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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분노의 추격자] 퀜틴 타란티노가 만든 '장고'의 리메이크에는 '장고: 분노의 추격자'라는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원제인 Django Unchained 와 딱 맞아 떨어지는 제목은 아닙니다만, 뭐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라고 할 것도 아니고, 영화 내용과는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많은 구세대들들은 '장고'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몇가지의 선명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수염이 바늘처럼 송송 자라난 프랑코 네로의 얼굴, 말을 타고 멋지게 달리는 대신 관을 끌고 다니는 괴상한 카우보이,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관 속에서 튀어나오는 *** (과연 1966년작 영화의 내용을 갖고 스포일러를 따져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가려 두겠습니다.^^).

 

어쨌든 오리지널 '장고'는 최고의 오락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드레날린 아티스트 퀜틴 타란티노가 리메이크한다는데, 기대가 가지 않을 리가 없었죠.

 

그리고 많은 아저씨 관객들은 외쳤습니다. "젠장, 장고라니! (말년에) 관뚜껑 그림자도 못 봤는데 장고라니!"

 

 

 

가장 기대에서 어긋났던 건, 타란티노의 '장고:분노의 추격자'는 1966년작 오리지날 '장고'와 사실상 아무 상관 없는 영화였다는 점입니다.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 외에는 전혀.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로 위 사진, 스쳐 보기만 해도 '장고다!'라고 할 수 있는 저런 모습의 '오리지날 장고 비주얼'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혀.

 

 

 

 

사슬에 묶여 이동하고 있던 흑인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미국 서부 사막을 떠돌던 슐츠 박사(크리스토프 발츠: 발츠라고 읽을지 월츠라고 읽을지 늘 갈등되는 상황)의 도움으로 구조됩니다. 그리고 장고에겐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연인 브륀힐데(케리 워싱턴)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죠.

 

일단 장고에게 킬러로서의 천부적인 소질이 있음을 발견한 슐츠는 그를 현상금 사냥의 조수로 쓰는 한변, 브륀힐데를 산 대농장주 칼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찾아내 장고와 브륀힐데를 재회할수 있게 해 주려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구세대들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습니다. "아니 대체 이 영화에 왜 장고라는 이름이 붙은 거지?" 일단 '오리지널 장고'를 구성하는 시각적 표현물, 즉 푹 눌러 쓴 모자와 밤송이 수염, 지저분한 외양과 질질 끌고 다니는 관 같은 것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도 안 끌고 다니는 장고가 장고냐'는 말이 나올 법 합니다.

 

물론 타란티노는 당연히 할 말을 다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장고' 이후에 수십편의 영화가 '장고'라는 주인공을 이리저리 울궈먹었는데 그걸 다 관통하는 공통점이라도 있다는 거냐. 전혀 계승할 생각 없었다. 그런 걸로 따지지 마라. 뭐 영화 속에서 20세기 역사도 제 멋대로 바꾼 적 있는 타란티노니까 가질 수 있는 당당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장고'라는 제목이 주는 선입견 없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솔직히 플롯 면에서 뛰어난 점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타란티노의 영화답게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단순 과격의 정서입니다. 관객에게 쓸데없는 추론을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 같기도 합니다.

 

각각의 사건은 꽤 매끄럽게 연결되지만, 개별적인 사건들이 대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갖고 있나를 따지는 건 매우 곤란합니다. 그건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법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서부극'이라는 뜻의 '웨스턴'이라고 부르는 대신 '서던(Southern: 이 영화의 무대가 미국 서부가 아니라 남부라는 뜻에서. 물론 서부극의 주 무대인 텍사스는 더 남쪽 아니냐고 하실 분도 계시지만, 당시의 텍사스는 '미국'이 된지도 얼마 안 되는 서쪽의 황무지였죠)이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이 영화는 너무도 뼈속까지 스파게티 웨스턴의 정수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의 위치를 따지자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과 테렌스 힐의 '내 이름은 튜니티' 시리즈의 딱 중간 정도?

 

 

 

사실 그렇다 보니 이 영화에 대한 일부 평론가/기자 양반들의 지나친 의미 부여가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독일계로 설정되어 있는 슐츠 박사라는 인물입니다. 이 역할을 연기한 크리스토프 발츠는 전작 '바스타즈, 거친 녀석들(Ingrorious Bastards)'에서 나치 장교 역을 맡았죠. 솔직히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또 독일계 미국인이 오히려 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이것 역시 무슨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는 얘깁니다. 그냥 할 수 있는 얘기는, 크리스토프 발츠라는 배우가 엄청난 흡인력으로 관객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것. 정말 최곱니다.

 

영화의 결말을 건드리게 될까봐 살짝 위태롭기도 하지만,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악당 캔디 역시 '극악무도한 미친 놈'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약간 부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비즈니스'를 할 생각을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이성을 잃는 것은 우리 편, 즉 정의의 편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정의의 편(?)은 모든 문제를 좀 더 평화롭고 매끈하게 처리할 수 있었죠. 하지만 감독이 타란티노이다 보니 불행히도 그런 진행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냥 즐겁게, 피의 향연을 즐기면서, 마음 편히(?) 보시면 되는 영화.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 동안 자신의 다른 영화를 볼 때보다 조금 더, 최소한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어린이가 되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건 영화가 유치하거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유치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이 영화는 '우리는 일부러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거야'라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고: 분노의 추격자'를 즐기는 정도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얼마나 그 가이드를 충실히 이행했느냐에 달렸습니다. 평소의 자신은 극장 밖에 두고, '장고'를 본 뒤에 다시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어설픈 의미 부여나 심층적인 해석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마시구요.

 

어쨌든 개인적으론 매우 강추. (물론 역시 개인적으로, 관뚜껑이 안 나오는 아쉬움은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더군요.)

 

 

 

P.S. 올드 '장고'를 아쉬워하는 노친네들에 대한 배려로 프랑코 네로는 한 장면 나옵니다. 술집에서 만나는 아저씨 역으로.^ 아, 물론 '마이애미 바이스'의 돈 존슨도 한 장면 걸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물론 주제가도 가져다 씁니다. 이건 '대체 오리지날 장고라는 게 뭐야' 할 분들을 위한 오리지날 장고 주제가의 뮤직비디오(?). 친절하게 '장고' 한 편에서 장고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지 카운트도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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