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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영중인 중국산 판타지 영화 '화피'를 보고도 '천녀유혼'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영화 '천녀유혼'(최근 제작된 드라마 '천녀유혼'이 아닙니다)을 본 적이 없는 사람뿐일 겁니다. 21세기의 감각과 기술이 21년 전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건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죠.

문화적으로 척박하기 짝이 없었던 80년대, 푸른 색 조명 아래 등장한 한 미녀의 고혹적인 자태는 한국 젊은이들의 삼혼칠백(三魂七魄)을 사정 보지 않고 안다리로 후려 버렸습니다. 개봉관인 아세아극장에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천녀유혼'은 재개봉관으로 흩어지면서 입소문을 타고 신드롬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미 개봉했다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에스케이프 걸'까지 '의개운천'이라는 중국영화풍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고, 이 영화 이후에는 '귀신같다'는 말이 더 이상 욕이 아니었습니다. 꼴사나운 산발 머리를 한 여자를 가리켜 '귀신같다'던 말은 어느새 사라지고, 예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자를 보고 '귀신같다'고 하게 됐죠.

그게 바로 왕조현의 위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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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는 조이 웡(Joey Wong)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왕조현은 1967년 1월 31일생입니다. 광동어로는 왕조인, 북경어로는 왕쭈샨, 대만식 북경어(북경어와 다른가보죠?) 왕츄션, 복주어로는 옹조헨이라고 불린다는군요. (네. 장난은 그만 치겠습니다.)

대만의 수도 대북에서 태어난 왕조현은 2남2녀의 둘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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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80년대에는 '왕조현이 대만 대표 국가대표 농구선수였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올림픽에 나갈 수 없다는 비장함 때문에 영화배우로 변신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왕조현은 어린 시절부터 쿠오 콴 아트스쿨에서 배우수업을 받은 연기자였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농구선수였고, 14세부터 농구 선수로 활약하기는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5세때 농구화 CF 한 방을 찍고서 농구 선수로서의 미래와는 안녕을 고하게 되죠. 당연합니다. 이런 미녀를 농구계로 돌려보낼만큼 대만 연예계가 무능하지는 않았겠죠.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키였을 겁니다.





그의 프로필에는 키가 1m72로 돼 있지만 실물을 본 사람들은 "최소한 1m80"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트릭을 쓰지 않고 그녀와 나란히 연기할 수 있는 남자 배우는 홍콩에는 거의 없었단 얘기죠.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주윤발과 공연한 1986년작 '의개운천(義蓋雲天)'입니다. 처음에는 '에스케이프 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가 몇년 뒤에 한문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죠.

왜 한문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을까요. 이유는 당연합니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열렸기 때문이고, 한자 제목(그것도 넉자라야 제 맛입니다)을 달아야 진정한 홍콩 영화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성기를 연 작품이라면 당연히 '영웅본색' 연작을 꼽아야겠지만 '천녀유혼'역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1987년,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한국 남자들은 모두 이 여자에게 혼이 나갔습니다.


물론 이 영화를 8번 본 제가 과장하는 건지도 모르지만(제 주위에는 10번 이상 본 사람도 즐비합니다) 이 영화는 정말 신비로웠습니다. 그 신비로움은 왕조현의 다른 사진들을 보면서 더욱 커졌습니다. 어떤 사진을 봐도 '천녀유혼'의 왕조현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특히 이 물통이 나오는 신에서의 아름다움은 정말 숨을 멎게 하죠. 이렇게 흘러갑니다.

아시다시피 '천녀유혼'은 포송령 원작 '요재지이'의 한 토막입니다. '요재지이'는 구우의 '전등신화', 김시습의 '금오신화'나 마찬가지로 이곳 저곳의 민담을 소설에 가까운 형식으로 엮은 단편집 형태의 책입니다. 당연히 '천녀유혼' 이야기도 매우 짧습니다.

아내가 있는 영채신이라는 남자가 객지의 절에서 하룻밤 유숙하다가 섭소천이라는 절세미인으로부터 유혹을 받지만 준엄하게 꾸짖고 물리칩니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나 보니 옆방의 서생들이 죽어 있죠.

어찌어찌해서 영채신은 역시 같은 절에 머물게 된 연적하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섭소천이 귀신이란 사실을 알고 유골을 파내 고향으로 돌아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줍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섭소천은 다시 영채신의 곁에 나타나 두 사람이 남매의 연을 맺고, 영채신의 아내가 병들어 죽자 재혼해서 아들 낳고 딸 낳고(...귀신이?) 행복하게 삽니다. 매우 동화적인 해피엔딩입니다.





