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탑건: 매버릭>.
감상은 “너무 좋았다.”
한마디 더 보태면 “이렇게 좋아도 되는거냐.”
전편을 좋아했던 그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이 영화는 보물이자 보약이다. 그날의 기억이, 그날의 느낌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 극장 가득 울려퍼지는 Top Gun Anthem과 Danger Zone을 들으면서 벌써 눈물이 나려 한다. 오토바이는 타 본 적도 없는데도 활주로를 따라 매버릭이 가와사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에선 그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영화는 뭔가 숨은 의미를 찾거나 할 여지가 없는 직구의 연속. AI라고 만능 아니다. 아직 인간이 할 일 많다. 젊은이들에게 주눅 든 노인네들, 아직 멀었어! 기운 내! 할 수 있어! 뭐 이런 메시지는 너무나 자명해서 거론하는게 창피할 정도. 거기다 제작진은 다른 생각은 모두 접고, “어떻게 하면 1편을 본 관객들에게 좋은 기억을 줄 수 있을까”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친구들일텐데^^, 정말 정성이 가상하다.
다음은 그저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 기억나는 것들의 모음이다.
1. 오래 전, 고교생 록밴드를 인터뷰 할 일이 생겼다(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미 아이돌의 시대. 밴드라지만 니들이 무슨 밴드 음악을 하겠니, 라는 생각으로 질문했다. “그래서 어떤 밴드 곡을 커버해요?” 그런데 대답이 예상을 벗어났다. “토토요.”
태어나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너희가 토토를 안단 말이냐. 밀려오는 감동. 갑자기 멤버들이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다. 꼰대질을 했다. “너희가 한번 들어봤으면 하는 연주곡이 있어.”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Top Gun Anthem을 틀었다. “들어본 적 있니?” “아뇨. 근데 너무 좋은데요.” 그럼. 좋지. 안 좋을 리가 있니.
2. 36년만의 속편. <탑건: 매버릭>은 정말 흔한 속편 영화들이 닿을 수 없는 깊이의 영화다. <록키>로 치자면 1976년의 첫 편에서 바로 2006년작 <록키 발보아>로 넘어 온 느낌. 하지만 그 사이에는 4편의 <록키> 시리즈가 있다.
<탑건>과 <탑건: 매버릭>에서 톰 크루즈가 소화하는 젊은 매버릭과 늙은 매버릭은 어딘가 <허슬러>(1961)과 <컬러 오브 머니>(1986)의 폴 뉴먼을 연상시킨다. 원작에서 25년 뒤. 나이는 먹었지만 불 같은 호승심은 그대로인 초로의 남자. 젊은이들과 진심으로 부딪혀 승부하는 남자(공교롭게도 그 남자가 바로 톰 크루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건: 매버릭>은 다른 어떤 영화도 도달할 수 없는 요소를 갖고 있다. 1962년생인 톰 크루즈라는 사기 캐릭터다. 본래 2020년 개봉 예정이었으니 대략 57~8세 무렵의 모습이겠지만, 그 나이에 성적으로 어필하는 ‘매력발산 표정(매우 중요한 요소다)’을 유지하고, 젊은이들과 함께 상의탈의를 할 수 있는 배우가 과연 있었을까. 앞으로는 나올 수 있을까.
4. 어쨌든, 1편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세심하게 구성된 영화지만, <탑건: 매버릭>을 가장 재미있게 보기 위해선 역시 <탑건>을 봐야 한다. 본지 10년이 넘은 사람이면 한번쯤 다시 볼만하다. 지금 봐도 1986년작은 정말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탑건: 매버릭>은 <탑건>에서 약 30년 뒤의 현재. 가는 데마다 사고를 쳐서 장성 진급도 못하고 말년 대령으로 늙어가고 있는 매버릭은 어찌어찌 하다가 갑작스런 필요에 의해 다시 탑건으로 불려간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2명의 탑건 출신 엘리트 파일럿들. 그들 중 6명을 선발해야 하는 긴박한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두둥)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경고. 그래봐야 대단한 비밀도 아니지만, 어쨌든 경고. 영화 보고 오세요.)
