 연습경기를 할 이유도 없었겠죠), 2002년 대표팀 감독이 히딩크가 아니었더라면...

사실 세상에는 '실력은 있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재능이 있고 노력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어느 쪽에 인생의 진실이 있을까요?

어제의 'MBC 스페셜'은 거기에 대한 한 답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런 거죠. "천하의 박지성도 그의 능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그렇게 고전했다. 하지만 한 구석에서 쉼 없이 갈고 닦고 노력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실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단, 그건 그 노력의 정도에 달렸다. 어느 정도? 박지성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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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정상으로의 길이 그런 것이라면 정말 포기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이날 다큐에서 박지성의 부모는 두 번 울더군요. 아버지는 2002년 월드컵 본선 직전, '대표팀에서 제일 먼저 퇴출될 선수'로 박지성이 꼽혔을 때'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는 '제대로 된 청소년기도 겪지 못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학창시절의 추억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아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박지성처럼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학창시절을 희생하고, 친구나 젊은 날의 즐거움은 뒤로 미루고, 개구리 삶은 물도 마시며 노력할 겁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보장이란 있을 수 없죠. 거기에 'MBC 스페셜'의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이 무엇이 된다는 보장이 없을 때에도 박지성처럼 노력할 수 있는가.' 당연히 박지성이라고 해서, 자신이 언젠가 맨유에서 뛸 수 있을거라고 알고 있었을리가 없죠.

물론 진정 박지성처럼 노력한다고 해서 다 박지성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학교에서도 왠지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 친구들이 있죠. 노력을 실력으로 바꿔주는 재능이란 원래 불공평합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지난해 챔피언스리그 우승 결정전에 박지성을 제외시킨 데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불공평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런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것이 축구가 가진 잔인한 면이다.' 문득 인생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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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날 어머니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려선 박남정과 똑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하던데... 사람들이 다 연예인 시키라고 했어요." 지금의 진중한 박지성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얘깁니다. 과연 박지성이 혹시 연예인이 됐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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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할배'라는 별명이 김래원에게 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MBC TV '무릎팍도사'에 나온 김래원의 모습이 퍽 신선했던 것은 우선 이런 프로그램에서 김래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라는 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난 2003년 MBC TV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 정다빈과의 공연으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사실 기억을 더 더듬어 보면 김래원은 한방에 올라선 반짝 스타는 아닙니다. 데뷔가 너무 빨랐던 셈이죠. 1997년 김수근 최강희 등이 주연이었던 청소년드라마 '나'에서 이미 모습을 비쳤고 2001년-2002년에 이미 주연급으로 얼굴을 비쳤지만 히트작이 없었을 뿐입니다. 얼마 전 '꽃남' 이민호가 "김래원 선배를 롤 모델로 생각한다"고 말한게 우연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다른 청춘스타들에 비하면 훨씬 긴 시간을 이미 활동해 왔고, 그런 동안 천천히 성장해서 어느새 정상에 위치하게 된 김래원. 그야말로 '요란하지 않은 스타덤'인 셈인데 그의 이런 성장사를 돌이켜보다가 기억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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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이민호의 태국 방문 얘기 때 잠깐 소개드린 분이 다시 등장합니다. 요즘 태국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한류 관련 행사를 떠맡고 있는 KTCC의 이유현 사장님입니다. 그동안 태국에 다녀온 수많은 스타들 중 이분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죠. 그런 이사장님이 유독 칭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김래원입니다.

김래원은 지난해 10월, 방콕에서 열린 한국-태국 수교 50주년 기념 행사에 한류 스타를 대표해 참석했습니다. 당연히 공항에까지 많은 팬들이 몰렸고, 경찰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했습니다. 호텔까지 경찰들이 에스코트를 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여기까지는 여느 스타들과 똑같았다는 거죠.

그런데 김래원은 여기서부터 달랐습니다. 호텔에 도착한 김래원은 자신을 호위해준 경찰관들에게 일일이 다가가 감사 인사를 하더라는 겁니다. "이때부터 김래원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 이사장님의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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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의 사소한 일들은 생략. 그 다음은 행사를 마치고 귀국하던 날의 김래원입니다. 이사장님의 부하 직원의 증언은 대략 이렇습니다.

호텔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김래원은 진을 치고 있던 많은 팬들이 택시를 타고 자신을 따라 공항까지 오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가이드를 통해 태국 현지 직원(바로 이사장님의 부하 직원이죠)에게 '공항까지 택시비가 얼마나 드냐'고 물었다는 겁니다. 얼마라고 대답하자 김래원은 그 팬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김래원은 통역을 거쳐 "공항까지 멀고, 택시비도 많이 나온다. 또 중간에 들를 곳이 있어 바로 공항으로 가지도 않는다. 공연히 고생할 필요 없이 여기서 이별을 하자"고 한 뒤 단체로 사진 촬영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이 현지 직원이 "이런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고 하더라는군요.

뭐 더 많은 팬 인파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호텔에 와 있던 팬들이 별로 없어서 그게 가능했나 보지'라고 웃어넘길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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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알고 나서 '무릎팍 도사'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김래원은 스스로 '재미 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자신이 남을 웃기거나 즐겁게 하는 데 큰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털어놓더군요.

이날 방송 분량은 평소 다른 스타들에 비해 조금 짧았습니다. 브라운관에서의 '재미'를 위해 뽑아낼 부분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죠. 글자 그대로 '예능에는 최악의 출연자'라고 꼽을 만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라도 '무릎팍 도사'의 재미를 보장하는 것이 강호동과 유세윤의 몫인 만큼 어제는 두 MC의 활약이 유난히 빛났습니다. (강호동의 사과 개인기 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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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연예계에서 '겸손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굳혀가고 있는 김래원이 말한 일화 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가 끝날 때까지 말을 놓지 못하고 (상대역인 김태희에게) '태희씨'라고 물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이런 사람 보다는 오히려 약간 오버하는 사람이 상대를 더 편하게 해 줄 때도 있습니다. 결코 장점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경우지만, 여기서 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연기자 중에는 차인표가 상대방에게 '말 못 놓는 배우'로 유명합니다. 영화 '닥터 K'를 다 찍도록 상대역 김혜수에게도 '혜수씨'라고 불렀다는 것을 비롯해 함께 출연한 배우들 가운데 말을 놓고 오빠-동생, 혹은 형-동생 하는 경우가 더 드믈 지경입니다. 이 부분에서 묘하게 두 배우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닐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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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드라는 이름을 듣고 "누구야?" 할 사람에겐 별 의미 없는 포스팅입니다. 딥 퍼플의 키보디스트라고 하면 좀 달라지겠지만, 역시 요즘 분위기로 봐선 "딥 퍼플이 뭐야?"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테죠. 하긴 딥 퍼플이라고 해도 '하이웨이 스타'나 '스모크 온 더 워터'를 생각하는 사람에겐 별 관심 없을 공연입니다.

'존 로드 콘체르토-에이프릴(Jon Lord Concerto - April)'이라고 이름붙여진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이상하게 꼬인 일정 때문에 갈 수 있을까 걱정도 했고, 결국 시작 시간을 념겨 도착했지만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마음은 뿌듯하기만 했습니다. 안 왔더라면 정말 소중한 기회를 놓쳐 버릴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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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같이 갈 사람을 꾀는 것부터 난항을 겪었습니다. 마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존 로드라는 사람이 공연을 하는데..."
"그게 누구야?"
"딥 퍼플이라는 그룹에서 키보드를 치던 아저씨야. 딥 퍼플은..."
"나도 딥 퍼플은 알아. 그런데 별로 안 내키네."
"...스티브 발사모가 보컬로 같이 와."
"그건 또 누군데?"
"왜 전에 '게세마네' 잘 부르던 잘생긴 뮤지컬 스타 있잖아."
"아 그래?"

네. 존 로드 선생이 발사모의 덕을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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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드나 딥 퍼플의 역사에 대해 맘 먹고 얘기를 하자면 날밤을 새워도 모자랍니다. 일단 딥 퍼플이라는 이름과 거의 비슷한 무게를 갖고 있는 리치 블랙모어 선생을 빼고 나면 그들의 사운드에서 가장 큰 무게를 가진 사람은 이 로드 형님일 겁니다.

특히 전자 사운드의 개척기인 1970년대, 하먼드 B3와 C3 오르간으로 이 분이 보여준 절정의 무공은 당대 최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릭 웨이크먼이나 키스 에머슨 같은 거인들과 견줘 한 치의 손색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특히 록 사운드와 하먼드 오르간의 결합이라는 건 이 분에 의해 진정한 궤도에 올랐습니다.

리치 블랙모어를 제외한 나머지 딥 퍼플 멤버들이 존 로드의 사운드와 공헌에 대해 얘기합니다. 잠시 'Highway Star'의 솔로 부분을 직접 연주하기도 하죠.

 

내친 김에 그냥 원곡까지. 1972년 라이브입니다. 로드 형님의 얼굴은 막 피해가는군요.



