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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너무나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딱 한마디만 하라면,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은 대재난이란 말을 해야겠군요. 한마디 더 하라면,'삼국지-용의 부활' 제작진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적벽대전'을 보고 나니 그만하면 '삼국지-용의 부활'은 걸작이라고 불러도 좋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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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을 기다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저도 그중 하납니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불안한 전조가 비치긴 했습니다. 기사 인용입니다.

'그래서 제작진은 <적벽>이 무협판타지가 아니라 좀더 사실적인 역사극이라는 걸 누누이 강조한다. 특히 오우삼은 “<삼국지>보다는 <삼국사기>를 주로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극적으로 왜곡된 캐릭터와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좀더 적확하게 고증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굴지의 영화전문지 기사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뭔가 찜찜합니다. '삼국사기'? '후한서'도 아니고, 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아니고, '삼국사기'? 설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아니겠지요? 중국 사서에 '삼국사기'라는 책이 있다는 얘기는 도무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 영화사 쇼박스가 제작에 참여하는 바람에 한국 역사책을 참고했다는 뜻일까요?

아무튼 삼국사기건 뭐건 정말 정사를 참고해 고증에 충실했다는 뜻일 것 같은데, 문제는 만들어 놓은 영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고증에 충실했느냐가 좋은 영화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일단 그 부분에선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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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 조조(장풍의)는 헌제를 협박, 유비와 손권의 토벌을 허락받고 대군을 움직입니다. 유비는 백성들을 다 데리고 가느라 박살이 나고, 조운(호군)은 아두를 구합니다. 제갈양(금성무)은 손권(장진)을 설득해 함께 조조에 대항하려 합니다. 손권을 만난 제갈양은 그 하나만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님을 깨닫고 적벽에 주둔한 주유(양조위)를 설득하러 갑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의기투합, 조조를 무찌르기 위해 공동 전선을 폅니다.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 (赤壁: Red Cliff, 2008)'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절정을 이루는 적벽대전 전후의 이야기를 다룬 오우삼 감독의 4시간 짜리 대작의 앞부분입니다. 일단 절반은 북경 올림픽 전에 개봉하고, 나머지 절반은 연말쯤 개봉할 예정입니다. 당연히 진짜 적벽대전의 화공 신은 후반부에 있고, 전반부는 대륙의 영웅들이 어떻게 결전을 준비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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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행히도, 앞부분의 '적벽대전'에서는 전혀 박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일단 소설과 영화는 결코 작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오나라의 군웅들을 압박하는 제갈양의 현하 달변은 1분 정도로 압축돼 버렸습니다. 제갈양 혼자 오나라 군중에 머물지도 않고, 아예 유비와 손권, 주유가 연합 사령부를 만들고 함께 작전을 의논하고 군사훈련도 함께 합니다. 감녕과 조운이 친한 사이가 될 정도죠. 박진감 넘치는 소설 속의 사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주유와 제갈양은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관객들을 졸음에 빠뜨립니다.

'삼국사기'(?)를 참고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고 소설과 벗어나 정사에 충실한 것도 아닙니다. 도입부에서 조조가 유비와 손권의 정벌을 허락받는 장면부터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조조는 당시에 유비와 손권을 정벌하러 길을 나선게 아니었죠. 유표를 정벌하러 갔다가 형주가 의외로 쉽게 떨어지자 그 길로 동오 정벌에 나선 겁니다. 게다가 조조의 군대가 80만이라는 건 소설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으로 저지른 뻥의 결과죠.

정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이 어정쩡한 대본은 오우삼 본인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특히 삼국지연의든 정사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유비-손권 연합군의 합동 군사훈련 이라니, 마치 영화 '젠틀맨 리그'를 보는 듯 합니다. 삼국지를 읽은 초등학생의 상상을 대본으로 옮겨놓은 거라고나 할까요.

