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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주익 언덕으로 가는 길은 에스파냐 광장에서 시작된다. 에스파냐 광장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몬주익 언덕의 주요 포스트를 거쳐 몬주익 성을 지나 다시 광장으로 내려온다. '그 중간 중간'에 카탈루냐 미술관, 호안 미로 미술관, 보타닉 가든 등의 볼거리가 있다. 전부 샅샅이 구경하고 나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 다리도 아프고 그럴 여유가 없다.

 

심지어 이런 중요한 포스트도 버스 안에서.

 

 

 

 

 

 

제일 크게 나온 사진이 제일 흔들렸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영웅,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부조다.

 

당시를 기억할만한 또래라면, 결승점에 선두로 달려들어오던 황영조의 모습을 중계하는 캐스터의 "몬주익 언덕에.... 몬주익 언덕에...."라는 숨가쁜 코멘트를 통해 '몬주익 언덕'이란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92년 8월10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 경기인 마리톤에서 황영조는 전 세계의 황금 다리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따냈다.

 

황영조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우승후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황영조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이유는 더위에 강하다는 점. 당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위원회는 초여름 무더위를 피해 오후 6시30분로 출발 시간을 미뤘다. 그래도 시내는 스페인의 태양에 후끈 달아올라 있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결승점인 몬주익 경기장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대로 곁에 지어져 마지막 2km 정도는 오르막을 뛰어올라야 하는 난코스였다. 이미 세계 마라톤은 지구력에서 스피드로 패러다임이 바뀐 시점이었지만, 이런 난코스라는 점을 감안할 때 누구보다 폐활량이 크고 지구력이 강한 황영조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더위에 강한 한국 마라톤'은 이미 10년 전,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누구도 예상 못한 금메달을 따낸 김양곤 때부터 검증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김양곤은 기록상으론 2시간22분대의 저조한 성적이었지만 뉴델리의 무더위 속에서 페이스를 잘 지켜 경쟁자들을 따돌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몬주익 영웅'의 탄생.

 

 

 

예상대로 당시 세계신기록보다 7분 정도 뒤진 기록이었지만 무더위 속에서 기록한 값진 승리. 특히 손기정 이후 56년만의 마라톤 금메달이라 의미는 더욱 컸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황영조 신화의 시작이다. 황영조는 2년 뒤인 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국민 영웅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98년 이봉주의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한국 마라톤은 전성기를 이어갔다.

 

 

어쨌든 중간의 포스트들은 모두 통과하고 도착한 곳이 바로 몬주익 언덕 정상에 있는 몬주익 성이다.

 

몬주익은 '유태인의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뭐 유태인이 어쨌든 가 보면 이 자리야말로 바르셀로나라는 항구 도시를 수호하는 최대의 군사 거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요충지 중의 요충지다.

 

 

 

당연히 이런 대포도 있고,

 

 

성벽이 있다.

 

 

성벽 위로 올라가 보면 탁 트인 전망.

 

 

 

바르셀로나 시에는 어떤 건축물도 몬주익 성의 높이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꽤 큰 규모의 성이다.

 

 

 

 

 

반대쪽으로 나오면 바르셀로나 해안선이 역시 한 눈에 들어온다.

 

 

 

 

갈매기가 한가롭게 날고,

 

 

해변의 랜드마크가 된 W호텔이 멀리 보인다. 사진상으론 그리 인상적이지 않지만, 몬주익 성은 바르셀로나 전체를 한번쯤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로, 들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성 아래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출발점인 에스페냐 광장으로 내려왔다.

 

 

 

토요일 저녁. 저 몬주익의 분수 쇼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꾸역꾸역 까탈루냐 미술관 앞으로 몰려들고 있다.

 

아나운서 출신 여행작가 손미나가 "바르셀로나를 떠나 가장 생각났던 시공간"으로 지목했던 바로 그 분수 쇼. 장관이라는 말은 참 많이 들었는데 안타깝다. 여행중에 들를 수 있는 날은 금,토 이틀밖에 없었는데, 지금 분수 쇼를 바로 앞에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카탈루냐 음악당의 공연을 예매해 두었기 때문이다.

