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테이너 어쩌고 하는 얘기가 유행하던게 벌써 오랜 옛날 일 같습니다. 애당초 별 의미가 없는 말이기도 했는데 이름을 지어 부추기다 보니 한때는 떠들썩 했습니다만, 지금은 싹 사라진 분위기입니다.
사실 최근 몇해 동안 아나운서들이 떴던 시절이 있었다지만, 따지고 보면 유명했던 건 훨씬 더 옛날의 아나운서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름을 대자면 숱하게 댈 수 있죠. 그런데 지난해 이후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유명한 아나운서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왜 요즘은 아나운서들이 전처럼 활개를 치지 못할까요? 그런 저런 궁금증에 대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제목: 스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스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태희의 외모도, 김제동의 개인기도, 강호동의 우기기도 없이 마이크 하나로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기며 온 국민을 사각 화면 앞으로 끌어모으던 왕년의 제왕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말을 듣고 '그러게. 한때 김성주, 강수정, 노현정이 방송을 다 하는 듯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떨더니 어떻게 된걸까'하는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아직 아마추어 시청자다. 그럼 아직도 가끔 화제에 오르는 황현정-황수경-황정민 '황 트리오'의 전성기 때 얘길까? 아니면 온 국민의 일요일 아침을 깨웠던 '열전! 달리는 일요일'의 최선규나 손범수 아나운서를 떠올려야 할까?
그 정도도 아직 멀었다. 진정한 스타 아나운서라면 왕년의 MBC 프로그램을 정확하게 양분했던 '장학퀴즈'의 차인태, '명랑운동회'의 변웅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밖에 KBS를 대표했던 미스코리아 전담 MC 김동건, '장수만세'에서 팝 DJ까지 TBC를 개인 방송처럼 휘저었던 황인용을 빼놓을 수 없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 모두를 무색하게 만드는 '임택근'이라는 이름도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가수 임재범과 탤런트 손지창의 아버지로나 알려져 있지만 50대 이상 연령층에게는 김지미나 신성일보다도 한 단계 위의 스타다. 톱스타 엄앵란과 춤 한번 춘 죄로 스캔들의 주역이 되고, 4.19때 KBS 앞에 몰려든 시위대가 '사장 나오라'가 아니라 '임택근 나오라'고 외쳤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물론 오늘날의 방송환경에서 이런 전설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1950년대의 스타 아나운서 임택근은 거의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낼 수 있었다. 인기는 곧 권력이 되었고, 한번 스타가 된 이들은 새로 올라오는 후배들의 진출을 막고 자신의 치세를 늘려 나갈 힘을 얻었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한두명의 탁월한 방송인은 전체 편성을 좌우할 수 있었다. MBC의 경우에도 변웅전과 차인태라는 두 스타가 각각 교양은 차인태, 오락은 변웅전이라는 식으로 황금분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두 스타는 수시로 이 경계를 넘나들며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신군부의 방송 장악과 함께 상황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 MBC TV '영 일레븐', KBS 2TV '젊음의 행진'을 시작으로 젊은 층을 겨냥한 예능 프로그램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이런 프로그램에는 새로운 감각의 진행자들이 요구된다는 사실이 재빨리 상식이 됐다. 개그맨 출신의 주병진, 가수 출신의 이문세, 배우 출신의 송승환 등 '젊은' 전문 MC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런 예능 MC 전문화는 전 연령대에서 활기차게 이뤄졌다. '가족오락관'의 허참, '사랑의 스튜디오'의 임성훈, '우정의 무대'의 이상용, 그리고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등이 전면으로 나섰다.
이런 경향은 아나운서들의 활동 영역 축소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반발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80년대 이후 3S 정책하에서 예능 프로그램들은 급격하게 저질화(?) 되기 시작했고 대다수 아나운서들은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체면이 깎이는 일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 아나운서들은 9시 뉴스의 메인 앵커라는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데 있어 예능 프로그램 진행 경력이 오히려 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KBS의 전직 예능 PD는 "90년대 초에는 '연예가 중계'의 MC를 사내 공모했는데 지원하는 여자 아나운서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이를 꺼리지 않았던 손범수, 김병찬 등은 동료들이 외면하던 예능 진행자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결국 스타 아나운서의 자리에 올랐다.
변화는 경제 상황에서 왔다. 1997년, 한국이 IMF 시대를 맞자 온갖 기업이 경비절감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방송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아도는 내부 인력 때문에 고민하던 KBS는 그 즉시 상대적으로 출연료가 비쌌던 외부 진행자들을 정리하고 소속 아나운서들을 대거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위에서도 거론한 황정민-황현정-황수경의 3황 아나운서가 방송계의 신데렐라로 다시 태어났다.