사실 이 부분을 보다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결국은 적이 될 운명이지만 서로 끌리는 두 인물, 제갈양과 주유는 왠지 '첩혈쌍웅'의 주윤발과 이수현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조조를 응징하기 위해 서로 씩 웃으며 협력하는 영웅들은 어딘가 '영웅본색 2'의 다시 만난 삼총사를 보는 듯 합니다. 어쨌든 이런 설정은 기존의 삼국지와 썩 잘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15세 이하용 삼국지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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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이 이 수준이니 천하의 명배우가 온 들 어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주유 역의 양조위와 제갈양 역의 금성무를 비롯해 도대체 이 대본으로는 캐릭터가 그려지질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나마 사람처럼 보이는 건 조조 역의 장풍의와 손권 역의 장진, 그리고 손상향 역의 조미 정도입니다.

미스캐스팅의 냄새도 짙습니다. 아마도 감독의 의도는 진짜 주인공을 주유로 놓고 있는 것 같은데 양조위는 이 역할에서 그만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상향 역의 조미는 '남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상무 공주'는 커녕 천방지축 날뛰는 말괄량이 '황제의 딸' 연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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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 손상향, 아래가 유비...)

뭐 딱이 나쁜 건 아니지만 유비와 짝을 이룰 일이 걱정스럽습니다. 유비 역에 뭔가 있어 보이는 미중년 배우가 나섰더라면(...주윤발?) 모를까, 정말 지금의 유비로는 너무 심각한 아버지와 딸 구도밖에 안 그려집니다.

그럼 액션은 어떨까요.

일단 개인전은 게임 '진 삼국무쌍'의 실사 화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관우와 장비, 조운은 '소설 원작' 대로 수백명의 적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게임 화면같은 전투를 벌입니다. 물론 말을 타지 않고 땅 위에서 말입니다. 너무 비슷한 전투가 계속 펼쳐지는 바람에 나중엔 지루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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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전도 안습 수준입니다. 동양식의 전쟁 묘사라면 지금까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비길 만한 것이 없었다는게 중론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들면서 오우삼은 두 편의 할리우드 에픽에서 따 온 장면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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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되는 방패는 킹 비더 감독의 1959년작 '솔로몬과 시바'에서 나온 것이고, 팔괘진에 갇힌 조조 기병대의 모습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1970년작 '워털루'에서 영국 보병대의 방진에 갇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폴레옹 기병대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특히 전장 전체를 조망하며 내려오는 부감 촬영은 같은 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죠.

모방은 했으되, 기본적으로 전쟁이라는 것을 연구하지 않은 태가 역력합니다. 조조군의 마지막 무기(?)인 방패작전 같은 것이 그렇죠.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만한 병력을 진영 속에 가둬 뒀으면 화살 몇 대로 끝날 일을 갖고 장난감 쇼를 합니다.

오우삼이 '란'이나 '가게무샤', 혹은 가도카와 하루키의 '하늘과 땅과' 등을 한번이라도 봤다면 이런 유치한 장난은 하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명장'의 전투 장면도 이 영화보다는 훨씬 더 리얼하게 느껴지고, 무려 19년전 영화인 정소동의 '진용'의 기마 전투 신도 이 영화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오우삼과 연출진이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무술감독으로 개인간의 액션에 강한 원규보다 집단 액션의 경험이 풍부한 정소동의 도움을 받았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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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 이후, '평이하고 지루하다'는 평과 '만화같고 재미있다'는 평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좋다는 의견도 상당수 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너무 실망이 커서인지 연말 개봉 예정인 '적벽대전' 후편을 보게 될지가 의문입니다. 욕을 하더라도 봐야 할지, 아니면 그나마 안 보는게 오우삼에 대한 지금까지의 추억을 보존할 수 있는 일이 될지 말입니다.