로드는 딥 퍼플의 음악과 클래식의 결합을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실이 1969년의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 같은 곡이죠. 메탈리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S&M을 하기 수십년 전에 이미 이들은 자신들의 히트곡이 아닌 독자적인 곡으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시도했던 겁니다.

이미 딥 퍼플 멤버들과 함께 두어 차례 한국에 온 적이 있지만 존 로드는 이번엔 스티브 발사모, 카시아 라스카(여)라는 두 보컬과 함께 왔습니다. 밴드는 국내 멤버들로 채워졌고 서울 아트 오케스트라가 협연했죠.

이날 연주 곡목은 이랬습니다.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 (3 movements)
Pictures of Home
One from the meadow
Bourre
Pictured within
The Telemann Experiment
Wait a while
Gigue

Encore: Soldier of fortune, Child in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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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사정으로 Concerto 2악장 때에야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그리 많이 놓치지는 않았습니다. 2부 시작부터 로드 선생은 마이크를 잡고 나서시더군요. 2부 시작 첫 멘트는 누가 영국 사람 아니랄까봐 "다들 바에 갔다 오셨나요?"였습니다.

(그쪽 나라에서는 인터미션 때면 다들 바에 가서 한 파인트 정도 맥주를 마시고 오곤 하죠. 불행히도 세종문화회관엔 그런 바가 없답니다.ㅋ)

Pictures of Home을 연주하자 다들 열광. 하지만 2부에서 딥 퍼플 시절의 곡은 이 곡 한곡 뿐이었씁니다. 나머지는 전부 로드 선생의 솔로 활동 앨범 수록곡들이었죠. 생소한 곡도 많더군요. 보컬이 없는 Bourre같은 곡은 집시의 멜로디를 골격으로 하고 있다는 설명, The Telemann Experiment는 바흐 시대의 작곡가인 텔레만의 멜로디 하나를 듣고 이리저리 변형시켜 만든 곡이라는 설명이 따라왔습니다. 이렇게 진행이 되다 보니 은근히 본 공연보다 앵콜이라는 떡밥 쪽에 더 마음이 쏠렸습니다.

마지막 곡인 Gigue는 대단히 규모가 큰 록 협주곡 형식이었습니다. 스스로 '크레이지 피스'라고 소개를 하더군요. 연주 중간에는 살짝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아메리카'와 드보르작 교향곡 9번 4악장의 멜로디를 섞여 연주하는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전반적으로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형님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정됐던 앵콜. 객석의 아저씨 관객들은 "하이웨이 스타!" "번!"을 외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여유있는 미소의 로드 형님은 "그건 다음 기회에"라고 넘기며 "아마도 오늘 곡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작곡에 손대지 않은 곡일 것"이라며 'Soldier of Fortune'을 연주했습니다. 아아, 해 주시면 고맙기 짝이 없을 뿐이죠.

노래가 끝나고 로드 형님은 '한 곡만 더 하겠다. 이번엔 제목은 말하지 않겠다'며 다시 하먼드 오르간 앞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단 세개의 음표만 듣고도 객석은 들끓어 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세 음만 듣고 이 곡을 모르면 감히 딥 퍼플 팬이라고 할 수가 없죠.




발사모는 그가 왜 뮤지컬을 떠난지 꽤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최고의 예수로 꼽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특히 Child in Time의 고음부에서는 절로 소름이 끼치더군요. 노래 중간에서 쉴새없이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전성기의 길런이 아니라는 게 전혀 아쉽지 않았습니다.

모르시는 분이라면 발사모의 노래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게세마네'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노래가 끝날 때만 해도 아무도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공연의 제목이 'April'인데다 4월 아닙니까. 당연히 문제의 노래가 나올 줄 알았죠. 그런데 웬걸, 피곤하셨는지 로드 형님은 그냥 자리를 뜨셨습니다. '누가 공연 끝이래'는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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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귀가하는 차 안에서 Child in Time의 고음부를 따라하다가 동승자들에게 구박받은 사람이 저 하나만은 아니었을 듯 합니다.

문득 존 로드 선생을 위시한 당시 록의 거장들이 하먼드 오르간을 연주하던 시대가 그리워집니다. 창작력과 에너지가 온 사방에서 뭉클거리고 쏟아져 나오던 그 시대 말입니다. 그래서 골라 봤습니다. Proco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입니다. 매튜 피셔의 하먼드 오르간은 지금 들어도 영롱하기만 합니다.

 

언제건 다른 멤버들은 떨구더라도^ 리치 블랙모어와 존 로드가 다시 뭉쳐서 딥 퍼플의 사운드를 재현해 준다면 참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0이라는게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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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박중훈쇼'가 오는 19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최근 시청률은 참담할 정도입니다. 5일 엄정화-신영옥 출연편이 3.4%로 지금까지 방송된 내용 중 최저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최근 방송분이 3~4%대를 오르내리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갑자기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예 회복이 안 되는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겁니다.

지난해 연말, 방송 전만 해도 '박중훈 쇼'는 방송가의 최대 화제가 될만 했습니다. 아마도 방송-영화계를 망라해서 지금 연예 대통령을 뽑는다면, 스스로 고사하지 않는 한 박중훈이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겁니다. 물론 연예계에는 그보다 훨씬 관록이 두터운 선배들도 있지만, 그만큼 연륜과 인망, 친화력에서 넓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중훈쇼는 4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과연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가장 책임이 큰 것은 이 쇼의 제작진입니다. 박중훈 본인이 이 멍에를 다 뒤집어쓰기엔 제작진의 책임이 너무도 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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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박중훈 쇼'는 본래 SBS를 통해 방송될 예정이었습니다. 일이 잘 풀렸다면 1년 전에 이미 방송을 하고 있을 상황이었죠. 하지만 방송 계획이 이미 언론에 공개된 이후, 방송의 세세한 조건을 놓고 이견이 발생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박중훈은 제작진에게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KBS가 먼저 제의를 했는지, 박중훈 측에서 제의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무튼 박중훈은 "SBS만 아니면 어떤 방송사든 좋다. 당초 SBS가 내건 조건보다 나쁜 조건이라도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입장이었고, KBS건 MBC건, "박중훈이 토크쇼를 진행한다"는 호재를 놓칠 방송사는 없었을 겁니다. 당연히 덥석 물었죠.

하지만 '박중훈 쇼'라는 이벤트는 현재의 제작진에겐 너무 큰 고깃덩이였습니다. 소화시킬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현재의 제작진들의 전력을 살펴보면 '예능 전력'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아마도 교양/다큐멘터리 영역에서는 훌륭한 연출자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교양 출신으로 예능으로 전업해서도 훌륭한 재능을 발휘하는 연출자들도 간혹 눈에 띄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 교양과 예능은 동양과 서양처럼 쉽게 만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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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쇼'에 불만을 느낀 시청자들의 반응 중 가장 큰 목소리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재미가 없었을까요. 많은 시청자들은 '다 아는 얘기,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만 골라 물어보는데 어떻게 재미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항변합니다. 이 대목에서 시청자와 제작진이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중훈은 여러 차례 '정통 토크쇼를 하겠다(품위있게 진행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제작진도 재현 화면이나 자막 같은 것이 없는 토크쇼를 하겠다고 이 말을 뒷받침했습니다. 좀 답답한 노릇입니다. 박중훈이라는 MC는 이름 값이 무겁지만 TV 토크쇼 진행자로서는 초보입니다. 시청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향을 요구하는지를 체크해서 MC에게 전달해야 할 사람이 바로 제작진인데, 제작진도 MC와 마찬가지로 시청자의 요구를 전혀 모르고 있으니 시간이 흘러도 쇼가 달라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감히' 톱스타 박중훈에게 진행의 방향을 이러이러하게 가는게 좋겠다는 말을 누가 하냐구요.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제작진이 있고, 전문 작가진이 있는 겁니다. 초보 MC가 '내가 생각하는 토크쇼는 이렇다'고 할 때 잘 안 될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걷는 사람은 박중훈씨의 개인 스태프입니다. 방송 제작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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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회인 장동건 편에서 이미 제작진의 한계는 드러났습니다. 박중훈과 장동건이 친한 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제작진은 여기서 '장동건이 나온다' 이상의 욕심을 내야 했습니다. 물론 친하다고 아무거나 물어볼 수 있는건 아니지만, '박중훈의 품위'와 '장동건의 몸 사림' 사이에서 신선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방송에 낼 수 있도록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쇼의 제작진은 '무릎팍도사' 식의 토크쇼가 경박하고 저열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한 것은, '무릎팍도사'의 질문들은 출연자에 대한 치열한 연구, 수년간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예능 전문 작가들과 연출자들)에 의해 나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 받는 사람도 뜨끔하고, 보는 사람도 아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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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중훈 쇼'의 질문들은 '우리는 사실 장동건(혹은 김태희, 혹은 주진모, 혹은 김혜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아마추어적인 태도를 적나라하게 노출시켜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색이 토크쇼인데 질문자가 일반 시청자보다도 식견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어 온 것이죠.

