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았던 여자가 돌아와 복수하는 이야기, 참 많고도 많습니다. 특히 한국 안방극장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꽤 많이 인기를 누렸습니다. 다들 잘 아시는 '점 하나 찍고'의 원조인 '아내의 유혹' 이후 특히 많아졌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최근 방송을 시작한 JTBC '가시꽃'도 그런 유형의 드라마입니다. 억울하게 모든 것을 빼앗긴 여자가 죽음을 가장하고 기회를 노린 다음, 새롭게 태어나 돌아와서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들에게 복수한다... 많이 듣던 얘기긴 합니다.
물론 '아내의 유혹'이 이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의 원조라고 보기에 '아내의 유혹'은 참 젊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의 원형을 살펴보려면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 합니다. 과연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복수 이야기, 특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와 벌이는 복수 이야기의 고전은 뭐니뭐니해도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쓰여진 것이 1845년이고 보면 그 전이라고 이런 이야기가 없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작품의 지명도나 완성도, 대표성 등을 고려할 때 '원조'라는 이름을 가질만 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이 남자라는 점. 여자의 복수 이야기도 장화홍련전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널렸지만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귀신이 주인공이면 안 될 듯한 분위기입니다.
(물론 웃자는 얘기지만, 시각을 좀 돌려 보면 셰익스피어의 '헛 소동'이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여주인공 히어로가 행실이 나쁘다는 모함을 받아 결혼이 깨지고, 히어로가 죽음을 가장한 뒤 진실이 밝혀지자 히어로의 아버지는 남자들에게 '내 딸은 이미 죽었지만 똑같이 생긴 조카딸이 있는데 그 아이와 결혼하라'고 하죠. ...네. 사실 전혀 다른 느낌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죽은 여자가 돌아오는' 상황은 아마도 '헛 소동'이 원조일 것 같다는 얘기.)
그러다 문득 한 후배가 "선배, 혹시 예전에 죽은 줄 알았던 여자가 돌아와서 잘나가는 모델로 변신해 복수하는 외국 드라마 본 기억 나지 않아요?"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앗.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날듯 말듯. 남편이 아내를 악어 밥으로 던졌는데 여자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성형수술로 더욱 미인이 되어 복수하는....?
그래서 찾아냈습니다. 바로 '에덴으로 돌아오다'.
1983년작 호주 드라마 '에덴으로 돌아오다(Return to Eden)'는 이런 내용입니다.
부유한 40세 여성 스테파니(레베카 질링)는 유명 테니스 선수이자 미남인 그렉(제임스 레인)과 결혼, 온 세상이 행복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렉의 진짜 연인은 스테파니의 절친인 질리(웬디 휴즈). 세 사람은 늪지대로 여행을 떠나고, 배 위에서 악어를 바라보며 스테파니가 탄성을 지르고 있을 때 그렉은 스테파니를 뒤에서 밀어 버립니다. 악어 밥을 만들어 버리고자 한 거죠.
그렉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스테파니를 향해 총을 겨눕니다. 악어가 시원찮으면 구하기 위해 악어를 쏘다가 실수로 스테파니를 맞혔다고 하려고 했던 듯. 하지만 악어는 생각보다 효과적으로 스테파니를 공격하고, 피투성이가 된 스테파니는 조용히 물 속으로 사라집니다. 어쩔 줄 모르는 질리를 한 팔로 제지하며 지는 해를 향해 총 한방을 쏘는 냉혹한 그렉.
(이 장면은 위 동영상 27분30초 지점부터 꽤 실감나게 나옵니다.)
"말도 안 돼! 악어한테 저렇게 물려 가서 살아났다고?" 라고 화내실 분들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악어의 평소 습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악어는 일단 잡은 먹이를 그 자리에서 토막낸다거나 하지 않고, 일단 물속으로 끌어들인 뒤 익사시키는 쪽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엔 바로 먹지 않고 물 속의 수초 줄기나 돌 틈에 끼워 '저장'해 두기도 한다는군요. 그러니 '저장'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스테파니가 살아 나올 가능성도 있는 셈이죠.