 

아쉬움에 한껏 줌을 당겨 봤다(위 사진).

 

 

실제로는 꽤 먼 거리.

 

 

분수쇼는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다음번 바르셀로나를 찾을 때 보기로.

(...이번 생에 다음 기회가 있어야 할텐데.)

 

 

 

 

다들 분수쇼는 이 노래가 나올 때가 클라이막스라고 한다.

 

당연히 프레디 머큐리, 몽세라 카바예가 함께 부른 'Barcelona'. 본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제가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프레디 머큐리가 AIDS로 급사하는 바람에 갑작스레 그 자리에서 밀려난다. 그리고 나서 등장한 것이 사라 브라이트먼과 호세 카레라스가 부른 'Adios Para Siempre'. 모든 사람이 앞의 노래가 더 좋다고들 했지만 당시만 해도 '에이즈로 죽은 사람이 부른 노래를... 상서롭지 못하게...'라는 분위기였다. 요즘같으면 오히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라고 더 난리가 났을 일이다.

 

 

 

 

에스파냐 광장을 대표하는 쇼핑몰. 모습을 보면 눈치챌 수 있지만 본래 투우장이라고 한다.

 

해변에 서 있는 콜럼버스 동상이나 마찬가지로, 옆에 있는 탑 같이 생긴 옥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코스도 꽤 인기있는 관광 코스다. 물론 올라가 보지 않았다.

 

다 아시겠지만 본래 바르셀로나는 투우를 즐기는 문화권이 아니다(아시다시피 대부분의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우리는 카탈루냐 사람이지 스페인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본래 두 군데의 투우장이 있었지만 그것도 사실상 관광객용이었고, 몇해 전에 아예 카탈루냐 주 법령으로 투우가 금지됐다. 그래서 기존 투우장은 모두 용도변경이 이뤄졌다고.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어찌어찌 해서 카탈루냐 음악당 도착.

 

이날 저녁, 극장 안의 식당에서 이번 스페인 여행 내내 가장 잊을 수 없는 식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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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둘쨋날. 역시 아침부터 바르셀로나 여행에 나섰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유로자전거나라 투어. 이번엔 도시 곳곳을 누비는 속살 투어다. 특히 전날 밤 투어에서 다녀 본 길들을 낮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끌렸다. 다만 걷는 거리가 이만저만 아닐 것 같아 다소 긴장했다.

 

그런데 정작 집합한 뒤, 카탈루냐 광장 맞은편의 카페로 향한다.

 

 

카페 이름은 4Gats. 4가 Quatro라 콰트로가츠라고 읽는다. 정식 이름은 카탈루냐어로 Els Quatro Gats 다. gat이 영어의 cat이니 네 마리의 고양이란 뜻.

 

이 카페가 바르셀로나에서 무명 시절의 피카소가 늘 죽치고 앉아 시간 때우던 유서깊은 곳이라는 거다. 갈 데가 없어 하루 종일 자리 차지하고 있던 피카소에게 가끔씩 커피도 한잔씩 서비스로 주고 하던 주인장이 사실상 피카소를 키웠다는 이야기. 피카소 뿐만이 아니고 이 카페는 당대 스페인 화단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카페의 주인이 당대의 유명 화가인 라몬 카사스 Ramon Casas 였기 때문. 파리를 늘 동경했던 카사스는 바르셀로나에도 파리의 유명 카페들처럼 예술가들의 보금자리가 될만한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가게(?)를 열었다.

 

아래 그림이 카사스의 유명한 대표작. 자전거 앞자리에 수염난 사람이 카사스 자신, 뒷자리 사람은 콰트로가츠의 공동 경영자인 페레 로메우 Pere Romeu라고 한다.

