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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인가 NPC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모든 게임에는 NPC(Non Personal Character)라는 존재들이 있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병풍 같은 존재들을 말한다. 스타크래프트의 백곰 같은 경우도 있고, 가끔 플레이어들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게임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말해주는 역할일 수도 있지만 어떤 독자적인 사고나 행동은 할 수 없다. 플레이어의 게임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엑스트라들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1년 전쯤, ‘이 세상이라는 게임에서 자신이 NPC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NPC’에 대한 포스팅을 했다가 조회수가 나오지 않아 좌절하고 다시는 NPC 어쩌고 하는 글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다. 그런데 너무나도 그 설정과 어울리는 영화가 나왔다.

<프리 가이>의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는 프리 시티에서 은행원으로 살고 있다. 은행 업무를 수행하긴 하지만 주 업무는 선글라스 낀 남자(혹은 여자)’들이 총을 들고 은행에 나타났을 때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리는 정도다. 프리 시티에서 선글라스는 초인류의 상징이다. 그들은 은행을 털어도, 사람을 죽여도, 차나 건물을 파괴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돈을 내고 게임을 해야 이 게임이라는 세계가 의미가 있는 거니까.

일반 시민들은 고스란히 그들의 폭력에 노출되지만, 그냥 그게 일상이고 팔자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늘 똑 같은 인사를 나누고 똑 같은 커피를 마시면서. 그들에겐 그게 세상의 전부고, 세상의 이치다.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 프리 시티는 게임의 공간이고, 가이는 게임 프리 시티NPC. 그런 가이 앞에 어느날 심쿵하는 매력의 여성 캐릭터 밀리(조디 코머)가 나타나고, 그 순간 가이는 NPC의 굴레를 넘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세상의 질서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매트릭스>가 이미 20년 전 영화고 <레디 플레이어 원>이 벌써 4년 전 영화인 세상에서 이 설정이 대단히 신기할 것도 없고, 플레이어 아닌 NPC를 주인공으로 놨다고 해서 놀라 자빠질 일도 아니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그렇게 한번 시각을 바꿨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움직임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리얼 스틸>의 숀 레비가 감독인 만큼 따뜻한 유머와 밝은 분위기는 기본. NPC에겐 NPC의 길이 있다. 메인 캐릭터에겐 메인의 길이 있듯이.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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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센스(2011)

데이비드 맥켄지 감독. 이완 맥그리거, 에바 그린 주연

만약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한가지씩 감각을 잃어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후각이, 이어 미각이 사라진다. 인간들은 혼란에 빠지고, 냉소적인 셰프였던 마이클(이완 맥그리거)는 실업자가 될 위기에 놓인다. 수전(에바 그린) 연구팀은 급속도로 번져가는 전염병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주어진 오감으로 부족하다는 듯 가상 세계에까지 감각을 확장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감각들을 빼앗아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흥미로운 설정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오감은 인간이 욕망을 갖게 하는 전제다. 감각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 미각이 사라진 뒤에 미식이, 청각이 사라진 뒤에 음악이 사라지듯 시각과 촉각이 사라진 뒤에 성욕이라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충족할 수 없는 즐거움이 없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남아야 할까.

<퍼펙트 센스>는 감각이 하나 하나 사라질 때마다 나타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두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다는 절망과 파괴,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떻게든 최대한 남아 있는 감각을 이용해 삶을 유지하려 하는 방향(물론 오감은 욕망의 전제이기 전에 모든 생명체의 안전을 위한 도구이지만, 영화는 거기까지 커버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선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은 레스토랑을 찾고, 와인을 마시며 얼굴을 마주한다. 청각을 잃은 뒤에는 빠른 속도로 수화를 익힌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라이브 바에서는 밴드가 음악을 연주한다. 청중들은 공기의 진동을 통해 음악을 느끼려 애쓴다.

마스크 착용이 강제되는 사회. 격리. 강제 수용. 텅빈 거리. 11년 전 영화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팬데믹 시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는 영화. 초기 개발 단계의 제목은 ‘The last word’였다고 한다.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그 단어다. 흥미로운 설정을 100% 활용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사,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And life goes on)’으로 대변되는 낙관이 강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만약 이런 세상도 올 수 있다면 코로나 따위가 대체 무슨 문제일까.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용기를 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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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비해 책읽기에 소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연말. 책 한권을 봐도 필요한 부분만 보게 되고, 책보다 자료를 더 많이 보게 된 나날. 그래도 기를 쓰고 읽었다(?). 그중 참 좋았다고 생각되는 책을 꼽아 보니 12. 10권을 안 지키면 누가 따질 것도 아니니 그냥 소개

(드라마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2021년에 출간된 책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몇년도에 나왔든 2021년에 내가 읽은 책 중에 선정.)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조법종)

1884년 미 해군 소속 조지 포크 중위의 한반도 남부 여행기 번역과 그 해설.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개화파와 친분이 두터웠던 포크 중위는 한국에 대한 더 깊은 이해(물론 미 해군의 이해가 더 중요한 목적이었겠지만) 전라도와 경상도 여행을 떠났는데, 바로 그 개화파 인사들은 포크의 여행 도중에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이역만리에서 정변에 휩싸인 우리의 포크는 어찌 될 것인가…. 정도의 스릴 넘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여러모로 신기한 이야기. 이사벨라 비숍 여사와는 확실히 관점이 다르다.