그동안 이 쇼의 내용 중 가장 진부했던 것이 소녀시대 편, 흥미로웠던게 장기하 편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유는 뭘까요. 장기하라는 새로운 인물에 대해서는 어차피 제작진도 잘 모르고, 시청자도 잘 몰랐기 때문에 격차가 그만큼 좁혀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쇼의 제작진이 '예능을 다루는 태도'는 5일 엄정화 편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이날 '엄정화의 패션 변천사'라는 간단한 구성 화면이 나왔습니다. 3-4곡 정도의 과거 히트곡 뮤직비디오를 짜깁기한, 상당히 성의 없는 화면이었는데 배경음악은 전부 'D.I.S.C.O'였죠. 이 때문에 화면은 과거 화면이었는데, 박중훈이 "아, 저게 'D.I.S.C.O'때의 모습이군요"라고 얘기하는 실수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청자들이 충분히 채널을 돌릴 만한 상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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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제작진은 구성 단계에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자막 나오는거 봤어?"하면서 '자막으로 도배된' 무릎팍 도사를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제작진은 오프라 윈프리 쇼의 소파와 세트는 참고할 줄 알았어도, 그 쇼에 나오는 질문과 대답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하지 않은 태가 역력했습니다. 미국 시청자들이 세트가 멋져서 오프라 윈프리 쇼를 열심히 본 줄 알았나보죠.

'박중훈 쇼'의 교훈은 명확합니다. 아무리 달변의 진행력과 톱스타의 섭외력을 갖춘 훌륭한 MC를 데려다 놓아도 제작진이 그걸 훌륭한 방송으로 승화시킬 능력이 없는 한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톱스타를 데려와서도 망하는 드라마가 한둘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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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갖고 "박중훈은 역시 방송용은 아니었어" 라든가, "&&&는 인제 텄어"라고 치부하기에 앞서 제작진이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지난해에도 '교양 마인드로 예능을 건드린' 시도는 몇 차례 있었습니다. MBC에서도 주말 다큐멘터리 코너를 통해 이영애와 비를 밀착 취재(?) 한 적이 있었죠. 두 번 모두 시청자들로부터 '잔뜩 기대했는데 보여준 게 뭐냐'는 질책을 면치 못했습니다. 방송의 내용으로 봐선 피사체가 된 스타들은 만족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꽃등심이나 바닷가재가 만족하면 뭘 합니까. 손님이 좋아해야 식당이 잘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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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돈 관련 일을 하는 후배와 식사를 했습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그동안 잘 살던 돈 관련 일들을 하는 친구들이 아주 죽을 맛인 모양이더군요. "그러게 돈이란 건 원래 땀 흘려서 벌었어야지!"라고 농담을 했지만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영국 시간에 맞춰 업무를 보고, 뉴욕 시간에 맞춰 오후 11시에 회의를 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참 저러고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돈이야 저보다 훨씬 많이 벌겠지만 그래도...

4월이면 벚꽃, 벚꽃하면 4월이죠. 이놈의 벚꽃이라는 꽃은 의외로 수명도 짧습니다. 2주 정도 활짝 피었다가 슬쩍 져 버리는게 일이더군요. 이게 일본의 국화라는 이유로 뜻없이 미움도 받지만, 뭐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 중에서 장미를 미워하는 나라는 못 본 듯 합니다. 그걸 나라 꽃으로 고른 사람들이 문제지 뭐 꽃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본래 없던 꽃도 아니고.

아무튼 다른 뜻 하나도 없이 좀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뜻으로 경주를 휙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네. 돈은 좀 깨집니다만...ㅠㅠ 그래도 활짝 핀 벚꽃 터널에서 산보도 해 보고 하니, 그래도 사람이 이런 맛에 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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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문단지에 벚꽃 보러 처음 간 건 지난 3년 전입니다. 그때는 4월중순쯤이었는데 이미 벚나무들이 저런 모양이 되어 있더군요. 물론 저건 좀 심한 가지를 찍은 거고, 대부분 꽃이 볼만큼은 있었지만 언제고 한번쯤 꽃이 확 피어 있을 때 한번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드랬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날짜를 좀 빨리 잡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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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렇게 한풀이를 했습니다. 꽃이 아주 탱글탱글 꽉 차 있더군요.

벚꽃이라는 게 한껏 피어 있을 때는 흰 색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질 때가 되면 붉은 빛으로 보이더군요. 위 사진도 있지만, 저게 꽃 자체가 붉은 빛으로 바뀌는지, 아니면 꽃이 지고 난 대궁이 붉은 색이라서 비쳐 보이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꽃 구경 하실 여유 없는 분들, 구경이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사진은 클릭하면 더 크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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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걸어도 싫증나지 않는 꽃길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문단지 주변에는 북군동이라고 식당이 모여있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동네의 지존은 유명한 맷돌순두부. 하지만 최근에는 게장순두부집이 출현해 화제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가 봤습니다. 북군동 식당가로 진입해 바로 왼쪽 골목으로 죽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 맷돌순두부를 지나 골목 끝쪽에 게장순두부 간판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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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장순두부 + 비빕밥 상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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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순두부의 게장이란 간장에 게를 재운 그 게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대게의 껍데기 속에 들어 있는 게장을 가리키는 겁니다. 게장과 게살을 갈아서 국물을 내고, 그 국물에 순두부를 말아 냈다는 것이죠.

콤콤한 게 국물 맛이 나긴 합니다만, 결국은 순두부 맛입니다. 대단한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게 좋겠지만, 아무튼 한끼 식사로는 만족스럽습니다. 가격이 7000원이라는 거야... 관광지니까.


저녁은 경주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경주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아화리라는 동네가 있고, 거기에 서면식육식당(054-751-1173)이 있습니다.

경주 시내에서 북쪽으로 다리를 하나 건너면 김유신장군묘와 태종무열왕릉으로 가는 사거리가 나옵니다. 그 길에서 왼쪽, 무열왕릉쪽으로 사정없이 달리다 보면 고속도로 같은 길이 나오고, 한 30분 지나 아화리 이정표가 보입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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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를 직접 키운다고 하는데, 사실 맛도 맛이지만 일단 가격표를 한번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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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저 '갈비살'이 서울에서 파는 그 길쭉길쭉한 수입 갈비살이 아니라 '꽃등심+갈비살'이라는 데 있습니다. 갈비살 2인분을 시켜 봅니다.

고기 좀 드셔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저 때깔이 그냥 나오는게 아니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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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절반은 이미 불 위에 올려 놓은 다음입니다. 고기를 보자 이성을 잃어서, 나오자마자 사진 찍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아무튼 이 가격이 이런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건 서울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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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에게 아양도 떨어 봅니다.

"하도 맛있다길래 서울서 여기까지 왔어요. 잘 좀..."
"네. 존 데로 드릴께예."

고기맛은 눈으로 보는 대로 g.o.o.d. 양이 좀 적다고 엄살 컴플레인을 해 봅니다.

"무슨 말씀? 서울 손님들 다 와서 싸고 양 많다고 좋아하던데."

어라? 예상했던 반응과는 좀 다릅니다. 아니나다를까.

"작년에 인터넷에 떴다면서 서울 손님들 엄청나게 왔다 갔어요."

...안 통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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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맛도 맛이지만 이 물김치 엄청나게 시원합니다. 소면 삶아서 여기다 바로 말아 먹으면 일품이겠건만... 메뉴판에도 있는 소면, 국수가 없다며 주문 불가를 외치십니다.

아. 여기 경상도였지.


아무튼 경주 요맘때면 참 좋습니다. 이번엔 가보지 않았지만 감포 앞의 저 파란 바다도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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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지 않게 다들 나들이 한번 짜 보시죠.

하기야 올해 아니면 어떻습니까. 내년에도 벚꽃은 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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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락이 돌아왔다'. 각종 매체들이 '개그 왕의 귀환'을 소리높여 외친 지 약 100일이 지났습니다. 100일이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죠. 그 사이 '꽃보다 남자'는 25부작 방송을 마쳤고, '에덴의 동쪽'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송승헌이 뭘 하는지 가물가물해 졌습니다.

과연 '왕의 복귀' 100일 성적은 어땠을까요. 초반의 화제는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최양락 아저씨가 누군가요?'하고 호기심을 가졌던 10대들도 이제 최양락이 누군지는 다 알았습니다. 최양락이 복귀하면서 함께 합류한 이봉원에 이어 양원경, 홍기훈 등도 방송 활동을 재개했고, '저그(아저씨 개그맨)' 라는 신조어까지 꽤 귀에 익었습니다.

과연 저그의 전성기는 다시 올까요? 이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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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최양락의 '왕의 귀환'이 한창 화제일 때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최양락이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개그맨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쇼 비디오 자키' '유머 1번지'에 대한 추억을 기록한 글이었죠. 그 글은 이렇게 마무리됐었습니다.


