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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영화 '해적'에 나오는 옥새 장면이 매우 굴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주권을 인정받기 위해 이웃 나라의 군주로부터 '그대들의 나라를 인정하고, 그대 나라의 국새를 보내 그것을 증명하노라'라는 칙명을 받는다는 건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연원을 생각해 보면, 당시의 동아시아 상황에서 국새를 받는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모욕적인 일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각에서는 과거 조선이 명에 대해 취했던 자세와 마찬가지로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에 대해 굴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 국경을 함부로 넘어 조업하는 중국 어부들 하나 단속하지 못하고, 이를 가로막던 해경 요원이 중국 어부에게 살해당해도 속시원한 조치를 하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 - 심지어 수많은 인권/재야 단체들 또한 여기에는 입을 다무는 현실을 보면, 대체 누가 어느 시대를 향해 사대주의적이고 종속적이었다고 욕할 자격이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옥새의 의미와 그 전달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봤습니다.

 

 

 

 

 

 

옥새

[명사] 玉璽. 나라의 권위를 상징하는 국왕의 인장. 흔히 국새(國璽)라고도 불린다. 각종 문서에 국가의 약속을 대신해 사용된다.

 

개인이 도장을 사용하듯 나라에는 국권을 대신하는 도장이 있다. 한자로 새()라는 글자 자체가 가장 높은 권위의 도장을 뜻하며, 굳이 옥으로 만들지 않아도 흔히 옥새라고 쓴다. 이는 아마도 국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전국옥새(傳國玉璽)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국새라고 불리는 이 옥새는 한비자에 나오는 화씨의 구슬[和氏之璧]수명우천, 기수영창(受命 于天 旣壽永昌,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은 영원하리라)’의 여덟 글자를 전서로 새긴 것이다. 진에 이은 한()나라에서도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보물로 사용됐고, ‘삼국지연의에서 원소와 손견이 궁중 우물에서 발견된 이 전국새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에피소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후에도 전국새를 가진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라는 통념 때문에 수,당 시대까지 권력의 상징으로 존중받았다. 오대십국 시대의 후당 이후 전국새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고, 이후에는 모조품이 몇 차례 등장했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진짜 전국새를 사용한 사람은 진시황 한 사람 뿐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찍이 진시황이 천하를 순시하던 도중 동정호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위태로워지자 옥새를 물에 던져 잔잔하게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황제의 권위로 동정호의 용을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왕은 노인으로 변신해 황제에게 다시 옥새를 전달했다고 한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에겐 이 모두가 황제를 신격화하려는 이벤트로 보일 수도 있다.

 

한반도의 여러 왕조에게 중국으로부터 국왕에 책봉되어 칙명과 국새를 받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매우 중요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삼국시대 이후 책봉례가 끊인 시절은 없었다.

 

고려는 원과의 오랜 전쟁 끝에 굴복하고 사위의 나라가 된 뒤, 부마국왕(駙馬國王)의 칭호로 옥새를 받았다. 반면 새로 건국한 명은 고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1370,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 새겨진 국새를 보내왔다.

 

1392년 개국 직후 태조 이성계는 명에 사신을 보내 새 나라의 국호로 화령(和寧)’조선중 어느 것이 좋으냐고 질의했다. 화령은 함경남도 영흥의 옛 이름으로 이성계의 고향이다. 청을 받은 명 태조 주원장은 옛날부터 쓰던 이름이요, 불러서 아름다운 이름이라며 조선을 골라 줬다.

 

이로써 일단 정권의 정통성은 인정받은 셈이나 정식 책봉이 되려면 옥새 수령은 필수였다.  이성계는 1393년 고려 국새를 반납한 데 이어 1395년 태학사 정총을 사신으로 보내 옥새를 재촉했다. 하지만 당시 명은 정도전이 주도한 조선의 군비 확충을 우려 하던 터라 쉽게 국새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태종 1(1401) 612일에야 명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국새를 지닌 사신들이 도착했다(국왕이 직접 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영화 해적에 나오듯 조선 사신이 대신 받아 가져올 수는 없었다). 태종은 매우 기뻐하며 두 사신에게 각각 7언절구를 지어 답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2년 뒤인 1403 48일에도 역시 금인(金印)과 칙령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2년만에 또 국새가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진짜 고래가 삼켰는지도.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대단히 굴욕적인 일로 느껴질 수 있으나 당시 중국의 책봉은 중화라 불리는 동아시아 문명의 일부에 편입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시각을 달리 하면, 책봉 여부는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기준으로 볼 수도 있다.

 

일본에는 중국 한나라 광무제가 내린 한왜노국왕(漢倭奴國王)의 인장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조선초인 1401년엔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가 외교적인 노력 끝에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지인(日本國王之印)이라는 국새를 받고 명의 왕위 책봉을 받아들였다. 막부의 권력을 인정받고 조공을 통한 명과의 무역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명이 청에게 대륙을 내준 뒤 청도 조선에 새로 국새를 보냈고,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는 글자체를 만주체로 바꾸어 새로 보내기도 했다. 서유문은 무오연행록에서 이 국새에 대해 금으로 만들어졌고, 위에 거북이를 앉혔다. 안남(베트남)이나 유구(오키나와)에는 은으로 만들고 낙타를 앉힌 인장을 내린 것을 보면 우리(조선)와 대접이 다름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소중화(小中華)의 자존심이 눈길을 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지나간 역사를 매도하기보다는 과연 그 시대의 사대(事大)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G2시대의 한반도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이 이미 중국을 상대로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과연 오늘날의 후손들이 자주성 운운 하며 조상들을 매도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P.S. 제발 옥쇄라고 쓰고 오타라고 우기지 말 것.

 

 

 

 

 

영화 '해적'에 잠깐 스쳐 등장한 국새의 모습입니다만, 실제로는 봉황이 아닌 거북이가 새겨져 있었던 듯.

 

 

 

 

명이나 청으로부터 받은 옥새는 외교 문서용으로 고이 간직하고, 내정용으로는 수시로 국새를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청의 영향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판단한 고종이 즉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기존의 조선국왕지인 대신 황제어새를 새로 만들어 사용한 것을 보면 자주성에 대한 인식이 분명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단지 조선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실력의 뒷받침 없이 자주성이며 주권, 대의를 부르짖었던 댓가가 어떤 것인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입으로 자주와 자유를 외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주성을 주장하고도 뒷탈이 없기 위한 대비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잠시 기분은 유쾌할 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역사는 자존심 한 번 제대로 지킨 댓가를 그 이후의 몇 세대가 치렀던 일이 적지 않았음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시선으로 조상들을 함부로 비웃지 맙시다.

 

P.S. 이와는 별도로 '해적'은 참 유쾌한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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