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도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참 특이한 영화로 여겨질 법 합니다. 코엔 형제의 지난 날을 살펴보면 이들의 영화는 아무 생각 없어질 정도로 웃기는 코미디와, 범죄라는 창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본질을 들여다보는 소름끼치는 범죄 스릴러의 두 축을 왕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물론 코미디라고 해서 반드시 대중적이고, 범죄 스릴러라고 해서 반드시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들의 작품들 중 가장 난해하고 대중성이 떨어지는 작품으로 꼽히는 '바톤 핑크'가 스릴러의 색채를 띄고 있지만 스릴러 중에서도 '밀러스 크로싱'이나 '파고'같은 작품들은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걸작들로 꼽히고 있죠.
코미디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리조나 유괴사건'이나 '허드서커 대리인'은 그야말로 포복절도할 코미디의 걸작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블랙코미디라고 꼽아야 할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부분 부분 폭소를 자아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관객을 짓누르는 영화입니다.
사실 코엔 형제의 코미디 감각은 이들의 세계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재미있는 작품들이지만, 그 세계가 낯선 사람들에겐 뭔가 껄끄럽고 불편한 영화가 되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같은 영화는 20세기 초 미국 남부를 헤집고 다니는 세 탈옥수의 종횡무진 모험담을 - 물론 이 모험담 속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딧세이아'가 녹아 들어 있습니다 - 담은 유쾌한 수작이지만, 많은 관객들(특히 한국 관객)에겐 "뭐야? 조지 클루니가 왜 저런 썰렁한 영화에 나와?"라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아무튼 많은 분들에게 '유 아 마이 선샤인'이라는 노래는 영화 '너는 내 운명'을 떠올리게 하겠지만 제게는 '오 형제여'를 생각나게 합니다.
물론, 코엔 형제와 친숙한 관객이건 아니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2/3를 차지하는 르웰린 모스와 안톤의 추격전이 흥미진진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하는 안톤이란 캐릭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터미네이터 이후 가장 완벽한 암살자입니다.
그에게는 기본적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없고, 의무감만이 존재합니다. 드라마 주인공으로 인기 높은 덱스터와 비슷하죠. 하지만 덱스터가 항상 다른 사람들이 느낀다는 '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고민하는 반면 안톤은 자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 도망치는지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예측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에겐 살해의 동기 따위는 의미가 없죠. 그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눌러 죽이는 개미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개미를 죽이고, 어떤 개미는 살려주는 것 역시 선이나 악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얘기죠. 우스꽝스러운 헤어 스타일로 이 소름끼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바뎀은 본래 '스페인의 말론 브란도'라고 불렸던 호남 스타이지만, 매력을 희생한 덕분에 온갖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쓸어 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라면 역시 모스가 주인공, 그리고 안톤은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이라야 정상적인 전개가 가능합니다. 또 모스가 안톤에게 쫓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물을 달라고 간청하던 갱 조직 생존자의 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라는 것은 일반 관객들이 모스를 동정할 만한 충분한 동기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코엔 형제가 그렇게 호락호락 관객들의 기대에 맞춰 영화를 진행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죠. 오히려 코엔 형제의 시선은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를 늙은 보안관 에드의 시야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때문에 많은 관객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 1/3에 대해 심각한 반발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드의 독백은 이 영화의 원작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얼핏 봐선 지금까지 본 영화와는 아무 상관 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코엔 형제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영화의 제목을 대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첫 구절에서 따 온 거라는 건 다 아시는 얘기일테고, 이 시의 첫 구절은 본래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번역본들은 한결같이 이 첫 구절을 '이 나라는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영화의 한글 제목인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오역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것이죠. 코엔 형제의 의도 역시 '(이놈의 미국이라는 나라는)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일 테니까요. 늘 필요 이상의 무기와 폭력이 상존하고, 지배계급은 공포를 조장해 민중을 통제한다...는 것은 반드시 '화씨 911'이 아니더라도 미국의 진보진영이 갖고 있는 미국관에 반드시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게다가 세상의 변화는 따라기기에만도 급급한 현대 사회, 노인의 지혜라는 것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죠. 제목은 이런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렇게 되어 버린 미국이라는 나라를 한 늙은 보안관이 탄식하며 바라보는 영화입니다. 박진감 넘치는 추격전이 영화적인 재미를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코엔 형제는 이 영화를 그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아무튼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이 아닌 나라에 사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럼 대체 '노인을 위한 나라'라는게 어디엔들 있단 말입니까.
이런 마무리가 일반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을 가능성은 0에 가깝습니다만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격찬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실 분들에게 위안을 드리지만, 조쉬 브롤린과 하비에르 바뎀이 펼치는 대결만으로도 볼 거리는 충분합니다. 아마도 다 보고 나면 올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바뎀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건 사기라는 데 동의하게 될 겁니다.
p.s.1. 중간에 안톤이 고속도로에서 운전자를 죽이고, 방의 자물통을 날리는 데 사용하는 무기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제작진의 설명에 따르면 도축용의 볼트 건(Bolt Gun)이라고 합니다. 소나 말을 잡을 때 이마에 대해 한방씩 날려 뇌에 구멍을 내 주는 무기라는군요.
p.s.2. 영화의 두 축인 조쉬 브롤린과 하비에르 바뎀은 모두 미녀 파트너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죠. 브롤린은 이 게시판을 자주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다이언 레인의 남편입니다.
바뎀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미녀 스타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인이죠.
두 사람은 왕년의 문제작 '하몽 하몽'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이 영화에서 바뎀은 크루즈를 유혹하기 위해 고용되었다가 거의 모든 여성 캐릭터와 베드신을 갖는 투우사 지망생 역을 맡았죠.
물론 그때보다는 많이 망가졌지만 절대 살인마 안톤의 외모는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바뎀은 이렇죠.
아무튼 오스카를 받기 위해서라면 이 얼굴을
이렇게 만든다 해도 뭐 그리 속상할 건 없을 겁니다.
'영상을 훑었다가 > 영화를 봤다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리우드, 뒤늦게 테이큰을 인정하다 (23) | 2009.02.08 |
---|---|
아이언 맨, 제2의 트랜스포머가 될 듯 (13) | 2009.01.13 |
무방비도시, 구멍난 연출 (12) | 2008.11.21 |
추격자,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 (10) | 2008.11.21 |
세븐 데이즈, 기대 이상의 성과 (14) | 2008.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