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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시사회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 블로그를 통해 소개했던 영화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덜 대중적인 영화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제목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아시다시피 레오폴트 자허마조흐의 소설 제목입니다. 그리고 저 작가의 이름 자허마조흐에서 학대와 모욕을 당하면 성적 쾌감을 느끼는 이상 성욕을 가리키는 매저키즘이라는 말이 나왔죠.

 

소설 내용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권력 균형과 극한으로 치닫는 욕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서 전혀 이탈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코믹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6년째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영화감독 민수(백현진)는 어느날 섹시하면서도 베일에 가려진 여자 주원(서정)을 발견하고, 그녀에게서 영감을 얻기 위해 매달립니다. 하지만 주원은 내심 민수를 '벌레'라고 호칭하며 우습게 생각합니다.

 

민수는 그녀의 매력에 끌리는 동시에 그녀의 재력에도 욕망을 느낍니다. 하지만 주원은 이미 상대를 노예로 길들이며 즐거워하는 데 익숙해진 터. 민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줄듯 줄듯 하면서 즐기는 것(tantalizing)이 그녀의 목표입니다.

 

 

 

 

주원에게 부와 함께 성적 취향을 유산으로 남긴 사람은 얼굴이 나오지 않는 '남궁 회장'이라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결국 주원은 지금도 허회장이라는 인물과 정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죠. 그에게 민수는 하잘 것 없는 심심풀이의 대상 쯤 됩니다.

 

이렇게만 쓰면 이 영화가 인간의 욕망을 그리는, 대사는 거의 없는 1980년대 유럽 영화와 흡사할 것처럼 여겨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코미디라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일단 송예섭 감독의 내면 깊숙히 존재하는 시니컬한 유머감각이 영화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받아 마시지 말고 나한테 부으란 말이야!" 뭐 이런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쓰면 제가 감독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제가 대한민국 영화감독 가운데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름을 보시면 눈치 빠른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 제 사촌형이기 때문입니다.^ )

 

 

 

 

이 영화 속 캐릭터들의 특징은 양면성입니다. 주원과 관계를 맺는 허회장은 권력을 향한 심각한 얼굴과 주원의 성적 노예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민수 또한, 기존의 영화들에서 묘사되던 차분한 관찰자나 희생양과는 다른 캐릭터입니다.

 

그 자신이 주원에게는 극도로 굴종적이지만,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잔혹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이런 배치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가 반드시 일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한쪽 측면에서는 약자로 보이는 한 인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죠.

 

 

 

 

민수 역의 백현진은 어어부 프로젝트의 멤버로 무대에 섰을 때 보여주는 카리스마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면모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거의 아양 떠는 어린이의 모습으로 주원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특히 그렇죠. 어쨌든 직업배우가 아니라는 백현진의 말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어눌함을 지향한 연기는 무척 뛰어납니다. 특히 주원에 대한 세레나데 신은 아무래도 백현진 이외의 다른 배우가 했다면 정말 안 어울렸을 듯 합니다.

 

오랜만에 복귀한 서정은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충분히 뿜어냅니다. 제작진이 원한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이미지가 딱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죠. 다만 무엇이 그렇게 주원을 주변 사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파멸로 이끌어가는지, 동기 부여가 좀 더 충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 제가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결과를 낳을 듯 합니다.^^ 저는 계속 낄낄거리면서 봤습니다만, 그건 직업이 영화감독인 주인공 민수의 모습에서 제 사촌형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 좋을 듯.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 상영중입니다.

 

 

 

P.S. 티치아노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이 그림이 바로 자허마조흐의 원작에 영감을 준 작품이라고 합니다. 아랫도리에 두르고 있는 모피가 권위와 억압의 상징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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