5. 1986년 <탑건>이 나왔을 때 과연 영화 속 가상적국은 어디일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사실 그 시절엔 의심할 여지 없이 이라크가 1번 후보였다. 매버릭의 항공모함은 인도양 해상에 떠 있었고, 그 지역의 가장 유력한 미그기 운영 국가는 이라크였기 때문이다. 사실 꼬리날개의 별 모양은 북조선 공군의 상징이지만, 그걸 갖고 북한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도양에 북한이 웬 말이냔 말이다.
그럼 <탑건: 매버릭>의 가상 적국은? 이번 영화의 작전 지역이 태평양 함대 구역이라는 점, 5세대전투기를 운영하는 나라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유력한 후보는 러시아와 중국이다. 하지만 항공모함에서 내륙으로 접근하는 경로나 눈이 쌓인 지형이 있는 나라라면 러시아 외의 답을 생각하기 어렵다. 전투기의 생김새도 중국산 J-20보다는 러시아제 Su-57과 훨씬 더 비슷하다. (혹자는 F-14가 그 기지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란을 후보국으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이란 수준에 5세대 전투기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얘기다.)
6. 그런데 왜 그 나라에 F-14가 있는 걸까. 사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굳이 가능하게 하자면 ‘이란을 통해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다. 1970~80년대, F-14는 성능도 성능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전투기였기 때문에 해군은 F-14를, 공군은 F-15를 주력기로 채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천조국이라는 미국에서도 해군이 공군보다 부자다). 그런 비싼 F-14를 수입해다 쓴 외국은 원리주의 혁명 이전의 이란 뿐이었다. 친미주의자였던 팔레비 왕은 오일 머니를 아낌없이 투입해 F-14로 플렉스를 했는데, 팔레비는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세력에 의해 쫓겨나지만 이때 산 F-14들은 결국 돈값을 한다. 이란-이라크 전 당시 이 F-14들을 앞세운 이란 공군은 이라크 공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호메이니가 팔레비 덕을 본 셈.
물론 아무리 F-14가 미국 바깥의 어떤 나라에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은 있다고 쳐도, ‘그 나라’에 F-14가, 하필이면 그 기지에, 급유도 되어 있고 완전무장까지 된, 당장 비행 가능 상태로 정비되어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좀 심한 농담이 아닐 수 없다. 관객들에게 ‘톰 크루즈가 다시 F-14 조종석에 앉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제작진의 지나친 욕심이 빚은 결과. 좋은 뜻이었으니 그냥 넘어가자.
7. 이밖에도 진짜 전문가들이 보면 온통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겠지만, 마지막의 ‘적기’가 갑자기 3대가 되는 이유는 진심 궁금하다. 작전중이던 적기는 분명 2기였고, 마지막 3기째는 대체 어디서 불쑥? 굳이 설명하자면 매버릭이 기체를 이륙시키는 걸 보고(사실 이걸 막기 위해 크루즈 미사일로 먼저 공격한 것인데 그 활주로에서 기체를 이륙시킨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어떤 용감한 조종사가 3번 기체를 무리하게 이륙시켰다? ㅜㅜ
8. 찰리(켈리 맥길리스) 대신 페니(제니퍼 코넬리)가 나오는 이유는: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1편에서 구스의 아내 캐롤(당시 무명배우였던 멕 라이언이 이 역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눈에 띄었다)이 술자리에서 “제독의 딸 페니 벤자민”이라는 매버릭의 전 여친 이름을 거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1편에서 매버릭이 탑건 교관으로 돌아오면서 찰리와 재회하지만, 교관 노릇도 두달만에 때려쳤다는 걸 보니 연애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을 듯.
9. 아무튼 무슨 구조나 숨은 의미를 따질 영화는 절대 아니고, 다시 한번 권한다. 지금이라도 <탑건>을 보고 보러 가시길. 관람 경험이 훨씬 더 풍성해진다.
10. 마지막 자막은 1편의 감독인 고 토니 스코트에 대한 헌사. 가슴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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