이게 전부냐구요? 그렇습니다. 천녀(섭소천)를 괴롭히는 대마녀도, 인간세계에 실망해 숲으로 들어온 도사 연적하의 사연도, 흑산대마왕과의 혈투도, 천녀를 안장해 주면 영원히 그녀와 이별해야 하는 영채신의 애절한 사랑도 원작에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모두 서극과 정소동의 창작입니다.

자, '천녀유혼'을 보신 분이라면, 이 짧고 심심한 이야기를 이렇게 장대하고 아름다운, 가슴아픈 이야기로 만들어 낸 장인들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여기에 음악이며, 푸른 색과 붉은 색을 자유자재로 이용한 조명 역시 장인의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80년대 홍콩 영화의 르네상스는 짤짤이로 따온 게 아니었던 겁니다.


'영웅본색'이나 마찬가지로 '천녀유혼' 이후 엄청나게 많은 모방작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인 '화중선'에는 왕조현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죠. 아무튼 그중 퀄리티를 유지한 작품이었던 '천녀유혼 2 - 인간도'를 제외한 모든 작품은 한마디로 허섭쓰레기에 불과했죠.






최근 TV 시리즈로 재탄생한 천녀유혼 시리즈. 이렇게 장면까지 거의 똑같이 재현해 냈지만 원작의 포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게 중론입니다.





아무튼 이 영화 한편은 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홍콩 영화의 미적 감각을 지배했고, 또 한편으로는 왕조현이라는 배우의 연기 인생을 정리해 버렸습니다. 이 배우가 그 이후로 어떤 역할을 맡아도 '천녀유혼'의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죠. 물론 이후의 배우 인생을 볼 때 그리 적극적으로 지우려는 노력이 있었는지를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천녀유혼' 이전의 '의개운천'에서는 그래도 배우로서의 진지한 모습이 보였다고 할 수 있지만 '도신' 시리즈와 같은 현대물에서 왕조현은 그냥 예쁜 장식 같은 배우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스타의 자리를 유지하게 해 준 것이 '천녀유혼'의 또 다른 변형이랄 수 있는 '청사' 정도죠.




청사, 결말의 특수효과만 좀 자제했더라도 괜찮은 영화로 기억에 남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장동건이 나왔던 '무극'과도 통하는 영화입니다. 산해경에 나오는 과부(widow가 아니라 발이 엄청 빨랐던 전설의 거인족 이름입니다) 전설에 기반을 두고, 해보다 빨리 달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역시 허무한 '천녀유혼'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물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캐릭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연기력의 부족이었죠. '천녀유혼'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요부 연기가 현대극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관객들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다수 관객들은 왕조현이 현실로 내려오는 것, 즉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연기를 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는지도...

물론 저 '우연'은 그런 얘기를 들을 가치도 없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왕조현의 존재감은 거의 없습니다. 장국영을 좋아하는 동료 가수 역으로 나왔던 매염방의 우수 어린 눈길이 기억에 남을 뿐. 그러고 보니 왕조현을 뺀 두 사람은 고인이 됐군요.





'천녀유혼'은 한국과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히트했고, 왕조현은 일약 아시아의 톱스타가 됩니다. 한국에서 찍은 이 CF는 지금까지도 그 시대를 산 분들의 기억에 생생할 겁니다.



자, 이 CF를 보고 나면 꼭 생각나는 CF가 있죠.



이후 왕조현은 1989년에는 '홍콩에서 온 여인'이라는 일본 드라마에도 출연하죠. 이때부터 일본어 공부를 상당히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스타덤에 오른 것이 장애가 됐습니다. '천녀유혼'이 공개됐을 때 만 20세. 홍콩 진출 이후 8년간 왕조현은 58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매년 7편 이상을 찍은 셈이죠.

이 정도의 작품수를 유지하면서 이미지관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당시 홍콩 영화계의 현실이었다고 보는게 좋을 겁니다. 그야말로 그냥 찍어 붓는 형태의 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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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발목을 잡은 것은 그녀의 사생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홍콩에서의 그녀는 스캔들의 여왕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 자세히 하겠습니다) 결국 생활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한때 왕조현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 대중을 경악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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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 계속됩니다.



바로 그 다음편입니다.

왕조현이 왜 배우로 계속 성공하지 못했나, 후일담입니다.




영화 '화피'에 대한 내용은 이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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