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늦은 감이 있지만 올라갑니다. 이 글이 나가고 한참 뒤(그러니까 최근) 크레용팝의 '일베돌' 논란이 있었죠.
뭐 결론부터 얘기하면 뜻도 모르고 남들이 쓰니까 뭐 원래 있는 말인가보다 하고 쓴 사람들이 잘못인데, 그걸 갖고 응원을 하네 이제 정이 떨어졌네 하는 게 좀 우습게 보입니다. 애당초 이상한 표현을 만들어 낸 사람들에게 뭐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그 말을 따라 쓰는 어린 친구들에게 그 말의 책임을 다 지라는 건 지나쳐 보입니다.
그 말이 잘못된 것이니 쓰지 말라고 타이르면 충분할 일 아닐까요.
문화어사전, 일단 '갑을관계'부터 시작합니다.
갑을관계[명사]
뜻: 지시하는 자(갑)와 실행하는 자(을), 혹은 돈을 내고 일을 시키는 자(갑)와 돈을 받고 일을 해 주는 자(을)의 관계
흔히 ‘갑을관계’라고 표현되는 말. 여기서의 갑과 을이란 대개 계약서상으로 돈을 대는 자와 돈을 받고 용역을 집행하는 자 정도로 요약되지만, 실상은 ‘주도권을 쥔 자와 끌려가는 자’ 정도의 의미가 된다. 당연히 을은 갑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갑은 수틀리면 판을 뒤집어 을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갑을’이라는 말에 이런 의미는 들어 있지 않았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도 삼한갑족(三韓甲族, 아주 오래 전부터 명문거족인 유서 깊은 집안)이란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역시 갑이 좋은 것이긴 하나, 그렇다고 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갑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을은 ‘그 다음으로 좋은 것’으로 통했다.
추사 김정희의 서독(書牘)을 보면 ‘이곳의 샘물 맛은 관악산에서 흘러내려온 것인데, 두륜산과 비해 갑을을 가리기 어렵다(此中泉味。是冠岳一脉之流出者。未知於頭輪甲乙何如)’라는 용례를 볼 수 있다. 여기에 쓰인 갑을이란 ‘1,2등을 가리다’, 즉 비슷하게 좋은 것들 사이에서 순위를 매긴다는 정도의 뜻이다.
‘갑을 관계’이란 말이 지금의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현대적 계약서의 등장 이후다. 통상 모든 계약서에는 긴 회사 이름을 생략하기 위해 ‘갑’과 ‘을’이란 대명사가 쓰인다. 이 경우에도 대부분 돈을 내는 쪽이나 정부 기관, 언론사, 대기업 등이 ‘갑’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갑=힘있는 쪽’이란 등식이 성립했다.
이후 갑이 을에 대해 저지르는 강자의 횡포를 흔히 ‘갑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갑이 그렇게 말할 리는 없고, 힘없는 을들이 뒤에서 흉을 볼 때 쓰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갑을 관계가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는지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 늘 ‘을’로 살아가는 데 지쳐 자녀들에겐 항상 수입 브랜드 GAP을 입혔다”는 농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혹자는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 교육열도 ‘자식 세대만큼은 갑의 위치에서 살기를 바라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013년 4월 이후 포스코 상무 사건, 제과회사 회장 장지갑 구타 사건, 남양유업 욕설 통화 사건 등이 잇달아 이슈가 되면서 ‘갑의 도덕적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하청 업체와 대기업 사이의 관계를 풍자했던 KBS 2TV ‘개그콘서트’의 ‘갑을 컴패니’ 코너가 “한 달만 더 버텼더라면 화제를 선도하는 인기 코너가 될 수 있었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갑을 컴패니’는 2012년 연말 방송을 시작했으나 2013년 3월 종방, 간발의 차이로 ‘대목’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썽많은 '일베 용어' 차례.
민주화 [명사]
뜻: (일베 사이트에서 쓰이는 의미) 뭔가를 억눌러 획일화시키다
사전에선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이란 뜻. 19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한국 사회 운동의 지상 과제였다.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2013년 네티즌 세계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인터넷 사이트 일베저장소(www.ilbe.com)는 한국 온라인 이념지도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곳으로 통한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숭상하고, 5.18 사망자 사진에 ‘홍어 말리는 중’이라는 사진설명을 붙이는 포스팅이 재미로 올라오는 곳이다. 이 사이트에 올라오는 포스팅에는 두 개의 버튼이 붙어 있다. 다른 사이트의 ‘찬성’이 있는 위치에는 ‘일베로’라는 버튼, ‘반대’ 위치에는 ‘민주화’라는 버튼이 있다. 이 사이트에서 ‘민주화’란 곧 ‘싫다’ 혹은 ‘억누르다’ ‘반대하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반대로 ‘산업화’는 ‘좋다’ ‘추천한다’는 의미다.
5월14일 인기 걸그룹 시크릿 멤버 전효성이 라디오 생방 도중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소수 의견이라고 무시하거나 억누르지 않는다”는 의미로 ‘민주화’라는 말을 사용한, 너무도 ‘일베적’인 용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6시간만에 전효성은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사용했다”며 공개 사과로 진화에 나섰지만 후유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반면 일베 사이트에서는 “우리가 전효성을 보호해야 한다”며 음원 단체 구매 운동이 벌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일베식 표현' 때문에 혼이 난 사람 중에는 가수 김진표도 있습니다. 김진표는 한 방송에서 헬기 추락 장면을 보고 '운지하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썼다가 큰 항의를 받은 것이죠.
