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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동안 가장 친하게 지낸 건 만화였습니다. 인생의 로망이 만화책 끼고 뒹굴뒹굴인데 평소에 그럴 짬이 별로 없다 보니... 모처럼 연휴가 좋은 기회였습니다. 물론 사람이 살려면 또 할 일이 여러가지 있는 터라, 5일동안 37권밖에 못 봤습니다.

평소 친애해마지않는 한국 벤처기업의 기수이자 왕년의 만화평론가? 권대석 사장의 추천작을 중심으로 골랐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부터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뭐 만화같은 걸 볼 시간이 있다니...하고 혀를 차실 분들도 있을테지만 아무튼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오카자키 마리의 '서플리'. 연애 문제에 대한 인사이트가 필요한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오카자키 마리 - 서플리

아무래도 이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광고회사를 배경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AE에 해당하는 한 20대 후반의 열혈 직장 여성이 일에 치여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남녀관계의 깊이에 점점 눈을 떠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뭐 더 간단히 요약하면 'OL의 일과 사랑'입니다.

물론 한국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20대 후반까지 연애 한번 못해 본.... 타입은 아니고, 첫 등장부터 동거하는 남친이 있습니다. 그 남친과 깨지면서 본격 스토리가 시작되죠. 둘러싼 여성 캐릭터는 (1)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30대 초반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2) 외모도 일도 완벽에 가까운, 다소 얄미운 30대 초반 유부녀 AE (3) 제대로 된 남자를 잡아 결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전문대 출신의 20대 중반 사무직 (4) 단단히 프로 의식을 보여주는 30대 독신 스타일리스트 (5) 인생의 쓴맛을 모른 채 선배들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20대 중반 사회 초년생 (6) 좋아하는 남자에게 자존심이고 뭐고 일방적으로 매달려 목을 매는 20대 중반 사회 초년생 (7) '좋은 시절' 다 보낸 40대 후반의 독신 여사원 등입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남녀관계에 대한 밑그림은 다 다릅니다.


이 만화에는 '직장생활 5년이 넘었는데 애인이 없으면 연애결혼은 힘들다'는 말이 나옵니다(죄송합니다. 정확한 워딩은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3년이냐 4년이냐 5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만치 직장생활과 연애관계를 함께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일의 강도도 중요하죠.



사실 그냥 막연히 '직장생활'이라고 했지만 이 만화 속 인물들의 '일 중독'은 심각한 지경입니다. 광고회사가 일 많이 하는 곳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 회사의 이 주인공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뭐 하긴... 제가 아는 분들 중에도 이 만화의 주인공들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일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 맨 위 사진의 "나랑 일 중 뭐가 더 중요해?"는 남자친구가 하는 말입니다.^^)

특히 이 만화에는 그리 강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지만, 한국 쪽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하건 네트워킹이 강조되다 보니 식사와 술자리가 '사회 생활'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직장 동료 끼리, 동년배끼리의 릴랙스를 위한 술자리야 차라리 휴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분들'과의 술자리는 그 자체가 심한 스트레스죠. 이 만화에 나오는 분들은 그런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하루 15시간씩 일하는 워커홀릭이지만 늘씬한 미녀, 사귀는 남자들은 뉴욕 지사로 뽑혀 갈 정도의 미남 엘리트, 혹은 국제감각이 탁월한 사진작가, 업계 최고의 CF 감독 등 화려한 면모가 부각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아직 세상을 모르는 10대 소녀적 판타지에 충실한 만화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묻혀 있는 남녀 사이의 줄다리기 감정, 연애할 때 놓치거나 강조되는 점들, 일하면서 만나는 같은 여자들끼리의 연대감 혹은 적대감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다고(뭐 저는 어차피 건너 느끼는 것이지만;;)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매우 드라마적 요소가 풍성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2006년 일본에서 원제 그대로(물론 일본 식으로 하면 '사프리'가 됩니다) 드라마화된 적이 있습니다. 여주인공 역은 '전차남'의 이토 미사키. 후리후리한 키가 강조되는 캐릭터인 만큼 적절한 캐스팅이었던 듯 합니다. 다만, 이 만화가 그 무렵 연재가 시작돼 2010년에서야 완간된 점을 생각하면 드라마의 결말은 만화의 결말과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일하는 여성'들은 한번쯤 보실만 한 작품인 듯 합니다. 딱 10권으로 끝납니다. 다만 남자 입장에서 볼때 결말은 좀.... 그렇습니다. 여자분들은 좀 다른 느낌을 가지실 수도 있을 듯.




다케토미 토모 - 이루어질수없는 사랑

전 3권이라는데 앞의 2권밖에 구해볼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결말이 궁금합니다.

20대 초반에 이미 같이 잔 여자가 100명이 넘는 플레이보이가 명문 꽃꽂이 가문에서 고이고이 자란 영양(명문댁 아가씨라는 뜻의 일본식 표현이죠)에게 홀딱 반해 버립니다. 그야말로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알아 버린 겁니다.

