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마드리드의 둘쨋 날. 여전히 날씨는 흐리고, 동행인은 쇼핑을 원한다. 가난한 여행자의 마음에 그늘이 진다.

 

생전 처음으로 H 브랜드의 매장을 들어가 보고, 스페인을 대표하는 엘 코르테 잉글레스 El Corte Ingles 백화점도 가 보고... 뭐 그런 오전. 국내에서 살 수 없는 청바지를 잔뜩 샀다.

 

(여담이지만 국내 의류 메이커들은 허리 사이즈 34인치가 넘는 사람은 그냥 자루만 만들어 줘도 감사하며 입으라는 태도를 언제 버릴 지 궁금하다. 뚱보들도 디자인이 들어간 옷을 입고 싶다.)

 

 

 

그리고 찾은 곳이 바로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제2의 미술관인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공식 명칭은 국립 아트센터 뮤지엄 레이나 소피아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 꽤 길다. 프라도가 고전 미술 작품의 총 본산이라면 레이나 소피아는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곳이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 파리의 퐁피두 센터와 비교할 만 하다고 할까? 본래 병원이었던 건물을 1986년 개축했고, 설립자인 레이나 소피아 왕비의 이름을 땄다.

 

저 대형 엘리베이터 박스가 붙은 쪽이 정문이라는데 정문은 사실 눈길이 별로 가지 않고...

 

 

 

후문 쪽이 진짜 현대 미술관 답다.

 

 

 

아무 것도 안 써 있는데 분명히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일 것 같은 대형 조형물이 서 있다.

 

나중에 보니 제목이 '붓놀림(Brushstroke)' 이라고. 그렇게 알고 보니 붓처럼 보인다.

 

 

천장과는 또 이런 조화.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 의 식당이 괜찮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제가 한번 먹어 보겠습니다.

 

 

가격이 꽤 괜찮은 편.

 

그리고 비프 스테이크가 express menu에 있다는 점도 꽤 인상적이다.^^

 

 

 

식사와 함께 미술관을. 그리고 휴식을. 아주 좋은 느낌이다.

 

 

 

 

 

많은 분들이 이 미술관을 찾는 이유를 정확하게 안다. 2층 옆에 써 있다. 게르니카 Guernica 라고.

 

 

 

엘리베이터에서 바라본 풍경.

 

 

 

이 미술관도 마찬가지. 사진을 찍지 말라는 표시는 분명히 되어 있으나, 대부분 지역에서 사진을 찍건 말건 별 관심이 없다.

 

형식적으로라도 '사진을 찍지 말라'는 역할을 해야 할 안내원(?) 들은 꽤 많이 배치되어 있다. 하는 역할에 비해 사람이 많이 고용되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사회적 배려라는 느낌이다. 만약 사설 미술관이라면 정말 남아 도는 인력이 많다.

 

아무튼 그 사람들도 딱 한 군데, 게르니카 근처에서는 사진 찍기를 매우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다.

 

 

 

그래도 게르니카가 어떤 식으로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보여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건너편 전시실에서 찍은 장면.

 

저 방 안으로 들어가면 한 벽 가득 게르니카가 펼쳐져 있다.

 

매우 크다. 방 안에서는 어차피 그림 전체를 찍을 각도가 안 나온다.

 

 

 

 

1937년 4월26일. 히틀러의 독일 공군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한 사건이다. 1654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런데 배경을 알고 보면 더 기가 막히다. 당시 스페인과 독일은 전쟁중도 아니었다. 스페인은 내전중이었고, 뒷날 이 폭격은 프랑코가 독일 공군에 요청해 이뤄진 것임이 밝혀졌다. 바스크 인들의 민족주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공격이었다는 얘기다.

 

외국군을 요청해 자국 국민을 학살한 만행에 분노한 피카소는 강렬한 그림을 그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하고 이를 규탄했다. 프랑코가 집권한 이상 이 그림은 스페인에 들어갈 수 없었다. 대신 뉴욕 현대미술관의 간판이 되었다. 프랑코 사후 그림이 돌아올 수 있게 됐을 때에도 스페인의 모든 미술관이 이 작품을 원했고, 경합 끝에 레이나 소피아가 최종 승자가 됐다.

