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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함께'를 봤습니다.

 

2017 연말은 '강철비'-'신과 함께' - '1987'이 잇달아 개봉하는 대목입니다. 겨울방학의 시작이고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시즌인데다 크리스마스와 1월1일이 모두 연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대작들이 1주일 간격으로 개봉하는 것은 좀 이례적인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학도 긴데 이렇게 꼭꼭 붙어 개봉을 해야 하는지 약간 의문입니다.

 

그 세 작품 중 가장 먼저 '신과 함께'를 보았습니다.

 

일단 만족도는 최상. 오랜만에 훌륭한 순수 오락영화를 봤습니다.

 

흔히 오락성=상업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떤 작품이 상업적이냐 아니냐의 기준에는 오락성 외에도 여러 조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굳이 '순수 오락 영화'라고 한 것은 정치적인 상황, 개봉 당시의 사회적 이슈 같은 외적 요인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 안에 내재하는 고유의 오락성이라는 요소에 주목할 때 매우 탄탄하고 충실한,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좀 지나칠 정도로 내수 전용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과 함께'는 꽤 특이한 영화입니다. '광해', '변호인', '국제시장' '명량' 등 역대 천만 영화들, 그리고 기획 순간 바로 천만을 바라봤던 '군함도', 'VIP'같은 2017년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의 질곡이나 독특한 정치 상황에 주목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았던 점을 생각하면 제가 얘기하는 '내수 전용'이라는 말의 의미는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신과 함께'는 이런 영화들에 비해 매우 보편성을 띤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12금이라는 점도 '한국형 블록버스터'들과는 좀 다르죠.

 

아무튼 들어가는 말이 길었습니다. 그럼 줄거리.

 

(이 정도면 '출발 비디오 여행' 수준에 비쳐 볼 때 거의 스포일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스포일러가 있다고 느끼신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소방관 자홍(차태현)은 위험한 화재현장에서 소녀를 구해 함께 추락합니다. 일순 소녀를 구해냈다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자신을 데리러 온 차사 해원맥(주지훈)과 덕춘(김향기)을 보고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엔 죽을 수 없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홍(의 혼)은 저승으로 날아가고, 자홍은 거기서 차사들의 우두머리 강림(하정우)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망자들은 49일 동안 일곱 차례의 재판을 통해 이승에서 저지른 죄를 평가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 환생할 것인지 지옥에서 세월을 보낼 것인지 결정된다는 설명을 듣습니다. 

 

(네. 천당행...은 여기선 선택지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의인으로서의 죽음 덕분에 자홍은 귀인(貴人)으로 대접받지만 그래도 모든 인간은 살면서 생각지도 못한 죄를 짓고 사는 법이죠. 통과하는 재판마다 자홍은 조금씩 위기에 빠집니다. 그리고 차사들은 차사들대로, 천년 동안 49인의 망자를 각각 49일 안에 환생시키면 그들도 환생을 맞을 수 있다는 저승의 법에 따라 안간힘을 씁니다. 강림-해원맥-덕춘 조는 자홍에 앞서 47인의 의인을 환생시킨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홍이 통과하면 딱 한명 남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자홍과 세 차사의 앞에는 지옥귀들이 나타나 재판길을 방해하고, 이것이 이승에서 망자의 직계 가족이 원귀로 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강림은 이승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자홍의 동생 수홍(김동욱)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해 원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죠. 제대를 앞둔 육군 병장이었던 수홍의 원귀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관심병사 동연(도경수)의 주변을 맴돌고... 그 과정에서 자홍이 이미 15년 전 집을 나가 단 한번도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대체 효성과 우애가 유난히 깊은 의인 김자홍이 어머니와 동생을 15년간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영화의 뒤쪽 절반을 차지하는 미스테리이고, 강력한 반전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꼭 휴지나 손수건을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자분들은 눈화장이 녹아 민망해질 수 있습니다.

 

 

 

 

앞부분, 자홍이 죽은 이유와 일곱 대왕이 지배하는 일곱 지옥의 설정, 자홍과 세 차사들의 캐릭터가 설명되는 부분은 흠 없이 매끄럽게 흘러갑니다. 사실 '신과함께'의 초기 홍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부각된 부분은 '상상을 초월하는 CG 효과로 저승의 거대한 비주얼이 표현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CG는 명불허전, 대단합니다. 자홍과 세 차사가 가는 저승길의 비주얼은 한국 영화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다가 아니죠. '신과 함께' 제작진은 자칫 이런 작품의 제작진이 빠질 수 있는, '자, 이게 우리가 제공한 스펙터클이야. 어때, 멋지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김용화 감독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화려한 저승의 그래픽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메인 요리로 인물들의 디테일과 사랑받을만한 사연이 허술하지 않게 들어 찼다는 점이 '신과 함께'의 첫번째 강점입니다. 당연히 사건을 풀어 가는 메인 주인공은 하정우의 강림 역(원작의 강림도령과 변호사 진기한을 합친 캐릭터)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순무식과격한 무적의 전사 해원맥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해원맥은 차사들의 우두머리 강림도 위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강력한 전사입니다. 단 머리 쓰지 않는 일일 때만. ^^ 

 

 

 

 

그래서 해원맥은 사뭇 진지한 강림과 영화 내내 걱정이 태산인 자홍 때문에 자칫 무거워질수도 있는 영화에 웃음과 힘을 제공합니다. 아, 한국인이 좋아하는 배우 차태현의 위력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정우-차태현-주지훈-김향기 라인은 이들 외에 어떤 배우를 끼워넣어도 이 이상의 효과를 내기 힘들 정도로 탄탄합니다. 여기에 딱 세 장면 등장하지만 주인공으로 착각할 정도로 존재감이 뚜렷한 이정재가 있고, 영화 시작 30분 이내에 장광 김해숙 오달수 임원희 유준상(응? 어디?) 가 쏟아져 나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물반 고기받으로 쏟아진다는 점에서 진정한 블록버스터의 향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흠을 잡자면 초반엔 자홍의 재판이 너무 안이하게 쉽게 풀려나간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지옥귀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화 '신과 함께'는 장르가 바뀝니다. 수홍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와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뜻밖의 이야기들이 관객을 서서히 클라이막스로 이끌어 갑니다.

 

마지막, 올해 한국 영화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한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듭니다.

 

이 '한방'에 대해 꽤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너무 신파다'라는 일부 평자들의 주장입니다만, 부모 자식간의 정에 대한 이야기로 관객의 심금을 건드리는 것은 어떤 영화든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관객의 몫입니다. 이 영화에는 가족사에 관련된 강력한 최루성 코드가 있고, 저는 그 부분이 '신과 함께'라는 영화의 훌륭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 영화의 후반 30분은 관객 모두가 '우리도 알고 보면 모두 죄인임' 을 인정하게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신과 함께'가 완전무결한 영화는 아닙니다. 주인공 중 하나인 자홍의 초반 감정은 관객들이 따라가기에 다소 아슬아슬한 부분도 있고(이 역할을 연기한 것이 '한국인이 사랑하는 배우' 차태현이 아니었다면 좀 심각한 위협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전자 제품에 대한 집착은 좀 지나쳐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후반부가 자아내는 거대한 공감의 크기는 그런 사소한 흠결들은 충분히 덮고 갈 수 있는 힘들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영화 본편이 끝났다 싶으면, 역대 한국 영화 사상 최강의 쿠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심 빵 터집니다.)

 

 

 

무시무시한 싱크로...^^

 

 

 

P.S. 도경수가 연기한 캐릭터 이름 '원동연'은 이 영화의 제작사인 리얼라이즈 픽처스 원동연 대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입니다. 따라서 촬영장 분위기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동연아 임마! 야 이 자식아!"....

 

 

 

아무튼 도경수의 연기력은 아이돌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 한 사람의 배우로서 훌륭합니다.

 

 

 

P.S.2. 그래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 때문에 가장 크게 득 볼 배우는 주지훈김동욱이라고 생각.

 

P.S.3. 이 영화가 갖는 감동의 핵심은 관객의 죄책감을 공략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정한 장면이 평소 관객들이 갖고 있던 죄책감의 단초를 확 폭발시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이 부분에서 김용화 감독은 매우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주위에 잘 하셨던 분들은 그런 느낌이 덜 할 수도 있지만, 대다수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왈칵 밀려드는 감정을 느낄 거라는 생각. ^^ 여러분은 어떤지 한번 시험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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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안으로 프라하/베를린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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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xx일.

 

베를린 체류기간중의 예보는 내내 비. 하지만 베를린 주민님의 제보에 따라 베를린에서 비란 그냥 일상의 일부이며 언제 왔다 언제 갈지 모르는 그런 존재라는 걸 이미 알아버렸다.

 

그래서 그런 건지 다음날 아침은 정말 맺힌 데 없는 푸른 하늘.

 

물론 푸른 하늘이라고 더운 건 아니다. 오전엔 꽤 선선한 편이다. 물론 낮이 되어 해가 쨍하게 비치면 좀 덥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반팔 입을 날씨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의 목적지인 샤를로텐부르크 궁 앞에 갔을 때에는 그런 날씨를 종일 기대해선 안된다는 먹구름이 매우 낮게 드리워 있었다. 심지어 흘러가는 빗발까지.

 

하지만 우산이 필수인 런던과는 달리 베를린에선 우산을 상비한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유는 거의 모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척 하다가 사라질 것임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6일 동안 제대로 장대비가 오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의 매일 비가 왔으나 30분 이상 내린 경우는 없었다. (아, 밤에는 자는 사이 꽤 비가 온 듯한 흔적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이 샤를로텐부르크도 가이드북에 꼭 나오는 주요 관광지기는 하나, 우리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고...

 

 

 

바로 샤를로텐부르크 궁 정문 건너편에 있는 베르그루엔 미술관 Berggruen museaum.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당당한 '글립미술관'이다. 물론 짐작하겠지만 베를린에는 이런 규모의 국립미술관이 여러 군데 있다.

 

아무튼 이 미술관도 베를린의 강력한 뮤지엄패스에 의해 무료 입장. 개별적으로 방문하면 10유로 정도의 입장료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1층으로 입장하면 바로 보이는 자코메티 선생의 입상. 누가 보든, 어디서 보든 자코메티의 작품을 못 알아볼 리는 절대 없다. 그만치 강력한 아이덴티티. 이런 거 좋아한다.

 

 

 

베르그루엔 미술관이 있기까지는 하인츠 베르그루엔 Heinz Berggruen 이라는 분의 콜렉션 기부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글월이 있다. 설마 토마토 케찹(!)을 발명하신 분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

 

어쨌든 독일어다. 못 읽는다.

 

베르그루엔 미술관은 아담한 3층 건물 규모. 하지만 파울 클레, 파블로 피카소, 자코모 자코메티... 뭐 그러한 20세기 전반기의 내로라 하는 화가들의 알짜 작품들이 모여 있다.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흔치 않은 피카소의 조각 작품. 제목은 '학'.

 

그러게 누가 봐도 학.

 

 

 

 

그리고 알기 쉬운, 누가 봐도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인 '광장 2'.

 

참 이렇게 알기 쉬운 작가들이 좋다. 그냥 한방에 누구 작품인지 알아볼 수 있는.  

 

 

 

 

앙리 마티스의 후기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뜯어붙이기도 있고,

 

 

 

 

파울 클레의 상징 같은 저 쭉 찢어진 눈의 소녀. '노란 빵모자를 쓴 빨간 소녀'

 

 

 

 

 

그림을 보면 뭔가 음악적인 느낌이 드는데, 제목 역시 이채롭다.

 

'Abstract Color Harmony in Squares with Vermilion Accents'... 억지로 옮기면 '주홍색 액센트의 사각형들 속에 추상적인 색채 하모니' 정도? 뭔가 청각적 이미지를 색으로 옮기고 싶었다는 느낌을 정확하게 주고 있다.

 

이것도 역시 파울 클레 작품.

 

 

 

 

이 그림의 제목이 '네크로폴리스', 즉 '죽은 자들의 도시'라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클레가 본 피라미드들이다.

 

 

 

 

 

물론 이렇게 특유의 동심의 세계를 그린 작품도 있고,

 

 

 

이렇게 사물의 본질에 깊숙히 접근한 작품도 있다.

 

제목을 들으면 이해가 간다. '카페트'. 가로실과 세로실이 교차하며 짜여진 카펫을 현미경 눈으로 들여다 본 느낌이다.

 

 

'거울을 든 젊은이, 누드, 팬파이프 연주자, 어린이'

 

라는 제목의 스케치를 한 화가는 어느 순정만화가가 아니라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의 그림은 수없이 봤지만, 이렇게 만화풍의 그림은 드물게 본 것 같다.

 

제목은 '실레누스와 춤추는 패거리 Silenus and Dancing Company'.

 

실레누스는 어린 바쿠스(디오니소스)를 키워준 양부로 사람이 아니라 사튀로스다.

 

호색과 술주정이 특징인 사튀로스의 느낌이 너무나 즐겁게 표현돼 있다. 

 

 

 

 

 

3층으로 된 전시장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니 다시 활짝 갠 날씨에, 독특한 모습의 조각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자기만큼 큰 동생을 업은 착한 형... 이었으면 좋겠으나 제목은 'United Enemies'. 적과의 동침이다.

 

Thomas Schutte 라는 작가의 2011년 작품. 매우 인상적이다.

 

 

아무튼 작지만 내실있는 미술관.

 

워낙 미술관을 좋아하는 동반자와 같이 간 터라 이 미술관을 찾는 데에는 전혀 고민이 없었는데, 대체 왜 유럽만 가면 미술관을 가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분들이라면 과감하게 일정에서 빼시길 권한다.

 

쉴새없이 명소와 명소를 건너 뛰는 여행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비추. 마치 그 도시로 이사간 듯, 그 도시에 사는데 어쩌다 휴일을 맞은 듯 들르실 분들이라면 추천.

 

 

 

베르그루엔의 바로 뒤쪽에 브뢰한 뮤지엄이라는 작은 미술관이 붙어 있다. 일단 문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 미술관도 1층은 뮤지엄 패스의 무료 입장 구역이라 유유자적 들어갔다.

 

 

 

알고 보니 이 미술관은 공예/생활용품/포스터/인테리어 중심의 미술관.

 

특히 20세기 초 아르누보 스타일의 '도대체 저런 물건이 실용적인 가치가 있었을까' 느낌의 생활용품/가재도구/가구들이 잔뜩 있다. 관심 있는 분들에겐 꽤 흥미로울 듯.

 

 

 

 

그 다음, 강추하고 싶은 미술관이 길 건너편에 있다.

 

바로 잠룽 샤프-게르스텐베르크 Sammlung Scharf-Gerstenberg 미술관이다.

(http://www.smb.museum/en/home.html)

 

 

입구로 들어가면 막스 에른스트의 주물 작품 하나가 서 있다. 제목은 'The Most Beautiful'.

 

 

 

그리고 뜬금없이 이집트 어디선가 뜯어 온 신전 문짝이 하나 있고

(물론 이건 정복자들이 무단으로 가져온 건 아니고 문화재 보호 협약에 따라 어쩌고...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문짝을 보고 이 미술관의 성격을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이 미술관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초현실주의 전문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마침 쉬르레알리즘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 미술관을 만들게 한 샤프씨와 게르스텐베르크씨의 관심사가 모두 초현실주의 작품 컬렉팅이었다는 것이다.

 

 

 

 

장 뒤비페 Jean Dubuffet 의 '암콤 She-Bear'.

 

뒤비페는 이 미술관이 특히 사랑하는 작가이기도 한데, 이 미술관은 초현실주의의 출발점을 1761년 조바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판화 작품 '카르체리 Carceri (감금, 은둔, 감옥 등의 의미)', 프란치스코 고야가 1799년 내놓은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 (변덕, 수시로 바뀌는 기분의 의미)'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후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본격적인 전시는 2층부터지만 1층에도 희한한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마네의 '까마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던 마네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 그림,

 

 

놀랍게도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빅토르 위고다. 그 빅토르 위고 맞다.

 

제목은 무제, 혹은 '섬의 회상'

 

 

 

 

이렇게 피라네시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놓은 만큼 그 위층에는 피라네시의 '카르체리'에 방 하나를 할애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카르체리'는 피라네시가 상상한 엄청난 규모의 지하 뇌옥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말이 뇌옥이지, 사실 내 눈에는 피라네시가 상상한 지옥의 모습으로 보였다. 물론 첫 그림만 봐도, 그런 의도가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엿보인다.

 

 

 

아무튼 상상력의 규모가 압도적이다.

 

 

 

 

그리고 이 미술관에서 '우리 초현실주의파의 둘째 형님' 정도로 봅는 화가가 바로 프란치스코 고야다.

 

고야라면 '옷입은 마야'와 '옷벗은 마야'를 바로 떠올리는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겠지만, 일생을 호의호식/권력총애/부귀영화 속에서 보낸 것으로 유명한 고야는 인생 만년에 매우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다.

 

바로 인간 내면의 악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인데,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가 보신 분은 고야의 '블랙 페인팅'이라고 이름지어진 전시실을 기억할 것이다. 말년의 걸작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같은, 일면 공포감을 일으키는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그림에선 냉소적이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위 그림의 제목도 '어리석음, 혹은 대단한 전사'

 

 

 

물론 '카프리초'에 수록된 당나귀 그림도 여기서 빠지지 않는다.

 

 

 

 

 

오스카 도밍게스의 '안전핀'은 어딘가 달리를 연상시켜서 찰칵.

 

 

그리고 무척 좋아하는 회가 르네 마그리트의 청년기 그림인 '학생의 꿈'이다.

 

 

 

이건 말년에 그린 대표작 중 하나인 '밤의 가스파르'. 뭔가 사진의 부름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 초현실주의 화가 진용에서 빠질 수 없는 대가가 막스 에른스트.

 

그의 인상적인 작품 '사이프러스'도 여기 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음산한 한스 벨머의 '세 소녀와 죽음'.

 

 

 

 

 

아무튼 작지만 알찬 박물관이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공간, 박물관 카페가 무척 아름답다.