우려되는 것은 협력체제입니다. 현재의 예능계는 독불장군이 살아남기 힘든 형태입니다. 유라인과 강라인은 물론이고 대세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윤종신-신정환-김구라-김국진의 라디오 스타 팀, 또는 송은이-신봉선의 패키지를 보듯 팀의 형태로 움직이는 것이 시너지를 발휘합니다. 말하자면 '라인의 구축'이 급선무입니다.

그럼 과연 최양락의 곁에는 누가 있게 될까요? 그건 그때 가서 알게 될 일입니다. 다만 그 시점에서도 '왕년에 잘 나갔던 노장들'만으로 움직인다면 그건 상당한 약점이 될 걸로 보입니다. 지금은 강호동이 살짝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젊은 쪽에서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 유리해 보입니다.

노장 노장 하지만 최양락은 1962년생. 이경규보다 2년 연하고 여자 연예인과 비교하면 최화정과 황신혜의 사이에 있습니다. 아직 충분히 정상에 설 수 있는 나이입니다. 모처럼 노장들의 성공적인 행진이 오래 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전문은 이쪽에 있습니다.


이 글을 쓸 당시, 이런 상황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저그', '저그시대'라는 말은 매우 폐쇄적입니다. 이건 '아저씨 개그맨들끼리의 연대' 혹은 '80년대 개그맨들의 회귀'라는, 듣기 좋고 기사 제목 뽑기 좋은 허울 안에 갇히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들이 '옛날식 개그'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옛날과는 다른, 새로운 감각의 개그를 구사한다 해도 스스로가 이렇게 '나는 옛날 사람'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으면 현재의 방송환경에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연하 예능인들과의 과감한 연대죠. 물론 1962년생인 최양락씨는 '지금도 젊은 사람들과 충분히 연대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젊은 사람'이 우리 나이로 40줄에 접어든 강호동(1970년생)이라면 매우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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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나이 차이로 계산해봅시다. 최양락과 강호동은 8세 차이가 납니다. 강호동에게 8세 차이가 나는 후배는 은지원, 9세 차이가 나는 후배는 MC몽입니다. 치고 받고 하는 스스럼없는 사이를 생각하면 최양락-강호동의 관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깝습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의 최양락과 강호동의 관계는 강호동과 이승기(17년 차이)의 관계보다 더 멀어 보입니다.

비슷한 경우는 강호동보다 두 살 어린 유재석에서게 볼 수 있습니다. 유재석의 요즘 파트너는 1989년생인 대성입니다. 강호동-이승기와 마찬가지인 17년 차이죠. 현재 정상에 서 있는 이들은 그 정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려 17년이나 어린 동생들의 정기(?)를 흡수하며 견고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은 좀 더 세월이 흘러 20년 차이가 나는 후배들과도 훌륭하게 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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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비하면 현재의 '저그'들은 아래로의 연대가 매우 힘겨워 보입니다. 최양락과 17년 차이가 나는 후배라면 이효리나 김동완 정도의 1979년생들이 되겠군요. 이들과 최양락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풍경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당장 시도한다 해도 될 일은 아니지만, 최양락이 '그래도 말이 통하는' 강호동이나 윤종신의 보호벽 안에 있는 한 더 젊은 세대와의 소통은 요원할 뿐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그들에게는 40대-50대에 이미 구축된 팬층이 있고, 이들을 친근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굳이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 '아래로 내려가라'고 강요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대한민국의 방송 환경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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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들이 드라마 위주의 연기자라면 전혀 '아래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능은 이야기가 다르죠. 예능에서 40대 이상의 성인 시청자들이 마이너 계층이라는 것은 매우 선명합니다. 10대와 20대를 겨냥하고 40대까지 흡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40대와 50대를 겨냥한 프로그램이 한국의 지상파 방송에서 생존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일단 이런 프로그램은 광고주들이 외면합니다. 각 방송사들은 대외적으로는 '온 세대를 아우르는' 방송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광고주들이 외면하는 프로그램을 굳이 살려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면피용으로 일요일 새벽 6시-7시대 정도에는 편성할 수 있겠죠. 한국의 중년층이 또 다른 소비 시장으로 거듭나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이 연령대 시청자들은 과외비를 대느라 자기 본인들에게 투자할 여력이 거의 없는 불쌍한 부모들입니다. 광고주들이 매력을 느낄 여지는 별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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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예능인들은 나이를 먹어도 젊은 세대와 연대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필연입니다. 이런 논리에 일찍 눈을 뜬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당장 1958년생인 조형기와 4세 연하인 최양락 중 누가 더 젊은 세대에 친근하게 느껴질까요. 이들보다 훨씬 젊은 박명수는 이미 데뷔 초부터 이런 논리를 깨달았습니다.

그 자신의 입으로 그런 비결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내가 장수하는 이유를 알아요? 나는 항상 그 시기에 가장 잘 나가는 친구들과 방송을 했어요. 그 기를 흡수해야 나도 살거든." 이 말을 들은 것이 3년 전. 그의 '제8, 제9의 전성기'는 그저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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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서 '저그'들의 앞날은 그리 선명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복귀를 앞다퉈 환영했던 미디어는 벌써 시들해졌습니다. 이들은 냉혹합니다. 절대 생존에 협조적이지 않습니다. 내일에는 또 내일의 스타가 뜨고, 미디어는 다시 그들을 쫓기 바쁠 겁니다. 그건 본래 미디어의 속성이니까요.

가장 좋은 대책은 '아래로 아래로'입니다. 이를 부정하고 '저그들끼리의 더 공고한 연대'나 독자적인 생존을 노린다면, 그나마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저그에 대한 특수'가 사라진 다음에도 이들이 지금같은 관심과 인기를 누릴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가능하면 이들이 오래 오래 현역으로 남아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도 그 세대이기 때문이죠. 저도 어린 시절의 영웅들이 계속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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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가 남긴 여러가지 유산들 중 하나는 프레피 룩의 유행입니다. 사실 새삼스러운 유행이랄 것도 없을 듯 합니다. 프레피 룩의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옥스포드 스타일의 버튼 다운 셔츠, 브이넥 스웨터, 치노 팬츠 등은 이미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학생복의 주요 요소로 여겨졌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보다 남자' 이후에는 여기에 자켓이며 타이 등의 요소가 첨가되면서 좀 더 연령대가 확대되고, 프레피 룩이라는 말이 미국 동부의 귀족(?) 가문 청년들의 패션인 양 지나치게 미화되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프레피'라는 말이 그리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말 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프레피 룩의 대유행에는 뒤에는 한번 쯤 생각해 볼 여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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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프레피(Preppy, Preppie)란 동부의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사립 고교, 즉 프렙 스쿨(Prep School: Preparatory School)의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학교들이 '예비 학교'라고 불리는 것은 재학생들이 대학 진학, 특히 동부의 아이비리그 명문교들을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반 고교와는 차별화된 교육이 진행되고, 기숙사 제도를 통해 운영되는 학교도 많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미드 '가십 걸 Gossip Girl'에 나오는 학교도 당연히 프렙 스쿨이죠. 물론 더욱 당연하게, 이 학교 학생들의 패션 역시 프레피 룩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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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프레피 룩의 물결을 처음으로 일으킨 작품은 '꽃보다 남자'나 '가십 걸'이 아닙니다. 바로 1989년작인 '죽은 시인의 사회'죠. 엄격한 프렙 스쿨에서 입시와 진학 이외의 인생을 가르치다가 좌절하고 마는 키팅 선생님의 감동적인 일화를 담은 이 영화가 공개된 뒤, 10년 사이 한국 중-고생의 겨울 외투는 모두 더플 코트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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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연원을 따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이 프레피라는 말은 40대 이상에게 더욱 친숙한 말이어야 합니다. 지금의 10대나 20대들은 '그런 영화가 있었나' 싶을 고전 로맨틱 무비 '러브 스토리'에서 이 말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1970년작인 '러브 스토리'는 WASP 명문가 출신의 하버드 법대생 올리버 배릿 4세(라이언 오닐)와 이탈리아계(미국 사회의 백인 중에서는 가장 낮은 레벨입니다) 래드클리프 여대생 제니퍼 캐발레리(알리 맥그로)의 사랑을 다룬 작품입니다.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미국 사회에서도 빈부격차가 있고,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힘들어진다'는 충격(^^)을 준 작품이라고도 전해집니다.

아무튼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알리 맥그로는 라이언 오닐을 계속 '프레피'라고 부르는데 그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라이언 오닐의 독백이 끝나고, 바로 다음 장면입니다.)



하버드 도서관을 두고 래드클리프 도서관에 책 한권을 빌리러 온 올리버에게 제니퍼는 "500만권의 장서량을 자랑하는 니네 도서관을 두고 왜 우리 도서관에 왔느냐"며 쌀쌀맞게 대하는데, 말끝마다 올리버를 '프레피'라고 부르며 경우도 모르는 바보 취급을 합니다.

