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청년(?)의 얼굴만 봐도 이 분이 누군지 모를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요즘 멜로 연기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올해로 연기 52년째를 맞는 대배우 이순재씨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분이 중년 이전에 했던 대표적인 역할을 꼽으라면 쉽게 꼽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
나이가 안 되는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이 분과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도 선뜻 어느 한 작품을 꼽지 못하더군요. 물론 히트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이 분의 역정을 다 설명하기엔 너무 짧은 글입니다. 한 단면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안방을 설레게 한 73세의 키스신
황혼 커플 연기로 최고 인기 누리는 이순재
| 제79호 | 20080913 입력
배우 이순재(73)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의 이력을 제대로 따지려면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1992년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통해 한때 한국적 아버지의 대표상으로 자리잡고, 그 이미지를 통해 국회의원을 역임했다는 것만으로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스타성은 21세기에 비로소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 국민이 대상이란 점이 특이하다. 2006년 MBCTV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과 2007년의 MBCTV 사극 ‘이산’, 그리고 2008년의 KBS-2TV 주말연속극 ‘엄마가 뿔났다’에 이르는 잇따른 세 편의 히트작으로 세대 구분 없는 지지를 받고 있다. 50년에 이르는 그의 연기 역정에서 가장 빛났던 ‘대발이 아버지’ 시대를 능가하는 인기다.
안방극장 최고의 화제작인 ‘엄마가 뿔났다’의 인기에 불을 붙인 것이 장미희의 항복과 김혜자의 가출이었다면, 현재 이 드라마 최고의 화제는 이순재-전양자가 연기하는 황혼 커플의 아기자기한 멜로 연기. 지난 7일 두 사람의 키스신이 방송되면서 이 드라마는 40%에 육박하는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현재 이순재의 인기에 있어 특이한 점은 ‘나이 들어 인기를 얻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전에도 ‘노역 스타’라는 장르는 분명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노역 배우들은 어느 정도 일정한 캐릭터를 유지하기 마련이다.
1996년 100세를 일기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리며 활약했던 미국의 배우 조지 번스를 기억할 때 많은 사람은 굵직한 시가와 심술궂은 표정, 그리고 촌철살인의 유머를 기억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노역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김희갑이나 황정순을 떠올려도 작품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않는 고유의 캐릭터를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이순재를 한두 가지의 이미지로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조지 번스가 누구야, 하시는 분들을 위한 이미지. 왼쪽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시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대신 오른쪽 모습은 너무나 유명하죠. 캐리캐처로 옮겨 놓아도 똑같다는 조지 번스 스타일입니다.)
최근 히트작들만 훑어봐도 그렇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사춘기 소년처럼 들떠 하는 충복과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야동순재’ 이 원장은 한국 TV에서 유례를 볼 수 없던 독특한 캐릭터들이다. ‘이산’의 영조는 상당히 전형적인 왕 역할이라 쳐도 70대 노배우가 짧은 기간 사이 이처럼 다양한 변신을 하고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10일 처음 방송된 MBCTV ‘베토벤 바이러스’의 ‘4차원’ 노악사 역할 또한 위의 세 역할과 공유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웬만하면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특징은 52년간 걸어 온 성격파 배우로서의 길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고-서울대(철학과) 출신인 이순재의 데뷔작은 흔히 62년 KBS TV의 개국 기념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자신의 출발점을 56년의 연극 ‘지평선 너머’로 친다. 전쟁 통에 사라진 서울대 연극부를 재건한 것도 그의 공로로 꼽힌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순재의 출연작을 검색하면 66년의 데뷔작 ‘초연’ 이후 극장용 영화만 178편이 나온다. 주연작도 꽤 있지만 이순재는 본질적으로 조연이나 상대역을 맡았을 때 빛을 발하는 배우였다. 당대의 꽃미남 스타들인 신성일이나 남궁원에 비견할 만한 스타덤을 누린 적은 없었다. 특유의 탁성(濁聲)이나 작은 키가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에 제약이 된 부분도 있고, 날카로운 눈매는 악역 전문, 특히 보스 역할이 어울리는 배우로 그를 특화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성실함 하나로 ‘배우와 결혼하면 굶어 죽는다’고 공공연히 얘기되던 시절을 이겨냈다. ‘막차로 온 손님들’(67), ‘분례기’(71), ‘토지’(74) 등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은 이순재는 76년 작 ‘집념’에서 명의 허준 역할을 맡아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중년 이후의 화려한 스타덤을 예고하게 된다. 82년 드라마 ‘풍운’에서 흥선대원군 역할을 맡은 이후엔 주로 중년의 강직한 가장 역할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지금도 주말마다 자신이 지도하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학생들과 함께 고전 희곡을 놓고 벌이는 워크숍이 ‘삶의 활력소’라고 말하는 노장 배우. ‘얼짱’도 ‘몸짱’도, 한때 잘나가던 청춘 스타도 아니었지만 결국은 누구도 넘보기 힘든 만년의 스타덤을 쌓아 올렸다는 점만으로도 한국 연예사에서 그의 위치는 공고하기만 하다. (끝)
'엄마가 뿔났다'에서 문제의 그 키스신이 방송된 다음날, "대체 마지막으로 키스신을 해 보신게 언제냐"고 후배를 시켜 여쭤보게 했습니다. "아, 왕년엔 많이 했지!"라는 대답이더군요. 그런데 그 마지막이 무려 40년 전, 1967년 '막차로 온 손님들'에서의 키스신이라는 겁니다.