 

 

 

 

특별히 조경에 신경쓴 것도 아닌 듯 하지만 미술관 다운 높은 천장과 나무, 숲, 거리,

 

그리고 너무 사람이 많지도, 아주 없지도 않은 적당한 조용함. 따뜻한 햇살.

 

왠지 너무나 마음이 가는 풍경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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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영화의 바다에 풍 빠져보고 온갖 행사에 참석하고 하면 2박3일 정도의 일정이야 슝 날아가 버리는게 부산행이지만, 그래도 먹을 건 챙겨 먹어야 합니다. 특히 온갖 풍부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도시 부산에서라면.

 

왕년에는 부산에 꽤 자주 가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몇번 가다 보니, 가던 곳만 가게 되는 폐단이 있더라구요. 사실 그렇게 오래 머물수 있는 것도 아닌데 검증되지 않은 곳을 가는 건 또 불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엔 좀 맘 먹고 안 가보던 곳을 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부산 토박이 및 부산 마니아들의 증언을 참고했습니다.

 

 

일단 황혼무렵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아, 제목은 '맛집 가이드'지만 실상은 '술집 및 해장 가이드' 입니다.

 

 

 

새로 개발된 해운대 주상복합군이 몰려 있는 마린시티 옆 도로 쪽에서 보면 황혼무렵 하늘은 환상적입니다.

 

 

 

그중 어느 건물 1층에 아넬로 AGNELLO 라는 맥주집이 있습니다.

 

 

사실 이 일망무제의 하늘과 바다, 광안대교 풍경은 공짜입니다

 

다만 해질녘 바닷가에 앉아서 풍경을 즐기려면 어딘가 앉을 곳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음식이나 술 사진은 없습니다. 그냥 풍경을 즐기기 위한 부산물.. 사실 이 풍경에 뭘 먹으면 맛이 없겠습니까.^^

 

 

 

자리에 앉아 해가 완전히 질때면 이런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렇게 신선놀음처럼 풍경을 줄기다가,

 

 

 

해가 져서 이동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청사포를 많이 가봤는데 아무래도 시내에서 너무 멀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시내에서 가깝고 청사포의 장점을 갖고 있는 지점을 찾다가 <미포끝집>으로 갔습니다.

 

 

 

미포는 해운대의 끝자락, 그러니까 해운대 백사장 한 복판에서 조선비치호텔 반대쪽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해수욕장이 끝나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미포 항구입니다.

 

그 미포에서 바다를 따라 난 2차선 도로 끝까지 가면 거기가 미포끝집입니다.

 

 

거기서 조선비치호텔 쪽을 바라보면 이런 야경이 드러납니다.

 

오른쪽 중간쯤, 국회의사당 비슷하게 노란색으로 빛나는 건물이 조선비치호텔입니다.

 

 

창이 넓은 2층 방에 자리를 잡고,

 

 

구이 세트메뉴를 주문했습니다.

 

위칸에 저렇게 조개가 덮여 있고, 조개를 다 구우면 장어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구이 메뉴와 우럭매운탕을 합해서 세트메뉴. 싼 집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양도 푸짐하고 먹을만 한데, 사실 음식도 음식이지만 분위기가 그냥 끝내줍니다.

 

음식 타박보다는 눈과 귀로 즐기시길.

 

바다 옆에 사시는 분들 아니라면 만족하실겁니다.

 

 

 

 

청사포에서 누릴 수 모든 것 + 야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대개 3차 정도로 그랜도호텔 뒤쪽의 술집촌을 많이 가게 됩니다. 특히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주요 공간이 그랜도호텔이다보니, 이 시기 밤거리는 그랜드호텔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꼭 가야 하는 건 아닌데 왠지 발길이 그 쪽으로 향합니다.]

 

재수가 좋으면 옆자리에 톱스타들이 앉아서 한잔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죠.

 

3차이다보니 대부분 오뎅이나 해물에 소주를 한잔 기울이게 됩니다. 대략 비슷비슷합니다. '삿포로', '미나미', '붉은수염' 같은 집들이 유명한데 이틀 밤을 돌아다녀보니 특별히 강추할 만한 곳이 있는 건 아닌 듯 합니다. 거기서 거기... 기왕이면 넓은 집이나 대로에 면한 집을 가시면 더 유리할(?) 수 있겠죠. 서울식 서비스가 그리운 분들은 서울에서 원정 온 '이상'이나 '천하의 문타로' 분점을 가실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영화제 기간중 유난히 북적이는 곳이 바로 이 포장마차촌인데 이번에 가 보니 거의 '랍스터 전문점'으로 운영되는 곳들이 몇군데 있더군요. 포장마차 특유의 소박한 느낌을 기대하셨다간 큰일 날수도 있을 듯 합니다. 세가 비싸가 그런지 가격도 만만찮고... 아무튼 혹시 가시면 자리에 앉기 전에 그 집의 분위기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늦게까지 들이키고, 또 들이키고... 올해는 밤에 비가 부슬부슬 내려 백사장에서 술 마실 환경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백사장에서 캔맥주까지 마시고 비몽사몽간에 숙소로 들어가면, 당연히 아침에 속쓰림과 함께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럼 해장국으로는 해운대에선 복국과 대구탕이 제격이죠.

 

복국은 유명한 금수복국을 많이들 가시지만, 아는 사람들은 미포(간밤의 미포끝집이 있던 바로 그 미포)로 갑니다. 할매집이 있기 때문에.

 

 

들어갈 때 약간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집이 워낙 잘 나가기 때문에 주변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복집들이 즐비합니다.

 

너무 가짜들이 많아서 아예 '할매집 원조복국' 이라는 이름 앞에 '박옥희'라는 할머니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엘시티 공사장에서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가 오른쪽 집입니다. 왼쪽에도 복국집이 있는데 그집 아님.

 

 

 

이렇게 보글보글 끓어 나오는 복국에 식초를 살짝 뿌리면... 크아.

 

 

이집 보내고 후회했다는 사람 못 봤습니다. 강추.

 

찬도 깔끔한데 혹시 멸치젓 좋아하시는 분들은 멸치젓 청하면 주십니다. 침 넘어갑니다.

 

대구탕도 대개 이 미포 언저리에 잘 하는 집들이 몰려 있는데, 그동안 강자로 군림했던 한국콘도 옆 '속씨원한 대구탕' 도 장소를 살짝 옮겨 이 미포 골목 안에서 영업중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부산 토박이들 사이에서 '아저씨 대구탕' 이 최강자로 뜨고 있다고 합니다.

 

 

2박3일이면 대개 하루는 복국, 하루는 대구탕으로 변화를 줘서 활용하시는 것도 방법일 듯.

 

그런데 유명한 '속씨원한 대구탕'도 '시원한 대구탕', '할매집 원조복국'도 '미포 할매복국' '미포복국 할매집' 등으로 유사품들이 넘쳐납니다. 마찬가지로 해운대 암소갈비가 유명해지자 온갖 비슷한 집들이 넘쳐납니다. 해운대 갈비, 해운대 이름난 암소갈비...

 

진짜 원조는 여기, '해운대 소문난 암소갈비' 입니다.

 

 

 

알고보니 35년전에도 가본 집... 물론 갈비가 맛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저는 굳이 타지에서 가실 분이라면 해운대까지 가서 갈비를 드셔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주변의 거성갈비 도 요즘 뜨고 있는 맛집이라고 하네요. 

 

(물론 그리고 잠깐 왔다 가는 사람 기준입니다. 여담이지만 2002년에 부산에서 한달을 살아 보니, 딱 일주일 지나니까 회 생각은 전혀 없고 고기가 먹고 싶어 환장을 하겠더군요. 사람이 원래 이것 저것 골고루 먹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부산에 왔는데 회를 먹어야지 왜 횟집 얘기는 안 하고 헛소리만 하냐는 분들, 사실 어느 횟집을 가거나 서울에서 먹는 것보다는 훨씬 우수합니다만, 그래도 일단 맛이냐 가격이냐의 승부는 있습니다.

 

일단 인원도 꽤 있고 하니 가격과 푸짐함으로 승부하겠다는 분들이 가시는 곳은 민락동 어판장,

 

 

 

여기도 물론 잘 알려져서 옛날같지 않다고 하지만, 흔히 '민락 회센터'라고 불리는 광안리 해수욕장 한켠의 집들보다는 훨씬 싸고 푸짐합니다.

 

그런데 일행중에 그래도 나는 제대로 된 세팅에서 맛있는 회를 먹어야겠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부산 현지민들은 광안리 삼삼회집 이나 칠성회집 을 추천합니다. 맛과 가격의 균형점.

 

 

 

 

 

 

깔끔하고 바다도 막 보이고 그런 집을 기대하시는 분들에게는 칠성횟집이라고 합니다. (이건 직접 가본게 아니라서)

 

마지막으로 어 부산을 떠나야 하는데 밀면을 못 먹었네 하시는 분들에게 부산역에서 가까운 초량밀면 추천.

 

 

 

한약재향이 폴폴 나는 돼지 육수에 후루룩 먹기 딱 좋습니다.

대짜가 4500원. 가격도 저렴. 먹고 역까지 천천히 걸어서 10분.

 

 

 

해운대에도 분점이 있는데 본점만 못하다는 말이 많네요.

 

 

 

혹시 시간이 좀 더 되시는 분들은 부산역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신발원에 가서 만두를 드셔도 좋습니다.

 

부산역 맞은편은 예전부터 유명한 차이나타운. 요즘은 러시안 타운과 겹칩니다.

 

아무튼 차이나타운에 딱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있는 '신발원' 은 만두와 꽃빵, 꽈배기만 파는 이색 중국집입니다. 그냥 만두집이죠.

 

 

단 신발원은 좌석이 많이 없습니다. 자리가 있으면 그 자리에 앉아서 먹고, 안 되면 포장해서 들고 나와 드셔야 합니다.

 

기차 시간에 맞춰 가서 포장을 들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먹는 것을 추천합니다.

 

생강향이 밴 육즙이 줄줄 흐르는 만두를 딱 깨물면 그냥 막...

 

혹시 신발원이 너무 붐비면 그 라이벌인 마가만두 로 가셔도 됩니다.

 

 

 

신발원 얘기는 여러번 해서 지겨우실 분도 있을테니 여기까지.

 

신발원은 센텀시티에도 분점이 들어섰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영화 보시다가도 가실 수 있겠네요.

 

물론 술만 마신 건 아니고 영화를 3편 봤는데 그중 2편은 추천할만 합니다.

 

 

 

션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시간 맞는 분들은 꼭 보세요.

 

'실질적 노숙자'들이 살아가는 모텔이 배경이고 주인공은 어린이들입니다.

 

2시간 내내 깔깔 웃다가 마지막에 심장이 무너집니다. 쿠쿵.

 

 

 

 

사무라 히로아키의 걸작 만화 '무한의 주인'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영화화한 '불멸의 검'. 물론 일본어로는 영화 제목도 그냥 '무한의 주인'인데 수입사가 만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저만 해도 '어 이상한데...'하고 찾아보지 않았으면 이 영화가 '무한의 주인'의 실사판이라는 걸 몰랐을 듯.

 

어쨌든 만화는 잘 그리지만 실사판으로 영화만 만들면 이상해지는 일본적인 특징을 무시하고 영화를 봤는데, '실사판 치고는 권할만' 합니다. 뭐 만지 역을 기무라 타쿠야가 한다는 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을 듯.

 

아무튼 부산 잘 다녀오시길. 뭐 올해 못 가면 또 내년이 있잖아요?

 

*** 드넓은 부산 맛집을 다 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냥 부산역-해운대 중심으로 제가 알만한 집들을 써 봤습니다. 틀린 정보 수정 및 다른 집들 추천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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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늦어지는 데 대한 변명: 나이를 먹었는지 기억은 안 나고 눈은 침침하고(이건 아니지만)... 4개월 전의 일이지만 어찌나 지난 세기 같은지. 휴일 동안 엄청나게 진도를 나가야겠다는 마음도 먹었었으나, 이래 저래 개인사가 복잡한 터라... 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아무튼 그래도 최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

 

하케셔마크트 Hackescher Markt 라는 철자를 보면 대략 의미를 짐작할 수 있듯, 하케셔마크트는 '하케의 시장'이라는 뜻이다. 18세기 Hacke라는 사람이 베를린 시장일 때 형성된 market 지역으로, 중심지가 된 역사가 200년이 넘는다.

 

물론 지금도 활발한 시장이며 베를린 시내의 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유명한 이유는 바로 이 하케셴 회페 Hackeshen Höfe 덕분인 것 같다. 1906년부터 건설됐다는 이 건축단지는 아르누보 시대의 미적 감각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 유서깊은 곳인데, 독일 통일 이후 쇼핑 타운 +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 무대로 개발되어 OLD BUT NEW의 상징 같은 곳이 되어 있다.

 

 

 

맨 윗 사진의 입구로 딱 들어서면 바로 이런 중정 中庭, 그러니까 스페인 식으로 말하면 파티오가 나타난다.

 

본래 Höfe 라는 말이 바로 정원 중에서도 중정을 의미했다고 한다. 딱 보기에도 아르누보 스타일. 건물 상층부의 곡선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니까 여러개의 중정이 이렇게 겹쳐 있는게 이 하케셴 회페의 특징이다. 건물 아래로 난 통로로 들어가면 또 다른 정원이 나오고, 거기서 빠져 나오면 또 다른 중정과 만나게 되어 있는 미로 같은 구조다.

 

물론 보시다시피 주상복합 구조로 되어 있다. 건물 아래층은 상가, 위층은 거주 공간으로 꾸며져 있는데, 보기엔 참 그럴듯하지만 막상 여기서 산다고 하면 꽤 시끄러울 것 같다. (하기야 바르셀로나의 카사 바트요에도 지금 입주해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취향이니 존중하겠지만 막상 살려면 피곤하지 않을가 싶다.)

 

 

 

아무튼 건물과 상점들이 꽤나 신경 쓴 형태다. 위 가게는 양복점.

 

 

 

생각해보면 1970년대쯤엔 한국에도 이런 식의 중정이 있고 1층에 상가가 있는 아파트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언뜻 철거중인 서소문 아파트 생각이 나기도 한다. 물론 절대 이렇게 예쁘게 꾸며져 있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이 정도만 꾸며져 있어도 그럴듯 하다.

 

 

거기서 또 다른 터널을 지나면,

 

 

아예 대놓고 거리 예술가들을 위해 열어놓은 공간을 만나게 된다.

 

 

 

어찌 보면 정신 산란한 난개발(?) 지역인데, 이쪽 건물들의 내부는 대개 실험적인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어디 하나 빈 자리만 있으면 작품이 치고 들어온달까...

 

 

 

 

모퉁이를 돌고 돌다가 만난 이 파란 간판을 만나게 됐다.

 

그래, 인증샷은 이런 자리에서.

 

 

 

 

온몸을 다 넣지 말고, 이렇게 딱 클로즈업해서 어쩌고 하는데 동작이 그냥 다 찍혔다.

 

 

골목 사이사이에 이런 바가 있다. 오후지만 아직도 이 동네 사람들에겐 왠지 꼭두새벽 같으 느낌.

 

 

 

사진으로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음악은 클럽 분위기. 어두워진 다음에 맥주 한잔 하면 좋을 느낌이다.

 

 

물론 맥주 말고 다른 것(?)도 많이들 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치안이 좋은 지역이라 새벽까지 있어도 안전한 곳이라고.

 

 

 

동네를 돌면서 벽 구경만 해도 심심치 않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한 작품 ㅎ.

 

팬더에게 당하는 미키마우스... 어딘가 미중관계를 상징하는 듯도 하고.

 

 

 

하케셔마크트에서 전철을 타고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향해 가는 동안 알렉산드르플라츠 Alexander Platz에 있는 TV타워를 볼 수 있었다. 어찌나 상해 동방명주탑과 똑같은지. 베를린 주민이신 가이드님도 그런 말 많이 듣는다며 웃는다. 공산주의자들의 미적 감각은 가끔 눈을 썩게 만든다. 모스크바의 스탈린 양식 건물들은 어쩌면 양반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네 정거장을 달려 Berlin Warschauer Straße station. 여기서 대로변 내리막길로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 죽 걸어가면 그야말로 긴 대로 한켠에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가 나타난다.

 

 

 

베를린 가실 생각을 하신 분들 중에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모를 분이 있을까 싶지만 의무적으로 그냥 설명하면,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란 왕년에 건재했던 베를린 장벽의 일부로, 긴 벽화가 그려진 지역을 말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전 세계의 유명 화가에서 거리 아티스트까지 실로 다양한 인물들이 그 벽에 벽화를 그리고 싶다는 제안을 해 왔고,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 장벽의 일부 지역을 수많은 구간으로 쪼개 벽화를 위해 분양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의 길이는 1.3KM. 그림이 그려진 한 구간의 길이는 6~7m 정도 돼 보이는데, 넉넉잡고 10m라고 해도 130개의 그림이 있는 셈(실제로는 한 200개 되는 것 같다)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 작가의 작품은 없다고 한다. 왜?

 

 

작가들의 이메일 주소가 쓰여 있기도 하고,

 

 

 

작가를 기다리는 이런 공간도 있다.

 

 

물론 낙서 수준의 작품도 많은데,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이것.

 

"Mein Gott, hilf mir, diese tödliche Liebe zu überleben"

 

- 신이시여, 이 치명적인 사랑으로부터 살아남게 도와주소서. -

 

'형제의 키스 Bruderkuss'라는 제목인데, 이걸 보고 동서독의 수장들이 만난 것을 기념하는 그림이라고 써 놓은 블로그도 봤다.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겠지만 전혀 다른 내용. 왼쪽 사람은 1980년대 구 소련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 그리고 오른쪽 사람은 동독 서기장 호네커다. 두 사람은 실제로 형제국(?)의 결속을 의미하는 키스를 자주 나눴다고 한다.

 

이렇게.

 

 

그 통일전의 구질구질했던 끈끈함을 비꼬고 있는 그림이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무슨 느낌일지. 하긴 러시아는 구 소련 서기장 쯤은 우스울 수도 있는 '짜르' 푸틴의 지배하에 있으니 오히려 저 시절보다 역행했는지도.

 

 

위 작품을 그린 작가들의 이름이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경구.