 

 

여기 있는 그림은 사본이고 진본은 박물관에 있다고.

 

 

 

아무튼 화가들답지 않게 경영 수완도 좋았던지 4Gats는 오늘날까지도 같은 자리에서 성업중이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한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 에도 나왔다. (사실 제목이 주는 기대감과는 달리 이 영화에는 바르셀로나의 풍광이 그닥 많이 소개되지 않는다.)

 

바로 이 아래쪽 자리 중 하나다.

 

 

 

 

아무튼 1897년부터 성업해온 유서깊은 곳 답게 곳곳이 예쁘고 아늑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카소의 일대기(말하자면 피카소와 일곱 여자-아내의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날 바르셀로나 투어의 시작이다.

 

사실 공식적인 미술사를 보면 피카소는 수없이 변신한다. 초기 - 청색시대 - 장밋빛시대 - 아프리칸 - 입체파 - 신고전주의 - 다시 입체파 - 자유분방한 만년으로 계속해서 바뀌는 스타일을 보였다. 막연히 이렇게만 알고 있던 터에 그 변화의 시기마다 피카소의 내면이 흔들릴만한 생활 면에서의 변화가 있었다는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창백하고 우울한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청년기 절친이었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 Carlos Casagemas의 자살, 그리고 1901년 파리로 건너가 느낀 '나는 우물 만 개구리였구나'와 식의 느낌에서 온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다. 피카소가 1881년생이니 이 해 나이 만 스무살. 이 콰트로가츠에서 늘 어울리던 친구, 그리고 파리로 같이 청운의 뜻을 품고 유학간 친구가 모델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하고 자살한 사건 정도면 충분히 인생을 바꿔놨을 만 하다.

 

 

 

이 청색시대를 대표하는 그림 '인생 La Vie'에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카사헤마스라는 설명. 피카소의 친구에 대한 애도가 느껴진다. 아무튼 이 청색시대는 피카소에게 사랑이 찾아오면서 끝난다. 역시 젊은이에겐 사랑이 약. 피카소가 모델 페르난도 올리비에 Fernando Olivier 와 사랑에 빠지면서 우울한 청색은 사라지고 바로 장및빛 시대가 시작된다.

 

 

 

 

피카소는 올리비에의 초상만 100장 이상 그렸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피카소가 여자를 총 몇명 사귀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여성 편력에서 시작점은 늘 이 올리비에다.

 

 

 

 

에바 구엘 Eva Gouel - 피카소의 초기 입체파 시기. 하지만 구엘은 1912년 피카소를 만나고 3년만에 결핵으로 병사한다. 깊이 사랑했다고는 하나, 피카소는 죽기 직전의 그녀를 나몰라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에서 인상적인 이야기: 피카소는 본래 현실적인 성격이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매우 민감했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처음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것은 1907년이었지만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일제히 혹평을 해 대자 장롱 깊숙히 그림을 감춰 두었다가 1916년, 시대가 큐비즘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서자 전시에 내놨다...는 이야기. 이유야 어쨌든 '아비뇽의 처녀들'이 9년 동안 미발표작으로 남아 있었던 건 사실이다.^^) 

 

 

 

올가 코흘로바 Olga Khokhlova - 러시아 발레단의 발레리나. 이 시기 피카소는 화단의 기린아로 칭송받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면서 과도한 실험성에서 도피, 신고전주의의 화풍을 지향한다. 어쨌든 피카소가 실제로 결혼한 첫 여자는 올가.

 

사실 수많은 여자관계에도 불구하고 피카소가 단 두번밖에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바로 올가가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Therese Walter - 1927년, 피카소는 17세의 마리 테레즈를 만난다. 임신중이던 아내 올가는 마리 테레즈도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격분해 이혼을 요구하지만 피카소는 재산 분할을 거부. 따라서 올가는 1955년 죽을 때까지 피카소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유지한다. 

 

아무튼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인 '꿈(위 그림)'의 주인공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마리 테레즈의 얼굴들을 보면 평온함과 행복이 느껴진다. 반면...

