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손 대는 것마다 모두 죽여버리는 죽음의 천사 본드가 날아간 곳은 아이티. 여기서 본드는 친환경 기업 경영자로 포장된 악당 도미닉 그린(마티유 아말릭)과 복수를 위해 그에게 접근한 카밀(올가 쿠릴렌코)을 만나게 됩니다. 본드는 그린을 뒤쫓지만, 그린은 이미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유력한 조력자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 그에게서 손을 떼라는 명령이 내려오지만 본드가 그런 사소한 명령 따위에 얽매일 리가 없겠죠?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러서야 거대 조직의 이름이 '퀀텀 오브 솔러스'라는 걸 가르쳐 주는 이 작품은 매우 이색적인 본드 영화입니다. 21편 혹은 22편에 달하는(23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죠) 007 시리즈 전편 중에서 앞 편의 내용에서 그대로 이어 시작하는 경우는 이 영화 한편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새로운 007로 등장했을 때만 해도 온 세상이 반대자들로 떠들썩했지만 그가 주연한 '카지노 로열'이 흥행에서 대성공을 기록하면서, 반대의 소리는 쑥 들어갔습니다. 어떤 본드 팬들은 다니엘 크레이그와 '카지노 로열'의 방향이 이언 플레밍과 초기 본드 영화의 근원에 다가간 것이라며 옹호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옛날 블로그에서 오래 전에 펼쳐졌던 그 본드 논란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이런 얘기가 - 제임스 본드가 왜 제이슨 본을 추종하고 있느냐는 주장을 비롯해서 - 전혀 새롭지 않을 겁니다.
크레이그-본드의 2탄, '퀀텀 오브 솔러스'는 액션 영화로서 매우 훌륭합니다. 액션이 좀 지나치게 정신없긴 하지만, 액션에서 액션으로 건너 뛰는 솜씨는 매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너무 자주 권총도 아닌 주먹다짐이 등장하는 점을 포함해 대부분의 액션 시퀀스가 왠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준다는(굳이 제이슨 본을 다시 들먹이지는 않겠습니다)게 좀 아쉬울 뿐입니다.
좀 더 두드러진 단점도 있습니다. 두 명의 본드걸이 출연하지만, 예전의 본드걸들에 비해 너무 초라합니다. 특히 본드와 하룻밤을 보낸 뒤 '골드핑거'의 오마주 신에 등장하는 처지가 되고 마는 영국 배우 젬마 아터튼은 여러 모로 실망스럽습니다.
메인 본드걸이라고 할 수 있는 올가 쿠릴렌코 역시 영화 속에서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복수에 눈이 먼 아이큐 25짜리 캐릭터를 원망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쿠릴렌코가 연기하는 카밀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 본드가 너무 빨리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도록 다리를 거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영화는 106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도 러닝타임이 그렇게 짧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그리 탄탄하지 않은 플롯을 감안할 때 러닝타임을 줄인 제작진의 과감한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크레이그가 주도하는 새로운 본드 시리즈에 적대적입니다. 아마도 지금껏 로저 무어가 최고의 본드라고 생각하고, 로저 무어 시절에 성장해 다 큰 뒤에 션 코너리의 본드 영화들을 역사책 보듯 본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크레이그 옹호자들은 크레이그의 스타일이 초창기 코너리의 스타일('위기일발' 이전까지의 액션형 본드)을 재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이언 플레밍이 묘사한, 해사한 미중년이 아니라 오른쪽 뺨에 상처가 있는 현장 요원형 본드에 더 어울린다고도 하지요.
하지만 기존의 본드와 크레이그 본드의 결정적인 차이는 유머 감각입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유머 감각이 없는 본드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퀀텀'에서 본드는 단 한 차례 유머를 구사하더군요. "우리는 교사들인데 로또에 맞았소." 위기에 닥쳤을 때 찡그리고 인상을 쓰는 것이 과연 본드일까요? 여기에는 정말 동의하기 힘듭니다.
옹호자들은 또 말합니다. 새로운 본드는 이제 만들어지는 과정이고, 그 본드가 완성될 때(아마도 다음 편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예전의 본드가 갖고 있던 아우라가 다시 찾아올 거라고. 하지만 지금 본드 제작자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그저 돈다발일 뿐입니다.
그 '새로운 본드'라는 것은 이미 '카지노 로열' 때 다 드러났지만, 제이슨 본과 '24'의 잭 바우어를 합쳐 놓은 듯한 잡종 액션 영웅일 뿐입니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 나오는 본드도 존중할 의미가 있겠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본드는 20여편의 영화를 통해 자리잡은 새로운 캐릭터입니다.
사실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본드도 있고, 저런 본드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 본드의 모습도 바뀌곤 하는 게 정상이겠죠. 저는 다니엘 크레이그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레이어 케이크' 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충분히 주연급 배우의 역량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스티브 맥퀸 팬 중에서 과연 스티브 맥퀸이 007 역으로 나왔을 때 환호할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이언 플레밍이 가장 강력하게 밀었던 본드는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나왔던 전형적인 영국 신사 데이비드 니븐이었습니다. 물론 플레밍도 '위기일발'에서의 코너리를 보고 극찬을 했지만, 이건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라 코너리가 자신이 니븐에게서 기대한 요소들을 연기해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크레이그가 코너리나 니븐이 보여줬던, 침몰하는 배의 마스트에서도 연미복을 차려 입고 "그래도 아직 담배 필 시간은 있겠지?"라고 말하는 식의 여유와 유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해선 매우 비관적입니다. 하지만 크레이그의 본드 시리즈가 흥행에 줄곧 성공하는 한 이런 기대를 채워줄 또 다른 본드의 출현은 먼 미래의 일이 되고 말 것 같아 더욱 아쉽습니다.
이런 본드는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을까요.
p.s. 보드카 마티니를 마시지 않는 이 007은 영화 속에서 새로운 칵테일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스폰서 중 하나인 세계적인 보드카 메이커 스미르노프는 이 칵테일을 '베스퍼'라고 부를 모양입니다. 성분은 15ml Smirnoff Black Vodka, 45ml Gordon’s Gin, 7.5ml Lillet Blanc.
칵테일이라고는 하지만 40도짜리 술들의 조합이니 스트레이트를 먹는 거나 비슷하겠군요. 이걸 6잔 마셨으니 67.5 x 6 = 405 ml. 700ml짜리 위스키를(안주도 없이) 반병 이상 마신 셈이었네요. 주당 인정.
p.s.2. 로저 무어 경이 또 한 말씀 하셨군요.
'뭘 좀 하다가 > 영화를 보다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해 청룡영화상 예상, 누가 받을까? (42) | 2008.11.19 |
---|---|
왕년의 007은 '퀀텀'이 슬프다 (50) | 2008.11.12 |
상상력의 제왕, 마이클 크라이튼을 회고하며 (60) | 2008.11.07 |
화피, 중국 대작영화의 위기 (38) | 2008.11.03 |
미쓰 홍당무, 알이 꽉 찬 꽃게같은 (38) | 2008.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