 

Du hast gelernt was Freiheit heisst und das vergiss nie mehr.

"너는 자유의 의미를 배웠고, 이제 그것을 잊지 말라" 는 뜻이라고 함.

 

자, 여기서 거의 항상 나오는 질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란 이름은 베를린 장벽의 동쪽 사면, 그러니까 구 동독 쪽 면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럼 그 장벽의 반대쪽 면, 즉 서쪽 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도 그림이 있긴 하다. 있긴 있는데... 낙서다. 자조적인 표현으로 '웨스트사이드 갤러리'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뭐 서쪽도 꽤 작품성(?)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리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상하다고 느낄 부분이 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 막상 가 보면 슈프레강을 따라 장벽이 그어져 있고, 강 반대쪽이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그리고 강 쪽이 웨스트사이드 갤러리라고 되어 있다. 갑자기 베를린 2일차의 지리 감각이 흔들린다. "시내에서 장벽(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동쪽으로 꽤 가면 슈프레강이 나왔다"는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감각에 따르면 강쪽이 동쪽, 강 반대쪽이 서쪽이어야 하는데 실제는 그와 반대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베를린 주민도 질문하자 바로 답이 안 나온다. '어, 왜 그렇지?' 라는 반응.)

 

 

하지만 이건 일직선이 아닌 베를린 장벽의 장난이다. 위 지도에서 보면 브란덴부르크 문 남쪽 지역에서 슈프레강은 '대부분' 장벽의 동쪽에 있다. 하지만 안 그런 부부닝 한 군데 있다. 바로 그 지점이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지점이다.

 

 

이렇게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부분만 장벽이 살짝 강을 건너 와 있다. 장벽 자체가 슈프레강의 동쪽으로 건너 와 있기 때문에 이 저점에서는 강 반대쪽이 동쪽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평소 길치라는 말을 자주 듣는 분들은 이런 이야기 자체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테니 그냥 넘어가시면 된다. 반면 본능으로 길을 찾는 사람이라면 상당히 당황했을 부분이다.)

 

 

갤러리(?) 구경을 마치고 전철역 쪽으로 돌아오다 보면 슈프레 강 위에 오베르바움 다리 Oberbaumbruke 라는 유서깊은 다리가 있다.

 

 

 

다리 위에 성곽 같은 구조물이 있고, 인도 부분으로 들어가 보면 이렇다.

 

 

그리고 다리 위에서 슈프레강을 바라보면 이렇게 알리안츠 본사가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다리를 중심으로 양쪽이 모두 한밤에 불야성을 이루는 나이트클럽 밀집 지역이다.

 

 

 

저런 데가 다 유명 클럽. 사람들이 베를린 간다고 하면 다 '클럽 가냐'고 하는데, 체력이 달려서 한번도 못 가봤다. 

 

 

그렇게 해서 대략 베를린 핵심 투어를 마치고 도이체오퍼 Deutcheoper 역으로 이동.

 

Oper는 글자 그래도 오페라라는 뜻. 그런 역 답게 벽이 줄줄이 유명 작곡가들의 이름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땅 위로 올라가면,

 

 

바로 나타나는 매우 모던한 오페라하우스.

 

 

여행중에 어디를 가 봐도 가장 취향에 맞는 곳은 공연장/미술관에 딸려 있는 카페들인데, 여기도 역시 맘에 들었다.

 

 

카페 겸 대기공간.

 

 

 

 

여담이지만 베를린의 공연장에서는 카페/대기공간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체감상 좌석 간격이 한국보다 좁다. 심지어 한국보다 관객들의 평균 다리 길이가 더 길텐데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인터미션 때 안쪽에서 누가 밖으로 나가려 하면 바깥쪽에 앉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계속 일어서서 비켜주느니 그냥 같이 나갔다가 시간 맞춰 들어오는 것이 낫다. 실제로 인터미션 때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들 이렇게 샴페인이든 소다든 맥주든 마시면서 담소를 나눈다.

 

여기도 좌석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국보다는 많이 앉는 느낌이다.

 

세상에서 가장 서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인 것 같다.

 

 

아, 오페라하우스지만 공연은 '백조의 호수'.

 

커튼콜 때 사진촬영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다(거의 모든 관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따라 찍었다.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닌 터라 오페라를 보고 나오니 꽤 지쳐 있었다. 어느새 마음의 고향이 된 초 역(동물원 역)에 내려 거대한 피자로 저녁식사. 슬쩍 밤 구경을 다녀 볼 법도 하지만 중년 부부의 저질 체력상 여기서 더 이상의 행군은 무리라는 결론.

 

...보기보다 피자 맛도 괜찮다. 물론 저게 1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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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5일. 본격적인 베를린 투어의 시작이다.

 

일단 첫날은 마이리얼트립(Myrealtrip)의 1일 가이드 신청을 했다.

 

어떤 여행지를 갈 때 아무리 정확한 정보와 좋은 가이드북을 써도 사실 현지인의 말 한마디 만큼 정확한 경우는 없었다. 어떤 이들에겐 여행인 것이 그들에게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생활인의 정보만큼 충실하고 도움이 되는 정보를 다른 무엇을 통해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며칠 정도는 민박을 해 볼까 생각도 해 봤는데 베를린의 한인민박들은 생각보다 시설이나 위치가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꽤 큰 비용을 지불하고 1일 정도는 마이리얼트립의 가이드 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교회 앞. 2차대전 때 폭격으로 망가진 교회를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인데, 그 모습이 의외로 멋지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교회가 새로 지어져 있다.

 

 

사실 교회 외벽은 뭔가 계란 판을 붙인 듯 조금 어색한 느낌이 있는데

(교회 옆엔 요즘 유럽에 빈발하고 있는 테러 희생자를 위한 조문 촛불이 잔뜩 놓여 있다)

 

그런데 저 계란 판들이 안에서 보면,

 

 

이렇게 바뀐다.

 

안쪽에서 보면 이 파란 유리의 힘이 고전적인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능가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바다 속에 들어온 기분이 된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는 바로 교통의 핵심은 초 역으로 가서 베를린의 젖줄인 100번 버스를 타고 브란덴부르크 문 앞으로 이동.

 

 

 

 

사실 이렇게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장소를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들를 곳은 들러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뭐... 굳이 설명은 생략. 아무튼 이 문이 바로 프로이센 제국 시절부터 베를린의 상징이며, 분단 시대에는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다는 건 알아둬야 할 듯. 지금 사진을 찍는 위치가 구 동독 지역이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시작되는 운터 덴 린덴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베를린을 구경하게 되어 있다. 과거 동/서 분단 시절에는 동독이었던 지역이 집중적으로 개발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번 여행 기간 중에도 구 서베를린 지역은 그리 많이 머물지 않았다.)

 

사실 브란덴부르크 문보다 좀 더 인상적인 게 사진으로 볼 때 오른쪽, 베이지색 높은 건물 밖에 있는 건물 안쪽에 있었다.

 

 

슈테판 발켄홀 Stephan Walkenhol 의 'Big man with little man' 이다.

 

꽤 크다. 4미터 정도.

 

이 흰 셔츠 입은 아저씨가 바로 발켄홀의 상징 같은 캐릭터인데, 뒤에 이렇게 작은 사람이 숨어있다.

 

누가 봐도 성인 남성의 허세를 상징하는 작품.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 이 양반의 작품들은 악셀 슈프링거 그룹 본사 앞에도 있고, 베를린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베를린에 가시는 분들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은 빼놓지 않고 가실테니, 가실 때 꼭 여기도 들러서 보고 가시기 바란다.

 

 

그리곤 남쪽으로 약 200m 걸어 내려오면 유태인 희생 기념비(?)가 있다.

 

 

겉에서 보면 그냥 시멘트 구조물인데,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이런 느낌.

 

하나 하나의 사각 기둥이 높이와 크기가 조금씩 다 다르고, 굉장한 암울함이 느껴진다.

 

절망에 대한 표현이랄까.

 

 

그리고는 베를린의 유서깊은 아들론 호텔 뒤를 지나

 

(마이클 잭슨이 아이를 안고 흔들어서 어린이에 대한 안전의식이 없다고 엄청 욕 먹은 그 호텔이다.)

 

 

 

시내를 걷기 시작한다.

 

곳곳에 이런 공연 전시물도 반갑다. 베를린이구나, 하는 느낌.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사진으로 볼 때 무척 신기했던 포츠다머 플라츠의 소니 센터.

 

 

지금 봐도 그럴 듯 하다.

 

 

아시다시피 건물주가 대한민국 국민연금이라 한글로 안내가 쓰여 있다.

 

 

포츠다머플라츠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조용한 화랑 한 군데를 들렀는데 마침 정기 휴일.

 

 

그리고는 토포그래피 오브 피어 Torphography of Fear 앞의 장벽 잔해 앞으로.

 

지금 보면 두꺼운 벽도 아니고,

 

 

그다지 높은 벽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있는 벽의 일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예전에는 여기 오면 눈물이 난다는 분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보단 훨씬 낫지.

 

 

그리고 명소라고 꼽히는 체크포인트 찰리까지 도보로 바로 이동.

 

사실 지금 봐서 감흥이 있을 리 없다. 저 앞의 검문소도 하도 관광객들이 찾아서 지었다고.

 

그냥 사람 많은 관광 포인트 정도의 느낌.

 

노파심에서 얘기하는 거지만 절대 관광 명소 아니다. 가 볼 필요 없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지도로 볼 때는 멀어 보이는데 걸어가면 15~20분 사이에 다 닿는다.

 

 

시내로 들어오면 왠지 건물 하나 하나가 그럴듯하고 예쁘다.

 

프라하 같은 돌집만 보다가 봐서 그런가. 아무튼 모던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지반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지하수를 뽑아 강으로 연결하는 파이프인데 도시 미관을 살린 듯 핑크색이다. 어느 지역은 녹색, 어느 지역은 또 하늘색이라고 한다.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북쪽으로 죽 걸어가면 젠더마크트 광장이 나오고, 거기에 오늘의 점심 포인트가 있다.

 

 

확대하면 이름이 보인다. Butter & Wegner.

 

처음부터 이렇게 고급 식당에 갈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런데 막상 주문하려 보니 프라하와 왜 메뉴가 똑같은지. 슈니첼과 굴라쉬(그런데 여기도 굴라쉬는 영... 아무래도 굴라쉬는 러시아에서 먹은 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너무 신 맛이 강하다) 등등. 그래도 베를린의 명물 하나가 추가됐다.

 

저 대파같이 보이는 슈파겔 Spagel. 굉장히 굵은 아스파라가스의 변종이다. 매년 5월에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맛은...아스파라가스 맛인데 약간 더 단맛이 난다고 할까.

 

(물론 먹으러 기를 쓰고 찾아갈 만한 맛까지는 아니다. 아무튼 3인 점심 한 끼에 음료까지 7,80유로 정도)

 

 

 

어쨌든 식사를 마치고 돌아본 젠더마크트 광장.

 

 

프랑스 돔과 독일 돔이 쌍둥이처럼 마주보고 있는데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사실은 화장실 쓰러 들어감. 공짜라서.)

 

 

 

운터 데 린덴은 이렇게 곳곳이 공사중이다. 사람 셋이 옹기종기 서 있는 곳은 나치에 의해 독일판 분서갱유가 이뤄진 역사의 현장. 훔볼트 대학과 도서관이 있는 문화의 중심지에서 지식인 박해와 함께 나치가 원하지 않는 서적의 소각이 이뤄졌다. 그 기념물이 있으나 크게 눈길이 가지는 않았다.

 

 

어쨌든 뭘 지어도 이렇게 널찍널찍하게 지었다는데서 독일 특유의 스케일이 느껴진다. 훔볼트 대 도서관.

 

 

그렇게 해서 운터 덴 린덴을 다 지나 오면 묘한 집 한채가 보인다. 절반은 모던, 절반은 고전적인 구조다.

 

화랑으로 사용된다는 설명.

 

 

그리고 걸어서 박물관 섬을 통과하면 베를린 돔이 보인다.

 

물론 박물관 섬은 내일부터 박물관 패스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구경할테니 일단 패스.

 

유람선을 탄 사람들이 한가로워 보인다. 한번 타 봐야겠다는 생각이 물씬물씬.

 

(결국 못 탔다. 5일이나 있으면서 뭘 한거야...)

 

 

박물관 섬과 하케셔마크트의 중간 쯤에 있는 설치 미술.

 

이런 작품들이 너무너무너무 많다.

 

 

드디어 하케셔마크트 도착. 뭐 오래 걸린 것 같지만 젠더마크트 광장에서 쉬엄쉬엄 걸어서 30분 이내에 도착한다.

 

그래도 관광객 모드는 힘들다. 역시...;;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면, 하케셔마크트는 언제 가시든 꼭 들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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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베를린에 뭐가 있는데 베를린을 가?

 

라는 말을 사실 너무 많이 들었다.

 

서독과 동독이 나눠져 있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을 때에도 독일을 대표하는 도시는 베를린이라고 들었다. 나폴레옹과 맞서 싸우던 프로이센의 수도. 그리고 통일 독일의 수도.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독일의 패권을 장악했던 제3제국의 수도. 뭔가 거대하고 강력한 힘의 원천 같은 도시.

 

하지만 동서 냉전이 치열하던 시절 베를린은 갈 곳이 아니었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라는 대규모 간첩 사건도 있었고, 괜히 동독 영토 안 깊숙히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이라는 겁나는 곳이기도 했다. 뭣보다 독일로 가는 한국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내렸다. 독일을 포함하고 있는 관광 상품은 프랑크푸르트-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했다.

 

그 뒤로도 대성당을 보러 쾰른을 가거나 노이슈반슈타인을 보러 뮌헨을 가는(퓌센에 가려면 뮌헨을 거쳐야..) 사람은 꽤 있었어도 굳이 베를린에 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베를린? 아마 동물원이 유명하지...? 정도의 의견.

 

그러던 어느날 베를린이 유럽에서 가장 힙한 도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EU의 중심 국가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돈과 사람이 급격히 유입되고 있고, 현재 유럽에서 가장 핫한 도시는 베를린이라는 거였다.

 

핫하다는데...^^

 

 

6월4일. 그리 이른 아침...은 아니고 프라하 역에서 오전 10시28분 기차를 탔다. 베를린까지 소요시간 4시간30분.

 

나름 EC(유로시티)라는, '고속열차'로 분류되는 기차인데 대략 400km 정도 거리를 꽤 오래 간다. 이미 KTX의 즐거움을 아는 몸이 되어서... 이 구간은 ICE 같은 초고속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옆의 5시간16분은 버스. 가격면에선 버스가 시간 선택만 잘 한다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인당 2만원 내외로 갈 수 있는 티켓도 있었다. 특히 중간에 드레스덴에서 내릴 거라면 버스도 훌륭한 선택일 듯.

 

 

하지만 드레스덴을 그냥 통과하기로 함에 따라 4시간30분 버스는 피로도가 심할 것이라는(우등도 없다) 예측을 할 수 있었다. 프라하-베를린간 1등석 2인에 100유로 정도. 2등석이면 60유로 정도면 가능하다. 단 조기 예약일 경우.

 

도이체반 홈페이지 www.bahn.de 에서 예약하면 저렇게 생긴 티켓이 온다. 저걸 출력하거나, 앱을 깔고 모바일 티켓을 열면 된다. 모바일도 훌륭하게 작동한다.

 

그럼 1등석과 2등석은 무슨 차이?

 

 

일단 이게 1등석의 모습.

 

 

그리고 2등석.

 

그냥 보는 바와 같이 1등석은 좌석이 3열, 2등석은 4열이다. 그런데 항공기의 이코노미와 비즈니스도 실질적으로 좌석 폭에선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이 차이도 별 게 없다. 안 친한 사람들이 나란히 앉는다면 좌석 간격 차이가 의미가 있겠지만 친한 사람들은 큰 의미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등석이라고 좌석이 뒤로 젖혀지는 것도 아니다.

 

안 젖혀진다고!

 

 

심지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은 2등석에서 이런 룸을 잡을 수도. 물론 미리 잡아야 한다고 한다.

 

아무튼 1등석으로 할까 말까 고민하시는 분들, 고민 말고 그냥 2등석 하셔도 된다. 돈 값 못한다.

 

왕년에 유레일 좀 타 본 사람으로서 혹시 추억의 컴파트먼트형(그 왜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방으로 나눠진 열차 객실) 객실은 없나 봤는데 최신형 열차라 그런 건 없었다.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식당차도 있고,

 

 

어쨌든 넒은 차창을 통해 바깥 경치를 보면서 느긋하게 달린다는 건 버스와 비교할 수 없는 기차의 장점.

 

중간 중간 화장실도 다녀올 수 있고, 공간의 개방감이 다르다.

 

프라하-베를린 구간에선 꽤 운치있는 경관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날이 워낙 흐려서 원.

 

 

그래도 1등석이라고 물을 한 병씩 준다.

 

국경 건너간다고 여권 검사 같은 건 없다(EU!). 티켓 검사만 두어 차례 한다.

 

 

오후 3시 베를린 중앙역 도착.

 

참고로 독일어로 역은 Bahnhof인데 Haupbahnhof는 중앙역이다. 모든 도시마다 메인 역이 있다.

 

 

역의 규모가 어머어마하게 크고, 폼난다.

 

 

EU 대표 도시의 메인 스테이션으로 손색이 없다.

 

 

비가 와서... 밖에서 여유잡고 역 전경을 찍지는 못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도착한 풀먼 베를린 호텔 Pullman Berlin Schweizerhof

 

 

역에서 택시로 10분~15분 거리. 바로 앞에 200번 버스 정류장이 있고, 200번 버스로 3정거장만 가면(5분?) 서베를린 교통의 중심인 초 역 Bahnhof Zoologischer Garten(동물원 역) 이 있다. 너무 길면 그냥 '반호프 초' 라고만 해도 된다. Zoo는 독일어로 '초오'라고 읽으면 된다. oo는 독일어에서 '우'가 아니라 긴 '오오'다.

 

도보 7~8분 거리에 비텐베르크플라츠 Wittenbergplatz 전철역(U-BAHN)이 있다. 비텐베르크플라츠 역은 바로 베를린 최대 백화점이라는 카데베(Kadewe)를 끼고 있는 역이다.

