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제목이 Maid라니까 많은 사람들이 혹시 전도연 나오냐는 드립을 쳤다. 한국 제목은 <조용한 희망>. 사실 잘 지은 제목은 아니다.
스무살 나이에 아기 엄마가 된 주인공. 알콜중독과 폭력성을 슬슬 드러내기 시작한 남편에게서 아이를 떼놓기 위해 대책없이 집을 나온다. 기댈 곳?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자칭 예술가 엄마는 딱 봐도 사기꾼인 연하 남친에게 빨대를 꽂혀 살고 있다. 일찌감치 재혼한 아빠도 새엄마 눈치에 선뜻 뭘 어쩌지 못하는 상태. 주머니엔 잔돈 몇푼 뿐이고 일자리는 아예 가져본 적도 없다. 대체 이 주인공은 뭘 할 수 있을까. 좋은 길이건 나쁜 길이건, 선택지란게 있긴 할까?
여기까지만 들어도 고구마를 10000개 먹은 듯한 답답함이 느껴지실 분들이 많겠지만 이건 그냥 시작이다. 과연 이 정도로 아무 대책이 없는 상태가 있을까 싶은데, 보다 보면 문득, 이 주인공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형편상 진학은 못했지만 대학 장학생으로 뽑힐만한 재능이 있고, 매력적인 외모도 갖고 있다. 낙천성과 의지는 캔디급이고, 신라면에 물을 부어 먹는 수준(이봐 그건 컵라면이 아니라 봉지라면이라고!!)의 식생활에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강인한 체력도 갖췄다. 마약은 쳐다도 안 본다.
그러니 비슷하게 암담한 생활의 늪에 빠진 다른 많은 여성들에겐 이 드라마는 '주인공 혼자 잘나서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인생을 설계하는 판타지'로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다. 드라마다 보니, 주인공은 우연히 마주치게 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는데, 주인공에게 저런 능력치들이 없었다면 과연 저런 호의를 제공받을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얄팍한 가난 포르노에 그치지 않는 것은, 시청자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향과 애정이 굵은 명조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끔 생각한다. 대체 내가 낸 세금은, 그 많은 복지예산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 많은 공무원들은 뭘 하길래 신문 기사엔 늘 안타까운 가난과 한숨이 실리는 걸까. 아버지 간병을 떠안았다가 빚만 지고 존속살해로 재판을 받고 있는 청년이 그 지경에 빠지도록 이 사회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바로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데 최적화된 영화였다면, 드라마 <조용한 희망>은 흔히 말하는 '사회 안전망'이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그리고 어떤 때 쓸모가 있는지에 대한 차분하고 설득력있는 접근을 보여준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지만 결코 복지 선진국은 아니라는 평을 듣는다. 그런 사회에서 누군가 인생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과연 누가 당신을 받쳐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충실한 조명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난국을 맞은 사람들을 찬찬히 보면 80~90%는 자업자득이라고. 대개 그런 이들은 실패가 유전자에 박혀 있고, 누군가 손을 내밀면 그 손까지 진흙탕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도 한다.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코로나 사망자보다 자살자가 훨씬 많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시각이 있는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조용한 희망>은 그런 시각에 맞서 차분하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시스템도 세상 모든 루저를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특히 어떤 젊은이가, 조금만 도와주고 믿어주면 자기 힘으로 헤쳐 나올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도 그토록 힘들어한다면, 그것 하나 구제할 능력이 없다면 과연 이런 나라를 소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나. 별 것 아닌 당신의 도움 하나로 한 인생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까지 마다할텐가. 정말 당신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매년 매달 내는 세금이 너무너무 아까운 분들은 한번쯤 보셔도 좋을 드라마. 반면 내 아이들이 늘 남들보다 앞서가며 번듯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사회라는게 원래 밑에 깔아주는 애들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절대 보면 안 될 드라마. 어쨌든, 강추.
P.S. 웬만하면 이미 아시겠지만 엄마 역 앤디 맥도웰과 주인공 마거릿 퀄리는 실제 모녀간. <원스...>에 단역으로 나왔다. 살짝 미국 한효주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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