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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기 전부터 엄청난 호평이 밀려왔습니다. 시사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이안 감독은 정말 최고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는 최고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다.... 이 정도로 호평 일색인 평가는 그야말로 오랜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은근히 불안하기도 하더군요. 스스로 그리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인 것도 잘 알고 있는데다 지나친 호평은 기대를 낳고, 역시 과도하게 부풀려진 기대는 항상 실망을 낳는다는 것도 이미 익숙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로 꼽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3D IMAX, 최소한 반드시 3D로는 보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는데 그 말에 동의합니다. 수많은 액션 대작들, 심지어 '호빗'과 비교해 보더라도, 이 영화만치 3D가 효과적인 작품도 드물 듯 합니다.

 

 

 

 

일단 줄거리. 영화는 얀 마텔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략 크게 벗어나는 내용은 없는 듯 합니다.

 

소재 고갈에 시달리던 작가는 인도 폰티체리에서 만난 노인의 조언에 따라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인도인 파이(이르판 칸, 연령대에 따라 여러 배우가 연기합니다)를 찾아갑니다. 거기서 파이는 '신의 존재를 믿게 할만한 이야기를 해 주겠다'며 자신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폰티체리에서 동물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파이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 파리의 한 수영장 이름에서 따 온 것이지만 피신(pscine: 프랑스어로 '수영장'이란 뜻이더군요)이란 이름이 영어의 오줌싸기(pissing)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고,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원주율을 뜻하는 파이로 개칭합니다.

 

힌두교와 기독교, 이슬람까지 모든 종교에 빠져들던 소년 파이는 부모의 캐나다 이주 계획에 따라 일본 화물선을 타고 긴 항해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배는 필리핀을 지나 태평양 한복판에서 침몰해 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파이는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구명보트에서 위험천만한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예고편에서도 보여지듯, 영화의 3/4 정도는 망망대해 위의 배 안에서 파이와 호랑이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전 궁금해합니다. 대체 좁디 좁은 배 안에서 어떻게 호랑이와 소년이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지? 당연히 드는 생각일 겁니다. 물론 그 내용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이기 때문에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한 지인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바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보고 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죠. 영화 속의 바다는 그야말로 환상의 대우주입니다. 특히 수천마리의 해파리가 이뤄내는 바닷 속 장관, 고래의 등장, 해뜰 때와 해질 때의 수평선, 날치떼의 습격 등은 그야말로 CG의 영상미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장면들입니다. 이런 장면들만으로도 '라이프 오브 파이'를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이안 감독의 영화답게, '라이프 오브 파이'는 표면적인 이야기 속에 또 한 층의 이야기를 깔아 두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정교하게. 다만 이 이야기는 아직 안 본 분들의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고 하고자 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반드시 영화를 보신 뒤에 와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경고!

 

 

 

 

 

 

 

 

 

소설가가 파이를 찾아가 만나는 첫 장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입니다.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모태로 하고 있는 바로 그 영화죠.

 

물론 소설가들은 언제나 소재를 찾아 해메기 마련이고, 소설가가 누군가로부터 독특한 이야기를 듣는 데서 시작하는 스토리는 매우 흔합니다. 그런데 '스모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설가는 오기 렌에게 말하죠. "자네는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야." 그리고 '라이프 오브 파이'의 엔딩 역시 이 장면을 연상시키게 합니다. 마지막 장면, 멕시코의 병원에서 파이는 실제로 '그 자리에서 생각해 낸 그럴싸한 이야기'로 위기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이렇죠. 멕시코의 병원에서 파이는 사고 수습을 위해 찾아온 일본 해운회사 직원들에게 시달립니다. 이들은 "호랑이나 식인 섬이 등장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말고, 납득할만한 '진짜 이야기'를 해 달라"며 파이를 괴롭히죠. 파이는 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파이가 '그냥 생각해 낸 이야기' 일까요?

 

지금까지 관객이 본 영화와는 달리 이 이야기에는 동물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리 다친 얼룩말은 실제로도 다리를 다친 선원으로, 오랑우탄은 파이의 엄마로, 하이에나는 배 위에서도 파이 가족을 괴롭혔던 주방장으로 묘사됩니다.

 

원작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안 감독은 이 대목에서 의도적으로 제2의 해석을 열며 관객의 의심을 자극합니다. 파이는 정말 배 위에서 동물들과 살았던 것일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구명 보트 위에서 서로 죽고 죽인 것은 실제론 사람들이었지만 차마 인간들이 이런 짓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파이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들을 모두 동물로 바꿔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대체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누구일까요. 파이 자신이 아니라면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친 주방장이 선원과 엄마를 죽이자 파이는 내면의 야수성이 폭발하며 주방장을 죽여 응징합니다. 하지만 파이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자신을 호랑이로 삼아 본래의 자아와 떼어놓습니다.

