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10일 일요일.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언젠가부터 찍고 이동하는 여행보다는 한 도시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무는 여행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성에 차려면 한 도시에 한달씩은 살아야겠지만, 어쨌든 대중교통을 이용해 그 도시 사람들처럼 이동하고, 최대한 그 도시 사람들이 먹는 것들을 먹어보려 하고, 일상에 접근해 보려 하는.
뭐 아예 은퇴한 뒤라면 모를까, 일을 하면서 그렇게 다니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어느 도시든 대중교통이 대략 익숙해지고, 도시의 방향과 길이 눈에 들어올 때쯤 되면 떠날 때가 된다. 정말 아무데서나 보이는 에펠타워.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반가웠는데 이제 슬슬 귀찮아지려 한다.
아무튼 쌀쌀한 일요일 아침, 일찌감치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해 버리고 호텔을 나섰다.
세느강 북쪽의 텅빈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그런데 정말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은근히 바깥의 돌들이며 진입로도 어딘가 정성들여 돌보지 않은 태가 난다.
문 닫은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하지만 굳이 여기에 온 건 라울 뒤피의 '전기의 요정 La fee electricite'을 보기 위해서지.
이런 거대한 그림.
라울 뒤피는 193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해 대작 벽화를 의뢰받고, 현대 문명의 상징인 전기를 형상화하는 아이디어에 따라 제작에 착수한다. 그 결과 이런 대작이 나왔다.
이 작품에는 석판화 연작과 이 벽화가 있는데, 작년 서울 전시때는 이 작품을 약간 변형한 석판화 버전이 전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약간 둥근 홀 모양으로 되어 있는 2층 높이의 전시실을 가득 채운 대작.
잘 보면 수십명의 인물들이 있다. 무식해서 다 알지는 못하지만 20세기 과학문명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과학/공학자들이라는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맥스웰, 모르스, 뢴트겐... (나머지 잘 모름)
에디슨, 퀴리 부부, 멘델레예프... 뭐 등등.
물론 이걸 보러 온 거지만,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파리 시립'이라는 이름을 아무 미술관에나 달아줄 리 없다. 소장품들을 보면 그렇게 만만한 미술관이 아니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 꽤 많다.
이건 마티스가 스트라빈스키의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nol>의 1920년 초연을 위해 그린 무대와 의상. <나이팅게일의 노래>에 대해 들은 적은 없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황제를 감동시킨 나이팅게일의 노래. 어느날 선물로 바쳐진 기계 나이팅게일. 궁정인들이 기계 나이팅게일에게 열광하자 숲으로 돌아가버린 나이팅게일. 그러나 기계는 어느날 작동을 멈추고, 죽음의 사자가 황제 앞에 나타나는 이야기.
어쨌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는 여러 모로 전설이다. 마신, 니진스키 같은 이름들과 함께 달리, 피카소, 마티스 같은 사람들이 무대미술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마티스는 역시 마티스. 왠지 마티스의 스케치에서 '춤' 연작이 떠오른다.
그리고 또다른 인상적인 작품은 캐서린 브래드포드의 <운동선수들 Athletes>.
....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은 그림.
뭔가 동화와 악몽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듯한 그림. 돈 밴 빌리트의 작품 <야크와 달들 Yaks, moons>.
돈 밴 빌리트는 캡틴 비프하트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뮤지션이자 가수라는데, 처음 들어본다. 이럴 때마다 뭘 안다고 거들먹대는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라울 뒤피, <헨리 로얄 레가타의 조정 선수들 Regates a Henley, les rameur>.
그리고 그 연작. 헨리 로얄 레가타는 런던 테임스강에서 19세기부터 계속 열리고 있는 조정 경기라고.
빅토르 브라우너, <La Rencontre du 2 bis rue Perrel>. 제목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지만 조르주 루오를 연상시키는 숲과 정령인 듯 한 생명체의 묘사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리 로랑생이 1923년에 그린 Jeannot Salmon의 초상. 지인 중에 닮은 사람이 있어 눈길이 가는 그림이기도 했다.
마르크 샤갈의 <꿈 Le reve>. 문득 샤갈이 그린 그림 중 꿈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림은 몇개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중국 화가 Zao Wou-Ki의 그림이 여럿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01.10.73>. 1973년 1월10일이란 뜻일까? 폭설이 내린 산중의 설경?
대략 미술관의 설명으로 봐선 중국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살면서 널리 활동한 화가인 듯 하다.
아무튼 이밖에도 수많은 피카소, 샤갈, 루오, 보나르 등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던 멋진 미술관.
오히려 무료라는 이유로, 그리고 일반적인 관광객들의 노선과는 좀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많은 발길이 몰리고 있는 곳은 아니지만, 파리에서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한번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뭔가 초겨울에는 을씨년스럽던 마당의 카페. 노천 좌석 뿐이라 동절기에는 아예 문을 닫고 있었지만, 여름 밤이면 에펠탑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일 듯.
사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이 있는 이 건물은 팔레 드 도쿄라고 불리는 유서깊은 곳. 그러니까 1차대전 당시 유럽 연합국의 반 독일 노선에 참여했던 일본은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간주되어 이 건물에 수도의 이름을 남겼다.
물론, 서울에 있다면 꽤 중요한 명소 취급을 받았음직 한데 불행히도 여기는 파리. 이 정도의 연식과 이 정도의 사연을 가진 건축물은 그야말로 동네마다 하나씩 있다. 그래도 현장에 가 보면 확실히 멋지다.
그렇게 해서 잔뜩 흐린 파리의 하늘을 살짝 바라보며, 택스 프리 신청을 위해 들른 백화점 식당에서 사실상 마지막 끼니를 때웠다.
문어와 파스타. 꽤 비쌌지만 생각보다 고퀄의 식사.
그리고는 호텔에 들러 맡긴 짐을 찾고, 마지막 라운지 이용을 탈탈 털고, 우버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파리 드골 공항의 스타 얼라이언스 라운지(아시아나 항공도 함께 쓰는)는 엄청난 규모와 꽤 괜찮은 시설이 눈길을 끌었는데, 불행히도 좌석이 그리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런 걸 언제 쓸까 싶은 공간이 많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은 별로 없는 바람에 뭘 좀 먹어 보려 음식을 집으면 수백걸음을 걸어야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구조.
게다가... 아니 대한민국 국적기가 라면을 이따위로밖에 못 만들다니.
어쨌든 14시간의 긴 비행 시간 동안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는데 감사했다. 대한항공 비즈니스와 아시아나 스마티움은 일장일단이 있는데, 공간 이용 면에서는 대한항공이 좀 앞서지만 좌석을 내가 원하는 각도로 딱 맞춰 활용하는 것은 스마티움 쪽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귀국. 바로 달려간 곳은 부대찌개집.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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