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기자들이 가끔 이니셜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전에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글에는 이니셜이 나오긴 합니다만, 그리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어 보면 누군지 친절하게 가르쳐 드리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제가 만나 본 수많은 여배우들 가운데 이 분만큼 '여왕'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왕이나 여왕, 아무나 하는게 아니죠.본래의 제목은 'K, 그녀를 여왕이라고 인정하게 된 이유'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어 보고 나시면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2001년 쯤 있었던 일입니다. 


"따로 가서 한잔 할래요?"

만약 당신이 이런 메모를 미모의 톱스타로부터 받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렇다. 이 이야기는 누구라도 한번쯤 꿈꿔봤을 만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200*년, 한 사극이 시청률 50%에 육박하는 인기를 모으고 있을 때의 얘기다. 방송사는 신이 나서 제작진을 치하하는 잔치를 벌였다. 시끌벅적한 행사를 마치고 방송사 고위 간부들과 몇몇 기자들, 작가들과 일부 주연 배우들이 여의도에서 따로 자리를 벌였다. 흥이 난다기보단 지나치게 격식이 앞선 따분한 술자리였다.

그때 화장실을 다녀온 K가 슬며시 손을 뻗어 성냥갑 하나를 쥐어 주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던졌다. 눈빛이 0.1초나 스쳤을까. 못 견디게 궁금해진 기자는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성냥갑을 펼쳤다. 성냥갑 안쪽의 흰 속껍질에는 '따로 한잔 할래요?'라는 말과 함께 한 대형 가라오케 이름과 전화번호가 쓰여 있었다.

[참고로 핸드폰은 있었지만, 문자 기능이라는 것이 아직 나오기 전의 이야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기자는 학창시절 K가 출연하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그와 안면을 튼 적이 있었다. 취재하면서 몇 차례 옛 추억을 되새기기도 했고 현장에서 다른 기자들보다는 친근하게 말을 건넬 수 있었지만 그저 그런 정도. 그런 상황에서 기자에게 주어진 이 성냥갑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 지는 이 글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누가 이런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자리로 돌아온 기자는 K의 눈빛에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바보같이 헤벌쭉 웃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K도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가슴이 콩당거리고 뛰었다. 술자리에 10여 명의 사람이 있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 그와 의사소통을 했다는 쾌감은 매우 컸다. 술자리가 파하자 기자는 즉시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달렸다. 꽤 늦은 시간이라 약속 장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구에서 'K씨가 예약한 방'을 찾았다.

앞장선 웨이터가 문을 열 때 방안에서 여러 사람의 웃음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방을 잘못 찾았다'는 것이었다. 방안에는 적게 잡아도 30명은 돼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다. 60여 개의 눈동자가 내 몸에 꽂히자 술기가 확 달아났다. 입구 쪽에 앉은 한 사람이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금방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기자분이잖아. 몰라?"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누나한테 얘기 듣고 오신 거죠?"

그러니까 방을 잘못 찾은 건 아니었다.

"누나한테서 좀 전에 전화 왔어요. 곧 도착할 거래요. 먼저 저희랑 한잔 하고 계시죠."

그들은 '제작부', 즉 촬영ㆍ녹음ㆍ미술ㆍ조명 등의 스태프 중 막내급에 해당하는 친구들이었다. 흔히 퍼스트ㆍ세컨드ㆍ서드 등 숫자로 불리는 어시스턴트들은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박봉에 24시간을 근무하는, 육체적으로는 가장 혹사당하는 사람들이다. 화려한 축하연도 그들에게는 남의 일이었지만, 그런 그들을 누군가는 챙겨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K와 함께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따로 회식을 해 왔다고 했다. 이 자리에 K 이외의 다른 배우나 방송사 간부, 제작진의 우두머리들이 온 일은 없었다. 아무 힘도 없는 이들에게 술을 사 봐야 '누나'라는 친근한 호칭과 존경 외에 K가 얻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매달 적잖은 개인 돈을 써 가며 스태프의 노고를 위로해왔던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짧지 않은 경력이지만 어떤 배우도 이런 일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그 전에도, 그 뒤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동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도착했다.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들이 다시 집으로 데려가려 찾아온 큰누나를 만난다 한들, 그보다 반가운 환호성이 터지진 않았을 듯 싶다.

잠시 후 기자는 이런 대단한 일은 결코 돈이나 배포만으론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됐다. 그녀는 그 자리의 30여명과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폭탄주로 건배를 했다. 물론 전부 원샷으로.

이 감동적인 배포, 감동적인 주량. 그 광경을 지켜보다 기자는 어느새 의식을 잃었다. 얼마 전까지도 MBC TV <문희>가 방송됐다.  그는 나이를 잊은 듯 팽팽하고 아름답다. 과연 그의 젊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혹시 그 엄청난 주량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전생에 어느 나라 여왕이었을 것이 분명한 그 카리스마에서 온 것일까. 확실히 강수연에겐 대한민국의 다른 어떤 배우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 있다. (끝)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험해 보실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분을 직접 만나 보시면 누구라도 여왕으로 인정하고 싶어질 거라는 데 한표를 던집니다.

'연재를 했다가 > 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슴 속 한이 명가수를 만든다?  (20) 2008.12.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