올리버: '***'라는 책 있나요?
제니퍼: 당신네 도서관이 있을텐데요. 프레피.
올리버: 질문에 대답하세요.
제니퍼: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요.
올리버: 우리도 래드클리프 도서관을 쓸 권리가 있어요.
제니퍼: 내가 말하는건 규정이 아니라 도의 문제에요, 프레피. 그쪽엔 500만권이나 있잖아요? 우리는 몇천권 뿐인데.
올리버: 내가 원하는 건 한 권 뿐이라구요. 제길, 내일 시험이 있어요!
제니퍼: 입 조심해요, 프레피.

Oliver Barrett IV: Do you have this book?
Jennifer Cavalieri:  You have your own library. Preppy
Oliver Barrett IV: Answer my question.
Jennifer Cavalieri:  Answer mine first.
Oliver Barrett IV: We're allowed to use the Radcliffe library.
Jennifer Cavalieri: I'm not talking legality, Preppy. I'm talking ethics. Harvard's got five million books, Radcliffe a few thousand.
Oliver Barrett IV: I only want one. I've got an hour exam tomorrow, damn it!
Jennifer Cavalieri: Please watch your profanity, preppy.


그러자 발끈한 올리버는 "대체 왜 날 자꾸 프레피라고 부르냐"고 반항합니다.

올리버: 뭘 보고 내가 프렙 스쿨에 다녔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죠?
제니퍼: 당신은 부자에다 멍청하게 생겼거든요.
올리버: 하지만 사실은 난 가난한 집의 수재인데.
제니퍼: 하. 내가 바로 가난한 집의 수재에요.
올리버: 당신이 수재라는 근거라도 있어요?
제니퍼: 당신같은 남자랑 커피 마시러 가지 않으니까요.
올리버: (기가 막힌다) 하지만 난 당신이랑 커피 마시러 가자고 얘기하지도 않잖아요.
제니퍼: 그러니까 멍청하다는거죠.

Oliver Barrett IV: What makes you so sure I went to prep school?
Jennifer Cavalieri: You look stupid and rich.
Oliver Barrett IV: Well, Actually I'm smart and poor.
Jennifer Cavalieri: *I'm* smart and poor.
Oliver Barrett IV: what makes you so smart?
Jennifer Cavalieri: I wouldn't go out for coffee with you that's what.
Oliver Barrett IV: what if I wasn't even gonna ask you to go out for coffee with me?
Jennifer Cavalieri:l that's what makes you stup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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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음 장면은 당연히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러 간 장면이죠.

아무튼 이상의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 '프레피'라는 말은 '세상 물정 모르고 우기는 부잣집 도령'이라는 식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물론 늘 이런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말이 충분히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됐다는 걸 알 수 있죠.

(사실 '프레피'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이 장면을 보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장면입니다. 심지어 TV로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런 말이 나왔는지도 모를 겁니다. 제가 TV에서 볼 때 이 장면의 '프레피'는 '촌뜨기'라고 더빙이 돼 있더군요. 물론 의미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더빙입니다.)

그러니 '프레피처럼 입는다'는게 그리 좋은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옷차림은 말쑥하고 깔끔하지만 속으론 야무지지 못하고 멍청하다는 뜻도 될 수가 있으니까요. 물론 어떻게 해서든 겉모습만큼은 '강남 도련님, 아가씨 처럼 보이는' 것이 이 시대의 목표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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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어찌 하다 보니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 선생의 부음을 모르고 지나칠 뻔 했군요. 1924년 9월13일 생이니 향년 85세. 30일 미국 LA의 자택에서 영면에 드셨습니다.

솔직히 이분의 전성기가 1980년대 이전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관객들은 모리스 자르라는 이름이 그리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엔니오 모리코네가 아직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데 비하면 모리스 자르의 시대는 너무 일찍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모리스 자르의 시대는 스케일 큰 '에픽' 무비의 시대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거장 데이비드 린으로 대표되는, 시대착오적으로 큰 영화들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작곡에의 의욕을 잃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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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아무래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입니다.

사막과 인간, 역사와 인간, 엄청난 규모와 스토리를 엄청난 배우들과 함께 엄청난 화면으로 잡아 넣은 이 영화(제가 계속 '엄청나다'는 말을 남발하고 있는건 그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 힘들어서입니다. 21세기의 영화 기술로 이보다 방대하게 보이는 영화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영화만큼 오만하고 방대한 구상을 영상에 담을 사람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에서 모리스 자르의 웅장한 음악은 관객들 KO시키는데 역시 큰 몫을 합니다.

1992년, 데이비드 린 감독에 대한 헌정 공연에서 직접 지휘봉을 잡은 자르의 모습입니다.




사실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대단했지만, 같은 해의 다른 영화에서도 자르는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지상최대의 작전 The Longest Day'. 역시 이 영화보다 더 규모가 커 보이는 영화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영화보다 더 큰 규모의 대작은 앞으로도 다시 볼 수 없을 겁니다. 그 영화의 음악 역시 자르의 작품입니다.



1980년대. 자르는 '인도로 가는 길'로 또 한번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닥터 지바고'에 이은 세번째 아카데미 음악상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나 이 음악은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공로상의 성격이랄까요.

오히려 1980년대의 자르 옹은 아들 장 미셀 자르의 영향인지,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소품에서 잔잔한 재미를 봅니다. 자르 옹이 선택한 영화들 중에 상업적으로 크게 히트한 영화들이 많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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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가 음악을 맡은 영화 가운데 '사랑과 영혼 Ghost'같은 작품도 있긴 합니다. 그가 작곡한 메인 테마보다 'Unchained Melody'가 훨씬 더 기억되고 있어서 그렇지.)

1980년대의 자르의 작품 중 저는 이 곡에 유난히 애정이 갑니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위트니스'에서, 아미쉬 마을에 간 포드가 헛간 짓는 행사를 돕는 장면에서 잔잔하게 울려퍼지던 곡이죠. Raising Barn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영화상으로는 켈리 맥길리스가 예쁘게 보이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대사는 더빙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음악.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 역시 자르 선생의 입김을 받았습니다. 음악으로는 크게 기억나지 않을 작품이긴 합니다만, 많은 분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할 이 마지막 장면에 잔잔하게 깔리는 곡이 바로 자르 선생의 곡이죠.

'하우스 M.D'의 윌슨 선생의 앳된 모습은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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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장 미셀 자르도 1980년대에는 반젤리스와 함께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전자음악 아티스트였는데 요즘은 영 조용하군요. 요즘은 어디서 이런 음악이 나오면 촌스럽다고 질색을 할 사람들 천지지만, 한때는 이 음악이야말로 첨단 유행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교훈: 어느 시대든 최첨단으로 여겨지는 것일수록 빨리 퇴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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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니뭐니해도 마지막 곡은 '닥터 지바고'.

'라라의 테마'입니다. 역시 데이비드 린 헌정 공연때의 실황.


 
이 곡을 빼놓으면 자르 선생에 대한 결례가 되겠죠.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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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고 장자연씨의 가족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려운 걸음이었지만 이번 사건 이후 한번도 언론과 마주 대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적이 없는 분들이어서 그만한 보람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로 그동안 유족들에게 쏟아졌던 오해나 어이없는 비방이 어느 정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유족들을 만나기 전까지 저도 속이 좀 탔습니다. 지난번 글, '장자연을 두번 죽인 KBS 보도'라는 글에 3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다 읽어보지 않아도 90%가 욕설에 가까운 내용이었죠. 아주 노골적인 욕설은 몇개 삭제하기도 했지만, 부분 부분 포함된 욕설은 뭐 다 보이지도 않더군요.

욕설은 아니더라도 저주에 가까운 악플도 많았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욕을 섞지 않으면 자기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참 안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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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장자연 유족과의 인터뷰 기사를 먼저 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http://isplus.joins.com/enter/star/200903/16/200903160300249506020100000201040002010401.html?click=isplus

만난 건 14일이지만 유족과의 교감은 사건 직후 계속 있었습니다. 다년간 이 분야에 종사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누군가 이승을 떠난 사람이 있었을 때 누구보다 아파하는 사람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자살 사건의 경우, 유족들은 항상 말을 아낍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이 아끼던 사람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죠. 그러는 사이 사방에선 의혹이 판을 치고,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는 저 멀리 물 건너간 얘기가 되어 버립니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갑작스럽게 나타난 H 기획사 대표 유모씨가 던진 파문이 워낙 컸습니다. 돌연 빈소에 나타나 '죽음의 원인을 입증할 문서를 갖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유족들은 문서 내용의 공개를 거부했고, 파문은 그냥 잦아드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발인 다음날인 10일, 조선일보와 노컷뉴스에 '문서가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듯 '딱 한줄'의 문장이 공개됐습니다. 유족들은 이에 맞서 '제발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문건을 여러 언론사에 보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대체 저 유족들은 왜 저러냐. 억울하게 죽은 동생의 진실을 밝혀 줘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대체 어떤 가족이 자신의 딸, 자신의 여동생의 평판이 망가지기를 원하겠습니까. 더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처자에게 말입니다.

