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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여정 노출'이라는 검색어로 몇주째 인터넷 여론을 이끌고 있던 영화 '후궁: 제왕의 첩'을 조금 빨리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후궁'은 표면적으로 사극이고 조여정이 주인공이라는 점 외에는 '방자전'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영화지만 워낙 마케팅 차원에서 '방자전'이 강조되다 보니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는 같은 감독의 영화로 착각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노파심에서 강조하자면, '방자전',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과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누', '후궁'의 김대승 감독을 혼동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름이 비슷하긴 하군요.)

 

제목에 저렇게 써 놓고 본문은 '조여정이 주인공...'이라고 시작하니 이게 또 뭔 헛소리인가 하실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조여정만 주인공이 아니고, 김동욱, 박지영도 주인공이었다'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느끼실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스타일'이라는 괴물입니다.

 

 

 

 

대략 조선 초기 정도로 추정되는 시대. 왕의 배다른 동생 성원대군(김동욱)은 우연히 사냥길에 나섰다 머물게 된 참판(안석환)의 집에서 참판의 딸 화연(조여정)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대략 화연과 그 집의 아들처럼 대접받는 식객 권유(김민준)가 예사롭지 않은 관계지만 성원대군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원대군의 모친이며 왕의 계모인 대비(박지영)는 대군의 마음을 알면서도 간택령을 내려 화연을 왕의 후궁으로 들이고, 권유와 함께 도망쳤던 화연은 권유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로 아들을 낳아 중전의 자리에 오릅니다.

 

5년 뒤, 병약했던 왕이 급사하고 성원대군이 왕위에 오릅니다. 대비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선왕비 화연과 화연이 낳은 왕자는 권력자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왕이 된 성원은 여전히 화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상황에서 거세당한 권유가 내시가 되어 입궐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이 정도까지의 줄거리는 이미 각종 기사나 TV 영화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훨씬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작진이 굳이 오마주라고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찌기 신성일 윤정희 주연, 신상옥 감독의 '내시(뒷날 이두용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됩니다)'에서 오만석 구혜선 주연의 TV 사극 '왕과 나'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에게는 상당히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양가집 규수와 서로 사랑하던 젊은이가 여인을 궁에 빼앗기고 자신은 남성을 빼앗긴 몸이 되어 내시로 입궁,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는 옛 연인을 바라보는 이야기' 말입니다. 물론 '후궁'은 이 익숙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주체를 '내시'에서 '왕'과 '여자' 족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결말도 크게 달라집니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고전의 극복 혹은 재해석'이라는 강점을 갖고 시작합니다. 보는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깔고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맛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왕의 여자를 사랑한 왕' 부분에서 조금은 무리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성원대군의 욕망이 성취될 가능성 정도는 열어놓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선왕의 여자를 탐한 왕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측천무후도 당태종의 후궁이었지만 그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되었고 광해군도 선조의 후궁이었던 개시 김상궁을 총애했습니다. 하지만 '아들까지 낳은 형의 정궁'을 어찌 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죠. 며느리였다가 시아버지의 여자가 된 양귀비도 최소한 아이는 없었습니다.

 

 

 

 

뭐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도 형의 아내였던 캐서린을 첫 왕비로 맞기도 합니다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형사취수가 일반적이었던 고구려 시대 이후로는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혹시 이런 기록을 보신 분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고려 때만 해도 부계만 다르면 남매끼리도 혼인을 하고, 이모나 삼촌과 결혼한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지만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경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작진의 의도는 아마도 성원의 욕망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일 때 극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것이었겠지만, 반대로 '너무 어처구니없는 욕망'이기 때문에 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왕(성원대군)에 대한 공감이 뚝 떨어지는 부작용도 낳을 수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이쪽 생각입니다). 물론 막장드라마에 익숙한 현대인들이라면 다를 수도 있을 것이고, 결국은 관객 개개인의 취향 문제입니다.

 

 

 

 

굳이 성원대군의 욕망이 아니더라도, 이미 '혈의 누'에서부터 김대승 감독에게 '조선시대라는 배경의 고증과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의 완벽한 균형' 같은 것은 전혀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사극 영화의 예고편 배경음악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쓰일 때부터 짐작됐죠^^)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사소한 딴지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관객들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도입부에 얘기했듯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예사롭지 않은 비주얼입니다. 도저히 조선시대 의상으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의상과 공간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하는 이야기로 일각에서는 왜색 의상설^^까지 나왔다고 합니다만, 이건 좀 무리한 얘기고, 오히려 이 비주얼에서 김대승 감독의 의도가 좀 더 분명해진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 속의 낯선(?) 고전 의상들을 보다 보면 와다 에미('란', '영웅')나 '와호장룡'의 섭금첨(葉錦添, 티미 입)이 만들어 낸 탈국적적 내지는 범 동양적인 고전 세계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특히 섭금첨이 미술을 맡고 풍소강 감독이 '햄릿'의 재해석을 시도했던 '야연'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듯 합니다. '후궁'에서는 국내 최고의 미술감독으로 불리는 조상경씨가 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런 의상과 장중함이 강조된 궁 세트는 자연스럽게 관객을 지배합니다. 이 글의 제목을 정할 때 '스타일이 주인공'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감독의 거대한 야심이 발현되고, 배우들의 연기를 압도하는 스타일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일반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반면 셰익스피어적인 조건을 갖췄으되 셰익스피어 등장인물들의 독백이나 방백을 빼앗긴 배우들에겐 이 영화 속 등장인물로 동화되는 것이 상당히 힘든 과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배경 설명이 필요없는, 너무나 선명한 인물인 대비 박지영이 돋보인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 같고 반대로 다소 무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매력을 잃지 않았던 김동욱의 호연에도 큰 칭찬이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누드 연기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은 조여정의 열연은 굳이 새로 거론할 이유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 화려한 세트와 의상을 능가하는 존재감이랄까요(오히려 이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듣는 것이 부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아무튼 이 영화를 보는 이유 1번이 '조여정'인 분들이라면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P.S. 이하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궁금증입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여기서 발길을 돌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줄거리에 큰 영향이 없으니 스포일러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목이 '후궁'이지만 사실 영화에 나오는 중요한 후궁은 조은지 한명 뿐입니다. 물론 조여정이 처음 입궁할 때 계비로 입궁한 것인지, 후궁으로 입궁한 것인지(아마도 후자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분명치 않지만, 후궁으로 입궁했다 해도 그 시절은 영화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후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후궁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비전 지하의 그 비밀스러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것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친절하게 제목에 '제왕의 첩'이라는 해설까지 붙어 있고, 영어 제목도 'cocubine'으로 붙어 있고 보면(영화 제목에서 이 단어를 보는 건 '패왕별희' 이후 처음입니다), 충분히 제기될만한 의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왜 제목이 '후궁'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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