넷플릭스 시대의 글쓰기 (패멀라 더글러스)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에서 드라마가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메인 작가 혹은 쇼러너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아주 자세한 해설서. 초판은 21세기 초에 나왔고 원제도 넷플릭스와는 1도 관련 없지만, 최신판에서는 넷플릭스 이후의 사례를 많이 소개했으니 저 제목도 아주 틀린 건 아님. 관심있으면 유용.

버터 (유즈키 아사코)

소설. 살인자로 몰린 여자와 그 여자와 인터뷰를 하고 싶은 여자. 음식에 관심이 넘치는 여자와 음식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여자. 두 여자의 세계는 과연 만날까. 같은 여자라는 면에서 대동단결, 의기투합할 수 있을까. 그렇게 쉽지는 않은 두 세계를 녹은 버터가 연결한다.

공기의 연구 (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에서공기라는 말은 한국에서 많이 쓰는분위기라는 말과 매우 유사하지만 그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대체 그럼 그 공기란 뭔가? 부제인일본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말에서도 읽을 수 있듯 그공기의 무게는 한국인이 느끼는분위기의 무게와 비할 바가 아니다. 심지어 야마토 호를 마지막으로 출전시킨 결정은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다는 무시무시한 비유까지. 상당히 흥미롭다.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센델)

너무나 유명한 책인데 유명한 분들이 TV에서 이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앞부분 100페이지 이상 안 읽었구나’, 혹은 이 책을 소개한 신문 기사 이상은 안 읽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책. 특히 한국 보수 언론이나 보수 계열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인용해 가며 이야기를 하는 건 누가 봐도 자충수인데, 그게 자충수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은 걸 보면 한국이 신기한 나라인지도. 어쩌면 유명 정치인 가운데 그나마 이 책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이준석 하나 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분이 읽기 전에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훨씬 더 급진적인 책. 개인적으로 매우 공감.

혁명의 맛 (가쓰미 요이치)

맛으로 읽는 중국 현대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청조가 망하고, 황제를 위해 봉사하던 고도의 음식문화가 민간으로 퍼져나오며 형성되었던 20세기 초반의 화려한 북경 요리 씬은 중일전쟁과 혁명기를 거치며 파괴되어가지만 오히려 고위 공산당원들이 미식을 원하면서 다시 살아난다. 일본인의 눈으로 본 20세기 중국의 음식 문화와 그 변화에 대한 이색적인 책. 다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묘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손정목)

1953. 전쟁이 끝난 수도 서울. 어떻게 도시를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책. 어디까지를 서울로 할 것인가, 워커힐이라는 호텔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한강과남서울의 관계 등등지금의 일상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낯선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담겨 있다. 해를 넘겨 이 책 시리즈는 모두 읽어보고 싶다.

 

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일본 문학 사상 3대 천재니 5대 천재니 하는 리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낯선 작가. 천재라는 이름에 관대한 일본 문학계라는 점에서 그리 큰 기대는 없었지만 읽어 보고 매우 놀랐다. 창작의 뿌리를 고전에 두고 있어 제2의 아쿠다카와라는 말을 듣는지도. 번역된 작품 수가 매우 적어 아쉬움. 소년시절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내 <범 사냥>같은 작품을 쓸 수 있었다.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이미 세계 최고의 미디어기업 중 하나였던 디즈니가 ABC, 픽사, 마블을 품에 넣고 진정 최강의 자리를 굳히는 과정을 지켜본 밥 아이거가 책을 썼길래 정말 디즈니만이 갖고 있는 뭔가 비밀스러운 프로세스가 담겨 있지 않나 했나. 알고보니 어떤 유능한 직장인의 고군분투기.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고, 인사이트도 넘친다. ‘창의력은 과학이 아니다같은 인사이트 넘치는 말씀도 많이 하심.

 

제비뽑기 (셜리 잭슨)

영미권 사람들에게 줄거리를 얘기해주면 108,9어 나 그 얘기 아는데라고 한다는 유명 단편 제비뽑기가 실린 셜리 잭슨의 단편집. ‘제비뽑기의 섬뜩함과 함께 지극히 예민하고, 지극히 치밀한 글쓰기가 사람을 잡아 끈다. 벗어나기 힘든 악마적 매력.

 

40일간의 남미일주 (최민석)

작년 연초. 뭔가 약간 우울하던 무렵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책. 남미의 절경과 재미를 만끽하는 와중에 끝없이 이어지는 작가의 실수담과 후회. 탄식. 자학이 눈물없이 볼 수 없는 큰 웃음을 던진다. 특히 아르헨티나-브라질로 이어지는 신발 에피소드는…. 작가님. 장염일 때는 제발 맥주를 그만 드세요.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김영민)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이야기’, 애니메이션 월E의 뚱보 인간들,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생각난다. 인간의 욕망이란, ‘욕심이 있어야 인생이 있고, 인생이 있어야 욕심이 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책.

 

이밖에 2021년에 본 책 중 추천하고 싶은 책들은:

 

한국의 국보 (이광표)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신명직)

진짜 프랑스(스페인)는 시골에 있다 (문정훈)

오늘부터 클래식 (김호정)

아무튼 떡볶이 (요조)

배빵빵 일본 식탐여행 (다카기 나오코)

 

자, 마지막으로 이 책을 빠뜨리면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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