 

흔히 베를린은 100번과 200번만 타면 다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뭐 한번 가본 경험으로는 거의 그런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초 역이 가깝기 때문에 대략 어디서 오든 초 역 앞에 내려서 200번을 타면 10분 안에 호텔로 돌아올 수 있다. 어쩌면 초 역 바로 앞의 호텔보다도 덜 걷는 느낌이다.

 

 

실내. 매우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 좁지도 않다.

 

유럽 대도시에서 이런 호텔을 150불 이내로 잡을 수 있는 건 베를린의 큰 장점이다.

 

 

게다가 창밖으론 길 건너편에 있는 베를린의 허파, 티어가르텐 Tiergarden 공원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인터콘티넨탈 호텔이 보인다.

 

아무튼 블로그나 관광 안내를 보다 보면, 베를린이 큰 도시기 때문에 중심지도 여럿이고, 따라서 호텔도 두어 군데로 잡는게 좋다고 추천하는 사람이 있는데,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그런 말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서울 여행을 온 사람은 숙소를 세 군데는 잡아야 한다.

 

오히려 베를린은 서울보다 관광 포인트가 집중되어 있는 편이고, 서베를린의 중심지인 초 역에서 동베를린의 중심지인 알렉산더플라츠나 동남쪽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까지 30분 내로 이동할 수 있다. 호텔은 한 군데면 충분하다.

 

제대한지 얼마 안 되어서 짐 싸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라면 모를까, 짐 풀었다 다시 싸고 다시 체크인/아웃 하는 귀찮음을 감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장비 점검. 왼쪽은 프라하에서 산 전철 1일권, 오른쪽이 베를린의 교통카드인 웰컴 카드다. AB지역 5일권이라 36.5 유로. 1300원 기준이면 약 4만8천원 보면 된다. 6월 초만 해도 1200원대 초반이었는데 그새 또 올랐네.

 

아무튼 지역적으로 가까워서 그런지 두 티켓의 사용 방법이 똑같다. 처음 사용할 때 역이나 정류장에서 펀칭 기계에 대고 개통(날짜와 시간이 찍힌다)을 하면, 그날부터 정해진 날짜만큼 사용할 수 있다. 전철, 버스, 트램 모두 프리다. 그리고 수많은 식당/상점/문화공간 등등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 할인용으로는 딱 한군데에서만 써 봤다.

 

4일권이 4만8000원이니 하루 1만2000원 선. 처음 역에서 호텔 갈 때와 마지막 날 공항 갈 때 외에는 모든 교통을 이걸로 해결했다. 베를린에서 교통 편한 호텔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베를린은 시내 중심부터 A존, B존, C존으로 나뉜다. 우리는 시내 구경을 할 거라서 AB존용 카드를 샀고, 만약 외곽의 포츠담까지 갈 거라면 ABC존용 카드를 사면 된다.)

 

 

그리고 베를린 여행의 필수품인 뮤지엄패스. 이것만 있으면 3일 동안 베를린의 수많은 뮤지엄들을 그냥 입장할 수 있다. 24유로. 그런데 대부분의 뮤지엄들 입장료가 9~10 유로 정도 하기 때문에 3군데 이상만 들르면 본전은 뽑는다.

 

특히나 학생증이 있으면 12유로라니, 이건 정말 거저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예매해 둔 공연 관람을 위해 길을 나섰다.

 

 

 

호텔 남쪽. 비텐베르크 플라츠에 도착하자 시선을 확 차지하는 카데베 백화점.

 

동행인의 눈이 불타오른다. 백화점 건물을 통으로 씹어먹을 듯한 패기가 느껴진다. ㅠㅠ

 

 

전철을 타고 에른스트-로이터 Ernst-Reuter 역에서 내려 목적지인 쉴러 극장 Schiller Theater 를 찾는다.

 

(독일 여행을 하려면 입구=아인강 Eingang, 출구=아우스강 Ausgang 정도는 그래도 알아야 할 것 같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Staatsoper(State Opera, 그러니까 대략 '국립가극장'으로 번역된다)는 본래 시내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에 있는데, 본관은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그래서 현재는 쉴러 극장을 본거지로 사용중이다.

 

 

오늘의 공연은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파우스트의 겁벌 La Damnation de Faust'.

 

그래도 나름 오페라 좀 봤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한번도 보지 못한 작품이다. 예습하려고 DVD라도 볼까 했는데 그나마 DVD도 콘체르탄테(Concertante), 그러니까 오페라 콘서트 형식으로 연출된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공연된 DVD조차 국내에서 볼 수가 없는 오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보고 싶었던 건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당연히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지휘 사이먼 래틀, 주연 막달레나 코체나(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미세스 래틀이다), 그리고 연출 테리 길리엄이라는 이름 때문. 테리 길리엄... 아마도 '몬티 파이돈'을 아실 만한 분이라면 이 이름에 꽤 끌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래 영상에 나오는 '헝가리 행진곡' 같은 곡은 꽤 알려져 있고.

 

 

아무튼 공연을 앞두고 쉴러 극장 뒤편에서 식사를 한끼 해결하려다 희한한 곳 발견.

 

 

식당 이름은 Schiller Klause.

 

 

독일의 대문호 쉴러 선생의 이름을 딴 쉴러 대극장 바로 뒤의 식당인 만큼 뭔가 예술가들의 흔적 가득한 장소인데...?

 

 

놀랍게도 부페 레스토랑이다. 자, 수프 부페는 3.9유로, 큰 접시 하나에 먹고 싶은 만큼 담으면 4.9 유로.

 

그리고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싶은대로 원 없이 먹으면 7.9 유로다.

 

독일 물가고 체코 물가고 이건 너무 싼 가격 아닌가 ;;

 

"그럼 7.9유로 하자"는 동행인을 잠시 진정시키고, "우리 양으로 한 접시면 배가 터질 지도 모른다"고 설득.

 

 

 

그래서 이렇게 퍼 왔는데... 사실 음식 맛은 감히 권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싼게 비지떡이다.

 

하지만 몇몇 한정된 품목, 이를테면 프라이드 치킨(그런데 닭의 사이즈가 어마어마한듯. 닭다리가 주먹만하다)이나 소시지 같은 국제적으로 안전한 종목은 그냥 먹을 만 하다. 단지 다른 조리가 필요한 요리는 엄청나게 짜거나 뭔가 느끼한 맛이 강했다.

 

결론적으로 허기진 분들에게는 매우 좋은 선택일 수 있다. 한 접시 4.9유로만 어디냐.

 

 

 

생각보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청중의 수준은 나중에 간 베를린 필하모닉보다 훌륭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

 

하지만 오페라다 보니 청중 평균 연령이 60세 정도 되어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쉴러 극장 위로 달이 떠오르고,

 

좀 더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첫날부터 무리하지 말자는 여론에 따라 호텔로 귀환.

 

그리고 다음날 아침. 풀먼 베를린의 조식은 20년간 호텔 다녀 본 경험상 최상위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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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해가 기울 무렵, 천천히 호텔을 나서 구시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텔이든 민박이든, 한번 아침에 길을 떠나면 저녁에 녹초가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이제 좀 무리다.

그래서 핵심 관광 스팟에 가까운 호텔이 더 좋은 것이기도.

 

 

아무데서나 카메라를 대도 예쁘게 찍히는 프라하의 마법.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밤을 음악회와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프라하의 수많은 공연장에서는 쉴새없이 공연을 한다. 단, 거의 모든 공연들은 그저 '공연을 감상한다'는 목표에 맞춰져 있다.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 소위 말하는 관광객용 공연이다.

 

그런데 또 막상 들어 보면 돈 값 이상은 분명히 한다. 이유는 공연장들이 100년 200년 씩 된 교회 내부라는 데 있다.

 

프라하의 폭염을 피해 들어간 서늘한 교회 내부에서, 파이프 오르간과 오케스트라(소규모지만)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절로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만원짜리 공연이 10만원짜리 공연의 효용을 내는 순간이다.

 

지난 2000년 프라하에 들렀을 때, 우연히 길에서 나눠주는 찌라시를 보고 한 교회로 연주를 들으러 갔다. 그때 느꼈던 청량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비록 관광객용의 약식 연주회지만, 그래도 프라하를 가는 사람들이라면 꼭 시도해 보기를 권한다. 굳이 고르라면 성당 쪽을 추천한다(교회 공연도 많은데, 교회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없다^^).

 

 

오늘의 목적지는 틴 성당.

 

줄여서 그냥 틴 성당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틴 앞의 성모 성당'이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다. 체코어로는 Kostel Panny Marie Pred Tynem, 영어로는 Church of Our Lady before Tyn 이라고 한다.

 

지난번에 왔을 때 틴 성당의 내부를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함께 달래 보기로 했다.

 

 

 

엄청난 금빛의 물결. 성 비투스 성당보다 훨씬 화려한 색감이다.

 

팁 하나를 더 하자면, 일단 비싼 표를 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일찍 표를 살 필요도 없다. 틴 성당의 저녁 8시 공연은 최고가 1100 코루나(약 5만5000원)에서 500코루나 (2만5000원) 까지 매겨져 있다. 아마 500 코루나는 무슨 장애인 우대 티겟인가 그럴 거다.

 

하지만 늦게 갈수록 가격은 떨어진다. 왜일까. 어차피 공연은 하게 되어 있고, 한 사람이라도 더 들어오면 이익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공연 시작 시간에 임박해서 도착하기 바란다. (매진돼서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은 금물. 자리가 다 차면 보조의자 놓고 들여보낼 사람들이다.) '공연이 곧 시작하니 표를 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말하기 바란다.

 

'Discount Please!'

 

그 먼데까지 가서 체면 구길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냥 들어가시면 된다. 그 자리에서 당연히 할인을 해 준다. 오래 버티면 버틸 수록 싸 질 것을 확신하지만, 아무튼 적당히 타협을 해서 적당한 가격을 할인받고 들어가시기 바란다.

 

(할인율을 여기서 딱부러지게 쓰지는 않겠다. 각자 알아서 적당히 깎으시길.)

 

 

파이프오르간은 뒤에 있는 구조.

 

 

폰 카메라의 파노라마 기법을 좀 잘못 썼더니 기둥이 휘었다. 아무튼 이런 천장 아래서 음악을 듣는다.

 

멋지지 않나?

 

 

천장 한가운데 합스부르크의 독수리 문장.

 

역시 '그것 또한 우리의 역사'라는 체코 식 사고방식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8명 정도의 단원이 등장하는 Royal Chech Ochestra의 연주 시작.

(대체 왜 Royal이 들어가는지 매우 의문이지만)

 

연주곡은 비발디의 4계, 파헬벨의 캐논, 그리고 프라하이다 보니 당연히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블타바' 등.

 

그렇다. 클래식 좀 들으시는 분들이라면 입문 후 3개월 이내에 듣게 되는 곡들이다(엔딩 곡은 무려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 곡들을 자유자재로 특정 악장만 잘라 내 공연하는 등 전형적인 팝스 오케스트라의 선곡이다. 중간에 독주자로 나온 분은 체코 필하모닉의 악장 출신이라고 하는데... 뭐 누가 확인해 볼 것도 아니고.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대단한 예술적 경험'을 기대하실 만한 공연은 아니고 - 물론 프라하에서는 그런 공연도 매우 자주 열린다 - 이런 장소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게 매우 이색적이고 영혼을 맑게 해 준다는 것을 한번 경험해 보시라는 뜻에서 추천한다. 각자의 스케줄과 컨디션에 맞춰서.

 

 

공연이 끝나고 구시가 광장 쪽으로 나오면 보게 되는 풍경. 후스 동상과 성 니콜라스 교회 (참, 프라하에는 성 니콜라스 교회가 두 개 있다. 이건 구시가 광장 옆의 니콜라스 교회다)를 배경으로, 거의 항상 거리 예술가들이 판을 벌인다.

 

 

 

아마도 프라하라는 도시가 있는 한 영원히 만남의 장소일 구시가 광장의 얀 후스 동상.

 

"이번주 토요일 6시에 후스 동상 앞에서 만나" "알았어" 이런 대화가 수없이 오갈.

 

그런데 지금 저녁 9시다. 아직도 날이 너무 훤하다. 서머타임의 위력을 감안해도 너무 밤이 짧다.

 

 

그래서 일단 강 쪽으로 걷고 또 걷다가 적당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Mistral Cafe. 구시가 광장에서 마네수프 다리 쪽으로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

 

 

Mistral Cafe

Valentinská 11/56
110 00 Praha 1 - Staré Město

 

 

Hovězí maso 150g ve svíčkové omáčce s domácím bylinkovým knedlíkem 이라는 이름의 요리다(좌하단). 200 코루나 정도 하는데 정말 기막힌 맛이다.  대략 안심 그레이비 소스에 버무린 살코기(Beef with Sirloin Gravy 정도?) + 덤플링 이라는 뜻인데, Svíčková omáčka 에 핵심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식당에서라도 꼭 드셔 보시길.

 

나머지는 상식적인 음식들이다. 쇠고기 슈니첼, 팬에 구운 야채, 그린 샐러드. 다 기본 이상의 맛이다. 매우 훌륭

 

아무튼 저렇게 차려 놓고 먹으면 음료까지 한 4만원 정도.

 

 

 

사실 손님은 건너편의 꼬치집^^이 더 많았다. 체코에서는 아마도 스피지 Spizy 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러시아의 샤슬릭이나 그리스의 수블라키 같은 꼬치 구이 요리가 체코에서도 꽤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내부는 꼬치 굽는 연기도 자욱하고, 사람들이 미친듯이 맥주와 꼬치구이를 먹으며 떠드는 분위기. 가격도 꽤 저렴해 보였다. 일단 사람이 많길래 저 집을 가볼까 했지만 빈 자리가 없어서 조용해 보이는 앞집으로 왔는데, 음식을 먹어보고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신나게 저녁을 먹고 강쪽으로 나섰다. 해가 이제서야 뉘엿뉘엿 서산으로.

 

 

 

 

 

 

 

막 운치있게 예쁘고 그렇다.

 

 

아무데나 대충 들이대도 그냥 그림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강가로 나오면 건너편에 뜨악 나타나는 프라하 성의 전경.

 

 

 

강가 관광식당에선 관광객들의 식사가 한창. 조명 때문에 나무 색이 계속 바뀐다.

 

 

관광객 티를 팍팍 내면서 이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찾아보니 이 집 http://marinaristorante.cz 인듯. 청담동 보단 싸다.

 

 

 

 

 

찍어도 찍어도 성에 안 차고 자꾸 또 찍고 싶어지는 프라하성의 마력

 

이럴때 해보고 싶은게 카메라 성능 테스트다.

 

밤 촬영에 특히 강한 RX100 시리즈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잡아당겨질까?

 

 

 

이 정도가 한계인 듯. 아무튼 카를교 위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성 야경은 언제 봐도, 누가 찍어도 최고다.

 

 

 

카를 교 동쪽 광장은 항상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일단 저 다리 끝을 알리는 탑이 사진의 배경으로 그만이기도 하고.

 

저 자리에서 두 남자와 한 여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들 20대 초반으로 보인다. 허물없이 예쁘고 잘생겼다.

 

여자가 두 남자에게 말했다. "어머, 그럼 정말 여기서 헤어지는 거에요?" 두 남자는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뭐라고 대답을 하는데,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그 말 한마디에 세 사람의 관계가 그려진다.

 

세 남녀는 이번 여행길에 만났다. 어제 만났는지, 그제 만났는지, 오늘 아침에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의기투합해서 프라하 구경을 같이 하기로 한다. 그래서 쟁하니 해가 밝은 토요일, 프라하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그 기한은 오늘 밤까지. 프라하 구경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카를교 위에서 프라하 성 야경 보기'를 마친 뒤 두 남자는 원래 정해진 대로 여자에게 "이제 우리는 갈 길(아마도 시간으로 보아 프라하 역에서 떠나는 야간 열차가 아닐까 싶다)을 갈테니 아쉽지만 여기서 헤어지자"고 말을 한 상태인 것 같다.

 

여자의 마음 속이 과연 어느 쪽인지, 정말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예의인지는 알 수 없다. 두 남자 중 누가 여자에게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하루 다녀 보고 여자에게 질려 예정보다 빨리 이별을 선언해 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쩐지 프라하의 야경을 배경으로 이런 얘기를 듣고 보면,

 

저 세 사람이 나중에 어디선가 다시 만나 프라하에서 함께 보낸 그날을 얘기하는 미래를 상상해보게 된다.

 

 

 

뭐 아무리 메마른 사람도 이런 경관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삼각관계로 발전... 까지는 몰라도.^^

 

 

 

하늘도 파랗고... 밤인데도 파랗다.

 

 

 

이렇게 해서 프라하 여행은 일단락.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집을 들렀는데 분위기도 딱 1980년대 서울의 '하이델베르크'인데다 손님의 절반이 동양인, 나머지 절반 중 절반도 관광객으로 보였다. 큰 감흥 없는 마무리.

 

17년 전에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뭔가 롯데월드 같은 느낌이 난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무데나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오지만 어딘가 짙은 감흥을 주지는 못하는. 하긴 두 번 합해서 딱 3일 머물고 무슨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저 파란 저녁 하늘과 금빛으로 빛나는 성의 모습을 보면 저만한 볼 거리가 또 있을까 싶은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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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를 기억하실 분이라면 아마도 연식이 꽤 있는 분일게다.

 

1975년작. 대략 한 1990년대 초까지는 가끔씩 명절때 TV에서 방송해주곤 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5월27일. 히틀러가 '강철 심장을 가진 사나이'라고 불렀던 심복 중의 심복이자 독일군의 체코 총독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Reinhart Heydrich 가 출근길에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영국의 지원을 받은 체코 출신 낙하산병들의 영웅적인 테러.

 

전 체코 주둔군은 비상이 걸렸고 무자비한 색출작전 끝에 배신자가 발생, 실제 하이드리히를 습격한 2명을 포함해 7명의 낙하산병들이 한 교회에 숨어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탄환이 떨어질 때까지 그들은 수백명의 SS대원들을 상대로 저항했고, 마침내 교회 지하 묘지에서 서로의 머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강렬함. TV 방영 후에도 어떤 극장에선 태연히 이 영화가 상영되곤 했다. '가슴을 찢는 프라하의 이별'이라는 카피가 지금도 생각난다. 어쨌든 프라하에서 이틀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므로, 당시의 현장이 남아 있으면 가 보고 싶었다.

