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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훑었다가/영화를 봤다가

무방비도시, 구멍난 연출

'에덴의 동쪽', '가문의 영광', '너는 내 운명', 현재 방송중인 드라마 제목입니다. 공통점은 모두 재탕 제목이라는 거죠. 왕년에 히트한 제목을 그대로 갖고 오는 작품들을 보면 그렇게 새로운 제목 짓기가 힘든가 하는 안쓰러움이 앞섭니다.

(박진표 감독의 영화 '너는 내 운명'도 사실은 재탕 제목입니다. 70년대 한국 영화 중에 이미 '너는 내 운명'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었죠.)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썼던 제목 또 쓰기' 중독에 걸려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이미 있던 제목을 꼭 가져 와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대다수 관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제게는 이런 제목 재활용은 창의성의 결여를 예감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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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구나 이 영화의 제목은 어딘가 내용과 겉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Roma, Citta Aperta = Open City)'는 2차대전 종전 직전 나치의 지배하에 있던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 영화 '무방비도시'는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시가 무방비라는 것인지 좀 아리송합니다. 소매치기 범죄로부터 무방비라는 것인지... (아마 그렇겠군요)

일본에서 활개치고 있던 미녀 소매치기 백장미(손예진)는 법망에 쫓기게 되자 귀국해 다시 조직을 꾸립니다. 한편 엘리트 형사 조대영(김명민)은 오연수 반장(손병호)가 다시 부임해 소매치기 조직 검거를 계획하자 적극적으로 반항합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전설적인 여자 소매치기 강찬옥(김해숙)이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하죠.




사실 '무방비도시'는 전혀 스토리의 진행이 궁금한 영화가 아닙니다. 일단 예고편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예고편만 봐도 이 영화의 마지막 10%를 제외한 모두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약간 감각이 발달한 분들은 그 10%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건 넘어갑니다).

게다가 백장미와 조대영 형사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장면은 고대 소설의 상투성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백장미가 어설프게 위기에 몰리고, 조대영이 멋진 주먹 솜씨로 미녀를 구출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싹튼다는 건 뭔가 좀 더 고민했어야 하는 문제였다는 생각입니다.





형사와 범죄자의 위험한 관계. 게다가 한시간 정도 지나면,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백장미가 아니라 강찬옥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게 됩니다. 비교적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강찬옥에 비해 백장미는 너무도 속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백장미가 좀 더 입체적인 느낌을 갖추려면, 천인공노할 팜므 파탈인 백장미도 뭔가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 예를 들면 조대영이나 강찬옥에게 하려는 일에 대해 약간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해야 - 하는데 이 캐릭터는 전혀 후회라는 걸 모릅니다.

그러면서 우연한 기회에 살인을 저지르고 벌벌 떨 때에는 너무도 필요 이상으로 벌벌 떨기만 하죠. 이건 아무래도 대본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백장미라는 캐릭터에게 어디까지 주도권을 줘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촬영이 진행됐다는 뜻도 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방비도시'가 완전히 한심한 영화라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꽤 많은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캐스팅입니다.




사실 손예진은 할만큼 했습니다. 그리 재미없는 캐릭터를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 것은 손예진의 힘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상을 줘도 좋을 정도입니다.

물론 손예진의 연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악당 여두목 보다는 일반 관객들이 생각하는 '약간 과장된 여자 보스'의 모습에 더 가깝겠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이 캐릭터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은 '민완 형사가 넘어갈 정도로 그녀가 유혹적인가' 인데, 손예진은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네. 충분합니다.





김명민도 심심하긴 합니다만 자기 몫을 다 합니다. 애당초 이 캐릭터에서 이 이상을 뽑아낼 수는 없을 겁니다.




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상기 감독도 영화를 찍기 전까지는 김명민-손예진을 중심으로 한 영화를 계획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갑자기 영화는 김명민-김해숙의 구슬픈 모자 드라마가 되어 버립니다.

이건 아마도 김해숙의 열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해숙은 언제나 그렇듯, 너무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고 아마도 상당히 많은 관객들로부터는 눈물도 뽑아냈을 것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김해숙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소 무책임한 엔딩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이상기 감독이 생각한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액션일 겁니다. 첫 장면의 조폭단 검거 장면이나, 김명민이 수시로 보여주는 액션은 상당히 좋습니다. 심지호를 비롯해 '프랑켄' 김준배, '주무치' 박성웅 등의 호흡이 제대로죠.

솔직히 액션만으로도 '무방비도시'는 평균점 이상을 받을 만 합니다. 하지만 액션만 갖고 한 영화가 승부를 볼 수 있다면 이연걸이나 성룡의 영화가 가끔씩 흥행에 실패하는 이유가 뭘까요.





손예진의 패거리나,




김준배(영화 '강적'에서 공포의 대상 강철민 역으로 주목을 확 받았죠)




그리고 주무치 박성웅의 제 모습.


여기에 1인2역을 한 김병옥까지(그런데 왜 1인2역을 굳이 했는지 모르겠군요) 배우들은 각기 자기 몫을 해 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플롯과 연출의 약점을 건져 올리지는 못합니다.

현재의 상태로도 '무방비도시'는 꽤 많은 관객들을 만족시킬만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진행은 빠르고 액션은 군더더기가 없죠. 하지만 역시 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의 마무리 솜씨에 실망을 표현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한껏 펼쳐진 이야기를 하나로 쥐고 홱 틀어 올리는 솜씨, 그리고 수백번 되풀이된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들리게 하는 기술을 가다듬지 않으면 이상기 감독은 당분간 시행착오를 겪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