p.s. 삼국지를 읽지 않은 초등학생들에게는 좋은 오락영화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선택일 수 있겠군요. 오우삼에게 정통 대하 사극을 기대한게 잘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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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이런 장면은 후편에 나올 모양입니다. 삼국지 팬들은 보는 즉시 어떤 장면인지 아시겠죠. 참고로 왼쪽 인물은 노숙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이해하시는 분들은 개봉을 앞둔 '적벽대전'을 보시면 실망을 피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p.s.3. 오우삼의 영화답게 비둘기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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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전, 일련의 고수들이 천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살수단(암살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천년 동안 역사 뒤에서 암약하며 세상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조직의 핵심이었던 한 암살자가 그들의 독선에 의심을 품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때부터 중원은 혈겁에 휩싸이게 된다....-

네. 아주 무협지적인 구상이죠. 그리고 실제로, 영화 '원티드'는 너무도 전형적인 무협지입니다. 단지 칼이나 주먹 대신 총을 주로(칼을 안 쓰는 건 아닙니다) 쓴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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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의 주인공 웨슬리(제임스 매커보이)는 직장에서 뚱뚱한 여자 상사에게 아무리 '갈굼'을 당해도, 여자친구가 직장 동료와 바람을 피워도 아뭇소리 하지 못하는 천하의 찌질남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여신같은 폭스(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나고, 그의 일상은 전쟁터가 되어 버립니다.

어찌어찌하다 자신에게 천하제일살수(죄송합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보니...)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웨슬리는 그때부터 무공을 익혀 정의 실현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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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쓰는 무협지적 영상의 역사는 아마도 허관걸 주연의 '루안살성'에서 시작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마크 다카스코스의 '크라잉 프리맨'은 이 영화의 할리우드 버전으로 두 작품 모두 일본 만화 '크라잉 프리맨'을 원작으로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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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영화 이후 사라진 것 같았던 총 쓰는 무협영화는 총과 무공을 조화시키지는 않았던 '매트릭스'를 슬쩍 비껴가 '이퀼리브리엄'에서 꽃을 피웁니다. 심지어 건 카타(Gun Kata)라는 마니아적인 용어도 남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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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에서 총을 사용한 무공은 '이퀼리브리엄'을 넘어섭니다. '뻥 중의 개뻥'으로 꼽힐 만한 총알 곡선으로 쏘아 보내기를 비롯해 수 킬로 밖에서 저격하기, 달리는 전철에서 쏘기 등 만화 '크라잉 프리맨'이나 '고르고 13'에서나 보여졌던 놀라운 비기들이 속속 드러나 관객을 신나게 합니다.

여기에 그가 최강의 킬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쌓는 수련, 찌질이에서 진짜 남자로 거듭나는 설정, 그를 단련시키는 다양한 고수들의 등장 등 너무도 무협지적인 도구들이 매우 완성도 높게 구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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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시도를 무협의 확장으로 생각하며 유쾌하게 받아들일 관객들에겐 '원티드'는 매우 신선하고 즐거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관객들에겐 허튼 소리와 뻥으로 점철된 황당무계한 영화로 보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화는 일단 '남는 것(혹은 교훈)이 있어야 한다'는 상당수의 한국 관객들에겐 이런 영화를 받아들일 공간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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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에는 무거워지려면 얼마든지 무거워질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른바 운명의 베틀(운명의 여신들이 짜는 베에 의해 인류와 개인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신화는 그리스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습니다)이 결정하는 사람을 리더가 지목하면 휘하의 킬러들이 그 사람을 척살한다는 것은 상당히 은유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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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영화에서는 직설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있지만, 베틀이 짠 베 위에서 2진수로 암호화 된 한 사람의 이름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넓은 베 위에서 올 수를 세어 특정인의 이름이 나타난 부분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건 애당초, 처음부터 그 베를 해석하는 사람이 죽일 사람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가 사적인 정의 구현에 나선다는 스토리는 수없이 많은 영화에 등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중의 어떤 주인공도 웨슬리처럼 "내가 죽이려는 사람이 진짜 죄인인지 어떻게 알아?"라는 고민을 단 3분만에 해치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 그따위 고민으로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않겠다'는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의 스타일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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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7세. 세계 문화의 변방 중 변방인 카자흐스탄 출신의 감독이, 그것도 중앙 아시아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티무르'라는 이름의 감독이 이렇게 할리우드의 메인스트림에 뛰어들어 세계 액션 영화의 조류에 몸을 싣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이 감독은 러시아 영화인 2004년작 '나이트 워치'와 2006년작 '데이 워치'를 성공시킨 결과 '원티드'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이른바 만화적인 상상력에서는 기존의 할리우드 감독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두번째 할리우드 영화가 은근히 기대됩니다.