 

검색해 보니 있다.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 교회 St. Cyril and Methodius Cathedral. 동유럽이나 러시아 지역에서는 키릴과 메소디우스라는 형제 성인의 이름을 마주칠 때가 꽤 많다. 이들은 기독교 성직자인 동시에, 당시 문화적으로 야만에 가까웠던 슬라브족에게 문자와 문명을 가져온 인물들로 추앙받고 있다.

 

이런 이름에서 당연히 유추할 수 있듯, 이 교회는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니다. 동방정교회 계열의 교회다.

 

이렇게 프라하는 세 종류의 기독교가 공존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지하철 Karlovo Namesti 역에서 내려 3분만 걸으면 바로 교회가 나타난다. 아주 큰 교회는 아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부터 벌써 사람들이 뭔가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복원하지 않고 남겨 두고 있는 총알 자국.

 

'그날'의 교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흔적이다.

 

그리고 총알 구멍 복판의 긴 사각형 모양,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로 그 구멍이다.

 

지하실에 갇힌 낙하산부대원들이 절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구멍.

 

 

 

지금도 누군가 계속 꽃과 촛불을 바치고 있다.

 

 

교회 내부.

 

 

영화와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사실 이 교회가 그때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만 알았지, 영화도 이 교회에서 촬영됐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영화 장면을 찾아 보니 바로 이 현장이었다.)

 

 

 

 

 

천정화나 난간이나, 당시 꽤 큰 격전을 치른 실내인데도 수리는 말끔하다. 외부의 총알자국을 일부러 남겨 놓은 것 외에 교회 경내에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성당 밖으로 나오면, 바로 지하실 안내 표지가 붙어 있다.

 

 

 

지하실 입구. 간판 내용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Heydrich 라는 부분은 눈에 확 들어온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매우 상세한 전시공간이 나타난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사진 가운데 인물). SS 방첩부 및 제국보안부 수장. 보히미아 총독. 유대인 색출과 박해의 주역이며 나치 치하에서의 유대인 학살은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마스터플랜에 따라 진행되었다고 한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58881931

 

로랑 비네의 소설(인지 다큐인지 헷갈리는) 책 'HHhH'에 따르면 그는 악마같은 두뇌의 냉혈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치의 유력자들도 그를 두려워했고, 히틀러의 신뢰는 누구보다 두터웠다. 히믈러나 괴링보다 그가 덜 유명한 것은 아마도 전쟁 전반기가 끝날 무렵 암살당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이드리히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던 암살자들의 장비.

 

저 영국제 스텐 기관총은 결정적일 때 격발사고를 내 자칫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뻔 했다.

 

5월27일 오전. 요세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는 프라하 성으로 출근하는 보히미아 총독 하이드리히를 암살하기 위해 길 모퉁이에 매복하고 있었다. 암살 위협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드리히는 벤츠 오픈카로 출근하기를 고집했다.

 

차가 급커브를 돌기 위해 속도를 줄인 순간, 가브치크가 차 정면으로 뛰어들어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총기 고장. 암살자나 암살 대상이나 얼어붙은 채로 몇초가 흘렀고, 가브치크는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이드리히의 운전기사는 총을 들고 가브치크를 쫓았고, 그 순간 대기하던 쿠비시가 폭탄을 던쳤다. 뒷바퀴 아래에서 폭탄이 터졌다. 중상을 입은 하이드리히는 사고 직후에도 총을 꺼내 응사하는 기개를 보였으나 이내 쓰러졌다.

 

 

하이드리히가 탔던 차의 잔해.

 

하이드리히는 병원에 실려간 뒤에도 의식이 남아 있었지만 당시의 의료 기술로는 완벽하게 파편을 제거할 수도, 수술 후 감염을 막을 수도 없었다. 결국 8일만인 6월4일, 하이드리히는 사망했다.

 

암살 성공의 쾌거는 즉시 알려져 연합국들을 기쁘게 했지만 나치의 보복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암살자 중 하나인 요세프 가브치크의 생전과 발견된 시신의 모습.

 

낙하산병들이 처음 강하해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마을 하나를 아예 초토화시키는 등 잔혹한 범인 색출 작전이 이어졌다. 결국 낙하산병 중 하나가 배신하면서 이들의 소재가 알려졌다.

 

1942년 6월18일. 습격 22일만의 일이다.

 

 

교회 위층에서 1차 교전이 벌어졌고, 그들이 전부가 아니라고 판단한 SS 부대원들이 다시 수색을 펼쳐 마침내 지하실의 존재가 드러났다.

 

 

전시관 안쪽에 철문이 있다. 철문 안쪽이 바로 '새벽의 7인'의 주인공들이 최후를 맞은 곳.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으로 환기구가 보인다.

 

건물 밖에서 환기구는 그냥 벽의 색으로 보일 뿐이지만 지하실에서는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통로다.

 

 

오른쪽 아래는 이들이 절망적으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아 벽을 파헤친 흔적이다. 이들은 지하실 벽 어딘가가 강으로 이어지는 하수도와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런 부분에서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 후반부에선 뭔가 '새벽의 7인'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건너편은 본래 이 지하실의 목적인 묘지의 흔적

 

.

 

저 안쪽 계단이 교회 제단 밑으로 통하는 본래의 출입구다.

 

 

무조건 범인들을 생포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몇 차례 지하실 진입에 실패한 SS는 일면으로 회유를 벌이는 한편, 일면으로 최루탄과 물을 이용한 공격을 시도한다. 환기구를 통해 수공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

 

 

소설 'HHhH'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상할 정도로 영화 '새벽의 7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킬리앙 머피가 주연한 '안드로포이드'라는 영화에 대해서는 줄곧 얘기하고 있다.

 

사실 '새벽의 7인'의 원제는 'Operation Daybreak', 즉 '새벽 작전' 인데 실제 하이드리히 암살 음모의 작전명은 Operation Androphoid, 즉 '유인원 작전'이었다. 하이드리히를 고릴라로 설정한 것일지.

 

 

안쪽까지 이어진 묘지 공간이 모두 추모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역사적인 장소에 왔다는 기념으로 한 컷.

 

여행 전부터 계획하고 온 곳이 아니라 그런지 감회가 더 컸다.

 

 

 

큰길쪽으로 걸어 나오면 프라하의 새로운 명물 중 하나인 댄싱 하우스 Dancing House가 나온다. 1996년 완공된 건물로 체코계인 블라도 밀루니치와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합작품. 프랭크 게리 스타일 대로 뭔가 철근과 콘크리트를 다소 위태롭게 보이게 쥐고 흔든 느낌이 강렬하다.

 

프로젝트 이름은 '프레드 앤 진저'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실제로 춤추는 두 남녀의 이미지가 출발점이다. 현재는 오피스 겸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중이라고. (물론 가우디도 그렇듯 건축미를 자랑하는 천재들의 건물이 막상 입주해 보면 거주자의 편안함은 약간 뒷전으로 밀린 듯한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전적인 건축미를 뽐내는 국립극장 앞을 다시 지나 블타바 강의 동쪽 강변을 따라 걷는다.

 

왠지 국립극장 옥상에는 루이비통 백이 올라가 있는 느낌.

 

 

 

국립극장 바로 앞에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카페 카바나 슬라비아 Cavana Slavia가 버티고 있는데, 너무 관광객 티를 내고 싶지는 않다는 동행인의 의사를 존중해 일단 패스.

 

 

 

그래서 모스트 레기이 Most Legii 다리를 지나쳐서 30미터쯤 강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스메타나Q SmetanaQ 라는 이름의 매우 모던해 보이는 카페가 나온다. 건물 전체가 갤러리와 화구점으로 채워져 있다.

 

 

천장이 높고 모던하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공간

 

 

 

창밖으로 블타바 강이 보이고

 

 

요구르트와 주스, 케이크, 샐러드, 샌드위치 등 닥치는 대로 시켜도 개당 한국 돈으로 3000~5000원을 넘지 않는다.

 

 

 

안쪽으로 있는 야외석의 깔끔한 느낌까지. 오래 앉아 있기에 적당한 장소다.

 

브런치 용으로도 매우 좋고. 음식 맛도 훌륭.  Smetanovo nábř. 334/4, 110 00 Praha 1-Staré Město

 

 

 

 

블타바 강 건너편으로 프라하 성을 다시 한번 봐 주고

 

토요일 오전의 마지막 구간으로 하벨 시장 Harvel's Market 을 찾았다.

 

 

하벨 시장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허공에 매달린 남자를 마주쳤다.

1초간 놀라지만 잠시 뒤면 진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이 매달린 남자의 정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1996년 체코 조각가 다비드 체르니 David Cerny 가 만든 작품으로, 프로이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평생 오만가지 공포증에 시달리다 결국 암 투병 중 동료 의사의 도움으로 몰핀을 투여해 자살한 프로이트라면 늘 저렇게 절벽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살았을지도.

 

이 조각의 공식 명칭은 '매달린 남자' Zavěšený muž” (영어로는 Man Hanging Out 이란 뜻).

 

(그런데 왜 프라하에 난데없는 프로이트... 알고 보면 프로이트의 고향인 프라이부르크는 현재 체코 영토다)

 

우리는 우연히 마주쳤지만 미리 알고 가도 한번쯤 볼만하다 싶은 강렬한 인상의 조각품이다.

 

 

미로같은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 속에서 어찌 어찌 헤매다가 어떻게 저 조각과 딱 마주치게 됐는지, 그것도 참 인연이 아닐까 싶다. 가로 세로가 직각이 아니라 뭐라 설명하기도 참 힘든데, 아무튼 지도상으로 볼 수 있지만 카를교나 구시가 광장에서 멀지 않고, 하벨 시장과는 지척이다.

 

주소는 Husova, 110 00 Praha 1p-Staré Město

 

 

 

아무튼 몇 번을 헤매고, 길을 묻고, 하다가 찾아간 하벨 마켓... 인데,

 

파는 물건도 매우 한정돼 있고, 물건의 질은 매우 낮고... 그냥 10명 20명 똑같은 물건 사서 기념품으로 나눠주는 용도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느낄 수 없었다. 매우 실망.

 

뭣보다 시장의 매력인 길거리 음식 매장도 거의 없었고, 매장 10개 중 1,2개 꼴로 있는 과일가게가 눈길을 끌었다. 딸기며 체리 같은 나무열매(berry) 계열 과일들을 사서 그 자리에서 길가의 음료수대에 씻어 들고 다니며 먹는 풍류가 제법 그럴듯 해 보였으나 과일 가격이 너무 비싸. 한국에서 한 팩에 8000원 정도 하는 분량의 체리 값이 15000원 정도.

 

개인적으로 결론은 일부러 들를 가치는 별로 없다, 입니다.

(뭐 이런 거 특별히 좋아하시는 분도 있을테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 ^^)

 

아무튼 프라하의 땡볕을 피해 잠시 후퇴 후 휴식이 필요했고,

 

 

 

그리고 바로 프라하의 마지막 밤 구경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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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0년 전에도 존 레논의 벽은 존재했지만 그때는 잘 몰랐다.

(제목과의 호응을 고려해 첫 사진으로 넣음. 주요 내용은 나중에.)

 

다시 프라하 성으로 돌아간다.

 

 

 

오후의 햇살이 프라하 성의 돌바닥을 지글지글 달굴 무렵, 프라하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성 조지 성당 St George's Cathedral 로 들어갔다.

 

세인트 조지 St. George 는 잘 알려진대로 용을 죽인 용사이며 성인이고,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이다. 물론 잉글랜드에서만 추앙받는 것은 아니고, 유럽 전역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어떤 미술 작품을 볼 때 긴 창을 들고 용과 싸우고 있는 캐릭터가 있다면 성 조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거.

 

당연히 성 조지는 영어 이름. 체코에서는 이르지 Jiri 라고 불린다. 역시 저렇게 쓰고 이르지라고 읽는다고 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다. 체코 출신인 유명 발레 안무가 이르지 킬리안 Jiri Kylian 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리 킬리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현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는데 따져 봐야 아무 소용은 없다.

 

 

가장 오래된 건물답게 살짝 기운 느낌도 있는데 돌 건물의 특징상 내부는 무척 시원하다. 프라하의 태양에 지친 사람들은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 활용할만한 성당이다.

 

 

 

천장에는 성 조지의 활약에 대한 그림이 지워져가고 있고,

 

 

거의 매일 콘서트가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울림은 기가 막힐 듯.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열리는 콘서트도 관람 후보로 고려했다.

 

 

이렇게 해서 프라하 성 관광이 대략 끝났다. 이제 나가는 길. 왼쪽 끝의 1번 위치가 바로 성의 정문인데, 들어갈 때 4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가는 건 정문 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나가면서 정문을 봐야 하기 때문.

 

 

 

안쪽에서 정문을 바라보면 이런 풍경이다. 성 밖을 나서자마자 바로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밖에서 보면 이런 모습. 누차 강조하지만 성벽이 없기 때문에 성문도 없는 셈이다.

 

 

 

문제는 정문의 이 두 거인상. 둘 다 승자가 패자를 몽둥이로 내리치거나 칼로 찍는 모습인데, 이 역시 체코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굴욕적인 모습을 정문에 남겨놓는다니...

 

...아무래도 체코 사람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자나 성을 나와 강 쪽을 바라보면 이런 붉은 지붕의 물결을 보게 된다.

 

프라하를 상징하는 풍경 중 하나.

 

 

 

이런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스타벅스가 있는데 스타벅스가 너무 붐비는 것 같아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내리막. 프라하 성에서 카를교로 가는 길이다.

 

 

(프라하 성에서 존 레논의 벽을 거쳐 카를교까지 가는 길을 빨간 선으로 표시했다. 확대해서 보면 잘 보임)

 

프라하 성을 나와 바로 보이는 빨간 기와지붕 속으로 걸어 내려가는 길. 일단 한번 꺾으면 바로 유명한 네루도바 거리가 나온다. 각국 대사관, 유서깊은 상점 등이 몰려 있는 역사의 거리다.

 

 

 

 

시인 얀 네루다가 살았던 집이라고 함.

 

기울어진 햇살이 따가운 길을 걸어내려가면,

 

 

강 서쪽의 성 니콜라스교회(프라하에는 두 군데의 성 니콜라스 교회가 있다. 또 하나는 구시가 광장 귀퉁이에).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성당과 교회가 각각 많이 있다. 카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심지어 다음날 간 곳은 동방정교회 성당이다.)

 

니콜라스 교회에서 다시 내려가는 모스테츠카 거리는 유명한 술집이 많다고 한다.

 

 

그렇게 골목을 지나고 지나, 갑자기 나타나는 컬러풀한 장벽.

 

 

 

꽤 길다. 거대한 낙서판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유명한 존 레논의 벽 Lennon Wall 인데, 사실 레논은 살아서 여기에 온 적도 없고, 이 벽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사실 존 레논과 비틀즈의 노래가 가진 정서를 표현하는 낙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나, 굳이 왜 존 레논 월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1980년대, 구 소련 위성국가로서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권위주의적 통치에 마지막 안간힘을 쓰던 무렵 서구로부터 불어온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 불만이 표출된 공간인 것은 분명하다.

 

 

'Imagine'같은 레논의 노래는 일반적으로 좌파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라는 의견을 듣는데,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레논의 노래가 반항 내지는 반정부 의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참 얄궂다.

 

물론 20세기 후반 동유럽 사회주의가 진짜 사회주의냐...를 따지자면 그건 또 다른 얘기. 

 

 

 

낙서판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그 누구도 이 벽에서 똑같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낙서를 덧쓰고, 덧그리기 때문이다.

 

물론 굉장히 후진 낙서를 한다면 누군가 바로 와서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듯.

 

 

그리고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가이드의 말이 있었다. 뭘?

 

...누군가 지금도 열심히 낙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벽에 바짝 붙을 것이라면 반드시 벽 위의 낙서가 굳은 다음인지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다.

 

...그럴 듯 한데?

 

(잘못 고르면 등에 그대로 묻어 나오는 수가 있다.)

 

 

 

그래서 후방에 혹시 덜 굳은 물감이 있는지 꽤 세심하게 확인한 뒤 fly.

 

땀은 엄청 흘렸지만 상쾌함.

 

 

 

그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카를교가 나온다.

 

 

 

언제나 인산인해.

 

잡상인, 버스킹, 관광객, 소매치기가 많다고 소문난 곳이기도.

 

 

 

이렇게 다리 난간마다 간격을 맞춰 옛 성현들의 조각상이 서 있다. 아시다시피.

 

별 흥미는 없다.

 

 

...만 그 혀가 잘린 네포무츠키 성인은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니 한번 참아 본다.

 

 

그래도 다리니까 일단 강을 한번 봐 주고

 

 

 

다리를 다 건너서야 프라하 성 쪽을 바라볼 정신이 든다.

 

진짜 덥다. 쨍 하는 햇살.

 

 

카를교의 성루.

 

이 아치를 지나서 구시가 광장까지는 다시 도보 가능 거리다.

 

 

 

 

이중 저 위의 맥주집/레스토랑 코슬로브나 Koslovna 를 가 봤으나 손님의 2/3가 한국인...

 

 

암튼 그렇게 한 10분 걸어서 구시가 광장의 주인공인 틴 성당의 예쁜 자태를 다시 보고,

 

 

 

역시 너무나도 유명한 천문시계탑을 보는 것으로 이날의 일정 끝.

 

아침 8시에 집합해 물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중간 중간 쉬기도 했지만, 아무튼 오후 7시까지 11시간을 걸어다녔다.

 

서울에선 돈 준대도 안 할 일을 여기선 돈 내가 가면서 한다.

 

아무튼 천문시계는 주변 보수중이라 어수선하다. 인형극 봐 봐야 뭐 대단히 신기할 것도 없고.

 

일단 서있기도 힘들 지경으로 구시가 광장에서 약 10분 거리인 호텔로 후퇴.

