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호평받은 미국 '타임'의 리뷰에는 '복수 3부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는 누구나 박찬욱 감독을 말할 때면 '복수 3부작'을 얘기하곤 하죠. 잘 아시는 대로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복수3부작'이라는 이름으로 DVD세트가 나와 있을 정돕니다.
사실 어느 정도 박감독에게 관심이 있는 팬들이면 이 '복수 3부작'이라는게 처음부터 존재했던 구상이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하지만 어느새 박찬욱 감독이 세계적인 거장이 되면서, 마치 이 '3부작'이 처음부터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로 예정됐던 작품인 것처럼 오해받는 경우도 생긴 것을 흔히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일종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랄까요.
물론 일련의 영화들에 대해 '복수 3부작'이라는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은 박감독 본인입니다. 하지만 처음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 때만 해도 '3부작'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이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도 2003년 11월, '올드 보이' 개봉을 앞둔 인터뷰에서입니다.
그리고 박감독은 머잖아 다시 털어놓습니다. "솔직히 그냥 우발적으로 한 얘기였다. '올드 보이'를 만들고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온갖 기자들이 죄다 '왜 또 복수 얘기냐'고 묻길래 그냥 아예 '복수 3부작을 채울 생각이다'라고 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쩌다 보니 다음 작품이 진짜 복수를 소재로 한 '친절한 금자씨'가 되는 바람에 결국 3부작이 채워진 셈입니다. 반면 이번 '박쥐'는 '올드 보이'보다도 훨씬 먼저 구상했던 작품이지만 뒤로 미뤄진 거였죠.
세 편의 영화는 복수라는 주제 외에는 그리 비슷한 데가 없습니다. '올드 보이'와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꿈꾸는 주인공에게 초점이 맞춰진 스릴러의 스타일을 갖추고 있지만 '복수는 나의 것'은 형식과 플롯, 그리고 다양한 함의를 갖춘 낯선 영화입니다. 평론가들이 세 편의 영화 중에서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익숙지 않은 데서 오는 자극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박쥐'를 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복수는 나의 것'의 세계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2002년작인 '복수는 나의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보다도 나중의 작품인데도 이상하게 '옛날 영화'인 듯한 대접을 받곤 합니다. 아마도 상대적으로 본 사람이 적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박쥐'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복수는 나의 것'이 다시 생각나서, 예전에 써 뒀던 리뷰를 다시 꺼내 보게 됐습니다. 다른 게시판에 썼던 글입니다.
리뷰: 복수는 나의 것
이 영화에 대해 처음 들은 내용은 '엄청나게 잔인하다' 였고, 그 다음은 '뭔지 모르겠어, 이상해'였다. 그리고는 극장에서 보려고 짬을 내다가 어느날 보니 개봉관에서 사라져 있었다.
박찬욱 감독은 체질상, 그리고 그가 살아온 영화 인생상 '흥행 감독'이 되기 힘든 사람이다. 차라리 임권택은 될지언정 강우석은 절대 될 수 없다. 그런 그가 'JSA'라는 영화 때문에 온 영화계의 기대(물론 여기서 '기대'란 '대박 기대'를 말한다)를 짊어지게 된 것도 약간의 넌센스다.
물론 정작 본인은 그런 기대에 크게 구애당하지 않는 것처럼, 즉 "누가 너네보고 언제 기대하래?"라는 식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아, 그분이 직접 그렇게 얘기한 적은 없지만, '복수는 나의 것' 같은 영화를 만드는 걸 보면 말이다.
이 영화는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유쾌해하는 놈이 있다면 당장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 무척 재미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영화다. 재미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묘한 물건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게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유괴범에 대한 영화다. 그럼 유괴범이 죽일 놈이고, '복수'하는 애 아버지가 착한 사람이냐, 그렇지는 않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계급간의 몰이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좀 더 원초적으로, '남의 살의 아픔에 대한 무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장기밀매범들이 '남의 살'에 대해 생각한다면 신장만 떼낸 채 신하균을 길바닥에 버릴 수 없을 것이고, 역시 '남의 고통'을 안다면 장난이거나 선의라도 남의 딸내미를 데려갈 수 없었을 것이며, 사장인 송강호 역시 기주봉의 온 가족이 그렇게 될줄 알았다면 함부로 사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착한 동생'의 정체를 안 다음 상품 걱정부터 하는 아나운서도 없을 거다.