 

 

 

피카소는 이후 이런 그림도 그렸다. '한국에서의 학살'. 6.25 전쟁 중 한국에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 어디 한두번이었을까. 이 그림은 그중에서도 황해도 신천에서 있었던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한다.

 

 

 

전시실은 대략 이런 느낌. 프라도 보다 세련된 느낌이 든다.

 

 

네 방향을 둘러 싼 본래 병원 건물답게 중정 patio 가 있고 가운데 제법 나무가 우거졌다.

 

 

 

인상적인 그림을 발견하긴 했는데 안타깝게도 제목과 작가 이름 적은 메모를 분실.

 

 

 

어디에나 별 관심 없이 학교에서 가잔다고 온 아이들은 구석에 '짱박히기' 신공을 구사한다.

 

 

 

 

 

이번엔 메모를 같이 찍었다. 루치아노 파브로라는 이탈리아 작가.

 

무라노 글래스를 이용한 작품이 매우 인상적이다.

 

 

 

 

반면 존 케이지의 '소리 전시'는 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현대미술도 분명 유행을 탄다. 그리고 '현대'라는 이름으로 1950년대 이후 치러진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서 이제 걸러 낼 것은 냉정하게 걸러 낼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에는 매우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에 와서는 미술관 한 구석의 자리를 차지하고 먼지만 쌓여가는 쓰레기 대접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세월을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을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닐까.

 

 

 

레이나 소피아의 중정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이 애정행각을 펼치고

 

 

누가 봐도 칼더의 작품인 모빌 하나가 무심히 아이들을 내려다 본다.

 

 

엇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알고 보니 호안 미로의 작품.

 

 

 

 

이 얼굴을 희화화 한 느낌이더라니까... 뭐 느낌이 안 오면 말고.

 

 

 

 마드리드의 하늘은 계속 부옇게 흐려 있고,

 

 

어느새 뉘엿 뉘엿 해가 넘어가는 오후. 건너편에 바로 아토차 역이 있다.

 

 

그러고 보니 레이나 소피아 바로 앞이 작은 호텔촌이네.

 

베란다에 나와 레이나 소피아를 보는 것까진 좋은데 바로 역 앞이라 꽤 시끄러울 듯.

 

 

728x90

스페인 여행 둘쨋날. 역시 아침부터 바르셀로나 여행에 나섰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유로자전거나라 투어. 이번엔 도시 곳곳을 누비는 속살 투어다. 특히 전날 밤 투어에서 다녀 본 길들을 낮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끌렸다. 다만 걷는 거리가 이만저만 아닐 것 같아 다소 긴장했다.

 

그런데 정작 집합한 뒤, 카탈루냐 광장 맞은편의 카페로 향한다.

 

 

카페 이름은 4Gats. 4가 Quatro라 콰트로가츠라고 읽는다. 정식 이름은 카탈루냐어로 Els Quatro Gats 다. gat이 영어의 cat이니 네 마리의 고양이란 뜻.

 

이 카페가 바르셀로나에서 무명 시절의 피카소가 늘 죽치고 앉아 시간 때우던 유서깊은 곳이라는 거다. 갈 데가 없어 하루 종일 자리 차지하고 있던 피카소에게 가끔씩 커피도 한잔씩 서비스로 주고 하던 주인장이 사실상 피카소를 키웠다는 이야기. 피카소 뿐만이 아니고 이 카페는 당대 스페인 화단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카페의 주인이 당대의 유명 화가인 라몬 카사스 Ramon Casas 였기 때문. 파리를 늘 동경했던 카사스는 바르셀로나에도 파리의 유명 카페들처럼 예술가들의 보금자리가 될만한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가게(?)를 열었다.

