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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를 간다면 반드시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곳이 바로 인근의 도시 피게레스 Figueres 였다. 이유는 단 한가지.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의 고향이며 달리가 직접 구상한 달리 극장 미술관 Theatro-Museo Dali 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달리에 대한 외경은 아주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아마도 달리라는 화가를 가장 먼저 기억하게 된 그림은 누구나 다 아는 '기억의 집착'이었지만  그 그림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피카소 이후의 화가들은 전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중학생 시절의 어느날, 친척집에 있는 꽤 큰 화집에서 놀라운 그림 하나를 보게 됐다. 바로 이 그림이었다.

 

 

이른바 '최후의 만찬의 성사(聖事)'라는 1955년작. 두 페이지를 펼쳐 소개된 이 그림을 보고 단번에 빠져들었다. 당시의 소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 현대 화가 중에도 이렇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웅대한 구도와 구상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소견으로는 인류 역사에 남을 걸작이라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보다 이 그림이 훨씬 더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고 이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대학 진학 후에는 프랑스 광고계의 거물 자크 세겔라 Jacques Séguéla 가 쓴 '광고에 미친 사나이' 라는 책에서 우연히 달리와의 일화를 접하게 됐다. 세겔라가 고급 빌라의 광고를 맡으면서, 빌라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위해 달리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난 뒤 벌어진 에피소드였다. 상당히 긴 내용이라 여기 소개하기는 그렇지만, 아무튼 달리라는 사람이 작품 만큼이나 기괴한 사람(을 넘어 사실상 정신병자)이라고 느끼기엔 충분했다.

 

가장 최근 접했던 달리와 관련된 문건은 스탠 로리센스의 책 '달리와 나' 였다. 지금도 이 책의 황당무계한 내용이 어느 정도 소설이고 어느 정도 실제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접한 달리의 일화, 그리고 지금도 시장에 달리의 그림이 비정상적으로 많다는 것, 마지막으로 비슷한 시기에 읽은 리처드 폴스키의 책 '앤디 워홀 손안에 넣기' 에 나오는 현대 미술 시장과 컬렉터들의 행동 양식에 비쳐 볼 때 상당 부분은 사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달리와 나'를 읽은 뒤 피게레스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또다시 그 꿈이 이뤄지는 날이 왔다. 

 

 

 

바르셀로나(지도 아래 A)에서 피게레스(지도 위쪽 B)로 가는 길은 북동쪽, 그러니까 프랑스와의 국경으로 가는 길이다. 피게레스에서 조금만 더 가면 프랑스 땅이다. 피게레스에서 동쪽으로 죽 간 해변의 #표시가 있는 곳이 카다케스 Cadaques. 발리가 들르곤 했다는 바닷가 어촌 마을인데 달리 마니아들 뿐만 아니라 호젓한 지중해 어촌의 정취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들었다.

 

내친 김에 바르셀로나 교외에서 사람들이 많는이 찾는 곳이 몬세라트 Montserrat 와 기로나 Girona 다. 일단 기로나는 위 지도에서 피게레스로 가는 길 중간에 '헤로나'라고 표시된 곳이다. 거의 모든 관광 책자와 자료에 '히로나'라고 되어 있는데, 기차 안에서 안내 방송을 할 때에는 분명히 '기로나'라고 했다. 현지인들도 '기로나'라고 한다.

 

아무튼 바르셀로나를 가게 되면 암벽과 수도원이 유명한 몬세라트(위 지도에서 바르셀로나 북서쪽, C-16 사인 옆의 빨간 동그라미 표시), 중세 성곽 도시의 원형이 잘 보존됐다는 기로나, 그리고 달리 미술관이 있는 피게레스 중 하나 정도는 가 보게 된다. 어디를 선택하느냐는 시간의 문제.

 

가까운 거리와 경관을 좋아한다면 몬세라트, 중세 도시의 정취가 그리우면 기로나라고들 한다(둘 다 안 가봤으므로 길게 할 말은 없다). 그리고 미술에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피게레스를 선택한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르셀로나-피게레스는 약 140Km 거리. 예전에는 바르셀로나의 중앙역인 산츠 역 Sants Estacio 에서 피게레스까지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달리면 도착할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고속전철 AVE가 개통됐다. 단 문제는 AVE로 닿는 역은 시 외곽에 새로 지은 피게레스-빌레판트 Figueres-Vilafant(우리나라로 치자면 대략 천안아산역 같은 경우) 역이라는 점이다.