가족들의 분노는 13일 KBS 1TV '뉴스9' 보도에 극에 달했습니다. 오빠 장씨는 지금도 '그런 보도를 내보내려면 가족들에게 사전 상의는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특히 보도 자제를 요청하기 위해 전화한 목소리마저 녹취해서 방송에 사용한 데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더군요.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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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 전후로 번지수를 잘못 찾은 보도가 쏟아졌죠. 문제의 문서를 '유서'라고 지칭하는가 하면 '가족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 맡긴 것'이라는 폭언에서 장자연을 '목숨을 바쳐 연예계 비리를 폭로한 잔다르크' 처럼 몰고 가는 이상한 논설까지 나타났습니다.

문서의 본질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유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뻔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지장을 찍는 유서도 있답니까. 게다가 죽기 일주일 전에 유서를 써놓고 남에게 맡긴 다음 집에서 죽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물론 이 문건이 유서가 아니라는 것은 이런 추측이 아니라, 유족과의 교감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유족들의 코멘트를 이용해 기사를 쓸 수 없었죠. 유족이 그것 조차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쓸데없는 오해가 확산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블로그에 한 줄 붙였습니다.

p.s. 아직도 장자연이 남긴 이 글이 '유서'였다고 생각하고, 장자연이 이 문서의 내용을 밝히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군요. 여기에 대해 제가 말할 권리는 없지만, 이 문서는 유서도 아니고, 장자연이 그 내용을 이렇게 대중 앞에 공개하려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점 만큼은 분명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대체 네가 뭔데, 장자연이 그걸 알리려고 했는지 어떻게 아냐. 유서인지 아닌지 네가 알게 뭐냐'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유족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문제의 문서는 계약관계 해지를 위해 작성한 것일 뿐입니다. 결코 죽음을 예견하고 쓴 글도 아닐뿐더러, 그 글을 쓰고 나서 장자연씨는 장래의 활동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는 것이 유족과 측근의 증언입니다. 결코 '죽음을 예견하고 한 고백' 따위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장자연씨는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이 몰고 가려 했던 '죽음을 무릅쓰고 연예계 비리를 폭로한 잔다르크'는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이 쓴 대로 '힘없는 연예인'이었고,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내민 손을 선뜻 잡았던, 그리고 그 뒤로도 마음의 그늘을 극복하지 못했던 가엾은 아가씨였습니다. 스타덤을 꿈꾸고 연예계에 뛰어들었지만, 결코 이런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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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궁금해하시지 않을 우여곡절 끝에, 14일 낮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집으로 간 것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 밖에 나가기가 겁난다'는 유족들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장자연씨의 지인들과 함께 분당에 있는 집 대문으로 들어서는데 몇몇 기자들이 다가섰습니다. 추운 날씨인데 집 밖을 지키고 있더군요. 멀리 차 안에서 카메라를 대 놓은 사진기자도 보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아는 얼굴은 없었습니다. 다른 기자들이 '뻗치기'를 하고 있는 공간에 이렇게 태연히 들어간 적은 처음이라 저도 내심 긴장이 되더군요.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부모 없이 살아온 삼남매가 막내 여동생을 잃은 슬픔이 어떤 것인지, 아주 미세하나마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남매만 있으면 집안이 너무 어두워질까를 우려한 듯, 친척들이 집에 와 있었습니다. 알려진대로 이 집은 장자연과 언니가 단 둘이 살던 집입니다. 자매가 키우던 고양이 두 마리가 빤히 쳐다보더군요.

인터뷰를 하던 도중 눈길을 끈 것은 장자연의 친언니가 손에 꼭 쥐고 있던 흰 천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옷이었습니다. 왜 옷을 들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연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라는 겁니다. 옆에 와 있던 장자연의 작은어머니며 다른 친척들이 "그러면 안된다. 이제 그냥 보내 줘야지"하고 야단을 쳤지만 언니는 그 옷을 놓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더 끌고 가려는 언니의 심정이 너무도 짙게 와 닿았습니다.

지난번 글에 유족을 이해할 수 없다며 악플을 단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죽음을 가장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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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을 단 사람들 중에는 압도적으로 '너 대체 기획사에서 얼마나 받아먹고 이런 글을 쓰느냐'는 것도 꽤 있었습니다. 물론 이 정도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악플러들이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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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사람들 투성이입니다. 언니는 언니대로 동생이 죽을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몰랐다는 사실을 미안해 했고, 오빠는 오빠대로 바쁘게 사느라 동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몰랐다는 걸 미안해 했습니다. 친한 언니는 친한 언니대로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을 진작 언니 오빠와 나누지 않았다는 걸 죄스러워 했습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산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시간으로 치자면 두어 시간이 눈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지만, 불과 일주일 전 젊디 젊은 혼이 이승을 등진 공간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자마자 몸이 천근이라 쓰러지게 되더군요.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두 사람의 매니저에게 가족들이 느낀 실망과 분노는 여러분이 상상하기 힘든 크기일 겁니다. 경찰 수사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장씨의 오빠에게 물었습니다.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기대하세요?" 솔직히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표정이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누가 나쁜 사람인지는 세상이 다 알 것"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흥분하고 분노하셨던 분들, 여러분이 할 일은 그것 뿐입니다. 잊지 않는 것.


p.s. 상황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는 듯 해서 한줄만 덧붙입니다.

지금 경찰 수사 진행중입니다. 유족도 협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수사를 가로막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도 수사하지 말자고 한 적 한번도 없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면, 당연히 보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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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시스'라는 스페인 영화를 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1996년작인 이 영화는 스너프(정사 뒤에 여자를 죽이는 포르노의 일종) 필름을 우연히 발견한 대학생들이 그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결말과 관계없이 마지막 장면은 TV 뉴스 화면입니다. 여성 앵커는 말합니다. "저희는 이 필름을 단독 입수하고, 공개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결국 저희는 여러분의 볼 권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이 영상을 공개합니다." 미디어의 본질에 대한 아메나바르의 통렬한 '한방'입니다.

그리고 어젯밤 KBS에서 거의 비슷한 멘트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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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방송된 KBS 1TV '뉴스9'의 보도 리드 멘트입니다.

자살한 탤런트 장자연씨가 숨지기 직전에 남긴 자필 문건을, KBS가 단독입수했습니다. 술접대에 잠자리 강요까지, 연예계의 추악한 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KBS는 숨진 장씨의 명예와 불법행위 사이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 문건을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KBS가 이런 보도를 했다는 사실은 다시 다른 매체들에 의해 널리 퍼졌습니다. 유족들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이 문서의 공개를 거부해왔습니다. 그 기사들에 달린 댓글 중 수많은 댓글들 가운데서 "대체 왜 유족들은 이 공개를 꺼린 것이냐. 문서를 공개해서 동생의 억울한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댓글들이 꽤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지금 이런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가족의 심정입니다. 이번 사건이 있은 뒤 유족들은 일관되게 문서의 공개를 거부해왔습니다.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략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 지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족의 입장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 어느 가족이, 자신들의 여동생이, 그것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여동생이 저런 식으로 언급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두번째는 과연 문서의 공개가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위 리드 멘트를 보면 KBS의 명분은 '고인의 명예와 불법행위(에 대한 고발이라는 언론의 사명)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것이 더 공익에 부합한다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공개한다고 처벌이 이뤄지고, 공개하지 않는 것은 악을 덮는 일일까요?

자, 여기서 전제는, 진실을 규명하고 악을 처단해야 한다는 데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멘트는 변명입니다. 왜냐하면, 어제 보도가 나간 문건을 최초 확보한 기자에게는 일단 장자연의 명예를 지키면서도 불법행위를 견제하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확보한 문건을 경찰에게 인계하고, 비공개 수사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미 유족들은 10일 경찰에 문서를 확보하고 수사를 하더라도 절대 내용이 새 나가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일반인들이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듯, 문서의 내용이 공개된다고 해서 그 문건에 명시된 '처벌받아 마땅한 사람'이 곧바로 단죄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KBS 보도국과 해당 기자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보도는 너무나도 기계적인 보도였던 겁니다.

