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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완성되기 전부터 '뭔가 괴물같은 영화가 하나 나올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나홍진이라는 신인 감독은 '어쩌면 천재일 지도 모른다'는 소문의 주인공이었고, 두 명의 주연 배우 역시 역량이 입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윤석은 '타짜'를 통해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과 같은 선에 설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고, 하정우 역시 뭔가 터뜨리고 말 재목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죠. 그래서 정작 영화의 세부 사항(잔혹한 스릴러라는 것 외에는)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대가 꽤 영글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원래 큰 법. 하지만 진짜 물건은 그런 큰 기대를 넘는 파도를 만듭니다. 저 말고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2008년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추격자'는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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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마사지 업주로 변신한 전직 형사 엄중호(김윤석)는 잇달아 일어나는 휘하 마사지사들의 실종으로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는 어느날 애 딸린 미진(서영희)을 억지로 한 손님에게 내보낸 뒤에 문제의 휴대폰 번호가 수상하다는 걸 깨닫죠. 하지만 미진은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맙니다.

'추격자'는 잘 알려진대로 출장마사지사 등 유흥업계 종사 여성들을 주로 살해했던 유영철 사건을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누가 살인마인지를 추격하는 두뇌 게임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닙니다. 범인의 정체는 시작하고 20분 이내에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죠. 하지만 게임은 거기서 시작되고, 나홍진 감독은 두 시간 내내 관객의 가슴을 벌렁벌렁하게 만듭니다.

혹자는 이 영화를 가리켜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연출 데뷔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장편 영화를 처음 연출하는 감독의 작품으로서 이보다 훌륭한 영화는 없었다는 뜻이죠.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이 영화는 그런 칭찬을 받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작품입니다.




이미 엄청난 찬사를 받고 있는 영화인 만큼, 칭찬은 간략하게 보태고자 합니다. 영화 진행상 중요한 대부분의 장면들이 밤의 골목길이나 실내의 침침한 화면인데도 불구하고 감독이 의도한 것, 즉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장면들은 너무도 선명하게 콕콕 찌르듯 전달됩니다. 이건 감독이 화면 어디를 어둡게, 어디를 밝게 해야 할지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는 뜻이죠.

화면의 물림 또한 거의 완벽합니다. 갑자기 밝아졌다 어두워진다거나, 중견 감독들의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화면 톤의 갑작스런 변화도 이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미 편집 단계에서 감독이 자기가 원하는 장면을 모두 갖고 있지 않고선 확보하기 힘든 완성도입니다.

(물론 현장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완성도는 감독이 천재라서가 아니라, 엄청난 강도의 재촬영 -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죽을 때까지 다시 찍을 수 있는 끈기와 스태프를 설득해내는 리더십의 증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어느 쪽일까요?^^)



김윤석과 하정우라는 배우들 또한 아무리 칭찬해도 넘치지 않을 겁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하정우는 상대적으로 인물의 설정이 쉬운 사이코패스 역할을 맡은 데 비해 김윤석은 다소 복잡한 엄중호라는 인물을 너무도 완벽하게 관객에게 납득시킨 공로가 있어 더욱 칭찬받을 만 합니다.

엄중호는 지나치게 악하지도, 또 지나치게 선하지도 않은 인물입니다. 그저 어떻게든 먹고 살아 보려는 인물이고 초반에는 어쨌든 자기가 본 손해를 만회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지만, 영화 후반이 되면 정의의 사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병원에 누워 있는 미진의 딸을 위해 어떻게든 미진을 찾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실천으로 옮길 양심은 갖고 있는 사람이죠.

미진을 찾아 다니는 과정에서도 어린 아이를 앞에 두고 "미친년, 차라리 사우디라고 하지"라는 식으로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해 대는 사람이지만 최소한 뼈속까지 썩은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보통이거나 보통만 못한 사람'이 결국은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부분에서의 메시지는 황정민이 연기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만 관객이 느끼는 설득력 면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아무튼 미진의 어린 딸을 이용한 엄중호의 동기 부여는 어찌 보면 전형적인 수법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의 흔들림과 엄중호의 변화는 김윤석의 놀라운 연기력으로 관객에게 자기 일처럼 전달되죠.




그런데 사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해묵은 궁금증 하나가 떠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경찰 부분에 대한 놀라운 디테일에 대해 "정말 리얼하다"며 감탄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사람들 중 실제로 이 영화가 '리얼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진짜 경찰 관계자이거나, 경찰 가족이거나, 하다못해 경찰서 출입기자이거나 경찰서를 수시로 드나드는 범법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은 대체 어떻게 이 영화가 '리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름끼치도록 리얼하다"는 찬사를 받아냈던 오마하 비치 상륙 장면에서부터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관총에 맞아 병사들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장면을 실제로 본 사람은 관객들 중 0.001%도 안 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화가 구현해내는 전쟁을 '리얼하다'고 느낍니다.

실제 있었던 전쟁이고, 그 참상을 전해듣거나 다큐멘터리로 봤기 때문일까요. 가끔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리얼하다'고 느끼곤 합니다.





예를 들면 제임스 카메론의 '에일리언 2'에 나오는 우주해병대와 에일리언의 격전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리얼하다'고 중얼거리곤 합니다.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을 수 있을텐데 말이죠.

정리해서 말하자면, 많은 경우 관객들이 리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짜 리얼리티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건 연출자와 배우들의 교묘한 사기일 뿐이죠. 즉 '그럴 듯 한 것'과 '실제로 그런 것'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다수 관객들은 영화 '세븐 데이즈'에서 김윤진이 펼치는 엉성한 법정 변론 장면에 대해서도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추격자'에서도 관객들이 이 영화에 나오는 경찰들의 모습에서 리얼함을 느끼는 것은 '왠지 그럴 것 같기' 때문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많은 관객들이 알기 때문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추격자'의 대본과 설정은 매우 성공적이란 얘기가 되겠죠.





아무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추격자'는 순식간에 끝나 버립니다. 러닝 타임은 두시간이 넘지만 너무도 짧게 느껴지게 말이죠. 수많은 장르 가운데서도 특히 스릴러의 수준이 낮았던 대한민국에서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건 정말 기적으로 여길만 합니다.



p.s. 두번이나 시도한 끝에 영화를 봤습니다. 스타라고는 없는데다 개봉 직전까지 인지도도 극히 낮았던 이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는 건 더욱 더 놀라운 일입니다. 평단과 언론의 집중적인 호평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특히 기본적인 사건의 인과관계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말이 되는' 영화의 흥행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이 영화의 성공이 대본 단계에서의 완성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군요.




p.s.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혹시 잔혹한 장면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분은 좀 주의하시는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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