(어디까지나 가능성!)
1983년의 '미니시리즈(한국 미니시리즈는 16부가 기본이지만 70~80년대 영미권에서는 3~6회 정도의 연작 드라마를 미니시리즈라고 불렀습니다)' 판 '에덴으로 돌아오다'는 불과 딱 세편짜리 소품이었지만, 호주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만만찮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1986년에는 22부작의 정규 시리즈로 제작되어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리즈도 제목이 'Return to Eden'이라 혼동의 여지가 있습니다. '미니시리즈'라는 설명이 붙은 것이 원편.)
한국에서는 1989년 신년 특집으로 방송돼 상당한 화제를 모았습니다. 당연히 여러 차례 앵콜 방송됐고, 얼마 뒤에는 '시드니 셸던 원작'의 소설이 발간되기도 했죠. 왜 ' '를 쳤느냐... 이유는 이 소설이 시드니 셀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랍지만 사실. 이 시절만 해도 한국이란 나라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법이 통할 정도로 허술한 나라였다는 겁니다. (또는 그럴 정도로 시드니 셀던은 구매력 있는 작가였다든가.)
아무튼 결론. '죽은 줄 알았던 여자가 돌아와 복수하는 이야기'라는 장르에서 원조격인 작품을 찾으라면 이 '에덴으로 돌아오다'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을 가장한 트릭은 샤론 스톤, 이자벨 아자니 주연 '디아볼릭'의 원작인 1955년작 프랑스 영화 'Les diaboliques'이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여자의 죽음이 소재가 아니라서 제외.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한국에서도 '아내의 유혹'이 인기를 얻었고, 현재는 '가시꽃'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유망한 신인에서 깜짝 스타로 발돋움할 기회를 얻은 세미(장신영). 하지만 세미에게 그 기회를 빼앗긴 유명 스타 지민(사희)은 복수를 다짐합니다. 세미는 재벌집 외동딸인 지민의 집 별장 관리인의 딸이었기 때문에 지민은 깨진 자존심에 몸을 떨었던 거죠.
그 별장에서 파티가 열리고, 세미는 술에 취한 지민의 오빠 혁민(강경준)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놓입니다. 결국 혁민을 피해 달아나던 세미는 2층에서 추락해 식물인간이 되고, 혁민 일행을 저지하려던 세미의 아버지도 계단에서 밀려 떨어져 죽음을 맞습니다. 재벌 2세와 국회의원 아들 등으로 구성된 혁민의 일행 특성상 부모들은 모든 연줄을 동원해 사건을 무산시키고,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던 세미의 어머니도 사고를 위장해 살해합니다.
(실제 드라마 장면과는 좀 다른, 장신영의 여유 컷)
남은 것은 식물인간이 된 세미. 일당은 세미마저 조용히 없애 후환을 없애려 하지만 세미는 깨어나고, 혁민/지민의 집안에 원한을 갖고 있는 남준(서도영)의 도움으로 복수를 준비합니다. 물론 집에 불을 질러 세미가 죽은 것으로 꾸미는 것은 필수. 그리고 7년 뒤, 세미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해 복수를 시작합니다.
...이런 어디서 살짝 본 듯한 스토리. 하지만 '가시꽃'은 스피디한 전개(어차피 다 짐작하실 만한 내용은 과감히 통과!)와 적절한 악역들의 배치(특히 악당 중에서도 잡초같은 3류 악당 백춘 역을 맡은 이철민씨가 압권입니다. 보신 분이라면 이해하실 듯...)로 놀라운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방송 7회만에 시청률이 3배로 급상승중입니다. (아, 물론 출발점이 좀 낮긴 했죠.^^)
전형적인 복수극의 외양을 갖춘 '가시꽃'이 어느 정도까지 주부 시청층을 흡수할 지 개인적으로 참 궁금합니다.
(보너스는 1~7회까지의 하이라이트 요약. 이 정도면 지금부터 '가시꽃'을 보시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모든 주요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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