세번째, 아직도 왜 문건의 공개가 공익적이지 않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실 분들을 위해 덧붙입니다. 장자연이 남긴 문서의 내용에 따라 연예계 폭력의 실체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KBS도 저 보도를 할 때 문제의 매니저 이름을 '김모씨'라는 익명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과연 KBS에서 저 보도가 나간다고 해서 저절로 검증이 될까요? 과연 문서에 기록된 불법행위를 문제의 '가해자'들이 바로 인정하고 죄값을 받게 될까요? 이거야말로 수사 전문기관이 달라붙어서 해결해야 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아무튼 정의의 구현이 목적이라면, 기자는 문서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도 경찰이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진실이 입증되고, 책임자의 처벌이 가능해졌을 때 문서의 내용이 보도됐다면 아마도 KBS의 '진정성'을 믿어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의 이런 보도는, 일반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외에는 실제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KBS 측은 "그건 경찰이 고민할 일이지 기자가 고민할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겁니다. 또는 "미쳤어? 우리가 보도 안 한다고 그 문서가 끝까지 안 나올 것 같아? 비공개 수사 요청? 제정신이야? 그러다 다른 놈들이 냄새 맡고 기사 쓰면 우리는 뭐가 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할 때에는 더 신중했어야 했던 겁니다. 특종 욕심에 온 정신이 가 있다면 이런 데에 생각이 미칠 리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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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저 고상한 KBS가 '저질 황색언론'이라고 가끔 표현하는 스포츠지 기자로 10년 넘게 일해왔습니다. 연예인들의 열애설 나부랭이를 팔아먹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죽음을 놓고 장난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연예인들의 죽음을 지켜봤지만, 이렇게 유족들의 간청을 무시해가면서 일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어제 KBS가 보도한 '유족과의 인터뷰'는 장씨의 오빠가 "제발 그런 보도로 자연이의 명예를 해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려고 직접 건 전화였습니다. 그 전화마저도 KBS는 녹취해서 보도에 이용했습니다. 과연 이 보도를 보고도 장자연이 편히 잠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p.s. 아직도 장자연이 남긴 이 글이 '유서'였다고 생각하고, 장자연이 이 문서의 내용을 밝히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군요. 여기에 대해 제가 말할 권리는 없지만, 이 문서는 유서도 아니고, 장자연이 그 내용을 이렇게 대중 앞에 공개하려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점 만큼은 분명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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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절끝에 이뤄진 WBC의 지상파 TV 생중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다행한 일입니다. 비록 14대2로 참패하는 굴욕도 있었지만 1대0의 짜릿한 대첩을 안방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방송사들은 절대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지상파와 중계권을 보유한 IB 스포츠의 줄다리기는 치열했습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경제난으로 방송사 사정이 어렵다. 광고주들이 몸을 사려 적자가 예상된다'는 주장과, '이 기회에 IB 스포츠의 콧대를 꺾어야 한다'는 두 가지 명분으로 초강경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 결과 2006년 중계료보다도 싼 150만달러(약 23억원)에 지상파 3사가 돌아가며 중계를 진행하게 됐습니다. IB가 요구한 금액의 절반 정도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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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WBC, 광고 없어서 못한다더니'라는 기사(http://isplusapp.joins.com/wbc/wbc_article.asp?aid=1107601&contcode=01070101)'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라운드 4경기를 소화한 결과 SBS는 10억원, MBC가 14억원, KBS가 10억원대의 광고 수입을 올렸습니다. 방송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광고주들이 앞다퉈 광고 물량을 제시한 결과죠.

앞서 말한대로 3사의 중계료 합계는 23억원 정도이므로 3사가 공동 부담하면 사당 8억원 정도. 이미 3사 모두 1라운드에서 최소 2억원씩의 소득을 올렸습니다. 하나 더 보태자면 이번엔 대회 직전에 중계 여부가 결정되는 바람에 중계팀을 파견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출장비까지도 아낀 셈입니다. 2라운드 몇 게임만 중계하면 당초 IB 스포츠의 요구액을 다 줬더라도 흑자가 날 상황입니다.

아무튼 이런 결과는 '광고가 없다'며 3사 합계 중계료 130만달러(약 20억원)를 고집하던 방송사들이 결국은 잇속을 모두 챙겼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행히도 중계가 실현돼 국내 야구팬들이 지상파로 중계방송을 볼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끝내 중계가 실현되지 않았더라면 그 욕을 어떻게 다 먹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중계방송 포기를 불사했던 KBS는 이번 1라운드에서도 염치불구 새치기를 감행했습니다. 3사가 돌아가며 중계하기로 한 합의을 무시하고, MBC의 몫이었던 마지막날 일본과의 1-2위 결정전을 KBS 2TV로 방송해버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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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상파 TV들의 굵직한 해외 스포츠 중계의 역사를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식의 태도는 조금도 낯설지 않습니다. 마침 WBC 기간인 만큼, 다른 종목은 접어 두고 야구와 관련된 주요 방송권의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이렇습니다.

1998년, 박찬호의 경기 중계를 위해 지상파 방송 3사는 공동 대응을 약속합니다. 1년 전인 97년 KBS가 중계를 하면서 꽤 짭짤한 광고 소득을 올린 것이 소문났기 때문에 MLB도 높은 중계권료를 요구할 것이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사실 KBS의 복이었던 것이, 96년 5승에 그쳤던 박찬호는 97년 KBS의 중계 기간 동안 14승을 올려 처음으로 두자리수 승리를 쌓으며 에이스로 부상합니다. 당연히 시청자의 관심과 광고가 폭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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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98 시즌을 앞두고 중계권을 채간 것은 신생 지역민방인 경인방송이었습니다. 이들은 킬러 콘텐트 부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고, 3대 지상파 방송사가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난을 이유로 MLB와 줄다리기를 벌이던 도중 베팅에 성공했습니다.

닭쫓던 개가 된 3사는 '외화 낭비'라며 갖은 저주를 퍼부었지만 박찬호는 경인방송의 중계 3년간 각각 15승, 13승, 18승을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경인방송의 봄날이었죠. 송월타올 광고의 인기가 치솟았던 것도 이 무렵입니다.

3년 계약이 끝나고 역시 3대 방송사는 공동 대처를 합의하지만 MBC가 한발 빨랐습니다. 몰래 독자 계약을 추진한 MBC는 경인방송이 감히 낼 수 없는 거액을 내고 4년간 메이저리그 중계를 따냅니다. 역시 KBS와 SBS의 저주는 이어진 수순이었고, 이들은 보복으로 MBC가 국내 프로야구를 중계하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그러나 MBC가 새치기에 벌을 받았는지 박찬호는 계약 첫해인 2001년에만 15승을 올렸고, 2002년 텍사스로 이적한 뒤에는 9승, 1승, 4승으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재활에 투입합니다. 당연히 KBS와 경인방송이 누렸던 광고 특수는 없었습니다. 2002년 김병현이 36세이브를 올린게 유일한 위안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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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린 박찬호의 중계권은 아무도 탐내지 않았고 독점 중계권을 가진 IB스포츠의 자체 채널인 Xports가 중계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이 해에는 최희섭이 있었습니다. 최희섭은 이해 LA 다저스에서 한경기 3홈런을 터뜨리는 등 15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부풀립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2006년 시즌을 앞둔 당시, 3대 지상파 방송사는 IB 스포츠의 중계권 독점에 항의하는 뜻으로 연합 전선을 펴고 있었지만 KBS가 슬쩍 계약에 성공합니다. 최희섭의 선전과 박찬호의 부활이 기대되던 상황입니다.

즉시 다른 방송사들은 KBS의 신의 없음을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습니다(정해진 수순입니다). KBS는 당시 3사가 합의한 내용, 즉 'IB스포츠와 개별적으로 접촉하거나 구매를 의논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백하게 어긴 것으므로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KBS의 역공은 입이 딱 벌어지게 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만 IB와 접촉한게 아니다. 다른 방송사도 이미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있었고 오히려 우리가 늦게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뒤로도 다른 방송사들이 그게 사실이니 아니니 한참 시끄러운 말이 오갔습니다. 어쨌든 KBS가 상대적으로 큰 돈을 낸 것도 사실이고, 합의를 깬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해 최희섭은 마이너리그로 강등돼 죽을 쒔고, 박찬호도 그닥 신통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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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것도 사실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동안 거쳐간 수많은 국가대표 축구 월드컵 예선전, 아시안컵, 월드컵 본선 등의 중계권에서 오간 실랑이와 새치기, 뒷돈 올리기 등은 이루 다 주워 담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합의는 지키는 쪽이 바보가 되어 온 것이 지금까지 한국 지상파들이 주도한 중계권 다툼의 교훈입니다.