 

 

 

 

도라 마르 Dora Maar -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낳을 수 있게 했던 여자라는 평. 사진작가이며 그 스스로도 예술가여서 피카소 자신도 스스로에게 영감을 주는 여자라고 불렀다고 함. 1936~1944년 사이 피카소의 연인이었지만, 자유분방한 피카소에게 너무 집착하다가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피카소의 유명한 '우는 여자(위 그림)' 연작 그림이 바로 신경쇠약으로 피카소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 도라 마르를 모델로 한 것이다.

 

마리 테레즈를 그린 그림과 뒷날의 도라 마르를 그린 그림 만큼 그 여자들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비교도 없을 듯.

 

 

 

 

 

프랑수아즈 질루 Francoise Gilot - 가장 얘깃거리가 많은 여자다. 1943년, 62세의 피카소는 22세의 미술학도 를 만나 깊은 관계에 빠진다. 젊은 연인의 활력 덕분인지 이 시기의 피카소는 '고전 다시 그리기'의 새로운 세계에 진출한다.

 

 

 

이 그림도 지금은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이 그림을 그릴 무렵의 피카소는 자신감이 흘러 넘친 나머지 "야, 내 그림이 벨라스케스 그림보다 훨씬 낫지 않아?"하고 물어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화면 아래쪽의 개 그림에서 피카소의 유머 감각이 돋보인다. 이 개는 1992년, 바로 유명한 이 개의 모델이 된다.)

 

 

 

바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모델인 코비 Cobi. 어딘가에서는 피카소가 키우던 개 이름이 바로 코비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치 않다. 아무튼 잠시 곁길로 이야기가 샜다.

 

 

 

질루는 60이 넘은 피카소의 일방적인 만행과 왕자병,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젊은 여자들과의 스캔들에 피카소와 결별해 버린다. 그리고 나서 다른 식으로 피카소에게 복수를 했다. '피카소와의 삶 Life with Picasso'라는 자서전 풍의 책을 내면서, 한 해변에서 늙은 피카소가 큰 양산을 들고 젊은 자신을 공주처럼 모시고 따라다니는 장면의 사진을 표지로 사용한 것이다. 누가 봐도 '망할 놈의 영감, 어디 엿 좀 먹어 봐라' 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유사 이래 수많은 예술가들은 젊은 연인을 사귀면서 자신의 창의성을 유지했던 것 같다. 피카소 역시 젊은 여성들에게 끝없이 끌렸던 것이 바로 야수와 같은 창작력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다. 질루는 이에 대해 "그 '성스러운 괴물(sacred monster)'에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은 여자는 나 뿐"이라며 피카소의 이기적인 모습을 고발했지만... 그렇게 해서 그 자신이 얻은 건 무엇일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질루가 낳은 딸 팔로마 피카소는 뒷날 티파니의 보석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쳐 피카소의 자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다.

 

 

 

 

자클린 로케 Jacqueline Roque - 유로자전거나라 설명에선 '피카소도 결국 질루 이후 지친 탓인지 만년은 35세의 과부와 보냈다'고 되어 있었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피카소는 1953년 27세의 이혼녀 로케를 처음 만났다. 이 시기, 피카소는 도자기에 새롭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35세의 로케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니까 로케 역시 피카소가 좋아했던 '젊은 여자'였다. 단지 오래 버틴 젊은 여자였을 뿐이다. 운이 따랐다면 피카소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 '공식 아내'인 올가 코흘로바가 1955년 사망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로케는 피카소의 '아내 2호'가 됐다.

 

피카소의 두번째 결혼은 1973년 피카소의 죽음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질루를 비롯해 수많은 과거의 연인들, 피카소의 '씨'를 낳은 엄마들이 재산에 대한 권리를 놓고 도전해 왔고, 로케는 이들과 맞서 '피카소의 아내'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1986년, 로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설명에 따르면 로케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다른 유족들의 접근을 막을 정도로 독점욕이 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피카소 이야기 끝.

