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한 층을 내려가 퐁피두 4층.
걷다 보니 샤갈 특별전을 하고 있네. 아무리 샤갈의 도시지만 너무 편애하는거 아니냐는 생각으로 들여다보니, 뜻밖의 사연이 있는 전시다. 알고 보니 샤갈이 의상 디자이너 역할까지 했다고 하네.
사연인즉,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라고 하면 다 아실 바로 그 단체. 번역하면 '미국발레단'이라 그냥 저렇게 썼다)가 1944년,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새로운 안무로 싹 리뉴얼하려는 시점. 책임 연출자 루시아 체이스는 이미 완성된 무대 세트와 의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존경하는 마르크 샤갈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의 러시아적 감성으로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세요! 스트라빈스키 선생님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뭐 이런 식으로 설득을 했겠지. 사실 샤갈은 벨로루시 출신이지만 아무튼.
급하게 일을 맡은 샤갈은 딸 이다의 도움을 받아가며 100여벌의 의상과 소품 등등을 급하게 다시 만들어 냈는데,
불행히도 야심찬 새 공연에서 안무는 '총체적 난국'이라는 평을 들었다는 슬픈 이야기.
이 공연에서 칭찬받은 것은 샤갈의 혼이 담긴 의상 뿐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샤갈은 체이스를 위로하는 편지를 썼는데, 내용인 즉 '내가 보기에도 안무는 좀 이상했다. 그러니 빨리 조지 발란신에게 부탁해서 다시 어떻게 해 보라고 해라.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하고', 뭐 그런 얘기였다고.
그래서 발란신이 투입된 결과, 1947년의 새로운 안무는 성공을 거뒀고 샤갈의 의상도 같이 전설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진다.
스케치 하나하나가 다 멋진 건 당연한 일인데,
과연 샤갈의 이 꿈속같은 디자인을 실제 옷으로 승화시킨 디자이너/재단사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지. 실제 만들어진 옷이 궁금하기도 하다.
자료를 보내 대략 이런 느낌이었던 듯. 물론 그림이 더 멋지다. 영화도 항상 원작 소설이 더 좋듯, 당연한 일인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모퉁이를 돌아 또 다른 샤갈이 나타난다. (퐁피두는 정말 샤갈을 사랑하나보다)
바로 1963년, 오페라 가르니에의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준비했던 밑그림들.
샤갈은 그냥 붓 대고 막 그려서 그런 그림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샤갈도 미리 다 그려보고 하는 거였구나. ;;
음...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을거 같은데 말이지. (응 아니야)
아무튼 이런식으로 완성된 그림을 며칠 뒤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실제로 이 천정화의 감동은, 퐁피두에서 원화를 보고 갔기 때문에 더 컸다.
샤갈을 빼고도 퐁피두의 4층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사실 생각보다는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물론 '생각보다'가 중요하다). 게다가 5층은 작가 하나에 그림 하나 정도씩 수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있는 반면 4층은 작가 하나에 딸린 전시공간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니 현대미술의 그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이렇게 퐁피두에 자기 작품을 전시해 놓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물론 4층은 상설전시라기보다는 주기적으로 작가를 바꿔 전시하는 듯 했다. 안 그랬다가는 큰 일이 났을지도...
일단 눈길을 끄는 작품은 장 뒤비페의 <겨울 정원 Le Jardin d'hiver>. 겨울 정원이라는 말은 '온실'이란 말로도 해석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온실이라기보다는 그냥 알타미라 동굴 같은, 구석기 시대의 벽화가 그려진 동굴 같은 느낌.
회화가 아니라 3차원의 꽤 큰 동굴이라, 이렇게 안에 들어가서 기념촬영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실제 간거 맞음)
그리고 끌렸던 그림은 마크 브뤼스 Mark Blusse 의 <퉁그라우아의 딸 1 Mister Tungrahua's daughter I>. 퉁그라우아는 찾아보니 에콰도르에 있는 화산의 이름이라고. 2001년작인데, 여기서도 뭔가 일본 판화의 느낌이 솔솔 풍긴다.