 

작은 시내 복판에 있던 구 피게레스 역과는 달리 이 역은 지도상으로 2Km 정도 외곽에 있다. 그깟 2Km라고 코웃음 치실 분도 있겠지만, 막상 걷자면 텅 빈 언덕과 벌판을 거쳐 30분 정도는 잡아야 할 거리였다. 차량 이동을 권한다.

 

버스를 이용하면 대략 피게레스 관광안내소 근처에서 내리게 된다. 불행히도 시내 표지판은 엉망이라 중간에 길을 묻지 않을 수 없는데, 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너무나 좁은 동네라 어떻게 하든 달리 미술관에 닿게 되어 있다. (그리고 길 묻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단 노인에겐 절대 물으면 안 된다.^^)

 

이내 달리 미술관의 위용이 모습을 드러낸다. 빨간 건물 위의 금색 조상과 달걀의 기괴한 조화가 눈길을 끈다.

 

...근데 왠지 멋져.

 

 

여기서 또 한번, 피게레스의 성당 종탑이 보이는 골목으로 꺾어진다.

 

 

그리고 나서 전혀 이런 게 있을 것 같지 않은 골목 안. 입구가 나타난다.

 

 

정면의 달걀머리 마네킹 같은 형상은 카탈루냐의 철학자 프란세스코 푸욜 Francesc Fujol 에게 헌정된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도 멋져.

 

 

구형 잠수복과 황금으로 된 바게트 빵을 든 자와 Jawa(스타워즈 IV의 사막 부족) 같은 형상이 나란히 선 기괴함.

 

...역시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멋지다고.

 

표를 사서 입장하고 나면 작은 뜰이 나타나고, 정면의 기이한 형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원형의 작은 정원이 있고, 한복판에는 캐딜락 한 대. 그리고 캐딜락 위에는 고대 원시인들의 비너스 여신상을 연상시키는 여자 조각상이, 그 뒤에는 타이어로 만든 탑이 우뚝 서 있다.

 

이것이 표를 끊고 중정으로 들어선 관람객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광경이다.

 

 

 

탑 위에는 뜬금없이 배 한 척. 그리고 배의 마스트 끝에는 검은 색 우산이 매달렸다.

 

이 정원을 둥근 벽이 둘러싸고 있고, 벽에 난 창에서 금색 마네킹들이 환영하듯 손을 흔든다.

 

 

 

여성상의 이름은 '에스더 여왕 Queen Esther'. 오스트리아 조각가 에른스트 푹스 Ernst Fuchs 의 작품이다.

 

에스더 여왕은 구약성서에서 페르시아 왕에게 시집간 유태인 처녀로서,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한 페르시아 중신들에 의해 유태인이 몰살당할 위기에 놓이자 목숨을 걸고 남편인 왕에게 간청해 동족들의 생명을 구한 인물이다.

 

 

 

물론 그 에스더와 이 조각상이 대체 무슨 관련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구석기 유물인 빌렌도르프의 관능미 넘치는 비너스 Venus of Willendorf, 혹은 아스타르트나 이슈타르 여신상이 떠오를 뿐이다.

 

 

 

 

뭐 이런거 말이지.... 아무튼 뭔가 멋지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 에스더 여왕상은 쇠사슬을 통해 뒤의 타이어 탑과 연결되어 있다. 타이어 탑은 달리 스스로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기둥을 복제한 것이라고 한다. 하필 왜 트라야누스의 기둥일까. 이유는 트라야누스가 스페인에서 태어난 로마 황제이기 때문이라고.

 

육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스페인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땅이다. 게다가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고울 지방(지금의 프랑스)보다 히스파니올라(당연히 스페인) 훨씬 더 먼저 로마의 영토로 편입됐다. 로마인은 기본적으로 바다의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을 죽 훑어내려가며 북아프리카에서 그리스, 소아시아를 죄다 장악하고 지중해를 자신들의 수족관으로 만든 뒤에야 비로소 북으로 알프스를 넘어 중부 유럽으로 진출했다.

 

이러니 뱃길로 지중해를 건너 바로 도착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는 로마 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의 끝에는 '길만 건너면 아프리카'인 지브롤터가 있다. 지중해 장악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보유해야 할 곳이다.

