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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대구 부근의 기지촌에서 컨트리 뮤직을 연주하던 상규(조승우) 패거리는 낯선 흑인음악을 연주하는 기타리스트 만식(차승우) 패거리를 만나 의기투합, 6인조 밴드를 결성합니다. 팀 이름은 데블스. 때맞춰 서울에서 보컬그룹 페스티발이 열린다는 사실을 안 이들은 서울 진출을 노립니다.

하지만 이들의 서울 진출은 결코 쉽지 않죠. 시민회관 화재 이후 막 피어나던 그룹사운드들은 설 자리를 잃고, 은근히 이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 주간지 기자 병욱(이성민)은 통행금지와 밴드의 공연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건 바로 통금 해제 시간인 4시까지 올나잇으로 영업하는 나이트클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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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 감독의 '고고70'은 한국 최초의 '본격' 록 밴드 영화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음익 영화를 표방한 영화들은 꽤 많이 있었습니다. 80년대의 청춘스타 전영록을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영화들이 있었고(개중엔 여성 밴드를 주인공으로 한 '돌아이' 시리즈도 있었죠), 또 한때는 동방신기급의 인기를 끌었던 송골매 멤버들이 주연한 '모두다 사랑하리' 류의 영화들도 있었습니다. 윤도현의 '정글 스토리'도 빼놓을 수 없겠죠.

하지만 음향과 음악, 연주와 스토리가 제대로 '붙은' 영화로는 아마도 '고고70'을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 속의 밴드지만 조승우와 차승우를 주축으로 한 밴드 데블스는 실제로 존재했던 밴드인 동시에, 자신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진짜 밴드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조승우와 신민아지만, 진짜 주인공은 '밴드'입니다. 혹은 이 밴드가 펼치는 공연과 노래야말로 진짜 주인공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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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화려한 휴가'를 볼 때와 비슷한 안타까움입니다. 1970년대, 지금은 기억마저도 희미해진 옛날이지만 우리에게도 저렇게 촌스럽고 미약해 보이지만 다양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문화가 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는게 아깝고 분했습니다.

혹자는 이 시기의 대중문화, 특히 대중음악에 대해 '번역 문화'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이 시기의 밴드들은 해외의 성공적인 음악을 '따 오는 데' 급급합니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관심도 없을 때라 귀로 들어서 좋은 음악을 그대로 가져다 개사해서 쓰기도 하던 시절이죠. 이 영화에도 나오는 C.C.R의 'Proud Mary'같은 노래는 한글로 개사한 곡만도 10여 종류가 존재할 정돕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조영남의 '물레방아 인생'이죠. '도올고, 도오는, 물래방아 이인생' 하는 노래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올라가요 남산, 놀아봐요 명동'이라는 가사로 등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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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지 몇해 되지도 않았던 시절, 그렇게 남의 문화를 '이식'하는 과정이 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지가 의문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을 모방하고, 베껴 내다 보면 어느 틈엔가 우리만의 독특한 것을 만들어 낼 여지가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70년대는 너무 어두웠습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원한 것은 스파르타식의 금욕적인 병영국가였고, 한국전쟁을 겪은 당시의 '어른' 들은 이런 국가 이념에 쉽게 동조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있어 문화라는 것은 사치였고, 나약과 퇴폐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란 군가나 새마을 노래의 수준이었을 뿐입니다.

제가 TV를 처음 이해하기 시작했던 무렵의 한국 대중문화계는 정말 뻥 뚫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른바 '대마초 파동'으로 이름을 알만한 가수들은 모조리 무대와 방송에서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한창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던 친척 형들은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나 이장희의 '그건 너', '한잔의 추억' 같은 금지곡을 부르는 걸 반항의 상징으로 생각하던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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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는 '딴따라'를 경시하는 풍조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일까요. 어차피 대중들이 모두 좋아하기엔 한계가 있는 클래식 문화는 숭상하면서도(그것도 사실 숭상이라기보단 해외 유명 콩쿨에서 입상하는 걸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걸 보듯하는 분위기에 가깝죠) 대중이 모두 사랑할 수 있는 문화는 비천하고 시간낭비에 가까운 것으로 매도한 대가를 한국 사회는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 대가란 이런 겁니다. 40년 전만 해도 한국의 국부는 땅만 보고 묵묵히 일하는 근면한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몇명의 천재가 수천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입니다. 이른바 창의력의 시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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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란 나라는 19세기가 전성기였고, 양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한 구석으로 찌그러져 버리지만, 현대의 영국은 창의력 선진국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패션과 음악,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영국은 세계 최첨단의 인재들을 계속 배출하고 있죠(물론 세계적인 금융 선진국이기도 합니다만). 대중 문화의 질과 다양성 부문에서 영국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성과물을 계속해서 뽑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저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보수적이고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면서도 '딴따라'들에게 기사 작위를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진취적인 태도가 바로 그 힘이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딴따라'들과 협연하기를 꺼리지 않는 그런 문화적 관용과 창의력은 종이의 앞뒷면입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튀는 놈'들을 '딴 생각을 품은 놈', 혹은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놈' 들로 때려 잡은 결과, 한국의 대중문화는 21세기까지도 외국 것들을 누가 먼저 베껴오느냐로 승부가 갈리는 수준에 머물게 됐습니다.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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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동기에 이미 '퇴폐문화의 주범'이라는 철퇴와 함께 지하로 사라져버린 한국 록 문화의 위기는 말할 것도 없죠. 몇 차례의 '쥐잡기'로 인해 사라졌다 다시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다시 등장하는 사이 '록 문화'에는 심각한 왜곡이 등장합니다. 가장 대중적이고 즐거워야 할 록 문화가 기이하게도 저항의 상징(물론 이런 부분도 의미와 전통을 가진 것이지만) 처럼 되어 버린 겁니다. 가장 대중 가까이 가야 할 록 문화가 오히려 대중과 멀어질수록 정통성을 가진 것처럼 오해되는 분위기를 띠게 된 것이죠. 이것 역시 통탄할 일입니다.