이번에 KBS가 방송 3사를 대표해 IB스포츠와 협상을 진행한 것도 결국은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한 방송 3사의 몸사리기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경기가 지난해 초만 같았더라도 KBS가 협상을 진행하는 사이 다른 방송사가 새치기로 끼어들어 거액을 주고 독점 중계권을 따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런 방송사들이 이번에는 모든 과거를 잊고 '외화 유출을 막고 IB 스포츠의 고액 중계료 요구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주장하며 WBC 중계를 무산시킬 뻔 한 걸 생각하면 참 속이 끓습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일 뿐이죠. 한마디로 국민의 볼 권리고 뭐고는 이들 방송사에게 아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얘기를 하자면 방송 중계권료가 전부가 아닙니다. 지지난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이 "나는 원래 독립제작사 PD다. 오늘 상 받는 자리지만 이 얘기는 해야겠다. 방송사들, 그동안 내가 방송사에 납품한 프로그램들의 저작권을 돌려달라. 너무 하는거 아니냐"며 수상소감에 항의를 덧붙이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든 다큐든, 지상파를 통해 실려 나간 프로그램의 저작권에서도 지상파는 절대 갑입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현재 3대 지상파 방송이 누리는 독점적 지위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어서 여기선 이만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동기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외화 절약도 크게 한 셈이니 그 돈으로 좋은 데 쓰길 바랍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할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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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중근 만세! 그저 이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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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모습이나 다시 보게 됐으면 합니다. (태극기 꽂는 행동 자체에 대해선 찬반이 있지만, 그냥 '저런 감격스러운 모습'의 뜻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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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망 제보를 받았을 때, 그리고 '장자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었을 때 불현듯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 즉 KBS 2TV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진선미 삼총사'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비슷한 입장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직업이 직업인지라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배우 장자연' 보다는 '진저, 써니, 미란다 - 그 셋 중의 하나'라는 이미지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망자가 생전에 가장 바랐던 것은 '써니 장자연', 혹은 '배우 장자연'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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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꽃보다 남자'에서 F4 따라다니는 세 여자애들 가운데 하나"로 고인을 기억합니다. 이 세 사람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당연히 지난주 끝난 백상예술대상입니다. 사실 이 세 분을 모실 계획은 없었습니다. 단지 행사 직전, F4가 모두 행사장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이 진선미 트리오의 한 측근이 "삼총사도 이 자리에 서고 싶어하는데 가도 되겠느냐"고 문의해 왔습니다.

저희로서는 당연히 행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단 F4가 그랬듯, 이 셋도 함께 모여 들어와 주기를 바랬습니다. 당연히 셋이 함께 있는 것이 더 화제도 되고, 임팩트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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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진선미 트리오는 이미 '꽃보다 남자'에서는 공식적으로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본래 이들의 역할은 12부까지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마지막회 쯤에는 우정출연을 하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볼 수 없게 됐고, 저 백상예술대상 레드 카펫에 선 모습이 이들의 마지막 함께 한 모습이 될 전망입니다. 이날 행사장에선 참 밝기만 한 모습이었는데...

고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인의 소속사사 사실상 매니지먼트 관련 업무를 정리하면서 '매니저 없는 연예인'이 됐다는 건 대략 알고 있었지만, 10년 전 부모를 모두 여의고 언니와 살고 있다는 것 역시 이번 사고가 난 뒤에 알았습니다.

신화고 미녀삼총사는 모두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장자연이 1982년으로 27세, 국지연과 민영원은 1984년생이어서 25세입니다. 주연급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꽃남 F4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준과 구혜선이 25세, 가장 어린 김범은 1989년생으로 만 20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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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나 구혜선이야 주연급이니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25-27세의 나이로 여고생 역할을 한다는 건 그리 바람직한 경우는 아닙니다. 그만큼 20대 역할로 한창 활동해야 할 나이에 아직 연기자로서의 기반을 잡지 못했다는 얘기니까 말입니다. 연기자에게는 그보다 더 아픈 일이 없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수많은 스타 지망생들 가운데서는 이 '미녀삼총사'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만세를 부를 사람들이 수백 수천명 있을 겁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연예인들의 밝은 면만을 봅니다. 연예인이 되면 누구나 스타크래프트의 개조 밴을 타고, 돈을 물쓰듯 쓸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작 연예인이 되려고 준비하거나 해 본 사람들은 드라마에 단역 한번 서는 데까지도 얼마나 많은 운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고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진짜 연예인'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말입니다.

물론 장자연의 죽음을 통해 세상은 다시 한번 무명 연예인의 비애를 거론할 것이고, 한 젊은이의 못다 이룬 꿈에 눈물을 흘릴 겁니다(물론 오래 가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같은 미녀삼총사 멤버인 국지연의 말에 따르면 장자연은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연기학원을 다녔고, 소속사와 장래 문제로 고민은 많았지만 무슨 일에 대해서도 '잘 되겠지'라고 말하는 낙천적인 사람으로 비쳤다고 합니다.

더구나 '꽃보다 남자'의 이민정과 함께 출연한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그가 왜 이런 죽음을 맞았는지 참 의아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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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선 누구나 아는 얘깁니다만, 제가 초년병일 때 한 노장 연기자가 물었습니다. "송기자, 배우가 뭐 하는 직업인지 아나?" 느닷없는 우문에 우물쭈물하다 "연기하는 직업이죠"라는 평이한 답을 내놨습니다. 당연히 그건 답이 아니었죠.

그의 답은 "기다리는 직업"이었습니다. "연기자가 20년을 하건, 30년을 하건 실제로 연기하는 시간은 얼마 안 돼. 나머지는 전부 기다리는 시간이야. 좋은 대본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맞는 배역이 나한테 올때까지 기다리고, 연기 하러 가서는 내 차례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몇 배나 더 많아."

이 말의 속뜻은 '그러니 기다리는 시간에 넋 놓고 기다리지 말고, 잘 준비해 두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될 거라고 기대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죠. 배우가 아니라도 이 말은 모든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얘기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 지혜는 정작 한껏 나이가 들어서야 얻게 되는게 보통입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욱 아쉬울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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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나이의 젊은이, 그것도 사람들이 선망하는 연예인이란 직업에서 이제 막 빛을 발할 무렵의 연예인이 이런 죽음을 맞았다는 건 경악과 함께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아무쪼록 좋은 데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고인도 고인이지만 힘겨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연기자 지망생들, 연예인이 아니라도 한창 장래를 준비할 나이의 젊은이들은 부디 다시 한번 마음을 독하게 먹어 제발 이런 뉴스를 다시 안 보고 안 듣게 해 줬으면 하는 마음 뿐입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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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게 웬 백인이 한국식 트로트를 노래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입니다. 멜로디는 무척이나 친숙합니다만, 정작 제목은 처음 듣습니다. '오 그대여 춤추자'. 가사도 한국어 가사라고 하기엔 참 엉성하지만, 어쨌든 서양 사람이 이렇게 구성지게 트로트를 구사한다는 건 참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유튜브를 통해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들은 뉴질랜드 출신의 듀오 플라이트 오브 콘코즈(Flight of Conchords)입니다. flight는 알겠는데 conchords는 뭔지 모르겠군요. 사전에도 안 나오는 희한한 말인데... 아무튼 못 보신 분들이 있다면 이들의 노래를 일단 들어보시는게 급선무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면 설명이고 뭐고 필요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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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트 오브 콘코즈는 브렛(브렛 매켄지)과 저메인(저메인 클레멘트)의 듀오입니다.

뉴질랜드 출신이긴 하지만 이들은 지금 미국에서 활동중입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HBO의 시트콤 Flight of Conchords의 주인공으로서죠. 이들은 극중에도 실명으로 출연해 웃음을 자아냅니다. 매회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나오고, 저 트로트 가요 '오 그대여 춤추자'도 그중 하납니다.
시트콤은 2007년부터 시작됐고, 현재 시즌2가 방송중입니다. 위 노래는 2008년 시작된 시즌 2의 7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것으로, 지난 2일 방송됐다는군요. 정말 전파가 빠릅니다.

이들이 부르는 저 트로트곡의 배경이 한국식 노래방 화면이라는 건 금방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에피소드를 짠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정통했다는 얘기죠. 또 노래하는 브렛 매킨지를 보면 한국식 트로트를 들어 볼 만큼 들어봤다는 것도 드러납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오 그대여 춤추자

그가 너를 쳐다본다
넌 꿩처럼 건강하다 (대체 왜 하필 꿩?)
하지만 사랑은 가끔은 방해가 된다
방해는 이처럼 다양하다
가끔은 사랑이란 갈비처럼 달콤하다
다른 때는 사랑이란 변한 우유처럼 새콤한
(잘못된 소의 우유처럼) 맛을 낸다

삶이란 가끔 집을 짓는 어떤 돌처럼 힘들다
쉬울 때도 있다
오 그대여 춤추자
오 그대여 춤추자
오 해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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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얘긴지 참 엉성하지만 아무튼 노래는 노랩니다. 멜로디는 정말 그럴듯 하죠. 정교한 스토리보다는 노래가 위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방송한다 해도 뭐 그리 썩 히트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저 트로트 노래 하나만큼은 압권입니다.

이들의 프로필에는 '포크 듀오'라고 되어 있지만 부르는 노래는 포크 뿐만이 아닙니다. 우선 힙합입니다. 제목은 하마 대 코뿔소(Hiphopopotamus vs. Rhymenoceros)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노래의 제목은 '우주의 보위(Bowie's in Space)'.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 낸 노래입니다.




마지막은 좀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포크. '인간은 죽었다(Humans are dead)입니다. 인간이 사라지고 로보트들만이 살게 된 미래의 지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에 개그맨 정재환씨가 이런 식의 코믹 듀오로 활동한 적이 있었죠. 사실 코믹송이라고 해도 매주 이런 노래를 만들어 낸다는 건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가사가 문득 생각나는군요.





p.s. 아, 물론 나탈리 화이트를 이 대목에서 빼놓으면 안되겠죠.^^  '스타킹' 녹화에서 어떤 내용이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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