p.s. 물론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오래 오래 여운이 남는' 영화를 원하는 분들은 절대 보시면 안되는 영화입니다. '이퀼리브리엄'이나 '콘스탄틴'에 열광하신 분들이라면 아마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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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어느 포스터를 봐도 안젤리나 졸리의 사진이 더 크게 나온다는 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졸리가 이제까지의 출연작 중 가장 매력적으로 나오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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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인 21은 두 가지 숫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블랙잭을 상징하는 카드의 합계, 또 하나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나이입니다.

영화 '21'이 흥미로운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딱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플롯에 있습니다. 'MIT에 다니는 수학 천재들이 라스베가스 카지노의 블랙잭에 도전, 수백만달러를 딴 이야기'라는 부분이죠.

특히 'MIT 수학천재들의 라스베가스 무너뜨리기(Bring down the house)'라는 논픽션 원작의 존재는 더욱 흥미를 끕니다. 물론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 존재하는 MIT 블랙잭 팀 소속 멤버들을 살짝 변형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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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졸업반의 가난한 수재 벤(짐 스터지스)은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 합격하고도 총 30만달러에 달하는 학비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그런 그에게 우연히 미키 로사 교수(케빈 스페이시)가 놀라운 제안을 해 옵니다.

뛰어난 머리를 이용한 카드 카운팅으로 라스베가스에서 돈을 긁는 팀이 존재하고, 그 팀에 결원이 생겼으니 들어오라는 거죠. 심지어 짝사랑하던 여학생 질(케이트 보스워스)이 그 팀의 멤버이기도 합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벤은 결국 "딱 학비만 따자"는 생각으로 팀에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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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도 성공적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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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도박으로 딴 돈에 그리 관대하지 않습니다. 하버드 메디컬 스쿨의 장학금이 장애인에게 유리하듯, 도박으로 딴 돈을 가져갈 수 있는 주인공은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 형제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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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는 할리우드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인 이른바 '수재 영화'와 TV 시리즈 '라스베가스' 사이에서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습니다. 일단 수재 영화 쪽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수재들의 세계를 그리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일단 몬티 홀 문제. 처음 강의실에서 미키 교수는 벤에게 3개의 문을 가진 퀴즈 진행자 문제를 내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는 설정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연자가 A, B, C라는 세 문 중 하나를 선택해 자동차가 나오면 그 자동차를 선물로 주는 퀴즈 쇼가 있다. 3개의 문중 하나에는 자동차가 있지만 나머지 두 문 뒤에는 염소가 있다. 출연자가 문 A를 열자 진행자는 선택되지 않은 문 두 개(B, C) 중 하나를 열어 염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혹시 본래의 선택을 바꾸겠느냐"고 물어본다. 이때 출연자에게는 선택을 바꾸는 것이 유리할까, 본래의 선택을 그냥 유지하는게 유리할까?'