 

 

가는 길에 화약탑(좌)과 시민회관(우)이 있다.

 

시민회관 내부의 스메타나 홀에서 이날 저녁 '프라하의 봄' 음악제 마지막 날 공연이 잡혀 있었다.

 

펜데레츠키가 저자직강 아니고 자신의 교향곡 7번을 직접 연주하는 스케줄.

 

볼까말까 망설이는 사이 매진돼 버렸다.

 

 

 

화약탑을 지나면 바로 숙소.

 

아침 8시에 바츨라프 광장에서 집합해 저녁 7시 구시가 광장에서 해산.

 

중간중간 쉬기도 했지만 근 12시간에 걸쳐 초강행군을 한 셈이다.

 

저질체력 중년부부 실신.

 

 

 

그래도 잠시 쉬었다가 뭘 좀 먹고 자자며 기어나왔다.

 

 

 

틴 성당 야경은 여전하고,

 

 

 

골목 하나만 들어오면 바로 딴 세상 느낌.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식당에서 굴라쉬를 주문했다. 용기가 빵이다.

 

그럴듯 한데 짜다.

 

엄청 짜다.

 

짜서 빵이랑 먹어야겠다고 빵을 허물어뜨려 같이 먹었다.

 

더 짜다.

 

나중에 보니 그릇(빵)이 굴라쉬보다 더 짜다.

 

제길.

 

 

분노를 달래기 위해 명성 높은 굴뚝빵 뜨레들로로 입가심 시도.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맛이다.

 

빈 빵만 먹으면 60코루나, 아이스크림을 가득 채우면 120코루나.

 

맛있다. 매우 맛있다.

 

 

밤의 화약탑과 시민회관.

 

1층 레스토랑 앞에 보디가드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고, 정장과 드레스 차림 남녀들의 만찬이 한창이다.

 

프라하의 봄 음악제 폐막 관련 행사가 아닐까 싶다.

 

 

 

카를교 야경 관람을 잠시 생각했으나 체력저하로 일단 후퇴. 호텔로 돌아오는 길 상점 창에는 다양한 상표의 압상트 병이 녹색 빛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압상트도 이 동네가 본고장이었나...

 

 

 

그리고 다음날, 언젠가 한번 가 보리라 생각했던 곳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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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다들 좋다고 할 때는 역시 다 이유가 있다. 프라하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 다니는 곳은 카를교프라하 성, 그리고 구시가 광장 이다. 그리고 볼거리로 따지자면 역시 프라하 성이다. 그런데 프라하 성에 가면 프라하 성이 보이지 않는다(볼 수가 없다).

 

위 사진 같은 모습을 보려면 프라하 성을 내려와 강을 건너야 한다. 강 건너, 혹은 카를교를 비릇한 여러 다리 위에서 보는 프라하 성이 제일 아름답다. 간혹 프라하 성의 야경을 보기 위해 밤에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바보 짓이다.

 

가까이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멋지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게 프라하 성의 비밀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 나온다.

 

 

 

프라하의 핵심 지역. 왼쪽 붉은 원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프라하 성이다. 동서로 살짝 긴 고구마같이 생겼다.

 

블타바강은 프라하 시내를 구불구불 관통하기 때문에 딱 뭐라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대략 남에서 북으로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울처럼 강남과 강북이 아니라, 대략 강동과 강서로 도시를 가르는 셈이다.

 

프라하 성은 블타바 강을 기준으로 강서 지역의 고지대에 다소 비스듬하게 위치해 있다. 따라서 위 지도에 Charles Bridge 라고 나와 있는 카를교에서 볼 때 정면을 마주할 수 있다.

 

프라하 주변의 고지를 찾자면 오전에 갔던 비셰흐라드와 이 프라하 성(체코말로는 프라쥐스키 흐라드 Prazsky Hrad 라고 한다고 한다) 정도인데 특히 이 프라하 성의 위치는 프라하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이므로, 프라하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수없이 성을 지었다 개축했다 했던 곳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항공사진. 성이라고는 하지만 프라하 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성이나 옹성의 느낌이 아니다. 즉 성벽이 없다. 성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건물과 창들이 죽 자리잡고 있으니 막상 안에 들어와서는 건물은 많이 봤는데 저게 성이었어? 하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그나마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북쪽 면은 대다수 관광객들의 눈으로부터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비교 대상을 알함브라 궁으로 삼는다면, 이게 주변에 일단 성벽과 해자로 민간 세계(?)와 성을 딱 구분해 놓고 시작한데다 알카자르 같은 요새의 흔적도 있으니까 아 여기가 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프라하 성은 그런게 전혀 없다. 그냥 촘촘하게 붙어 있는 빌딩들이 성처럼(!) 빙 에둘러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앞서 말했듯 처음에는 성곽도 있고 요새도 있고 했던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불필효한 요소는 치워 버리고, 그냥 건물들로 둘러싸인 성이 되었다는 그런 얘기다.

 

 

위 항공사진과 이 지도를 같이 보면 이해가 쉽다. 이 지도의 굵은 선들이 모두 성벽이 아니고 건물이다. 물론 비상시에는 성벽 역할을 하겠지만, 이미 화약무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 이후에도 계속 이 성이 증축되고 사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성벽과 해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이 성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누가 봐도 성당같이 생긴 저 큰 건물 말이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이 정도밖에 안 보인다.

 

 

 

 

그러다 회랑을 통과하면 갑자기 큰 건물이 훅 눈에 들어오는데 그게 대단히 인상적.

 

 

 

 

이렇게 불쑥 등장한다. 알고 보면 건물의 서쪽면인데, 큰 원형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인다.

 

 

 

이 성당 역시 이 성과 역사를 같이 해서 수백년간 건설되고 수십번 개축됐다.

 

저 디멘터같이 생긴 가고일은 언제부터 있었을지.

 

 

 

 

사실 성 비투스 대성당을 한바퀴 돌다 보면(돌기 싫어도 입장 줄이 길어서 한바퀴 돌지 않을 수 없다) 성당의 주인공이 저 가고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고일이 유독 눈에 띈다.

 

 

 

큰 성당 좀 다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고일은 본래 높은 곳에 괸 빗물을 흘려보내는 배수구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오래전에 본 '노틀담의 꼽추'에서는 콰지모도가 저 구멍으로 끓는 물을 부어 침입자들을 물리치기도 하는 모습이 나온 듯.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불확실할수도 있음. 미리 발뺌.)

 

아무튼 몸을 한껏 뒤로 젖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성 비투스 대성당을 바라보니 뭔가 아찔하면서 멋지다.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 일단 볼 수 있는 3개 사면을 같이 보는 것을 권장한다.

 

 

방금 전에 본 모습이 서쪽 정문, 즉 두개의 첨탑과 원형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면이었고,

 

 

 

이게 남쪽 면이다. 중앙 탑 양쪽으로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주르르 도열돼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대쪽인 북쪽 면은 첨탑이 없고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쪽이 성당의 동쪽 면. 즉 주 제단 High Altar 가 있는 쪽이다. 곧 날아오를 것 같은 용의 형상이다.

 

유럽지역의 대성당들을 볼 때마다 어딘가 dragon의 느낌을 건물에 담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약 20년 전 프라하에 처음 왔을 때, 이 비투스 대성당의 동쪽 면이야말로 사악한 용의 느낌이 난다고 생각했더랬다. 경외감을 넘어 다소 공포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아무튼 이런 모습의 성당이다. 안으로 들어감.

 

 

 

서쪽 입구로 들어가 동쪽 주 제단 High Altar 쪽을 바라본다. 역시 용의 등뼈같은 저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세비야나 밀라노의 대성당을 보고 온 사람들에겐 그리 큰 감흥은 없다. 대성당들의 구조는 거의 비슷비슷하기 때문. 하지만 이 성 비투스 대성당에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바로 아르누보 시대에 대폭 교체된 스테인드글라스.

 

다른 거대 성당들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비해 대단히 장식적이고 화려한 맛이 있다.

 

 

외경에서도 볼 수 있듯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줄지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스타 중의 스타가 있는데,

 

 

 

바로 이 분.

 

 

 

 

그림체를 보면 딱 아실 수 있는 알폰소 무하 님의 작품이다. 대부분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이 모자이크를 기본 표현 수단으로 삼는데 이건 그림이다. 20세기 초의 작품이라 그런지 아직도 매우 선명하고 아름답다.

 

 

 

 

흥미로운 것은 하단의 이 요상한 표시. 많은 사람들이 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 "대체 방카 슬라비아가 뭐야?"하는 궁금증을 갖는다. 답은 PPL이다. 상업미술의 대가인 무하 님의 작품을 여기에 설치하기 위해 자금을 댄 후원사가 바로 BANKA SLAVIE 라는 은행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하 님은 저렇게 대문짝만하게 후원 마크를 박아 주셨다. 기업광고의 효시... 정도 될 것 같다.

 

(이 슬라비아 은행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거나, 이름이 바뀐 것 같다.)

 

 

 

건물 북쪽으로 2층에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 구조가 다소 특이했다.

 

 

 

바깥 사진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방문자가 서쪽으로 들어와 동쪽의 주 제단 High Altar 을 바라보면 이런 뷰가 나온다. 새벽 미사 때면 저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 것이고,

 

 

 

채광창으로 이렇게 빛이 들어와 실내를 더욱 신비롭게 하고 있었을 거다.

 

 

 

프라하 여행을 가면 꼭 듣게 되는 '성인 네포묵'과 관련된 그림. 14세기 말 프라하 대주교였던 얀 네포무츠키 Jan Nepomucky 는 왕비의 고해 내용을 알려달라는 국왕의 부탁을 거절한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결국 혀를 잘린 채 카를교에서 강물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았다(당연히 죽었다). 그런데 그 뒤로 카톨릭 사제의 의무(고해성사의 비밀 준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공로를 높이 인정받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체코말로는 얀 네포무츠키, 독일식으로는 요하네스 폰 네츠무크라고 불리는 분의 일대기다.

 

그림 좌하단에 왕비의 고해를 듣고 있는 네포무츠키의 모습이 있고, 오른쪽엔 국왕으로부터 직접 신문당하고 있는 네포무츠키의 모습이 있다. 그러니까 왼쪽 아래 모습은 자료화면인 셈이다.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그 그림 바로 옆에 이렇게 네포무츠키 성인의 화려한 관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물론 시신은 없다). 은 2톤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묵으로 신의를 지킨 그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저렇게 맨 꼭대기에 잘린 혀를 강조해놓고 있다. 맨 위, 천사 옆의 방패에 새겨진 명란젓같은 형상이 바로...혀다.

 

 

그리고 성당 남쪽 면에는 아마도 근대에 만들어 넣은 듯한 체코의 국가 문장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유럽을 다니다 여러 나라의 문장을 보다 보면 세상에 동물이 사자와 독수리밖에 없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자와 독수리는 인기있는 동물이다. 체코 역시 국가를 상징하는 동물로 사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잘 보면 꼬리가 두개라는 점이 특이하다. 잉글랜드의 국가 상징인 일어선 사자 lion rampant와 유사하지만 가장 큰 차이가 역시 꼬리다.

 

꼬리가 두개인 사자는 '브룬츠빅(Bruncvik)의 사자' 라고 부르는데, 브룬츠빅은 바츨라프 성인과 함께 체코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흔히 '체코의 오딧세우스'라고 불린다는 그는 마법의 칼을 가진 전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머리 아홉 달린 사자와 싸우는 신령한 사자(꼬리가 두개였다)를 도와 싸움에 이긴 뒤, 그 사자와 함께 온 세상을 누비며 모험을 한 양반이다. 브룬츠빅이 늙어 죽자 사자도 먹이를 먹지 않고 무덤 곁을 지키다 따라 죽었다(사람보다 오래 살았다니 역시 보통 사자가 아니다).

 

아무튼 체코가 위기에 빠지면 민족 영웅 바츨라프 Wenceclaus 가 브룬츠빅의 마법의 칼을 들고 달려와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게 체코의 흔한 민간 신앙이라고 한다. (이상 '동유럽 신화/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참조)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4644987

 

 

아래 문구인 Pravda Vitezi 는 "진실은 승리한다"는 뜻.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말에서 따 온 것이다. 저 문장 하나에 체코라는 나라의 요체가 다 들어 있는 셈이다.

 

 

 

남쪽으로 나와서 성 비투스 성당 구경을 마무리.

 

비투스 성당을 빼고 나면 사실 프라하 성 안에서 구경할 거리는 별 특별한 것이 없다. 왕궁 미술관이 있는데 작품 수도 꽤 된다고 하나 프라하 성에서 미술관 구경을 했다는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그 다음이 성의 남사면을 구성하는 '구 왕궁'인데,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별로 찍을 것도 없다.

 

 

 

창밖으로 내다보면 이런 풍경. 저 멀리 블타바강이 보인다.

 

 

찍지 말라고는 하는데 대체 왜 찍지 말라는지 알 수 없어 한장 찍었다. 구 왕궁 내부의 메인 홀이다. 지금도 체코 국가 정상이 주최하는 연회가 가끔 열린다고 한다. 유럽의 실내 홀 중에서는 가장 크다던가 뭐 그렇다. 특별히 감동적인 면은 없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 연회장 옆의 한 방(구 국회였나, 궁정 평의회였나 뭐 그런 이름이었다)에 합스부르크 가 황제와 황족들의 초상화를 그대로 걸어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체코는 17세기부터 약 300년 동안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독립을 쟁취한 지금까지도 당시 황제들의 그림을 걸어 놓고 있는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광화문 뒤에 아직도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안에 여전히 천황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상상해 보자. 가당키나 한 일일지.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은 '어쨌든 그것도 우리의 역사'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한국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인데, 아무튼 그렇다고.

 

 

구왕궁을 지나 발길은 황금소로로 간다.

 

 

황금소로란 프라하 성의 북쪽 성벽 안쪽에 다닥다닥 붙어 지은 작은 집들의 거리를 말한다. 가이드북들은 주로 '동화 속 마을처럼 색색깔로 아름다운 작은 집들이 잇달아...'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직접 가 보면 대체 조만한 집 속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가서 살았다는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좁고 궁벽하다. 사람 한두명이 들어가 그냥 눕기도 힘들 정도의 공간들이다.

 

그리고 황금소로라고 이름을 붙여서 그렇지 사실 사람들이 기억하고 보는 건 딱 하나다. 바로 저 22번 집 오른쪽에 붙어 있는 검은 줄 같은 표시.

 

 

 

'프란츠 카프카가 살던 집'이라는 표지 하나다. 카프카가 이 집에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고, 아무튼 황금소로의 이 집에 산 적이 있다는 얘기다. 카프카가 이 집에서 글을 썼을까. 글쎄. 안에는 타자기 하나 올려 놓을 책상 하나 들어갈 공간도 없어 보인다. 침대나 하나 겨우 들어갈까 말까.

 

 

 

아무튼 천재 소설가가 살았다는 인연 덕분에 궁정에는 카프카의 동상이 서 있다. 왜 알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몸인 탓에 동상의 한 부분만 금빛으로 빛난다. 아아...;;;

 

청동상은 본래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은 부분은 저렇게 된다.

 

스타 작가가 수십년간 받았을 성추행의 환난에 잠시 묵념.

 

 

 

일단 프라하 성 이야기는 이정도. 빨간 지붕을 보며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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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일단 걷고 시작하는 도시다.

 

몇해 전 바르셀로나를 다녀온 뒤 처음 만나는 도시와의 인사는 유로자전거를 통해 하는 것이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서울생활에서 도보와 멀어진 몸을 어떻게서든 여행 모드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한번 죽을 만큼 걸어 보는 것이 괜찮다는 생각. 그리고 그 도시를 가장 빨리 이해하는 길은 대중교통과 다리를 이용해 직접 길을 찾아 다녀 보는 것이라는 말에 절대 동의한다.

 

 

.

 

6월1일 밤늦게 도착해 여장을 푼 K+K CENTRAL PRAGUE 호텔.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공항에 떨어진 시간이 꽤 늦은 시간이라 미리 호텔에 ride를 요청했다. 가격은 700코루나/27유로. 코루나 대 유로 환율은 대략 25~26 대 1 정도다. 곳곳의 환전소에서는 다양한 환율을 제시하는데 아무래도 이 공정환율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있을 것 다 있고 깔끔한 호텔인데 아쉽다면 슬리퍼가 없다. 밖에서 신던 신발을 방 안에서 신고 있으면 피로가 가중되는 체질이라 뭔가 맨발에 신을 것이 필요한데, 혹시 이 호텔을 이용하실 분은 비행기에서 적당히 하나 얻어 오시길 당부드린다.

 

그 외에는 다 OK. 욕조도 있고, 물도 하루에 1L(2병)씩 준다.  

 

 

이런 방...

 

 

아담하고 귀여운 조식당. 보시다시피 규모가 작고 가짓수가 많지 않지만 척 보면 알 수 있듯 음식들이 나름 공력이 들어가 있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오렌지주스도 직접 간 것이 나왔다. 그리고 나름 낙농국이라 그런지 유제품의 수준이 매우 높다. 특히 치즈 종류.

 

뭐 계란은 스크램블과 삶은 계란 두 종류 뿐인데, 조금만 용기를 내서 얘기하면 먹고 싶은 형태로 해 준다. 괜히 위축되시는 분들 있는데, 이건 여기 뿐만이 아니고 웬만한 호텔이면 다 해 준다. 계란 후라이가 먹고 싶으면 주저없이 요청하시기 바란다. (까짓거 안 해주면 그만이지)

 

 

 

우상단이 신선한 치즈에 찍어 먹는 생 햄. 이런 거 좋아시는 분들에겐 천국이다.

 

 

 

다른 각도에서 찍어 본 조식당. 예쁘다.

 

사실 호텔이 정면에서 보면 굉장히 작아 보이는데 앞뒤로 긴 방이다. 그래서 전망이나 이런 건 별 기대할 게 없지만 어지간한 특급호텔에서 기대할 만한 것은 다 있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쨍하니 맑은 다음날 아침. 유로자전거 도보 투어 집합 시간인 오전 8시 바츨라프 광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프라하에 왔다는 표시로 일단 바츨라프 광장의 상징인 바츨라프 동상 앞에서 기념샷.