그런데 장애가 한둘이 아닙니다. 이 아가씨는 빚 때문에 저택과 장원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돈많은 정혼자와 결혼해야 하고, 정혼자의 어머니는 또 남자주인공이 아는 사람입니다.
2권까지 봤는데 결론이 매우 궁금하다는 면에서 뛰어난 작품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 19금.




오바 츠쿠미(스토리작가), 오바타 타카시(작화) - 바쿠만

만화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앞의 두 사람은 '데스노트'를 함께 만든 콤비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만화를 그린다는 것'에 대한 만화를 그렸습니다.

너무 몸을 혹사해 만화를 그리다 죽은 삼촌을 둔 중학생 1은 어느날 학교 최고의 우등생인 중학생 2로부터 "너 나랑 같이 만화계에 뛰어들지 않겠니?"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습니다. 평소 만화 스토리를 쓰고 싶었던 2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 1을 스카우트한거죠.

중학생으로 출발한 이들 듀오는 갖은 연구로 작품을 만들어 일본 최고의 만화 주간지 '점프'에 도전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역시 아시겠지만 '점프'는 독자 앙케이트를 통해 연재되고 있는 만화의 인기도를 측정하고,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만화는 잔혹하게 잘라버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만화는 세계적인 스토리의 보고인 일본 '망가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가르쳐주는 충실한 교과서 역할을 합니다. 신인 작가가 주간지의 연재에 도전하고, 연재에 성공하면 단행본이 나오고, 단행본이 히트하면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고, 거기서 결과가 좋으면 극장판까지 다시 만들어지는 그런 과정이 알기 쉽게 다뤄져 있습니다.

물론 주인공 1과 친구 여중생과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우리는 사랑하지만 서로 성공할때까지 만나선 안돼") 같은 정서, 또 지나치게 엄숙하게 묘사되는 역시 일본적인 점프 편집부의 권위주의("한번 결정된 일이야!") 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아무튼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만화적인 개그 스토리도 충분히 재미를 제공합니다. 현재까지 10권 나와 있고, 극중 주인공들과는 달리 만화 '바쿠만'은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더군요.^^

(이들 콤비의 라이벌로 불리는 동년배의 천재 만화가에게서 '데스노트' L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점도 웃음거리로 꼽을 만 합니다.^)




토보소 야나 - 흑집사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만화라고 해서 조카분의 강력 추천으로 보게 됐습니다. '...집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꽃미남 집사와 아가씨의 스토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가씨가 아니라 안대를 한 꽃미남 도련님...

빅토리아 시대 영국. '여왕의 번견'이라고 불리는 팬텀하이브 가문의 어린 후계자(백작)는 12세에 불과하지만 영국 정부의 구린 일들을 해결하는 '어둠의 손' 역할과, 세계적인(?) 완구 회사의 경영자라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정체불명의 완전체 미남 집사가 버티고 있죠.

곧 드러나지만 이 미남 집사는 완벽한 두뇌와 완벽한 전투력, 그리고 절대 죽지 않는 완벽한 체력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악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마 치고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정의롭습니다. 그가 백작의 집사로 봉사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백작의 영혼을 차지하는 댓가로 백작이 이승에 사는 동안 충실하게 그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로 계약을 했기 때문(네. 이런 이론에 따르면 악마는 계약에 죽고 사는 존재라고도 하죠)이라는데, 한 남자아이의 영혼을 차지하는 데 들어가는 수고 치고는 너무 셉니다.

뭐 만화니까 그렇다고 치겠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다소 심각한 대사(인간의 본질적인 악에 대한 성찰...성 대사)와 집사를 제외한 세 사람의 고용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초등학생용 개그(그야말로 슬랩스틱성이 주류)의 불균형은 매우 심각합니다. 심각한 대사는 고교생 이상 용, 개그는 초등학생용이라고 생각하면 평균 잡아 중학생 이상은 재미있게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흑집사'의 인기는 중학생을 넘어 성인층에게도 한창 폭발적이라는군요. 물론 만능인 미남 집사가 인기 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 치지만, 평소 생각하던 '악마'라는 존재의 능력에 비하면 이 집사의 능력은 너무 약하기도 하고(또 어떤 때에는 너무 무리하게 강합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구성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쉽지 않은 만화였습니다. 초기 설정으로 끝까지 먹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

현재까지 10권 나와 있고, 앞으로 30권은 무난히 돌파할 듯 합니다. 아무튼 저는 별로 더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긴 '홍차왕자'나 '꽃보다 남자' 역시 저는 참고 보지 못합니다.) 전형적인 소녀 만화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이상입니다. 사실 '최근 읽은 책' 등 무게있는 포스팅도 하고 싶지만 어쩐지 무거워서... 이런걸로 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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