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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와 관련된 코멘트를 할 때마다, 반드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볼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만들걸 그랬다"고 합니다. 물론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겠지만, 저는 이 말에 한 30% 정도는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감독의 '역사 비틀기' 솜씨는 이미 <황산벌>에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남자>는 그 부문에서는 <황산벌>의 성취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햄릿>을 이용한 경극 장면은 지나치게 가벼웠다고나 할까요. 영화는 화려하고 볼거리도 풍부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을 울리기에는 약간 부족했다는 것이 저의 느낌입니다.

아무튼 국민의 1/4이 봤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성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제 지독하게 못난 짓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음은 영화가 한창 흥행 가도를 달릴 무렵인 지난 2월에 쓰여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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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의 through*2] '왕의 남자'의 진실은? (1)
 

'왕의 남자'가 한국 영화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온갖 대작들이 겨울방학과 크리스마스-연말연시 대목을 겨냥하고 일제히 포문을 여는 12월. '킹콩'과 '태풍'의 쌍끌이 정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려되던 '왕의 남자'는 예상밖의 선전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물론 아직 관객 동원면에서는 '태풍'의 절반 정도인 200만명 선을 웃돌고 있지만 제작비는 '태풍'의 1/4 수준이니 효율면에서는 두배가 넘는 셈이다.

원작 연극 '이'가 보여준 이색적인 소재, 감우성과 정진영에서 신인 이준기에 이르는 출연진의 호연, 이미 '황산벌'에서 역사의 재해석에 만만찮은 솜씨를 보여준 이준익 감독의 3박자가 조화를 이룬 결과. 그런데 '왕의 남자'를 보다 보면 궁금증이 절로 생긴다. 과연 이 영화는 얼마나 역사 속의 사실과 일치하고 있을까? 예전같으면 꿈도 꾸기 힘든 일이지만 최근 전산화된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의 힘으로 일반인들도 조선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단, 이하의 내용은 그냥 궁금증을 해소하자는 글일 뿐, 영화의 공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일찌기 임권택 감독의 '개벽'이 개봉됐을 때 한 재야사학자는 '최제우와 전봉준은 보은 집회에서 만난 적이 없는데도 영화에서는 사실을 왜곡했다'며 영화의 '부정확한 고증'을 지적하는 글을 일간지에 기고하기도 했지만, 이는 영화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다. 영화 작가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사건들의 구멍을 상상력으로 메울 권리가 있다. 영화는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 장생과 공길은 실존 인물인가?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의 연산군조에 장생이란 인물은 나오지 않지만 공길은 딱 한번 나온다. 연산군 11년(폐위되기 1년 전) 12월 29일의 일이다.

배우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중략)'논어(論語)'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하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流配)하였다.

이날 왕은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로 모이면 도둑이 된다"는 이유로 아예 광대들이 대거 참석하던 전통 유희인 나례를 폐지시켜버렸다. 배우라는 존재에 대해 어지간히 비위가 상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다. 이보다 6년 전인 연산군 5년(1499년) 12월19일만 해도 은손(銀孫)이라는 뛰어났던 광대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가 은퇴했으니 후임자를 천거하라고 대신들에게 요구할 정도로 연희에 애정이 두터웠던 연산군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실제의 역사는 이런 기록 한 줄로 추정하기에는 훨씬 복잡했을 것이다. 참고로 공길이 미소년이었을 것이라는 내용은 전혀 없다.


2. '왕의 남자'가 커버하고 있는 시간은 어느 정도의 기간인가?

시작의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앞부분의 내용이 갑자사화 직전의 긴장된 분위기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작은 연산군 10년인 1504년 3월 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박원종과 성희안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1506년이다. 이렇게 따지면 전체 시간은 약 2년에 달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2년이 흘렀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3. 연산군은 정말 성종의 후궁들을 영화처럼 죽였나?

놀랍게도 실록은 영화보다 훨씬 끔찍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연산군 10년(1504년) 3월20일, 연산군은 임사홍의 밀고로 마침내 모친에 대한 복수의 칼을 뽑았다. 폐비 윤씨의 죽음이 아버지 성종의 후궁이었던 엄씨와 정씨, 그리고 이들을 궁으로 들인 할머니 인수대비의 참소 때문이라고 판단한 연산군은 일단 정씨의 소생인 두 동생, 안양군 항과 봉안군 봉을 잡아들여 곤장을 친다. 그 다음의 행동은 인간으로서는 용서받기 힘든 패륜의 극치였다. 실록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본다.

(왕은)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 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안양군 항과 봉안군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중략)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다음날 왕은 자신의 명대로 어머니를 곤장으로 친 안양군에게 말 한마리를 상으로 내리는, 제 정신인 사람은 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결국 안양군 봉안군 형제는 1년 뒤 유배를 거쳐 사약을 받는다. 연산군은 이들을 죽이기 전에도 전 재산을 몰수하고 첩들을 다른 종친들에게 첩으로 보내는 등 악착같은 복수의 집념을 보였다. (2편에서 계속  http://isblog.joins.com/fivecard/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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