 

아래 그림이 카사스의 유명한 대표작. 자전거 앞자리에 수염난 사람이 카사스 자신, 뒷자리 사람은 콰트로가츠의 공동 경영자인 페레 로메우 Pere Romeu라고 한다.

 

 

여기 있는 그림은 사본이고 진본은 박물관에 있다고.

 

 

 

아무튼 화가들답지 않게 경영 수완도 좋았던지 4Gats는 오늘날까지도 같은 자리에서 성업중이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한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 에도 나왔다. (사실 제목이 주는 기대감과는 달리 이 영화에는 바르셀로나의 풍광이 그닥 많이 소개되지 않는다.)

 

바로 이 아래쪽 자리 중 하나다.

 

 

 

 

아무튼 1897년부터 성업해온 유서깊은 곳 답게 곳곳이 예쁘고 아늑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카소의 일대기(말하자면 피카소와 일곱 여자-아내의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날 바르셀로나 투어의 시작이다.

 

사실 공식적인 미술사를 보면 피카소는 수없이 변신한다. 초기 - 청색시대 - 장밋빛시대 - 아프리칸 - 입체파 - 신고전주의 - 다시 입체파 - 자유분방한 만년으로 계속해서 바뀌는 스타일을 보였다. 막연히 이렇게만 알고 있던 터에 그 변화의 시기마다 피카소의 내면이 흔들릴만한 생활 면에서의 변화가 있었다는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창백하고 우울한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청년기 절친이었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 Carlos Casagemas의 자살, 그리고 1901년 파리로 건너가 느낀 '나는 우물 만 개구리였구나'와 식의 느낌에서 온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다. 피카소가 1881년생이니 이 해 나이 만 스무살. 이 콰트로가츠에서 늘 어울리던 친구, 그리고 파리로 같이 청운의 뜻을 품고 유학간 친구가 모델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하고 자살한 사건 정도면 충분히 인생을 바꿔놨을 만 하다.

 

 

 

이 청색시대를 대표하는 그림 '인생 La Vie'에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카사헤마스라는 설명. 피카소의 친구에 대한 애도가 느껴진다. 아무튼 이 청색시대는 피카소에게 사랑이 찾아오면서 끝난다. 역시 젊은이에겐 사랑이 약. 피카소가 모델 페르난도 올리비에 Fernando Olivier 와 사랑에 빠지면서 우울한 청색은 사라지고 바로 장및빛 시대가 시작된다.

 

 

 

 

피카소는 올리비에의 초상만 100장 이상 그렸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피카소가 여자를 총 몇명 사귀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여성 편력에서 시작점은 늘 이 올리비에다.

 

 

 

 

에바 구엘 Eva Gouel - 피카소의 초기 입체파 시기. 하지만 구엘은 1912년 피카소를 만나고 3년만에 결핵으로 병사한다. 깊이 사랑했다고는 하나, 피카소는 죽기 직전의 그녀를 나몰라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에서 인상적인 이야기: 피카소는 본래 현실적인 성격이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매우 민감했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처음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것은 1907년이었지만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일제히 혹평을 해 대자 장롱 깊숙히 그림을 감춰 두었다가 1916년, 시대가 큐비즘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서자 전시에 내놨다...는 이야기. 이유야 어쨌든 '아비뇽의 처녀들'이 9년 동안 미발표작으로 남아 있었던 건 사실이다.^^) 

 

 

 

올가 코흘로바 Olga Khokhlova - 러시아 발레단의 발레리나. 이 시기 피카소는 화단의 기린아로 칭송받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면서 과도한 실험성에서 도피, 신고전주의의 화풍을 지향한다. 어쨌든 피카소가 실제로 결혼한 첫 여자는 올가.

 

사실 수많은 여자관계에도 불구하고 피카소가 단 두번밖에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바로 올가가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Therese Walter - 1927년, 피카소는 17세의 마리 테레즈를 만난다. 임신중이던 아내 올가는 마리 테레즈도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격분해 이혼을 요구하지만 피카소는 재산 분할을 거부. 따라서 올가는 1955년 죽을 때까지 피카소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유지한다. 