 

 

(여전히 바츨라프라는 발음과 Wenceclaus 라는 철자의 괴리는 참 낯설다..)

 

시크한 유로자전거 가이드는 일행이 모이자 바로 이동 선언. 처음으로 체코 전철을 타 본다.

 

프라하 교통 1일권은 110코루나. 1코루나가 2017년 6월 기준 대략 50원이니 5500원 쯤 된다. 이걸로 하룻동안 버스와 전철, 트램을 계속 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철역에 자판기 외에는 매표창구가 따로 없다 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역무원도 본 기억이 없다)

 

잘 보면 전철역마다 매점이 있다. 이 매점에서 ONE DAY PASS를 달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매점이 주말에는 아예 문을 안 열든가 늦게 연다는 것. 그런데 자판기는 동전만 받는다. "그럼 주말에 전철을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함?"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나가서 문을 연 가게를 찾아 동전을 바꿔 오든가, 체포를 각오하고 무임승차를 해야 한다. 아찔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결론: 주말에 전철/버스를 타려면 1) 미리 1일권을 사 놓든가 2) 미리 동전을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 날이 금요일이었고, 다음날인 토요일 내가 직접 겪어 봐서 안다.  

 

 

프라하의 전철은 이렇게 3개의 색으로 구분된다. 바츨라프 광장의 바츨라프 동상/국립박물관 앞에 있는 역은 눈치로 때려잡아도 빨간선과 녹색선이 교차하는 무제움 Muzeum 역. 여기서 빨간 선으로 두 정거장을 가 비셰흐라드 Vysehrad 역에서 내린다.

 

역에 내려 5분쯤 걸으면 나타나는 성곽의 형태.

 

 

 

눈치로 때려잡는다 체코어로 따져 보면 Narodni 는 대략 영어의 National에 해당하는 것 같다. Kulturni 는 누가 봐도 culture와 관계 있는 단어겠지. 그럼 뭔가 국가문화유산 혹은 주요 사적에 해당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눈치 아닌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Hrad는 체코어로 성. 그러니까 비셰 성이다. 비셰는 '높다'는 뜻으로 합하면 '높은 성'이 된다. 고지가 흔치 않은 프라하 근교에서 이 정도의 고지면 상당히 전략적인 요충지로 보일 법 하다.

 

그냥 성은 아니고 체코 건국신화가 내재된 땅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민족 성지 역할을 한다. 체코의 단군할아버지 격인 체흐 Chech 가 나라를 세운 뒤, 그의 아들 크록 Krok 이 이 비셰흐라드를 도읍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딸이자 예언자인 리부셰 Libuse 가 나라를 통치했다.

 

리부셰는 체코 민족의 앞날에 엄청난 전란과 살상, 피와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런 고초에도 불구하고 체코 민족은 영원할 것"이라는 희망의 말도 남겼다. 유난히 많은 국난을 겪었던 이 나라 사람들에게 리부셰는 희망의 상징으로 추앙된다고 한다.

 

 

걷기 좋은 돌길.

 

 

 

날씨도 좋고 어느새 내성 문.

 

 

 

멀리 저렇게 교회 종탑이 보인다.

 

비셰흐라드 안에는 국가적 성지가 있어 유명하다. 체코의 건국에 기여한 위인들만을 위한 묘지다.

 

 

 

 

 

 

들어서자마자 스메타나의 묘비가 사람들을 맞는다. 아시다시피 교향시 '나의 조국'으로 유명한 그 분.

 

뒤에 나올 드브로작과 함께 보헤미아 음악의 대명사인 그 분이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있는 대형 위령탑.

 

 

여기에 이름이 오른 분들은 모두 체코의 위인전에 오를 만한 영예의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왼쪽 두번째 칸을 보면 위쪽에 알폰스 무하가 있고, 그 아래로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릭과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 부자가 있다. 이 정도는 해 줘야 이름이 올라갈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아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보후밀 카프카 는 유명한 조각가로, 우리가 잘 아는 프란츠 카프카 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체코에서 카프카는 그리 드문 성이 아닌 것 같다.)

 

 

 

이런 각양각색의 묘비들로 가득한 공간.

 

 

이렇게 비석 사이를 걷다 보면

 

 

안톤 드보르작 님의 묘소에 도달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들은 드보르작 교향곡 9번이 바로 라파엘 쿠벨릭의 지휘로 녹음된 버전이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곡도 드보르작 교향곡 9번. 뭔가 다 연결된 느낌이다. (뿌듯)

 

 

묘지 바로 옆에는 두개의 첨탑이 돋보이는 베드로와 바울 성당 이 있다.

 

 

그런데 성당 문짝이 예사롭지 않다.

 

 

아이구 이뻐라.

 

 

 

다른 쪽 문은 또 다른 쪽 문 대로. 나름 유럽 좀 다녀 봤지만 이렇게 핑크색으로 예쁘게 꾸며진 문은 또 첨일세. 하지만 오전 10시가 성당 개장 시간이라 안을 둘러볼 수는 없었다.

 

 

 

비셰흐라드는 프라하를 관통하는 블타바(몰다우) 강의 남쪽에 위치한 요새다. 그닥 고지대가 없는 프라하 일대에서 이렇게 강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는 충분히 전략적인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이런 뷰가 나온다.

 

아무튼 좋은 날씨와 수풀 길, 체코의 역사를 잠시 되새겨볼 수 있는 비셰흐라드는 산책을 겸한 여행길의 방문지로 매우 추천하고 싶다. 마음이 한가롭지 않은 분이라면 비추.

 

 

 

아무튼 그렇게 비셰흐라드 구경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와

 

 

트램을 타고 프라하 시내로 향한다. 비셰흐라드는 굳이 서울과 비교하자면, 대략 강서구 정도에 위치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해서 블타바 강 남쪽의 올림픽도로 아니고 강변 도로를 타고 시내 쪽으로 슝슝

 

 

 

 

그렇게 해서 트램/버스 환승을 위해 내린 곳이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여기서도 공연을 볼 참이었는데 6월 초에는 뭔가 일정이 맞지 않았다. 매우 아쉽.

 

 

위 건물의 위쪽 조각상. 밤에 보면 참 멋질 광경이다.

 

 

그렇게 해서 시내로 진입해 도착한 곳은 프라하의 명소 중 하나인 무하 박물관.

 

 

 

아르누보 시대 최고의 수혜자(?)로 꼽히는 알폰소 무하의 작품이 전시된 무하 박물관이다. 입장료는 240코루나. 약 1만2000원 정도인데 이 가격이 싼거냐 비싼거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 사실 작품 수를 생각하면 그리 싸지는 않다. 우리의 경우 유로자전거 투어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어 가이드 설명을 듣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일반 관람객이 이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은 30분도 길 수 있다. 그 정도로 작품 수가 적다.

 

 

무하를 혹시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들어갈 필요는 없을 듯. 어쨌든 그림체를 보면 자다가 깨어나도 아 저게 무하 그림이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하다. 아마도 무하 그림이 찍힌 연습장 한 두 권 안 써본 사람 없을 듯. 그리고 무하가 전 세계 순정만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지대하다.

 

 

게다가 무하의 작품 대부분이 포스터 내지는 석판화라서 '이 미술관만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느낌은 사실 별로 없다. 아마도 이 미술관이 갖고 있는 무하의 대표작이라면 이 '별 Star'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굳이 하고 싶은 말은 - 무하의 그림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미술관은 패스해도 아무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그걸로 맛난 거 사 드시라.

 

 

이걸로 오전 일정 끝. 런치 타임~

 

 

바츨라프 광장 끝자락의 가장 목 좋은 곳이라 아마도 시내에서 가장 비싼 집일텐데 파스타 종류는 200~300 코루나, 고기 종류는 300~500 코루나 정도 한다. 그래도 체코에서의 첫 식사라 어쨌든 먹어봐야 한다는 꼴레뇨 Koleno 를 시켰다.

 

꼴레뇨는 체코어로 무릎이라는 뜻. 말 그대로 돼지 무릎을 그냥 통으로 양념해 삶아 낸 요리다. 집집마다 방식이 조금 다르겠지만 이건 삶은 것만은 아니고 껍질을 살짝 튀겨 바삭한 맛을 살렸다. 어떤 집에 가면 짜다는 평도 있었는데 관광객 입맛에 맞춘 탓인지 전혀 짜지 않고 맛있다. 머스타드 소스와 함께 먹으면 아주 궁합이 좋다.

 

족발도 거의 먹지 않고 돼지고기 냄새를 싫어하는 동행인도 매우 만족했다.

 

 

자, 대망의 프라하 성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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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것의 효용은 떠날 상상을 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아주 막연히 시작합니다. 언제쯤 어디를 갔으면 좋겠다. 물론 한날 하루도 회사를 비울 수 없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고, 휴가라는 것이 그저 수험생 자녀들의 학원이 문을 열지 않는 기간에 불과한 분들에겐 너무나 사치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서 최성수기 제주도에 하루 100만원 가까운 호텔/체제비를 들여 며칠 간신히 다녀오는 것으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는 분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뭐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니 그런 가격이 가능하겠죠.)

 

이런 분들 정도는 아니더라도 휴가는 쉬러 가는 건데 대체 왜 쉬러 가는 것까지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계획을 하고 머리를 짜야 하는 건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자신의 여행을 디자인하는 것 자체가 이미 즐거움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찬찬히 한번 생각해 보시면, 세상 어떤 일에서도 저절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얻어지지는 않습니다. 쇼핑, 식사, 데이트... 다 그렇죠. 내가 직접 신경 쓰고 싶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 신경써줄 사람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일찍부터 계획을 짭니다. 특히 항공사 마일리지를 활용해 비행기표를 얻어내려는 경우에는 꽤 일찍 일정을 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저라고 돌발상황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두 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티켓 반납에도 수수료가 꽤 듭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순탄하게 진행돼 '6월 독일행'이 가능했습니다.

 

 

 

 

 

 

 

프라하는 지난 2000년 다녀온 적이 있지만 단 하루를 구경했을 뿐이고, 언젠가는 한번 다시 가 볼 생각이었으므로 여정을 프라하-베를린으로 짜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두 도시를 연결하는 직행 노선은 기차로 4시간 30분. 버스로도 비슷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기차는 미리 예매하면 2등석이 20유로대, 1등석은 50유로대로 가능합니다. 버스는 시간대에 따라 10유로대도 가능합니다. 물론 기차가 버스보다는 쾌적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당초에는 두 도시의 거의 중간지점인 드레스덴 경유를 생각했더랬습니다. 독일 최고로 꼽히는 드레스덴 슈타츠오퍼(오페라 홀)에서 공연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찌 어찌 하다 보니 드레스덴에서 마땅히 볼 작품이 있는 날짜에 일정을 맞추기 힘들어졌고, 자연스럽게 프라하-드레스덴-베를린, 혹은 베를린-드레스덴-프라하가 연결되지 않게 되어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사실 같은 이동이라도 한번에 4시간30분은 2시간/2시간30분으로 나눠 하는 이동보다 좀 버겁죠. 어쨌든 항상 원한대로 되지는 않는 법입니다. 오페라를 빼고 나면 굳이 드레스덴에서 1박을 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계산 일정은 프라하에서 3박, 베를린에서 5박으로 총 8박10일이 됐습니다. 프라하 도착 시간이 늦어 첫날 하루는 그냥 이동일로 소모하는게 아쉬웠지만 뭐 직장인으로 이 정도 날짜를 빼기는 쉽지 않습니다. 베를린에서 5박이 좀 길게 느껴져 다른 도시로의 이동도 고려했지만 일단 그건 현지 사정을 좀 더 정확하게 알아본 뒤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6월초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와 기간이 겹쳐 그런지 프라하 호텔비가 평소보다 30% 정도는 비싼 듯 했습니다. 물론 프라하는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비용이 더 들더라도 숙소는 관광 포인트가 몰려 있는 구도심에 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포인트는 걸어서 이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후보들을 고민한 끝에 K+K센트럴 프라하 (https://www.kkhotels.com/en/prague/hotel-central) 를 선택했습니다.

 

방의 청결도, 위치, 조식에서 대단히 만족스러운 호텔이었습니다. 한 3분만 걸어가면 관광 포인트인 화약탑이 나오고, 술집과 식당, 카페가 즐비한데 골목 하나 바뀌면 바로 조용해진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방이 약간 좁다는 느낌은 가격 대비 감수하기로.

 

 

 

 

베를린에서도 5박이면 숙소를 한번 정도 옮기는게 좋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울 사는 사람의 기준으로 베를린은 결코 큰 도시가 아닙니다 - 물론 전체 도시 면적으로 보면 베를린이 더 클 수도 있겠지만, 관광객의 입장에서 볼 때 베를린은 오히려 볼거리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도시입니다. 일반 관광객이 가는 서쪽 끝은 초 역(동물원 역), 동쪽 끝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 정도라고 할 때 그 둘 사이의 이동 시간이 3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절대 호텔을 옮길 필요 없습니다.

 

물론 가기 전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지만, 아무튼 수많은 베를린 호텔들을 검색해보다 풀먼 베를린 Pullman Berlin Schweizerhof (http://www.pullmanhotels.com/gb/hotel-5347-pullman-berlin-schweizerhof/index.shtml) 로 목적지를 결정했습니다. 공원 바로 앞이라는 아늑함과 쾌적함, 그리고 바로 앞에 베를린의 젖줄인 두 개의 버스(100번과 200번) 중 200번 정류장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객실 넓이도 기대 이상이었고, 욕조는 없지만 욕실도 넓고 깔끔했습니다.

 

무엇보다 조식은 이제껏 가 본 수많은 호텔들 중 거의 수위권. 사용해 볼 일은 없었지만 지하에는 수영장도 있었습니다. 최대 백화점이라는 카데베가 걸어서 10분 이내, 동물원은 걸어서 5분. 아쉬운 점은 주변에 편의점이나 미니마켓이 없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사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유흥가에서 늦게까지 어울리다 바로 방으로 올라가 잔다는 느낌을 원하는 분들에겐 권하지 않을 호텔입니다. 하지만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조용하고 깔끔한 느낌을 원하는 분들에겐 가격 대비 매우 훌륭한 호텔입니다. 아울러 베를린 곳곳을 헤집고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를린을 굳이 목적지로 삼은 것은 공연 관람을 기대했기 때문인데, 사실 이 부분을 중시하는 분들이라면 여행 계획을 미리 짜시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베를린이 베를린인 만큼, 클래식 공연에 있어선 DVD 타이틀 급의 아티스트들이 나서는 공연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그런 공연들은 대략 60일 전이면 매진돼 버립니다. "자, 우리가 베를린에 왔으니까 큰 맘 먹고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 한번 봐 줘야겠지?" 하고 생각했을 때 표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약 3개월에 걸쳐 공연 티켓도 사고, 기차 표도 사고, 호텔도 예약하고, 그렇게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바쁜 일상이지만 가끔씩 베를린 시내 지도를 보고 있을 때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패키지 여행의 장점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싸고, 알아서 밥 주고, 알아서 재워 주고, 알아서 차 태워 주고, '휴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 쪽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문득 문득 베를린 지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기대와 흥분을 생각하면, 직접 디자인하는 여행의 재미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훨씬 더 비싸고,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재미를 오래 오래 되씹기 위해서 천천히 여행기를 쓰겠습니다. 대략 1년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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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철 감독의 영화 '대립군'을 봤습니다. 130분 동안 화면 속의 인간들은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합니다. 토우(이정재)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그들대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세자 광해(여진구) 또한 왕이 되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이름 없는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고, 가토 기요마사의 명을 받아 세자 일행을 뒤쫓는 왜군 장수 역시 빈 손으로 돌아가면 가토의 질책으로 할복을 피할 길이 없으니 피차 물러설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몸부림의 아수라장 속에서 영화는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어쩌면 너무 선명해서 다소 시대에 뒤진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죠. 같은 말이지만 만약 아무개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면, 대체 어떤 덕목이, 어떤 기준과 시선이 그 아무개를 제대로 된 지도자로 설 수 있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입니다.

 

약 10개월 간의 진통 끝에 새 대통령이 나와 구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고 있는 지금, 2017년의 한국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순서대로 하자면 일단 영화의 배경을 소개해야 합니다. 조선 선조 때, 1592년.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숫자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이 부산을 통해 조선 내륙으로 치고 올라오고, 선조와 대신들은 평양을 거쳐 북으로 북으로 피난을 거듭합니다. 중간 피난지 영변에서 선조는 "나는 천자의 나라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요동으로 건너가 직접 구원병을 청할 뜻을 밝힙니다(1592년 6월13일).

 

그리고는 대신들이 일제히 요동행에 반대하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이 또한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했지만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다음날인 6월14일 자신은 요동으로 떠날테니 세자는 평안도 땅에 남아 의병을 모으고 결사 항전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른바 분조(分朝), 즉 조정을 둘로 나눠 국난에 대처하겠다는 것입니다.

 

조선 건국 200년, 말하자면 안일했던 나라에 국권이 흔들리는 대전쟁이 일어나고, 선조로서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겠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만으로도 지나치게 허둥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난을 극복할 만한 슬기로운 군주가 당시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죠.

 

 

 

 

이때 광해군의 나이 만 17세.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다 큰 장정의 나이지만 그래봐야 스무살도 안 되는 앳된 청년일 뿐입니다.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국정 최고 지도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기엔 어림도 없는 나이입니다. 게다가 아버지 선조는 장남인 임해군 보다는 뭘 봐도 낫다는 점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웠지만, 이들 사이에 부자간의 살가운 정을 엿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광해는 임진왜란 중의 활약으로 백성들과 대신들의 신망을 샀고, 그 이후 선조는 오히려 광해를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대립군'은 이런 역사의 기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과연 무엇이 궁중의 금지옥엽이었던 17세의 광해군을 국난 극복의 선두에 선 강인한 왕자로 바꿔 놓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대체 이 왕자는 전쟁중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미리 경험해보지도 못한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을까요.