자,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이렇습니다. '남은 문은 2개. 그럼 뭘 고르나 아무 상관이 없잖아.' 하지만 확률과 통계란 상식과 가끔 차이를 보여줍니다. 통계학적으로 출연자가 선택을 바꾸는 것이 본래의 선택을 유지하는 것에 비해 2배 더 높은 당첨 확률을 갖고 있습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그냥 이렇게 이해하는게 좋습니다. 당초 3개의 문이 있을 때 출연자는 1/3의 확률로 선택을 합니다. 즉 그가 고른 문 뒤에 차가 있을 확률이 1/3, 고르지 않은 두 문중 하나에 차가 있을 확률이 2/3입니다. 그런데 사회자는 나머지 두 문 중 하나를 열어주면서 2/3의 확률이 있는 쪽으로 옮겨 탈 수 있는 기회를 준 겁니다. 따라서 당연히 가야 하죠.

물론 무슨 소리냐고 발끈하실 분이 있을 거니다. 지금까지 저의 경험으로는,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도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분은 못 알아듣더군요. 다만 계산은 정확하고, 실제로 충분히 큰 횟수의 테스트를 해 봐도 같은 스코어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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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해 두고 싶은 이야기는 이 몬티 홀 문제(이 문제의 이름입니다)를 MIT에서 수학을 전공하는 4학년 학생이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겁니다.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수학 전공 학부생들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문제기 때문이죠. 또 웬만큼 퍼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한두번은 들어봤을 문젭니다.

이 문제로 미키 교수가 벤의 능력을 알아본다는 건, 대학 영문과 4학년 전공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햄릿의 결말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고 그걸 맞춘 학생을 "정말 대단한 녀석인걸!"이라고 감탄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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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카드 카운팅이란 가능할까요? 물론 레인맨이 아니라도 가능합니다. 블랙잭을 아는 분들이라면 당여한 얘기지만, 블랙적에서 정말 중요한 건 내가 받을 다음 한 장의 카드가 그림(10 또는 왕족)일까, 또는 로 넘버(특히 2, 3, 4, 5, 6)일까 하는 것이죠.

가장 고전적인 카운팅은 그림 카드에게 +1, 로 넘버에는 -1의 값을 주고 덧셈 뺄셈을 하는 겁니다. 나머지 카드는 당연히 0이죠. 카드 한 벌은 13곱히기 4로 52매. 카드가 모두 오픈되면 숫자는 0이 됩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카드 32매가 사용됐고 카운트가 +10이라면, 나머지 20장의 카드에서 -10이 나와야 합니다. 0값의 카드가 골고루 사용됐다면 이제부터 남은 카드 중에는 절대적으로 로 넘버가 많다는 뜻이 되죠.

물론 이건 카드를 단 한벌 사용할 때의 얘깁니다. 당연히 카지노 측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최소 4벌, 혹은 6벌(six deck)의 카드를 사용하죠. 그것도 커트를 해서 일정 부분만 사용합니다. 모두 카운팅을 어렵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정교한 카드 카운팅 기법들이 개발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설의 MIT 팀 멤버 중 몇 사람은 아예 blackjakinstitute.com이란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 카드 카운팅을 가르치는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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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영화 '21'은 수재의 세계도, 블랙잭의 세계도, 더구나 카드 카운팅의 세계도 어느 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평작입니다.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초보적인 설교 또한 유치할 뿐입니다.

그저 관심이 가는 건 한때 올란도 블룸의 애인으로 유명했던(그래서 그가 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케이트 보스워스가 예쁘게 나온다는 정도일까요?

거기에 관심 없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기보다는 원작을 읽거나, 블랙잭에 대한 책을 사서 보시거나, 아니면 드라마 '라스베가스' 시리즈를 구해 보시거나 하기를 권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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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한국계 배우 아론 유가 등장인물 중 '초이'라는 한국인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버드 메디컬 학장도 한국인 유학생을 거론하죠. 아이비리그에 한국 학생들이 많긴 많은가봅니다.

게다가 세계적인 프로 갬블러 중에는 또 동양인이 많죠. 사람들에 따르면 영화의 주인공 벤 캠블의 캐릭터는 한때 MIT 팀의 리더였던 제프 마(당연히 중국계겠죠)에서 따온 거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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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카드 카운팅은 미국 어디에서도 합법입니다. 다만 카지노 업주들은 자신들의 영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정도로 베팅이 큰 카드 카운터들은 적발해서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랍니다.