그 문화를 모르시는 분들은 '대체 왜 운지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 있는 단어냐'고 의아해 하시기 마련입니다. 그 내용에는 최민식이 나왔던 운지천 광고와 관련된 몇 단계의 파생 과정이 있습니다만, 굳이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시간 낭비죠). 아무튼 그 결과 어디선가 떨어지는 것을 '운지하다'라고 쓰는 표현이 나돌고 있는데, 그 표현의 출발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비하하는 것이라는 점만 알아 두시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김진표 본인은 '전혀 그런 의미인지 몰랐다'고 곧 사과했습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운지'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떨어진다'는 뜻으로 알아들을만한 여지가 충분합니다. 한자로도 隕地 라고 써 놓으면 그럴 듯 하기 때문입니다. 저 隕자는 '떨어질 운', 즉 '운석'의 운입니다. 앞뒤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본래 그런 말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멤버들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트윗의 '노무노무'라는 말도 일베 사이트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라는 게 크레용팝을 '고발'한 네티즌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한국어의 음상을 생각하면 '너무너무'를 '노무노무'로 쓰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뭐 크레용팝 소속사 대표라는 이 분은 확실히 그쪽과 친하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일베 회원들이 크레용팝이 인기를 얻는데 큰 기대를 했다면, 이쪽 소속사에서는 이 사이트에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당연한 일 아닐까요.^
아무튼 사과든 해명이든 그리 깔끔하진 않았지만 거의 봉합되어 가는 느낌.
마마돌 [명사]
뜻: 아이돌 출신으로 자녀를 둔 뒤 현역으로 복귀한 연예인
일본의 가수 겸 배우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 때문에 생긴 단어다. 198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아이돌이었던 마츠다는 1986년, 24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결혼을 발표하며 무대를 떠났으나 87년 출산 후 곧바로 컴백, 미디어로부터 마마돌(Mama+Idol)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2013년 1월16일 결혼한 원더걸스의 선예가 임신 발표를 하면서 국내에서도 마마돌 시대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팬들의 기대가 한창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룹 업타운 출신인 윤미래가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JK와 결혼해 2008년 이미 아들 조단을 출산했으므로 마마돌 1호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지만 일단 업타운이 아이돌 그룹이냐는 데 약간의 논란이 있고, 윤미래도 결혼 뒤에는 아이돌이라기보다는 힙합 아티스트의 이미지로 활동했으므로 마마돌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순혈 아이돌 출신으로는 S.E.S 출신의 슈가 지난 2010년 결혼해 이미 아기엄마가 됐지만 결혼 시기가 전성기를 지난 뒤였고, 출산 후 사실상 활동이 없기 때문에 나이나 인기로 볼 때 ‘국내 마마돌 1호’에 대한 기대는 선예 쪽으로 몰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선예가 출산후 선교 활동을 하겠다는 입장이라 원더걸스의 앞날이 불투명해진 것... 소속사에선 일단 전혀 검토된 바 없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
731 [명사]
뜻: 20세기 초 제국주의 일본의 만주군 휘하에 있었던 특수부대의 이름.
피점령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다. 2차대전 종전 후에도 한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1980년대 이후 발견된 기밀 문서를 통해 그 실체가 공개됐으나 이 시설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 포로가 희생됐는지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하얼빈 교외에 있었던 유적은 현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 부대의 만행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말이 ‘마루타’라는 단어다. 이 부대에서는 실험용 포로를 ‘통나무’를 뜻하는 마루타라고 불렀다. 지난 2009년 국회 질의응답 중 당시 정운찬 국무총리는 “마루타라는 말을 아느냐”는 질문에 “전쟁 포로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731부대가 뭔지 아느냐”는 질문에는 “저, 항일 독립군”이라고 대답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정 총리는 나중에 “알고 있었으나 질문자가 너무 다그쳐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2013년, 무뇌아적인 역사인식으로 줄곧 극우파적인 행동을 일삼아 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5월13일 ‘731’이라는 숫자가 붙은 항공자위대 훈련기에 탑승한 사진을 공개해 다시 말썽을 빚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독일 총리가 나치 문양이 새겨진 전투기에 탑승한 것과 같다”고 강도높게 비판했고 미국에서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P. S. 음모설 하나. 지난 2006년 7월21일, 일본 민방 TBS는 731부대의 실체를 밝히는 시사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이 방송의 한 장면에 아무 맥락 없이 당시 내각 관방장관직을 맡고 있던 아베의 사진이 등장해 화제가 됐다. 자민당이 발칵 뒤집혔고 원인 조사가 이뤄졌으나 제작진의 단순 실수로 결론이 내려졌다.
당시 자민당 총재를 노리던 아베는 "고의라면 내 정치생명을 노린 음모"라며 격분했지만 그 이상의 사실은 밝혀진 바 없다.
위의 전투기 사진은 많이 보셨겠지만 마지막에 언급한 이야기는 꽤 오래 전 일입니다.
그러니까 2006년 7월21일, TBS의 '이브닝 파이브'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731부대 관련 내용이 등장했고, 그 보도 과정에서 별 맥락 없는 아베 당시 장관의 선거 포스터가 노출됐다는 겁니다.
정상적인 반응은 '대체 아베와 731이 무슨 관계?' 라는 식이었을 것이 분명하고, 아베 본인은 당연히 펄쩍 뛰었죠. TBS 측은 사과.
흥미로운 것은 일본 우익 사이에서는 TBS가 "재일교포들의 지배를 받는 반일 방송"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2006년의 이 사건이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워낙에 별 맥락 없는 사건들의 연속인데다, 시간이 좀 경과한 것들이라 더 어수선하게 보이는군요.^^ 아무튼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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