위 사진은 1969년작 '춘원 이광수'에서 젊은 이광수 역을 맡았을 때의 모습이고 상대는 당시 최고로 막 올라설 무렵의 남정임입니다. 그러니까 저 포즈에서도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는 뜻이군요.^
50년간 영화만 거의 200편. 분주하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반까지는 1년에 7-8편에도 출연했던 경력에 비해(물론 당시엔 너나 할것 없이 이 정도를 찍었습니다), 당시의 회고담은 참 어처구니없는 것이 많습니다.
사귀던 애인(물론 결혼 전 얘깁니다)의 가족이 "아나운서인줄 알고 교제를 허락했는데, 배우라니 굶어죽는 것 아니냐"고 사이를 반대했다는 얘기, 결혼 후에도 생활고 때문에 만두집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얘기, 그 만두집에도 '배우가 한다'고 소문이 나면 각다귀들이 몰려들까봐 아예 가게 근처에 얼씬도 못 했다는 얘기 등등.
이순재씨가 요즘 배우들에게 가장 불만을 갖고 있는 부분은 역시 '기본기 부족'입니다. 1962년, 한국에도 TV가 생겼을 때 모든 드라마는 생방송이었습니다. 당연히 시간이 1분 넘쳐도 안 되고, 모자라도 안 됐던 거죠.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투씨'에서 생방송으로 시트콤을 진행하는 모습이 나오곤 했는데, 아무튼 배우들이 기본적으로 연기가 받쳐 주지 않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아, 더욱 코믹한 건 당시에는 CF도 모두 생방송이었다는군요. 드라마가 끝나고 카메라가 옆으로 돌아가면 그 자리에 상품 선전대가 차려져 있고, 배우들이 그 자리에서 광고 멘트를 읽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요즘의 홈쇼핑 광고처럼 했다는 거죠.
아무튼 이런 '생방송 시대'를 살아온 분들인 만큼 대본도 숙지가 안 되는 젊은 배우들과 함께 일하는게 불만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이런 '선생님 급' 배우 중에서 젊은 배우들이 가장 겁내는 사람은 박근형씹니다.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야단을 치기 때문이죠. 대신 배우는 것도 많기 때문에 존경도 받습니다. '자기 배우'를 크게 키우고 싶어 하는 매니저들은 일부러 박근형씨와 같은 드라마에 집어 넣어 '교육'을 받게 하기도 하죠.
박근형씨가 이렇듯 엄한 학생주임 스타일이라면 이순재씨는 조용히 한마디씩 툭툭 던져서 잘못을 바로잡는 교장 선생님 스타일이라는군요. 하긴 김태희를 보고 "요즘 서울대는 얼굴 보고 뽑냐?"고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분들 중 하나이기도 하죠.
최근 시작한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 또 하나의 희한한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평소엔 너무도 조용하고 깔끔한 노인이다가 갑자기 흥분하면 우유 팩을 발로 밟아 터뜨리기도 하는, 살짝 다중인격 양상을 보이는 오보에 연주자죠.
한국 시청자들이 이렇게 노역 배우에게 관심을 갖게 한 것도 이순재씨의 공로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쪼록 오래 오래 건강하셔서 더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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