 

파이의 분열된 자아는 배 안과 배 밖에 있습니다. 참극이 일어난 배를 떠나 구명대 위로 피신한 파이는 자신의 야수성을 배 안에 남겨두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을 찾기 싫은 파이는 '보트로 돌아가면 호랑이가 나까지 해칠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이안 감독은 이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해석'임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를 여기 저기 깔아 두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살해하기 전까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숨어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하이에나와 공존하기도 하죠. 진짜 호랑이라면 하이에나가 '죄'를 지어 응징해야 할 때까지 가만히 살려두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호랑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파이가 배 안의 식량과 물을 모두 구명대 위로 옮겨 놓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이유 또한 없겠죠.

 

물론 이안 감독은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거였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은 의도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냥 암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 심지어 파이 자신도 -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그냥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집착하는 것은 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제대로 감상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어쨌든 이야기는 계속.)

 

 

 

 

그러던 어느날, 파이는 우연한 사고로 보급품을 모두 잃고, 마침내 '리처드 파커'와 공존해야 할 필요를 깨닫습니다. 채식을 포기하고 야수성을 받아들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파이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파괴적인 본능을 달래기 시작합니다. 고기 한점 한점을 먹이며(먹으며) 말이죠.

 

식인의 섬은 참 기묘한 상징입니다. 특히나 미어캣으로 가득 찬 섬이라니... 파이의 환상 치고는 참 희한합니다. 정답이라는 근거는 없지만(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답'이라는 말 자체가 이 영화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한가지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어쩌면 파이는 바다 위에서 또 다른 표류자를 만나거나, 인간이 살고 있는 어떤 섬에 도착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굳이 그 존재들이 미어캣으로 표현된 것은, 자신에 의해 희생된 - 자신의 먹이가 된 - 존재들이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의 발현일 수 있습니다.

 

그 존재를 인간이라고 보는 것은 미어캣 - 두 다리로 걷는 동물 - 이라는 형상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어린 아이였는지도 모르지요.

 

 

 

 

여기서 파이는 꽃인지, 과일인지 모를 덩어리 안에서 인간의 이빨을 발견합니다. 끼워 맞추자면 이건 파이 자신의 용변일 수도 있습니다(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에 용변을 매화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와 마주치는 순간입니다만, 파이는 역시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섬(식인이 일어난 공간)이며, 그 섬을 떠나면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의 죄악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는 섬을 떠나는 배 안에 '리차드 파커를 위한 식량(미어캣)을 챙기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인간이 사는 문명의 땅에 도착한 파이. 이제 더 이상 야수성과 공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파커는 밀림 속으로 떠나갑니다. 다시는 볼 일이 없겠죠. 파이가 또 한번 야만의 환경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면 언제든 호랑이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되고 나면 '파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많은 한줄 평들은 '자연과 소년의 아름다운 조화' '공존의 미학'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이면은 무시무시한 이야기거든요. 마지막 장면, 파이가 평범한 가장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민 장면은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인 존재인지를 드러내 주는 장치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전히 채식주의자인 '온화한 파이'의 모습도.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키면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이라는 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사건을 그대로 서술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 보다는 실제 일어난 일을 다른 사물이나 동물에 비유해 우회적으로 표현하곤 했죠. 넓게 보면 인격화된 신의 존재도 결국은 이런 비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영화 '파이 스토리'는 인류가 어떻게 해서 우화라는 것을 탄생시켰는지, 혹은 어떻게 해서 비유법과 과장법을 발달시켜 왔는지에 대한 깔끔한 설명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소름끼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대자연 전체를 대상으로 볼 때 삶이라는 것은 항상 우아한 행위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의 교훈은 오히려, '삶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사소한 교훈이나 도덕, 가치나 율법 따위보다 항상 상위에 있다'는 준엄한 가르침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문명은 낳은 자와 태어난 자,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와 섬김에 대해 가르치지만 여왕개미는 위기에 놓이면 자기가 낳은 알과 애벌레를 먹고 생존하라는 본능에 따릅니다. 이것은 선악 이전에 존재하는 생명의 법칙이죠. 자연은 본래 도덕 이전에 존재합니다. 이른바 노자가 말한 천지불인(天地不仁)의 가르침입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파이가 망망대해에서 야수의 공포를 길들이며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물아일체의 경지(크리쉬나의 입안에 있는 우주처럼..) 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켠에서는 그 이면에 엄연히 존재하는 치열한 생존의 원칙을 - 인간들이 문명을 앞세워 가끔 부정하곤 하는 - 일깨워주기도 하는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어쩌면 이런 감춰진 이야기가 없었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흔한 어린이용 영화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더없이 매력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이른바 '우화의 탄생에 대한 우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P.S. 인도 철학...까지는 몰라도 인도 신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본다면 훨씬 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 온갖 신들을 주워섬기던 파이는 정작 번개를 보면서 인드라를 떠올리지는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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