이건 무슨 규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어떤 개인사업자도 사업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손님을 내쫓을 수 있다는 원칙에 준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10년 목욕 안 한 사람은 공중목욕탕에서 안 받는게 당연하다는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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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중이 터졌습니다. 한국 영화의 위기, 위기 할때 영화계가 "그래도 '강철중' 만큼은..."하는 기대를 걸었고, 또 반드시 터져야만 하는 영화였죠. 강우석 감독이나, 그의 제작-투자사 시네마서비스 입장에서도 그랬고 한국 영화계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설마 이건..." 했던 작품입니다. 그만큼 절박했다고 할 수 있죠. 사정을 보시면 이해가 갑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에서 제작 혹은 투자한 작품들은 이랬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궁녀' '아들', '황진이', '싸움', '신기전', '모던 보이', '뜨거운 것이 좋아',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그리고 '밀양'과 강 감독이 직접 연출하는 '강철중'이었죠.

이중 '아들', '황진이',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싸움',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뜨거운 것이 좋아'가 줄지어 흥행에서 쓴 맛을 봤고 '모던 보이'와 '신기전'은 이렇다할 이유 없이 개봉이 한없이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결과물에 대해서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상태입니다. '밀양'과 '궁녀'가 간신히 손해를 안 본 정도라면 더 할 말이 없죠.

그러니 '강철중'이 무너졌으면 아예 시네마서비스가 문을 닫거나 하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던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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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강우석 감독이 너무도 자신만만했던 '한반도'에서 '실미도'의 신화 재현에 실패한 터라 - 이 영화는 3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긴 했지만 누구도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를 꺼리는 아주 드문 사례입니다. 초반 '밀어붙이기'를 통해 관객 동원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동시에 한국 영화에 대한 신뢰도를 그만큼 떨어뜨린 영화였죠 - 가장 필요한 순간에 역시 가장 자신있는 무기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눈길이 갑니다.

뭐니뭐니해도 강우석 감독에게 사람들이 바라는 건 역시 코미디죠. 그 중에서도 역시 경찰 코미디, '투캅스' 시리즈와 '공공의 적' 시리즈가 제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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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별다른 설명도 필요없습니다. 2002년 '공공의 적'에 나온 강철중 형사와 강동경찰서 강력반이 그대로 재현되는데 단지 이번의 나쁜놈은 대 조직의 보스 이원술(정재영)입니다.