그럼 또 그게 모르는 사람 쪽의 잘못이냐. 꼭 그렇지도 않다. 심지어 누나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착한 동생 신하균조차 고통에 몸부림치는 누나의 신음소리를 외면하고 라면이나 먹고 있게 된다. 이건 그가 나쁜놈이라서 아니라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아닌 옆집 총각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면에서 '복수는 나의 것'의 시각은 대단히 구조주의적이다. 사람은 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자기의 입장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다. 갈등은 필연적이고, 해소는 '피' 없이는 불가능하다. 영화는 개개인의 입장으로 문제를 치환시키지만, 넓은 시각에서 보면 무산계급과 유산계급 사이의 관계는 언제든 '피'를 볼 수 있는 긴장이 내재돼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영화는, 6.25 이후 만들어진 한국영화중 가장 위험한 영화다. (심지어 '장산곶매'가 만든 영화들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대체 그 영화들을 몇명이나 봤냐.)
때로 자신의 계급을 망각하고, 이런 갈등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다. 마지막 순간의 송강호, 즉 "너, 착한 놈인거 안다"라고 말하는 송강호가 그렇다. 그러나 그가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섣불리 관용을 취할 수도 없다. 어차피 그와 신하균은 이미 충돌을 예상하고 달리는 기차다. 그리고 복수를 하건 안 하건, 그에게 남은 길은 어차피 파멸 뿐이다.
영화를 때로 섬뜩하면서도, 때로 코믹하게 하는 것은 박찬욱 감독 특유의 '무표정한 유머'의 힘이다. 특히 배두나가 말하는 "아저씨, 백 퍼센트야. 정말이야."가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 그야말로 관객은 기절할 정도가 된다.
(여기에 대해 박감독은 "아무리 평소에 뻥 치고 다니는 애들이라도, 그 말을 허투루 들으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고 했다고 한다.)
물론, 박찬욱이라는 감독이 딱 저런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영화는 시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평론가 출신 감독'이라는 딱지 만큼이나, 그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 동시에,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이 어떤 시각으로 이 영화를 볼 것인가...'를 고려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는 나의 것'은 명료하기보다는 약간 고의적으로 초점을 흐린 영화이기도 하다. 약간 고상하게 말하자면 '해석자의 공간을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겠고, 좀 천박하게 말하면 '너무 뻔히 다 보이는 영화'라는, 먹물들의 비틀린 비난을 피하려는 세련된 몸놀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상태에서도 '복수는 나의 것'은 대단히 흥미롭고 잘 만들어진 영화다. 특히나 이런 영화를, 송강호나 신하균 같은 재능있고 비싼 배우들을 데리고 만들 수 있다는 건 그의 행운이기도 하다.
다음번엔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지가 자못 궁금하다. 갑자기, 예전에 한 10분 보다가 만 '삼인조'를 어디 가면 다시 볼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끝)
이 영화의 단역진은 꽤 화려합니다. 아나운서 역으로 이금희씨가 나오고, 장애인 역으로 류승범이 나옵니다. 사실은 형인 류승완 감독도 배달원 역으로 잠깐 나오죠. 신하균이 맡은 류 역의 이름은 '류완범'이라고 돼 있는데 이게 아예 류승완-승범 형제의 이름을 하나로 합친 거라는군요.
이밖에 이 영화 얘기를 하자면 오광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봉고차를 타고 달려온 일행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었죠. 그 특이한 용모 때문에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이밖에 정재영도 나온다고 하는데 무슨 장면인지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쯤 다시 찾아 보셔도 좋겠습니다.
흥미로운 건 영화의 영화 제목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Mr. Vengeance'죠. 그냥 직역하면 'Vengeance is Mine'이겠지만 아마도 이건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와 제목이 똑같아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제목이 바로 저 제목이고, 이 제목이 해외에서 괜찮은 반응을 얻자 아예 '친절한 금자씨'의 영어 제목도 'Sympathy for Lady Vengeance'로 붙여집니다. 이때는 이미 세 편의 영화가 모두 나온 뒤였으니까 '3부작'으로서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데 아무 하자가 없는 셈입니다.
p.s. 그러고보니 요즘 유행하는 '백프롭니다'의 원조가 배두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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