 

아무튼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인 '꿈(위 그림)'의 주인공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마리 테레즈의 얼굴들을 보면 평온함과 행복이 느껴진다. 반면...

 

 

 

 

도라 마르 Dora Maar -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낳을 수 있게 했던 여자라는 평. 사진작가이며 그 스스로도 예술가여서 피카소 자신도 스스로에게 영감을 주는 여자라고 불렀다고 함. 1936~1944년 사이 피카소의 연인이었지만, 자유분방한 피카소에게 너무 집착하다가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피카소의 유명한 '우는 여자(위 그림)' 연작 그림이 바로 신경쇠약으로 피카소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 도라 마르를 모델로 한 것이다.

 

마리 테레즈를 그린 그림과 뒷날의 도라 마르를 그린 그림 만큼 그 여자들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비교도 없을 듯.

 

 

 

 

 

프랑수아즈 질루 Francoise Gilot - 가장 얘깃거리가 많은 여자다. 1943년, 62세의 피카소는 22세의 미술학도 를 만나 깊은 관계에 빠진다. 젊은 연인의 활력 덕분인지 이 시기의 피카소는 '고전 다시 그리기'의 새로운 세계에 진출한다.

 

 

 

이 그림도 지금은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이 그림을 그릴 무렵의 피카소는 자신감이 흘러 넘친 나머지 "야, 내 그림이 벨라스케스 그림보다 훨씬 낫지 않아?"하고 물어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화면 아래쪽의 개 그림에서 피카소의 유머 감각이 돋보인다. 이 개는 1992년, 바로 유명한 이 개의 모델이 된다.)

 

 

 

바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모델인 코비 Cobi. 어딘가에서는 피카소가 키우던 개 이름이 바로 코비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치 않다. 아무튼 잠시 곁길로 이야기가 샜다.

 

 

 

질루는 60이 넘은 피카소의 일방적인 만행과 왕자병,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젊은 여자들과의 스캔들에 피카소와 결별해 버린다. 그리고 나서 다른 식으로 피카소에게 복수를 했다. '피카소와의 삶 Life with Picasso'라는 자서전 풍의 책을 내면서, 한 해변에서 늙은 피카소가 큰 양산을 들고 젊은 자신을 공주처럼 모시고 따라다니는 장면의 사진을 표지로 사용한 것이다. 누가 봐도 '망할 놈의 영감, 어디 엿 좀 먹어 봐라' 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유사 이래 수많은 예술가들은 젊은 연인을 사귀면서 자신의 창의성을 유지했던 것 같다. 피카소 역시 젊은 여성들에게 끝없이 끌렸던 것이 바로 야수와 같은 창작력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다. 질루는 이에 대해 "그 '성스러운 괴물(sacred monster)'에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은 여자는 나 뿐"이라며 피카소의 이기적인 모습을 고발했지만... 그렇게 해서 그 자신이 얻은 건 무엇일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질루가 낳은 딸 팔로마 피카소는 뒷날 티파니의 보석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쳐 피카소의 자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다.

 

 

 

 

자클린 로케 Jacqueline Roque - 유로자전거나라 설명에선 '피카소도 결국 질루 이후 지친 탓인지 만년은 35세의 과부와 보냈다'고 되어 있었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피카소는 1953년 27세의 이혼녀 로케를 처음 만났다. 이 시기, 피카소는 도자기에 새롭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35세의 로케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니까 로케 역시 피카소가 좋아했던 '젊은 여자'였다. 단지 오래 버틴 젊은 여자였을 뿐이다. 운이 따랐다면 피카소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 '공식 아내'인 올가 코흘로바가 1955년 사망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로케는 피카소의 '아내 2호'가 됐다.

 

피카소의 두번째 결혼은 1973년 피카소의 죽음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질루를 비롯해 수많은 과거의 연인들, 피카소의 '씨'를 낳은 엄마들이 재산에 대한 권리를 놓고 도전해 왔고, 로케는 이들과 맞서 '피카소의 아내'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1986년, 로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설명에 따르면 로케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다른 유족들의 접근을 막을 정도로 독점욕이 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피카소 이야기 끝.