 

[물론 저는 미술사 전문가도 아니고, 바르셀로나를 다녀 온 여행객일 뿐입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제가 알고 있던 것들을 덧붙여 쓴 글입니다. 혹시 더 정확한 내용을 아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시면 가차없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피카소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페에서 듣는 느낌도 색달랐다.

 

 

 

바르셀로나 시가 인증한 문화공간으로서의 표석. 바르셀로나 곳곳에 이런 식의 유적 인증 표지가 있다.

 

 

 

"아저씨, 제가 죽치고 있어도 뭐라고 안 해 주셔서 감사해도. 혹시 제가 뭐 해 드릴거라도 없을까요?"

"음. 너 곧잘 그리는 것 같은데 우리 가게 포스터 하나만 그려 봐라."

"포스터요?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로트렉 그림이 마음에 들더라구요."

 

뭐 대략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 피카소가 그린 4Gats의 포스터.

 

이렇게 해서 첫 코스인 4Gats를 나서 피카소 미술관 Museo Picasso 로 간다.

 

 

 

 

 

 

좁다른 고딕 지구의 골목길을 수십번 꺾어져서 도착한 곳이 바로 피카소 미술관. 왜 피카소 미술관인데 철자에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B' 마크를 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바르셀로나 시의 공식 문장인 것 같기도 하다.

 

 

 

 

한 귀족 가문 저택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덕분에 중정이 있는 고운 건물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아름답다. 규모나 소장품의 수가 결코 어마어마하지는 않지만, 위의 이야기 속에서 여자들(!)과 함께 거론된 피카소의 시대별 변천사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잘 정돈된 미술관이었다. 입장료 11유로. 월요일 휴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특히나 이 글을 읽고 갔다면.^^

 

 

 

 

피카소 미술관에서 역시 다시 좁은 골목길을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넓어지면서 빛을 한껏 안고 나타나는 건물이 있다. 바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성당 중 하나인 산타마리아 델 마르 Santa Maria del Mar.

 

1384년 완공될 당시에는 이 성당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찰랑찰랑 하는 해변이었다고 한다. 산타마리아는 잘 알려진대로 뱃사람들을 수호하는 역할.

 

 

 

 

고전적인 사원의 양식미가 잘 살아 있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처럼 전 세계에 단 하나 있는 아름다움과는 좀 다르지만, 아무튼 내부에 들어서면 위압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유럽 대 성당의 느낌에 충실하다.

 

 

 

그렇지만 고전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수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중에는 1992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하나 있다.

 

1992년은 바로 바르셀로나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

 

 

자세히 보면 수많은 이니셜들이 쓰여 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 중 메달리스트들의 이름 철자를 이용해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다. 누가 찾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이 중에 황영조 선수의 이니셜이 있다고 한다.

 

눈 밝은 사람이 좀 찾아 주기 바란다. 내 눈엔 안 보여서.

 

 

 

 

 

7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산타마리아 델 마르는 여전히 예배를 보는 성당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카탈루냐 카톨릭의 상징인 검은 성모상.

 

본래의 검은 성모상은 이슬람 지배 초기, 이교에 대한 박해를 겁내 지하로 숨어들어갔던 시절의 유물이다. 그때도 처음부터 검은 색이었던 것은 아니고, 지하 동굴 성당에서 예배를 보려니 촛불이나 횃불의 그을음 때문에 성모상이 검게 변했다는 것. 그 전통을 기려 이렇게 지상에 나와 있는 성모상에도 검은 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리지널 검은 성모상은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 중 유명한 관광지인 몬세라트에서 볼 수 있다고.

  

 

 

이렇게 해서 오전 일정 끝. 한여름은 아니지만 바르셀로나의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오후엔 난데없이 바르셀로나 뒷골목에서 위대한 한국인과 마주치게 된다. 대체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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