 

...또 삼천포로 빠졌다. 아무튼 그래서 '트라야누스의 기둥'의 타이어 버전이 여기 있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 아치 모양의 거대한 격자창 너머로는 달리가 메트로폴리탄 발레 '라비린스'에 사용했던 거대한 무대 배경막이 걸려 있다. 이 배경막을 통해 왜 이 이상야릇한 전시장을 '극장 미술관 Theatre-Museo' 라고 이름붙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왕상(왠지 자꾸 여신상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의 뒤쪽에서 보면 그 벽을 장식하고 있는 기괴한 조각상들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구도는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고 흐르는 음악은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신화적인 느낌이 신비로운 맛을 더한다.

 

 

 

 

정원을 지나 들어간 박물관 메인 건물 1층. 건물 밖에서 보던 바로 그 돔(cupola)이 있는 부분이다.

 

정원에서부터 1층까지, 쉴새없이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고, 의미를 부여하자면 끝이 없다. 쏟아지는 이미지의 폭격이라고나 할까. 거대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그야말로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어때, 이래도 인정 안 할래?'하는 달리의 오만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느낌이다.

 

 

 

쿠폴라 아래로 들어와 정원을 바라보고 좌우 벽에는 거대한 그림이 각각 걸려 있다. 그중 오른쪽 그림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좋아하는 그림이다. 바로 '환각을 일으키는 투우사 The Hallucinogenic Toreador'. 어디선가는 '투우사의 환상'이라는 제목으로도 소개된 그림이다.

 

그런데 원본은 아니라고 한다. 원본은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 피터스버그(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아니다^^)에 있는 달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2층에 유명한 '링컨의 얼굴' 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작품의 제목은 '18미터 밖에서 보면 링컨의 얼굴인, 해변을 바라보는 갈라의 누드 Gala nude looking at the sea, which, at 18 meters appears as President Lincoln'다.

 

정말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보인다.

 

 

그렇다. 그는 18미터 밖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지를 갖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 외에도 이 미술관에는 익히 보던 작품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섹스 어필의 유령 The spectre of sex appeal' 이라든가. 이 그림이 이렇게 작은 그림인 줄은 몰랐다. 엽서 두세 장 정도의 크기.

 

 

역시 유명하고 여러 작품으로 재생산 된 '갈라리나 Galarina' 당연히 다들 아시겠지만 갈라는 달리의 아내이자 뮤즈다.

 

 

유명한 빵 바구니 그림은 앞에 금으로 도금된 빵 바구니가 함께 있어야 완성된다.

 

 

백조로 변해 레다를 유혹한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브를 딴 '아토믹 레다 Leda Atomica'. 물론 여신의 원형은 역시 또 갈라다.

 

 

'풍자적 구성 Satirical compositon'. 히든싱어 관련 글에서 잠깐 소개했지만 앙리 마티스의 '춤' 연작과 너무나 닮아 있다. '춤'의 모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달리 같은 거장도 초기에는 자기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훈련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시도 중의 하나.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의 재해석.

 

 

 

 

루브르에 있는 유명한 니케 여신상을 재해석한 이 작품의 제목은 '릴리스-레이먼드 루셀에 대한 오마쥬 Lilith-Hommages to Raymond Roussel' 이다. 에반게리온 덕분에 이제는 모르는 분들이 거의 없지만 릴리스는 유다 전설에서 이브(하와) 이전에 존재했다는 아담의 짝이다. 아담에게 종속된 이브보다 독립적인 여성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권 운동의 심볼로 가끔 쓰이기도 하는데, 니케 여신상을 여성의 성기와 연결한 상상력이 다만 놀라울 뿐이다.

 

지하로 내려가면 달리의 또 다른 취미 중 하나인 금속공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신인 나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법은 돈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달리. 그러고 보면 금이 등장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렇게 금빛이 찬란한 지하 전시실 벽면을 보면, 이 놀라운 박물관에서 가장 감명깊은 상징물을 만나게 된다.

 

 

 

달리의 묘비.

 

그렇다. 피게레스에 있는 달리의 '극장 미술관'은 달리의 거대한 묘지였던 것이다.

 

달리 미술관을 정리하자면 갈길이 워낙 멀지만 달리에 관심 없는 사람도 있을테니 대략 다음편으로 마감. 그리고 나서 그날 밤. 가을날의 바르셀로네타 해변으로 갔는데... 달리의 그림 속 같은 초현실적인 풍경이 나타났다.

 

이런 느낌.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벌써 10편째 기행문인데 아직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까지 언제 가나. 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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