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종>이라는 새로운 드라마가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이수연 작가의 작품이고 한효주 주지훈이 주인공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작품이 한방에 다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나눠 업로드 된다는 걸 알고 나선 '다 올라오면 봐야겠다'로 태세를 전환했다. 마침 <쇼군>을 추천하시는 분들이 있어 이번 디즈니 멤버십 부활의 타겟을 <쇼군>과 <지배종>으로 잡았다.
(이 OTT 난립의 시대, 그 많은 OTT에 모두 월사금을 바치는 것은 너무 부를 과시하는 일이라는 입장이라, 대부분의 OTT들은 똑 똑 떨어지는 빗물이 고이면 멤버십을 살려 후루룩 마시고, 바닥이 마르면 구독을 끊는 형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업계 종사자분들, 이해하시죠?)
요즘 핫한 바이오 산업을 무대로 하는 드라마라길래 주인공들이 너무나 야근을 많이 해서 <집에 좀> 가라는 드라마인가 잠시 생각했으나(...죄송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정 한국에서 보기 드문 웰메이드 테크노 스릴러였다. 디즈니 플러스를 볼 수 있는 분들이면 지금이라도 꼭 보시길.
(올해 상반기에 드라마 좀 보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다들 '아니 왜 이렇게 볼만한 드라마가 없어요?' 하시던데, 보실게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주제 의식, 전개, 배우들의 연기, 핵심을 찌르는 대사, 다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기에 손색이 없네요.)
시작: 현재에 아주 가까운 미래. 동물의 특정 부위 세포를 대량 증식해 소를 잡지 않고도 꽃등심이며 안심을 실험실에서 배양해 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축산업의 양상이 뿌리부터 흔들린 시대. 그 중심에 한국 기업 BF가 있다. 수백조 가치를 평가받는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 BF 총수 윤자유(한효주)는 과감하게 농업과 축산업을 공장에서 대체하는 것만이 환경 파괴를 막고 인류 문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해군 대위 출신의 경호원 채운(주지훈)은 전직 대통령(전국환)을 불구로 만들고 자신을 퇴역하게 한 의문의 폭발 사건에 대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채운에게, 당시 폭발 현장에 윤자유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BF에 접근해 그 배후에 BF가 있는 것은 아닌지 조사해 볼 것을 지시한다.
한편 BF는 생계 위협을 받는 농어민들의 시위로 여론이 악화되고, 국제적인 사이버 테러리스트 집단에게 해킹을 당해 거액을 요구받는 위기를 맞는다. 총리 선우재(이희준)는 이 상황을 정국 운영에 유리하게 활용하려 하고, 선우재의 아버지이며 재벌 그룹 회장인 선우근(엄효섭)은 윤자유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BF의 지분을 요구한다.
스포일러가 싫은 분들은 대략 여기까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윤자유와 채운은 어찌 어찌 같은 편이 되어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역시 이수연 작가의 팬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누가 정말 같은 편이고 누가 정말 적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의심하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진심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미있다. 얼른들 보셔.
참,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들도 있던데 지배종이란 dominant species, 즉 여러 생명체가 같이 존재하는 하나의 생태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종, 즉 다른 종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종을 말한다. 당연히 지구 생태계의 지배종은 인간인데, 내용상 이 드라마에서 지배종이란 현생 인류보다 한 단계 더 진화했다고 볼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여기까지만.
(스포 경고. 넘어오지 마세요)
<비밀의 숲>에서 거대한 적들에 비해 돈도 없고, 뭔가 힘도 없는 주인공들의 노력이 안타까우셨던 분들이라면 이번엔 좀 편안하게 보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상대인 재벌그룹이나 국무총리만은 못하지만 BF그룹은 기술도 있고, 맨파워도 있다. 최소한 돈이 없어서 뭘 못하는 일은 절대 없다. 경호원도 수십명씩 고용할 수 있다.
비록 이 드라마가 근미래, 아직 이뤄지지 않는 신기술이 적용된 사회상을 그리고 있지만, 혹시나 <그리드> 같은 드라마일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그리드>에 비하면 기술은 그렇게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고, 복잡한 타임슬립 트릭도 없다. 연출 의도인지 가끔씩 시간상의 인과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시청에 방해 되는 요소는 아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역시 <24>나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느낌의 슈퍼 에이전트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드라마라는 점. 국내 드라마 주인공 중에선 이 작품의 주지훈에 비견될만한 캐릭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배신+배신으로 점철되는 악당들의 뿌리를 추격해 가는 과정이 탄탄한 플롯 덕분에 엄청난 몰입감을 준다. 심지어 <존 윅>에나 나올법한 파워 수트, 인공장기 수술의 부작용(?)인 초인적인 힘까지 장착하다니.
윤자유라는 '이상주의자이면서 유능한 이과 출신 경영자'의 역할을 한효주 외에 다른 어떤 여배우가 연기할 수 있었을지도 솔직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 역할은 수시로 매우 인간적인 대학교 서클 회장 언니에서 사람 수십명의 목숨 따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적들과 한치 양보없이 싸워야하는 우리편 대장의 면모를 오가야 하는데, 결코 구현이 쉽지 않을 인물이 한효주 덕분에 매우 설득력있게 그려졌다.
그리고 드라마에 생동감을 주는 것은 역시 막강한 악의 무리들. 엄효섭, 이희준의 화려한 악당 연기는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고, 잘 모르는 배우였던 박지연의 열연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악당들'의 목적이 BF가 갖고 있는 '진짜 무서운 비밀'의 확보에 있었다면, 대체 김신구 교수(김상호)를 굳이 죽여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살려서 핵심 원천 기술을 빼오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활용이 아닌가 하는 대목 처럼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또 후배 경호원은 하필이면 '칼과 불을 막아내는' 파워 수트를 입고 있다가 죽고, 경찰 세 사람을 공중부양시키는 채운의 괴력은 막상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특공대원들과의 1:1 대결 때에는 어디론가 실종되어 버린다는 진행 등도 아쉽다. 가장 중요한 전투 신에서 채운이 좀 더 슈퍼파워를 과시했어야 하는 건 아닐지.
그래도 현 시점에서 가장 시즌2가 기대되는 한국 드라마라면 아무래도 <지배종>을 첫 손가락에 꼽게 된다. 내부 상황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디즈니 플러스의 빠른 결단을 촉구한다.
P.S.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 마케팅 점검 좀 하시죠. 어떻게 구글 검색을 해도 포스터 말고는 검색되는 사진이 이렇게 없을수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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