 

[물론 저는 미술사 전문가도 아니고, 바르셀로나를 다녀 온 여행객일 뿐입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제가 알고 있던 것들을 덧붙여 쓴 글입니다. 혹시 더 정확한 내용을 아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시면 가차없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피카소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페에서 듣는 느낌도 색달랐다.

 

 

 

바르셀로나 시가 인증한 문화공간으로서의 표석. 바르셀로나 곳곳에 이런 식의 유적 인증 표지가 있다.

 

 

 

"아저씨, 제가 죽치고 있어도 뭐라고 안 해 주셔서 감사해도. 혹시 제가 뭐 해 드릴거라도 없을까요?"

"음. 너 곧잘 그리는 것 같은데 우리 가게 포스터 하나만 그려 봐라."

"포스터요?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로트렉 그림이 마음에 들더라구요."

 

뭐 대략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 피카소가 그린 4Gats의 포스터.

 

이렇게 해서 첫 코스인 4Gats를 나서 피카소 미술관 Museo Picasso 로 간다.

 

 

 

 

 

 

좁다른 고딕 지구의 골목길을 수십번 꺾어져서 도착한 곳이 바로 피카소 미술관. 왜 피카소 미술관인데 철자에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B' 마크를 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바르셀로나 시의 공식 문장인 것 같기도 하다.

 

 

 

 

한 귀족 가문 저택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덕분에 중정이 있는 고운 건물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아름답다. 규모나 소장품의 수가 결코 어마어마하지는 않지만, 위의 이야기 속에서 여자들(!)과 함께 거론된 피카소의 시대별 변천사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잘 정돈된 미술관이었다. 입장료 11유로. 월요일 휴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특히나 이 글을 읽고 갔다면.^^

 

 

 

 

피카소 미술관에서 역시 다시 좁은 골목길을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넓어지면서 빛을 한껏 안고 나타나는 건물이 있다. 바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성당 중 하나인 산타마리아 델 마르 Santa Maria del Mar.

 

1384년 완공될 당시에는 이 성당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찰랑찰랑 하는 해변이었다고 한다. 산타마리아는 잘 알려진대로 뱃사람들을 수호하는 역할.

 

 

 

 

고전적인 사원의 양식미가 잘 살아 있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처럼 전 세계에 단 하나 있는 아름다움과는 좀 다르지만, 아무튼 내부에 들어서면 위압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유럽 대 성당의 느낌에 충실하다.

 

 

 

그렇지만 고전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수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중에는 1992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하나 있다.

 

1992년은 바로 바르셀로나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

 

 

자세히 보면 수많은 이니셜들이 쓰여 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 중 메달리스트들의 이름 철자를 이용해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다. 누가 찾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이 중에 황영조 선수의 이니셜이 있다고 한다.

 

눈 밝은 사람이 좀 찾아 주기 바란다. 내 눈엔 안 보여서.

 

 

 

 

 

7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산타마리아 델 마르는 여전히 예배를 보는 성당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카탈루냐 카톨릭의 상징인 검은 성모상.

 

본래의 검은 성모상은 이슬람 지배 초기, 이교에 대한 박해를 겁내 지하로 숨어들어갔던 시절의 유물이다. 그때도 처음부터 검은 색이었던 것은 아니고, 지하 동굴 성당에서 예배를 보려니 촛불이나 횃불의 그을음 때문에 성모상이 검게 변했다는 것. 그 전통을 기려 이렇게 지상에 나와 있는 성모상에도 검은 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리지널 검은 성모상은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 중 유명한 관광지인 몬세라트에서 볼 수 있다고.

  

 

 

이렇게 해서 오전 일정 끝. 한여름은 아니지만 바르셀로나의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오후엔 난데없이 바르셀로나 뒷골목에서 위대한 한국인과 마주치게 된다. 대체 누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