딴 얘기가 너무 길어졌지만, '고고70'은 그런 암울한 시대, 한국 대중문화의 창의력을 군화가 짓밟아 버린 시대의 우화입니다. 소재는 지극히 비극적이지만, 당시의 발랄했던 청춘을 그린 작품인 만큼 분위기는 밝고 싱싱합니다. 최호 감독의 손끝을 통해 이런 분위기는 관객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죠. 70년대와 80년대, 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구호를 외친 것도 저항이었지만 머리를 기르고 기타를 메고 다니거나, 통금 해제 시간인 새벽 4시 거리로 달려나오면서 경찰관들을 희롱하듯 소리를 지르는 것(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도 소극적인 저항이었다는 얘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당시의 록밴드 문화와 데블스 멤버들을 마냥 우상화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들 또한 그냥 인간들일 뿐이고, 도덕적으로는 우월할 것 하나 없습니다. 인기를 무기로 여자들과 희희낙락하기도 하고, 도박으로 악기를 날리기도 하며, 인기에 취해서 친구며 '초심'을 잃는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균형을 이루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인공들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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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70'이 이런 완성도를 갖는 데 있어 조승우라는 탁월한 배우의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특히 무대에서 '엄마, 보고싶다!'를 외치는 조승우는 지금껏 우리가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가져 보지 못한 록 히어로의 상상 속 재현이라는 느낌이 아깝지 않은 명연을 펼칩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승우라는 배우의 에너지가, 그가 출연한 모든 작품을 통틀어 최대한으로 발휘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에너지라는 단어를 자꾸 사용하게 되는데,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영화 전체가 에너지로 꽉 차 있다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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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아 또한 이제껏 보여주지 못했던 발랄함을 이 영화에서는 한껏 뽐낼 수 있습니다. 이 배우에게도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 중 최고라는 표현을 써야 할 것 같군요. 이 작품에서의 신민아를 보면 그동안의 갖고 있던 청순의 이미지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타리스트 만식 역의 차승우도 연기자 데뷔(?)를 통해 감춰졌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아무튼 배우들의 열연과 영화의 열기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고고70'는 남달리 생기 넘치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화면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신나게 찍었는지 느껴진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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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걱정되는 부분은 사실 이해의 깊이에 따라 감상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시대를 경험했거나 어렴풋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 이 영화의 진정과 유머가 통렬하게 와 닿을수 있는 반면, 1970년대 후반 이후에 태어난 관객들은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시대를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에게는 좀 불친절한 영화도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역사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리고 뇌가 정확한 반복 박자의 '나이트 댄스' 음악에만 젖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 영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올해 여름 이후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영화라면 '고고70'이 아닐까 싶습니다.


추천과 댓글을 생활화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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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막상 화면을 보면서 낄낄대고 웃으면서도 마음 속은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저 시대, 그렇게 무식하게 싹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좀 더 나은 대중문화 환경을 향유할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기 때문이죠. 물론 영화 자체는 그런 생각 따위일랑 걱정 많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저 신나게 '놀면서' 볼 수 있는 영홥니다.


p.s.2. 이 영화는 한국 대중음악의 '2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승우는 록 아티스트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가수 조경수의 아들. 만식 역의 차승우는 한때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렸던 미남 가수 차중락의 조카입니다. 아버지 차중광도 가수였죠. 또 록의 대부 신중현의 2세들인 신윤철과 신석철도 등장합니다. 잘 찾아보시길.^


p.s.3. 영화에 나오는 주간서울 이병욱 기자의 모델은 잘 알려진대로 타이거 JK의 아버지인 서병후씨(전 주간중앙 기자)입니다. 하지만 이 분은 이 영화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3자의 눈으로 보기엔 이런게 시빗거리가 될까 싶기도 하고, 특히나 이 분이 대중문화에 정통하신 분이란 점에서 상당히 실망스러운 반응입니다. 이 분의 항의로 결국 와일드캣츠라는 여성 그룹의 이름이 와일드걸스로 바뀌었다는군요.

서병후씨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3&dir_id=301&eid=L0dCFk3/eDOtVynGoSZHNNdPgHP5Lbxu&qb=yLK058fRIL+1yK0goa6w7bDtNzChryC/1rDuu+ewxw==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노래, 'Land of 1000 dances'의 원곡입니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윌슨 피켓의 노래죠. 이런 분위기의 음악에 익숙지 않은 분들도 50초만 들으면, '아, 이 노래?' 하실만큼 유명한 후렴구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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