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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계속됩니다. http://isblog.joins.com/fivecard/13)


흔히 조선 3대 악녀(?)로 정난정, 장녹수, 장희빈을 꼽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기에 광해군 때의 상궁 김개시(개똥이)를 포함시키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아무튼 조선같은 신분사회에서 여자의 몸으로 정권을 농단할 수 있었다는 건 대단한 재능이라고 봐야겠죠.

영화 <왕의 남자>에서 이준기에 비해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강성연은 농염한 연기로 전과는 크게 다른 느낌을 심는데 성공했습니다. TV에선 지나치게 바른생활소녀 역할만 해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무튼 강성연이 연기한 장녹수는, 실제로는 강성연 만한 미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미녀가 아닌데도 남자를 녹이는 별난 재주가 있었다...는 것이 요지인데, 한번 자세한 내용을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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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2] <왕의 남자>의 진실은?

연산군이 정씨와 엄씨의 시신을 처리한 방식은 원문에는 '裂而?之, 散棄山野'라고 되어 있다. '잘게 찢어 해(?, 젓갈)로 담가 산과 들에 흩뿌렸다'는 뜻이다. 시신마저도 제대로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은 최고의 형벌을 뜻한다. 일찌기 한고조 유방이 통일의 공신인 팽월을 죽인 뒤 시체를 해(?)로 만들어 각지의 장수들에게 돌려 먹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내용은 뒷날 '중국인은 사람 고기를 수시로 먹었다'는 오해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저 처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분풀이가 되지 않았던 새디스트들이 개발한 복수의 한 방법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4. 장녹수는 정말로 연산군을 아이 다루듯 했나?

강성연이 연기한 장녹수는 연산군을 아기 다루듯 하며 공길과 연산의 관계를 질투하는 드센 여자로 나온다. 과연 실제의 장녹수는 어떤 여자였을까.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장녹수는 이팔 청춘도 아니었고, 빼어난 미인도 아닌 30여세의 농염한 여인이었으며 특히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다'는 것은 실록에도 나온다. 실록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장녹수는 제안 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였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의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寵愛)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얼굴은 보통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엄청난 상을 내렸다. (중략)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


5. 이극균은 정말 역모를 일으켰나?

광대들을 동물처럼 풀어놓은 사냥놀이에서 진짜 화살을 쏘다 잡힌 신하에게 연산군은 "네놈은 내 어머니에게 사약을 안긴 놈이 아니냐"고 말한다. 대본상으로 이 인물은 이극균이다(사실 진짜 이극균은 연산군에게 처단될 때 이미 67세의 노인이었으므로 활을 쏘아 누구를 노리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종조에 북방의 야인들을 무찔러 국경을 안정시키는 등 공이 많았으나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사사당할 때 조카 이세좌와 함께 사약을 받든 탓에 갑자사화의 희생양이 됐다. 영화와 같은 사건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연산군은 이극균이 '나라의 명을 따랐을 뿐 아무리 생각해도 지은 죄가 없다'며 사약을 먹지 않고 목을 매어 죽자 시신의 목을 베어 효수한 뒤, 나중에는 무덤을 파 백골을 바람에 날리게 하는 등 복수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극균과 이세좌의 운명은 두고 두고 얘깃거리가 됐다. 뒷날 숙종 때의 장희빈은 사약을 거부하며 "나에게 사약을 안기는 자는 뒷날 이세좌의 꼴이 될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뒷날 경종이 될 운명이었으니 그리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다만 경종이 단명하는 바람에 갑자사화와 같은 피바람은 다시 일지 않았다.


6. 한글로 연산군을 욕한 벽보가 붙었나?


이것이 유명한 익명서 사건이다. 1504년 7월, 신수영의 집에 익명으로 된 투서가 날아들어왔다. 살펴보니 3명의 의녀들이 모여서 임금을 비판했다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익명서가 순 한글로 쓰여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한 의녀가 '옛 임금은 난시(亂時)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파리 머리를 끊듯이 죽이는가. 아아! 어느 때나 이를 분별할까?’ 하고 묻자 다른 의녀가 ‘그렇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하려니와, 무슨 의심이 있으랴’라고 대답했다는 등의 대담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이 익명서를 보고 연산군은 대노하여 익명서의 등장인물들인 실재 인물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다들 '전혀 모르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대신들은 '고발하는 자에게는 범인의 재산과 베 500필을 주고, 벼슬이 없는 자라면 3품 벼슬을 주며, 천민이면 양인을 만들어 준다'는 후한 상을 내걸기를 주청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범인이 잡히자 않자 연산군은 몸이 달았다. 7월22일에는 한글을 쓰는 자를 처벌하고, 한글로 구결을 단 책까지 불태우라는 '언문 금지령'이 내려지고, 7월23일에는 한글을 잘 쓰는 자들의 필체를 보고하게 하여 필적 대조를 통해 범인을 잡으라는 지시까지 내린다. 결국 25일에는 한글과 한문을 잘 쓰는 자들의 필적을 사헌부 등에서 보관하게 하여 뒷날의 사단에 대비하라는 조치가 내려진다. 이렇게 난리를 피운 데 비하면 범인이 잡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필적 대조 사태는 영화에 나온 것과 과히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7. 연산군은 동성애자였나?

정사든 야사든 '연산군과 동성애'에 대한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연산군에게서는 과도한 이성애의 흔적이 보일 뿐이다. 나중에 숙원의 직첩을 받은 장녹수를 비롯해 전향, 수근비 등의 수많은 여인들이 실록에 이름을 드러낸다. 특히 '사대부가의 여인들을 잔치에 불러 오래도록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종친인 월산대군부인 박씨와도 관계를 맺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월산대군은 아버지 성종의 친형이니 자신의 큰어머니를 능욕한 셈이다.

연산군 12년(1506년) 7월20일, 월산대군부인 박씨가 사망한 내용을 다루며 실록은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자결한 것이라고 쑥덕거렸다(人言見幸於王, 有胎候, 服藥死)'는 내용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스캔들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이 바로 이 대군부인 박씨의 남동생이었던 것이다. 박원종은 누이의 시신 앞에서 통곡했고 그로부터 불과 40여일 뒤인 9월2일, 성희안 유자광 등과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물리치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옹립한다. 아무튼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연산군이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 인용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의 온라인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을 참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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