그 뒤로는 대형 설치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키네틱 아트의 대가 야코브 아감 Yaacov Agam 이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집무 시절, 엘리제 궁 안에 있던 대통령 개인공간 안의 한 방을 이런 식으로 꾸몄다고 한다. 1974년이라니 퐁피두 센터를 막 짓고 있을 무렵인 듯.
그리고 나서 후임 지스카르 데스탱이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자, 이 공간을 철거해서(...아무래도 취향이 안 맞았던 게 아닐까), 그대로 뜯어다 퐁피두 센터에 전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TMI: 알고보니 아감은 88 올림픽 공식 작가라 이런 것도 했다고 한다. 이런 5공 부역자였다니...)
그리고 또 엄청나게 넓은 공간을 차지한 또 다른 작품은 주세페 페노네 Giuseppe Penone의 <숨쉬는 그림자 Respirare l'ombra>. 사진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벽의 표면은 월계수잎이 켜켜 덮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벽 한 구석에서 빛나는 황금의 폐. 작가는 이 작품 안에 페트라르카와 그의 연인 로라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문학의 정서를 전혀 모르다 보니 그런건 잘 모르겠고... 도시의 성벽처럼 화석이 되어 가는 잎들, 그 안에 금속으로 굳어진 폐, 이것만으로도 자연과 멀어져가는 문명의 공허함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든다.
옆을 보면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안셀름 키퍼.
안셀름 키퍼 Anselm Kiefer의 <벨리미르 클레브니코프에게 : 전쟁의 새로운 이론 Für Velimir Chlebnikow: neue Lehre vom Krieg Schicksale der Völker>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도 '벨리미르 클렘니코프에게...'라는 글이 크게 쓰여 있다. 전시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을, 2차대전때 사용되었을 법한 녹슨 잠수함들의 모습. 클렘니코프는 중요한 해전은 317년마다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기이한 이론을 내놓은 러시아 시인(시인이 대체 왜...) 이라고 하는데, 글쎄.
아무튼 내용은 뭘라도 설치의 규모에 압도되는 이 소시민 같으니.
또 한 구석에서는 중국계 태국 화가 탕 창 Tang Chang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요즘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국 화가들의 물결인가... 하고 보니 혈통이 중국계일 뿐(한자로는 陳壯), 태국에서 태어나 사망한 태국 작가. 심지어 중국어로는 위키 페이지도 없다. 그런데 국제적으로는 명성이 높은 듯.
아무튼 눈길을 끈 건 역시 이 그림이었다. <무제 Sans titre>. 아마도 자화상이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었던 작품이 마르게리트 위모 Marguerite Humeau의 <지상2 Gisant II>. 지상이란 우리가 중세 묘지에서 많이 보던, 묘소 위에 누운 형상으로 조각된 고인의 모습을 말한다(불어 발음은 '지조'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한데...).
누가 봐도 코끼리의 두개골 같은 형상인데, '작가에 따르면' 뒷부분은 인간의 발성기관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진화의 어느 한 시점에, 지금의 인간의 말소리를 낼 수 있는 형태로 발성기관의 돌연변이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런 돌연변이가 만약 코끼리에게서도 일어났다면 어떤 생물이 등장했을까.... 라는 상상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분들이 말씀하셨다. '이해하기 위해 언어로 된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더 이상 미술이 아니지' 라고. 하지만 현대미술의 시대가 오면서, 과연 해설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이런 위모의 작품처럼 그저 '보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식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온 작품이라면.
아무튼 80년대생의 젊은 작가이면서 '현대의 다빈치'라고 불릴 정도로 지식과 예술의 결합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작가라니 역시 관심이 아니 갈 수가 없다.
이번 방문을 통해 몇몇의 관심 작가를 마음 속에 등록하고 퐁피두를 나선다. 안녕. 언제 또 다시 만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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