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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해와 유사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김정은이 너무 과도한 PPL 등으로 비난을 받아온 '루루공주' 출연 도중 "진심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더 이상 출연할 수 없다"고 했고 '마녀유희'의 한가인이 제작진을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례들도 이다해와는 사건의 핵심적인 동기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쨌든 출연하던 작품을 끝냈죠.
이다해의 글이나 주변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중도 하차를 원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에덴의 동쪽'에 나오는 이다해의 역할이 당초 기획단계에서 약속된 것에 비해 너무 축소된 것이라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너무도 흔했습니다.
1997년, '별은 내 가슴에'라는 드라마에서 최진실 차인표 안재욱 전도연이라는, 당시로서도 빛을 발하는 캐스팅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안재욱과 전도연은 아직 최고 스타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레벨이었고, 차인표와 최진실이 단연 투톱이었죠.
시놉시스 단계에서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만화 '캔디 캔디'와 똑같았습니다. 고아 출신의 여주인공 최진실이 부잣집에 들어오고, 우연히 명문가 출신으로 가수 지망생인 반항아 안재욱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죠. 물론 이 뒤에는 조용히 최진실을 바라보고 있는 엄친아 차인표가 있습니다. 결국 안재욱은 전도연에 대한 연민 때문에 전도연과 맺어지고 최진실은 차인표의 품에 안긴다는 것이 당초의 구도였습니다. 만화를 보신 분이라면 캔디(최진실) 테리(안재욱) 윌리엄(차인표) 스잔나(전도연)이 그대로 구현됐다는 걸 아시겠죠.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시작하자 구도가 흐트러집니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톱스타 감은 아니라고 여겨졌던 안재욱은 이 드라마를 앞두고 독한 마음을 먹고, 앞머리를 늘어뜨린 순정만화형 캐릭터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여기에 당시 소녀 팬들의 열광이 쏟아진 거죠. 시청률은 사회 현상이 될 정도로 치솟고, 제작진은 이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안재욱-최진실의 비중을 높입니다. 주인공이었던 차인표는 조연이 되어 갔고, 조연이었던 전도연은 단역이 되어 갔죠. 결국 결말마저도 시청자들의 뜻대로 최진실과 안재욱의 해피엔딩이 됐습니다.
배우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분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차인표와 전도연은 지금도 당시 드라마의 제작진과 소원한 관계입니다만 당시에도 공식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부분은 연출진의 권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년 전 얘기지만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방송을 해 가면서, 시청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체크해 가면서 드라마를 만드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드라마의 결말이나 인물의 비중이 당초의 구상과 달라지는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합니다. 이유도 여러가지죠.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갑자기 비중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연출자의 판단에 따라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류의 문을 연 드라마 '가을동화'도 마찬가지. 당초 송승헌-송혜교의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악역은 송혜교와 바뀐 딸 역인 한채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인이었던 한채영은 그 역할을 감당할만한 연기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한채영은 단역으로 변했고 송승헌의 애인 역으로 나왔던 한나나의 비중이 갑자기 커졌습니다.
왕년의 인기 드라마였던 '여인천하'에서도 강수연-전인화가 주인공으로 굳혀지는 과정에서 박상민과 김정은 등 당초 주연급으로 간주됐던 연기자들이 도중에 빠져나갔습니다. 당연히 이들 또한 자신의 역할 축소에 대한 문제로 제작진과 갈등을 빚었죠.
이처럼 배우의 비중이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커지고 작아지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그런 상황에 이다해처럼 격렬하게 반응하는 일은 대단히 드뭅니다. 이다해의 경우, 하차 문제를 놓고 제작진과 충분히 논의를 했고, '하차선언' 이전에 하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 해도 스스로 '나 이 작품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것은 경솔했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현장 관계자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다고 해도, 한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것은 그 작품이 끝날 때까지는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합의한 것인데 이렇게 빠져나가 버린 건 너무 지나친 게 아니냐"는 입장입니다. 또 어떤 경우든 자신이 출연하던 작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켜 줘야 한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스스로 원했든, 제작진의 선택이든 중도 하차가 그리 자랑할 일은 아닌 만큼 내놓고 얘기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은 배우와 제작진 중 누가 헤게모니를 쥐느냐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 때문에 일부 연기자들은 "시나리오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영화만 하겠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영화의 경우에도 중간에 배우의 비중이 달라지는 경우는 너무도 흔하죠.
얼마 전 '박중훈 쇼'에서 박중훈은 최진실과 함께 출연한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때의 에피소드를 얘기했습니다. "처음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최진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연기도 썩 잘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촬영이 진행되는 사이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광고가 떴고, 하루가 다르게 최진실이 스타가 되는 걸 느꼈다. 결국 영화가 개봉될 때 영화사는 포스터에서 아예 내(박중훈) 사진을 빼고 최진실 혼자 있는 모습을 내놨다. 기분이 나빠 항의했다"는 얘기였죠.
정리하자면 이다해의 문제는 결국 전작제가 실시되지 않는 상황, 즉 드라마 전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을 시작하고,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촬영을 계속해야 하는 현재의 드라마 제작 환경에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방송 전에 드라마가 모두 촬영됐더라면 이렇게 문제가 될 일도 없었죠.
하지만 현실은 현실입니다. 게다가 20부작도 아닌 50부작을 모두 사전제작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그리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죠. 또 어떤 배역이 축소되고 어떤 배역의 중요성이 갑자기 부각되는 것은 결국 제작진의 권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드라마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제작진이죠. 이를 위해 역할을 조정하거나 아예 빼 버리는 일, 새로운 역할을 추가하는 일 등은 제작진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다해의 '공개 해명'은 좀 성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우 이다해가 할 수 있었던 방법은 조용히 하차하거나 묵묵히 끝까지 출연하는 것이었을텐데, 그렇게 하기에는 연기자로서의 자존심이 너무 앞섰던 것 같습니다. 이다해의 가장 좋은 복수는 최대한 이 작품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에서 멋지게 성공해 '에덴의 동쪽'이 스타 이다해의 위치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것이었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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