2006년 전후, '아나테이너 붐'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독일 월드컵 중계에서 보여준 탁월한 진행력을 바탕으로 김성주가 스타 아나운서로 뜨기 시작했고 KBS 2TV '여걸 식스'에서 소탈함을 뽐낸 강수정도 각광을 받았다. 이어 새로운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인 KBS 2TV '상상플러스'의 노현정, '스펀지'의 2대 진행자인 김경란 '하이파이브'에 투입된 이정민 역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이미 아나운서들의 스타 만들기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데다 어느 방송사보다 풍부한 인력을 자랑하는 KBS는 이번에도 한발 앞서갔다.
이들의 성공사례와 함께 다시 한번 각 방송사는 아나운서들의 스타 만들기에 전념했다. 무엇보다 싸고, 정확한 한국어 교육으로 자질 시비에 휘말릴 여지도 없고, 이미 선발할 때부터 외모를 고려했으니 방송사 입장에서는 이들이 MC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더 좋을 일이 없었다. SBS는 뻔한 논란을 무릅쓰고 미스코리아 출신 아나운서 김주희의 해외 미인대회 수영복 심사를 용인했고, MBC는 아예 서현진, 최현정, 손정은, 문지애 등 신인급 아나운서들을 한꺼번에 투입한 예능프로그램 '지피지기'를 신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최근 2년간에 대해 '아나테이너 전성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냈지만 사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말일 뿐이다. 예능에 재능이 있던 몇몇 아나운서들이 우연히 '반짝 인기'를 얻었지만 이들 가운데 방송계의 스타로 불릴 만한 인물은 배출되지 않았다. 여론의 호들갑이 거품만 키웠을 뿐이다.
강제형 아나운서 협회장은 스타 아나운서의 부재에 대해 "과거처럼 긴 호흡으로 사람을 키우지 않고, 장수 프로그램도 없는 방송의 '경박단소(輕薄短小)화'가 가장 큰 이유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왕년의 대형 아나운서들이 스포츠 중계에서부터 바닥을 다져 올라온 데 비하면 최근의 인기를 얻은 아나운서들은 2∼3년차의 경력 때부터 오락 프로그램에 투입되고, 빠른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거듭되는게 스타 아나운서의 배출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에 대한 각 방송사의 냉담한 분위기가 스타 아나운서의 출현에 가장 큰 장벽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각 방송사의 예능국에서는 일정한 MC 풀을 갖고 오락 프로그램 진용을 짠다. 그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 인정받으면 유재석, 강호동, 이휘재, 탁재훈 등의 위치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 하지만 스타 아나운서에게 과연 무엇이 따라오느냐"고 반문했다.
전 같으면 인기 아나운서들은 프리랜서로 독립해 고액 출연료와 인기를 누릴 수 있었지만 지난해 이후 이건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KBS 노사는 최근 PD와 아나운서를 막론하고 프리랜서로 나선 전직 직원에게는 사직후 3년간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다른 방송사들 역시 자사 출신의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에게 비싼 출연료를 주는 데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의 푸념은 이어졌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뜨기' 위해서는 온 몸을 던져야 한다. 연예인 MC들이 개다리 춤을 추고, 한겨울에 얼음물에 뛰어들고, 까나리액젓을 자진해서 마시는 건 스타만 되면 그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봉급생활자인 아나운서에게 프리랜서로 클 통로까지 막아 놓으면 대체 뭘 기대하고 그 고생을 하겠나. 회당 몇만원의 수당을 받으면서 500만원, 1000만원 받는 '동료'들과 나란히 서는 게 '스타 아나운서'의 본질이라면 말이다."
어렵게 스타가 되어도 따라오는게 상대적 박탈감뿐이라면 과연 누가 스타가 되고 싶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아나운서의 정도(正道)'만 지켜선 스타가 될 수 없는 방송 환경이 유죄일까, 스타가 되어도 기대할게 없다는 매몰찬 현실이 문제일까. (끝)
세상이 변한건 분명합니다. 또렷또렷한 전달력보다는 프로그램의 맥을 꿰뚫는 재치가 훨씬 높은 가치로 평가받게 됐기 때문이고, 그런 식의 헝그리 정신을 갖춘 전문 방송인들에 비해 아나운서들이 갖고 있는 자산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죠.
이건 현재의 아나운서들이 진지하게 해야 할 고민입니다. 과연 '선진국에는 없는' 방송사의 공채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왜 한국에는 있는 것일까. 대외적으로는 스타지만 방송국 내부적으로는 '앵무새'라고 비하를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나운서는 과연 언론인일까. 그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는 열쇠가 있다고 해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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