 

 

 

 

영화의 시작. 임진왜란 발발 직전 토우(이정재)를 비롯한 대립군들은 여진족과 맞서고 있는 북쪽 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전공을 세우지만, 후방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 병역을 살고 있는 대립군들이라 누구도 그 공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수를 받고 약조한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또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병역을 살게 된다는 현실만이 무거울 뿐입니다.

 

그런 토우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남쪽에서 왜란이 발발했으니 국왕을 호종하러 평양까지 남하하라는 명을 받고 이동하다가 피란차 북상하는 왕의 행렬을 만납니다. 그리고 조정이 둘로 나뉘었으니 세자 광해(여진구)를 호위하고 강계까지 이동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한달만 있으면 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대립군들이지만 세자 호위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전쟁중의 특별 무과 시험을 통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바람으로 여럿은 선뜻 세자를 인도합니다.

 

하지만 철도 없고 숫기도 없는 소년 세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왜군의 추격, 왜군보다 더 무섭게 압박해오는 정체 모를 자객들, 턱없이 부족한 식량이며 무장, 추격을 피햐려 들어선 가파른 산길 등 이들 앞의 난관은 첩첩 산중. 그러는 가운데 토우는 자신이 호위하고 있는 왕세자의 민낯을 찬찬히 훑어볼 기회가 생깁니다.

 

과연 그를 살려 내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가 왕이 되면 이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자신도 대립군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토우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그를 살려내기 위해 나와 우리 무리의 목숨을 거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영화 '대립군'은 다들 아다시피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영화입니다. 본래 역사에 쓰여 있는대로 선조는 암군이요, 광해는 현명한 군주라고 딸딸 외우는 것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데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 소년이 민초들과의 만남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통해 민초의 눈높이에서 삶과 죽음을 느끼게 되고, 그를 통해 희생과 헌신이라는 영웅적 행위의 가치를 깨달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이 영화의 카피를 뽑아 보라고 한다면 저는 '그날, 소년은 남자가 되었다'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선 두 배우, 여진구와 이정재는 아낌없는 호연으로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여진구의 연기도 대단히 칭찬받을만 했지만, 특히 이정재는 2017년 이후 배우로서 그의 이름은 아마도 이 영화, '대립군'을 통해 가장 먼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정재라는 배우는 긴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변함 없는 모습을 보여줘 왔습니다.

 

 

 

 

 

네. 20년 가량의 시간 차이를 둔 모습이지만 거의 차이를 느끼기 힘듭니다. 그만치 이정재는 어찌 보면 불멸의 젊음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지금껏 자리매김해 왔죠.

 

 

 

 

아무튼 그의 젊은 모습은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동년배인 정우성과 함께 찬란한 빛을 뿜었습니다.

 

 

물론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그 젊음에 연륜이 깃든 뒤부터의 일인 듯.

 

 

전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열연이 새삼 그의 에너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립군'이라는 작품,

 

 

문득 이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불멸의 걸작 '7인의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사무라이라는 특권 신분의 남자들이 자신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무훈을 칭찬받는 것은 불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소명을 깨닫고, 한 촌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가 연기하는 캐릭터입니다)는 본래 백성의 아들이면서 전쟁통에 사무라이를 가장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과 동네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깨질 위기가 등장했을 때, 그는 백성의 눈으로 본 전쟁의 의미를 사무라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백성의 한 사람이기에 백성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인물.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사람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 수 있었던 남자.

 

이 영화, '대립군'에서 그 남자의 얼굴은 비로소 이정재를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얼굴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만한 연기를 보여줄 배우란 본래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이정재가 보여줄 또 다른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영화 '대립군'은 매우 반가운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P.S. 영화의 후반부에는 [배 한척]과 [배 한척에 목숨을 건 민초들], 그리고 [그 배에 함께 오른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물론 의도적인 설정은 아니겠지만, 그 [배 한척]이 주는 느낌은 매우 산산하더군요. 백성이 탄 배의 중요성이 이미 몇몇 지도자들의 운명을 바꿔 놓은 나라라서 말입니다.

 

P.S.2. 제작진으로부터 'NO CG, NO SET'라는 말을 듣고 보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영화를 보니 제작진과 배우들이 겪었을 고생의 강도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진정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반 관객들도 아마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보시면 감동 두배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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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한마디 정리하는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뵙고 인사를 드린 적도 몇번 있지만 특별히 긴 대화를 나눴다거나 내세울 만한 친분이 있는 사이는 전혀 아닙니다. 그저 오랜 시간 그분의 모습을 본 시청자로서, 관객으로서의 입장일 뿐입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70년대 한국에서 TV 드라마는 지금보다 훨씬 영향이 큰, 온 국민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흑백이었지만 TV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TBC, MBC, KBS라는 세 채널에서 방송해 주는 드라마야말로 경쟁 대상이 없는 대중의 관심사였죠.

 

 

 

 

그 시절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트로이카'가 있었습니다. 바로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이라는 세 이름이었죠. 사실 이 세 스타가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가장 빛난 스타였던 것은 맞지만 이 셋은 바로 'TBC의 트로이카'였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탤런트(TV 배우와 영화배우가 이런 이름으로 구별되고 있었습니다)나 코미디언들에게도 전속 방송사가 있었습니다. TBC에는 TBC 배우들만 나오고, MBC에서는 MBC 배우들만 나오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 TBC의 위상은 워낙 강력해서 저 트로이카 외에도 홍세미 김창숙 김형자 같은 당대 최고 여배우들과 원미경 같은 최고의 기대주들이 모두 TBC에만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남자 배우로도 한진희 노주현 김세윤 같은 배우들이 모두 TBC 전속이었죠.

 

MBC가 드라마 왕국으로 거듭나는 것은 5공의 방송 통폐합 이후이지만, 물론 이 시절에도 MBC 드라마는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남자로는 이정길 박근형 현석, 그리고 여자로는 김영애 이효춘 같은 배우들이 MBC의 얼굴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KBS의 얼굴이라면 한혜숙 김자옥 정도의 배우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남아 있는 제 기억으로는 방송 통폐합 이전 KBS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시절의 그 드라마 가운데서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김수현의 1978년작 '청춘의 덫'입니다. 이미 리메이크 작인 1999년판 '청춘의 덫'이 '전설의 드라마' 대접을 받는 분위기에서 78년작을 얘기하자니 뭔가 엄청난 옛날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긴 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매회 빠뜨리지 않고 '청춘의 덫'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다른 걸 다 떠나서 최소한 배우들의 연기 만큼은 1999년작이 1978년작을 따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GQ 아티클 '서울, 1978년 겨울'에서 퍼 왔습니다. 위 5장의 사진들이 모두 '청춘의 덫' 마지막회 장면들입니다.

(http://www.gqkorea.co.kr/2010/12/14/%EC%84%9C%EC%9A%B8-1978%EB%85%84-%EA%B2%A8%EC%9A%B8/)

 

78년작과 99년작은 인물의 이름부터 이야기의 구조가 일단 똑같습니다. *(  )안에 78년작의 배우를 앞에, 99년작의 배우를 뒤에 써서 구별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하지만 유능한 회사원 동우(이정길/이종원)는 윤희(이효춘/심은하)와 딸 하나를 두고 동거중인 사이. 형편상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장래를 약속한지 오래인 관계입니다. 하지만 동우는 어느날 오너 가문 상속녀 영주(김영애/유호정)의 관심을 받게 되고,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유혹에 직면합니다. 돈 뿐만 아니라, 착하지만 순종적이기만 한 윤희에 비해 활달하고 자존심 강한 영주의 매력이 강렬하게 어필하기도 합니다.

 

결국 동우는 윤희를 버리고 영주와 결혼하려 하고, 그러는 사이 동우와 윤희 사이의 딸이 사고로 죽음을 당합니다. 아이가 죽어가는 동안 동우가 영주와 있었다는 사실을 안 윤희는 180도 돌변합니다. 팜므 파탈로 변신한 윤희는 영주의 오빠이며 소문난 한량인 영국(박근형/전광렬)에게 접근,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너 집안에 들어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본래 기업 경영이나 가업 승계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던 영국은 윤희 때문에 감춰져 있던 능력을 드러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물론 이 드라마가 방송되던 당시의 제 나이를 생각하면 이런 스토리에 사로잡혔다는 게 좀 이상하실 수도 있겠지만 뭐 굳이 그걸 따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에나 약간 이상한 애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 )

 

 

 

아무튼 이 드라마는, 당시 굉장히 중요한 드라마 저널의 역할을 했던 조선일보 '방송주평'에 따르면, 초반에는 "때가 어느 땐데 1950년대 얘기같은 혼전관계 순정녀 이야기냐"는 말을 듣다가 윤희의 각성 이후에는 장안의 화제작이 됐고, 하지만 "미혼모가 변심한 애아빠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라니, 이렇게 부도덕한 내용을 온 국민이 보는 드라마로 방송하다니 제정신이냐"는 높은 분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조기종영이 결정되는 비운의 작품이 돼 버렸습니다. 김수현 작가가 굳이 이 작품을 리메이크하기로 한 데에는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배경 설명은 이 정도. 아무튼 당시 김영애라는 배우의 미모는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위에서 나열한 수많은 당대의 톱 여배우들이 있었습니다만, 한국에서 보기 힘든 날카로운 콧날과 함께 '원조 얼음공주'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도시적인 미모를 갖춘 배우는 달리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목소리에서도 지적이고 냉정한 면모와 함께 뭔가 감춰진 열정을 느끼게 하는 배우였죠(물론 이런걸 다 당시에 느꼈다는 건 아닙니다. ^^;; ).

 

 

아무튼 요즘도 한국 드라마에는 '도도하고 섹시하면서 평민(?)들을 벌레 보듯 하는' 재벌가 따님 캐릭터가 드물지 않게 등장합니다만, 근 40년 전에 그 원형을 연기한 배우로 이 배우만한 사람이 있었을까, 여기에는 반박하실 분이 별로 없을 듯 합니다. 특히 저 오리지널 '청춘의 덫'에서는 윤희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내는 사람이 영주인데, 그걸 안 뒤에도 오빠가 윤희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비밀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 내면의 갈등을 연기하는 김영애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두번째 작품은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작품, '모래시계'입니다. 이 드라마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건 공간의 낭비이기도 하고, 다들 기억도 선명하실테니 넘어갑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의 1회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했던 캐릭터는 바로 태수(최민수, 아역은 김정현) 어머니 역으로 등장했던 김영애입니다.

 

김영애는 젊은 날 좌익 운동을 하다 빨치산이 된 남편을 떠나 보내고, 혼자 아들을 키워 온 어머니 역을 맡았습니다. 수재였던 아버지의 유일한 흔적인 아들은 어머니에겐 인생의 유일한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요릿집을 운영하다 보니 여자로서 적잖은 수모를 겪어야 했고, (명시적이진 않지만) 알콜 중독이 됐어도 아들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집착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잘생긴 아들이 공부하는 것만 봐도 흐뭇해서, 아들의 공부방 웃목에 소반을 들여 놓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면서 앉아 있는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이 빨치산 아버지 때문에 출세길이 막혔다는 현실을 마주한 어머니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술취한 몸으로, 바람에 날아간 목도리를 줍다가 기차에 치여 생을 마감하는 1회의 마지막 시퀀스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한때 대통령을 꿈꿨던 패기만만하고 똑똑한 젊은이가 어떻게 해서 좌절과 분노로 가득한, 태수라는 이름의 야수로 성장하게 되는지를 너무도 선명하게 설명해 주는 이야기였죠. 이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가 김영애가 아니었다면, '모래시계'의 신화도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론 최근 영화 '변호인'에서 고문당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나이 많은 어머니 역할의 모습을 볼 때에도 이 '모래시계'의 잔상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아마 그랬던 분들이 꽤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고인의 업적과 공헌을 얘기하자면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듯 하고, 감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다만 그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 개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조의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늘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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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 아무래도 가장 먼저 주목을 받는 것은 배우들입니다. 아무래도 최고의 수혜자들은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드라마의 진짜 주역은 작가연출가입니다. 아무래도 그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제가 양심에 가책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진짜 주인공을 꼽자면, 백미경 작가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분을 처음 뵌 것은 2014년 여름, 유병술 몽작소 대표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무명 제작자였던 유병술 대표가 건네준 대본 표지에는 사랑하는 은동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유병술 대표도 지금은 '사랑하는 은동아'와 '오 마이 비너스'를 거쳐 잘나가는 드라마 제작자로 변신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목만으로는 전혀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본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슬금슬금 온몸이 빠져들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은 아시다시피 아주 새롭지는 않은 내용입니다. 어린 시절 고교생 현수와 초등학생 은동이는 운명처럼 만나 짧고 강렬한 애정을 느끼지만, 그걸로 인연은 끝이 나고 맙니다. 성인이 된 현수는 은호로 이름을 바꿔 톱스타가 되고(사실 유명해지고자 한 것도 은동이를 쉽게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은동이를 찾기 위해 자신의 자전적 일기를 출판합니다. 현수가 구술하는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 줄 작가로 정은이 발탁되죠.

 

이쯤 되면 드라마 좀 보신 분들은 정은이 바로 어린 시절의 은동이고, 뭔가 사연이 있어서 현수가 은호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거다라는 건 충분히 짐작하실 만 할 겁니다. . 누구든 지금껏 살면서 한번쯤은 들어 보거나 지켜봤을 법한 그런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은동아는 달랐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줄거리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냥 박제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원초적이고, 때로는 적나라하면서 어느새 은동이가 현수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가슴이 벅차 오르고, 엉뚱하고 고집불통이면서도 순수한 어른 은호의 모습에 웃음보가 터져나오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당시 드라마 편성을 위한 회의 때 제가 한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제가 미친 것 같습니다. 전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았는데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미친게 아니었습니다. 빨리 어떻게 해 보자는 결론이 났고, 그때부터 대체 이 작가는 누구냐고 알아 보는 과정이 시작됐습니다. 신인이라는데, 도저히 신인의 솜씨는 아니라는게 공통된 의견이었기 때문입니다.

대구 출신. 영어 학원 경영 경력. SBS 극본공모에서 단막극 강구이야기가 당선돼 제작된 바 있고, 현재 한 방송사 극본공모의 최종 결선에 작품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작품의 제목을 물어보고 다시 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작품은 JTBC 극본공모에서도 수상 내정작으로 뽑혔는데...?” (아직 비공개작이라 여기서 제목을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방송사들끼리 비슷한 시기에 극본 공모를 하면 응모하는 작가들은 누구나 양쪽 공모전에 모두 출품을 합니다. 수천개의 응모작 중에 수상작은 몇 개밖에 안 되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입상만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양쪽 모두로부터 입상하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워낙 심사하는 작품 수도 많고, 심사위원들의 취향도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드물게도 양쪽 모두 수상권에 들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저희보다 그쪽 방송사의 최종 발표가 빨랐으므로, 백미경 작가님의 대본은 그쪽 방송사의 수상작이 됐습니다. (방송국끼리의 관례상, 다른 방송사에서 먼저 수상작으로 뽑은 작품은 나중 수상에서는 제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중복 시상은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딜레마가 생겼습니다. 그쪽 방송사에서 당선 즉시 그 작품을 미니시리즈로 제작하자고 제안해 온 겁니다. 저희 쪽은 저희 쪽대로 이태곤 감독이 연출을 맡기로 하고 사랑하는 은동아의 제작을 진행하고 있던 터라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처음으로 백미경 작가님의 의리를 경험해보게 됩니다. “미안하지만 JTBC와 이미 이야기되고 있는 작품이 있다. 그걸 먼저 제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당선이 취소되더라도 감수하겠다.” 이게 신인작가에게 얼마나 어려운 결단인지, 업계에 계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결국 약속 엄수와 극본공모 당선을 맞바꾼 셈이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은동아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시청률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화제성은 상당했습니다. 일반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에게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이 보통이고, 작가나 연출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대단히 이례적이지만 업계에서는 대체 이 작가가 누구냐는 소문이 폭풍처럼 지나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인 작가로서는 특급 대우의 재계약이 이뤄졌습니다. “성적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JTBC에서 데뷔했다는 걸 잊지 않을게요. 은혜는 갚을 날이 올 거에요.” 작가님의 멘트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첫번째 글에서 언급했듯, 2016년 초 백작가님은 다시 한 편의 대본을 건네주셨습니다(통상 이럴 때에는 시놉시스와 대본 1,2부가 같이 있습니다). 한국형 원더우먼이 등장하는 바로 이 대본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주 종목이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가, 스릴러, 성인용 멜로, 휴먼, 판타지…. 대개 한 장르에 능한 분들은 다른 장르에서는 약점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힘쎈여자 도봉순을 보면서 가장 놀란 건 바로 장르를 넘나드는 힘이었습니다. 한 드라마 안에 로코와 스릴러, 판타지가 위화감 없이 공존하고 있었던 겁니다. 셋 중 두 가지는 몰라도 세 장르가 이렇게 사이 좋게 들어 차 있기는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사실 공개된 것이 이 정도일 뿐 실제로는 더 있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의 스릴러 부분은 시그널풍의 본격 수사물이라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는 미드 위기의 주부들을 연상시키는 시니컬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게다가 제가 위에서 언급한 다른 작품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홈 코미디와 판타지의 조화가 돋보였습니다. 당대의 수많은 대작가들 가운데서도 제가 과문한 탓인지 이렇게 여러 장르에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분이라는 이야기를 빼놓으면 안 되겠으나, 아무리 이 블로그가 사적인 공간이라 해도 다 털어놓기에는 좀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튼 지난 1, ‘힘쎈여자 도봉순의 제작 기간이 길어지는 동안 머리를 식혀 가며 품위있는 그녀’ 20회를 탈고한(때로 천재들은 두어 가지 일을 번갈아 하는 것이 뇌 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집필력은 범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단 두 작품으로 이렇게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솔직히 이 두 작품이 이 분의 대표작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누가 농담으로라도 이런 말을 하면 나 아이템(소재) 무한대인 거 알죠?” 하고 씩 웃을 분이기 때문입니다.

힘쎈여자 도봉순대본은 거의 끝나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대본이 끝날 때에는 무척 서운하면서도 설렐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엔 대체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대본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요.

 

P.S.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작가님의 스타일상 사진은 싣지 못했습니다. 아마 머잖은 미래에 어느 시상식장에서 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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