거성그룹이라는 회사를 차려놓고 회장이 된 원술은 고교생 싸움패들을 특채해 조직원으로 키우고, 겁없는 아이들을 속칭 '칼받이'로 이용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형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사표를 던지려던 강철중은 조직들의 극악한 행태에 분개해 사건 현장으로 뛰어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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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플롯이나 스토리에 큰 의미를 두게 되지는 않습니다. 처음 설정 때, 대단히 치밀하고 악랄한 두목으로 설정됐던 이원술이 어찌 보면 너무 간단히 무너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 영화의 강철중은 별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칼까지 맞는데도 별 고생 아니라면 좀 미안한가요?) 아무튼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사소한 스토리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의미를 둔 게 아니라 이미 관객들의 애정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강철중이란 매력적인 캐릭터를 이용해 얼마나 많은 웃음을 만들어내느냐에 집중하고 있고,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특히 강철중의 딸, 강미미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강우석 감독은 관객들이 배를 쥐고 웃게 하는 동안에도 어른답게 최소한의 '할 얘기'까지 빠뜨리지는 않습니다. 경찰보다 조폭이 더 폼난다고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아이들을 이용해 폭력 도구로 사용하는 조폭 두목들에게 '누군가는 그러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아무튼 설경구는 강철중 역할을 통해 뭐가 연기고 뭐가 연기가 아닌지를 헷갈리게 하는 명연기를 다시 한번 보여줬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정재영은 '할만큼 했다' 정도가 적절한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정재영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들, '아는 여자'나 '바르게 살자', '귀여워' 를 생각하면, 그 이상의 것 - 예를 들자면 다양한 감정이 담긴 표정연기 - 을 요구하는 것도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죠. 진짜 건달 연기라면 '귀여워'에서 매우 훌륭하게 해 냈지만 이번 연기는 그런 원조 건달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고... 성과라면 강철중이 전화를 안 받는 장면에서 진짜 악당처럼 보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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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과거의 성공적인 조연들을 불러낸 데 대해서 자기복제니 뭐니 하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대체 시리즈 영화의 장점이 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리고 '공공의 적' 하면 강철중 다음엔 역시 치사한 조폭 연기의 달인이신 산수 이문식 선생인데, 당연히 산수를 보는 즐거움을 관객에게 줬어야 정당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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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는 '공공의 적 1-1'이라는 제목으로, 강철중을 검사로 만들었던 '공공의 적 2'를 무시해버리고 다시 '공공의 적'의 공식 속편 자격을 이 영화에 부여하는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탓인지, 각본을 쓴 사람이 장진 감독으로 바뀐 탓인지 강철중은 좀 변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알겠지만 1편의 강철중은 상당히 위험한 캐릭터였죠. 빼돌린 돈이며 훔친 마약 때문에 어지간히 고민도 하고, 교통과로 쫓겨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강철중'에서의 강철중은 거의 슈퍼 히어로 캐릭터입니다. 무슨 짓을 하건 걱정이 안 되는 수준으로 안전한 캐릭터가 되어 버렸죠. 무슨 말이냐면, 1편의 강철중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캐릭터였지만 이제 강철중 형사는 '공공의 적' 시리즈의 언저리 안에서는 절대로 죽지 않을 불사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관객을 안심시키는 캐릭터가 되어 버린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서민 영웅'의 캐릭터를 타고 태어난 터라 매편 죽도록 고생만 하고 별다른 즐거움은 누리지 못할 것 같으니 절로 혀를 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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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강철중'은 몇편이나 만들어지게 될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공공의 적 2'에서의 설경구를 볼 때 어째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켜 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번 영화에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입니다. 이 다음의 '강철중' 영화에 대해서도 일단 설경구의 입장은 '작품이 좋으면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죠.

그렇다면 한 두가지 점만 조심하면 우리는 수시로 '강철중'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연구 부족으로 설경구가 하고 싶을만한 대본을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는 상황, 그리고 두번째는 우리나라가 갑자기 좋은 나라가 되어 더 이상 공공의 적이라고 볼만한 존재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는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써 봤습니다.)

세번째는 이 영화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 설경구가 '공공의 적'의 속성을 띄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건 이 영화의 성격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적'들은 모두 사회적인 강자이면서 악한입니다. 즉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남들보다 편히 잘 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남들을 희생시키려는 사람들이죠. 즉 '잘나고 못된 놈' 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악당들은 고급 양복과 넓은 사무실, 좋은 집과 좋은 외제 차 등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이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잘 살고 잘 나가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방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저 놈들은 뭔가 부정한 짓을 했기 때문에 - 실제로는 별로 나보다 나을 게 없으면서도 - 저렇게 잘 나가는 것'이라는 약간 비뚤어진 시각이죠. 어찌 보면 아주 노골적으로 사회적 편가르기를 시도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약 설경구가 호화 별장을 산다든가, 향정신성 의약품과 관련된 시비를 일으킨다든가, 엄청난 미녀 스타와 염문설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동안 나왔던 '공공의 적'들이 갖고 있던 악덕을 보여준다면, 그는 더 이상 강철중 역을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이건 어찌 보면 설경구라는 배우의 운명일 수도 있겠군요.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모습으로 봐선 이런 건 기우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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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유망주 이한이 김남길(가운데)로 이름을 바꾼 모양이군요. 그럴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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