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에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잠시 비교했습니다. 본인은 비명에 가더라도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오르지 않고는 큰 차이가 있었죠.
게다가 소현세자는 아들들 뿐만 아니라 아내인 강빈까지 사약을 받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됩니다. 한번 왕위에서 밀려나면 언제 반역의 무리로 몰릴 지 알 수 없는 '밀려난 왕손'의 운명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죠.
여기에 하나 더. 그래도 '북벌 정책(비록 실질적으론 큰 의미가 없었다고 하나)'을 시도하며 '기개 있는 왕'으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효종에게서도 실망스러운 모습이 보입니다. 바로 형의 자손들에 대한 대접이죠.
일부 드라마에선 효종이 소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 나오지만, 실상은 그럴만큼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글에 이은 소현세자 2탄입니다. 순서대로 보시려면 여기를 먼저 들러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나 http://fivecard.joins.com/1140
소현세자 (2)
1645년 2월18일, 백성들은 소현세자의 귀국을 앞다퉈 환영했다. 국가 차원의 경사였지만 이미 심사가 틀어진 왕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공사견문’은 인조의 성품에 대해 ‘찡그리고 웃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무겁고 말이 없어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임금의 말을 자주 듣지 못했으며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이 어떤지 측량하지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내성적이고 감정표현이 별로 없던 인조의 내면엔 세자에 대한 미움이 계속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소용 조씨의 역할도 컸다. 조씨 소생의 숭선군은 세자가 귀국하던 1645년, 고작 만 여섯살의 어린아이였지만 어쨌든 왕위 계승의 자격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소용 조씨, 공신 세력의 우려를 대변하는 김자점, 그리고 의심 많은 인조의 성품이 만난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4월23일, 세자는 학질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24일과 25일 ‘침을 맞았다’는 기록 한 줄씩만을 남긴 채 26일 사망했다. 침을 놓은 사람은 인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어의 이형익이었다.
'꽃들의 전쟁'에서 손병호가 연기하고 있는 이형익. 조선왕조실록은 꼭 집어 지목만 하지 않고 있을 뿐, 사실상 이형익의 손에 의해 소현세자가 죽음을 맞았을 것이라고 거의 적시하고 있습니다.
세자의 졸곡제를 다룬 실록 기사에는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온 몸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중략)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내용이 전한다. 사실상 독살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꽃들의 전쟁’에서는 김자점(정성모)이 직접 이형익(손병호)에게 세자를 해치게 지시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의’에서는 이형익(조덕현)이 다시 이명환(손창민)을 이용해 세자에게 독을 썼다는 설정이다.
'마의'에서는 그래서 이명환이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다시 이형익을 살해한다는 설정입니다. 직접 손을 쓴 것은 한 단계 더 거친 이명환이란 해석.
이형익은 심지어 소용 조씨의 어머니와 사통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누가 봐도 그에게 혐의가 가는 것이 당연했다. 언관들이 당장 이형익을 조사하라고 들고 일어났지만 인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 뒤에도 수시로 이형익을 불러들여 침과 뜸으로 치료를 받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인조는 6월2일, 서둘러 대신들을 모아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하겠다고 밝혔다. 원칙대로라면 왕위계승의 우선권은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선뜻 동의하지 않자 인조는 “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이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때도 김자점이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앞장섰다.
흥미로운 것은 그해 11월3일, 봉림대군의 감기가 낫지 않자 이번에도 의원 이형익이 “침을 맞아야 낫는다”고 간했다는 기록이다. 하지만 대군은 가벼운 감기라며 치료를 거절했고, 곧 회복했다. 만약 이 침을 맞았다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해가 바뀌어 1646년 1월, 인조는 수랏상의 전복구이에서 독이 나왔다며 진실 규명을 지시했다. 처음부터 소현세자빈 강씨를 용의자로 놓은 수사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강빈은 궁중의 왕따 신세였고, 엄중한 감시의 대상이었다. 독을 반입해 어선에 넣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문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었고, 강빈의 하인들 가운데서 자백이 나왔다.
조정 대신들이 “목숨만은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중국 조나라 무령왕의 예를 들며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맞섰다. 무령왕은 장남을 폐하고 차남을 후계자로 삼았다가 후계 구도를 놓고 분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궁에 유폐되어 굶어 죽은 인물이다. 누가 봐도 비슷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인조의 광기는 이미 통제의 범위를 넘어 있었다. 강빈은 사약을 받고, 어린 세 아들도 제주도에 유폐됐다. 그중 둘은 일찍 죽고(그 죽음의 원인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막내 석견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아이가 ‘추노’의 그 아기다.
조나라 무령왕의 고사는 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무령왕은 사실 당시 중국 남자의 하의(당시까지는 바지보다 치마에 가까웠던)를 개량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라!"는 개혁 조치를 한 긍정적인 고사로 자주 인용되는 인물입니다. 당시까지 오랑캐의 옷으로 간주되던 헐렁한 바지를 '말 타고 내리기 편하다'는 이유로 도입해 전국 7웅 중 하위권이던 조나라의 국력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하지만 말년에 총기가 흐려진 탓인지, 다 자란 장남을 제쳐 놓고 후비가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양위합니다. 대개 이렇게 되면 장남이 정치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수순이지만, 갑자기 장남이 불쌍해진 무령왕은 장남의 영토를 넓혀 조나라를 두개로 쪼개 상속할 궁리까지 합니다. 하지만 후비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격분한 장남은 아버지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후비파에 유능한 장군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 반란은 가볍게 실패. 장남은 아버지 무령왕의 궁으로 달아납니다. 이미 왕위를 넘겨받은 후비와 어린 아들 쪽에선 장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만 무령왕은 "내 아들인데 목숨만이라도 보존하게 해 달라"고 오히려 간청하죠.
밖에선 잔혹한 결단이 내려집니다. 장군들이 "만약 장남을 잡으러 들어갔다가 무령왕을 다치게 하는 날이면 우리는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그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본 것이죠. (이건 사실 또 얘기하려면 긴 얘기가 되어 여기선 생략하겠지만 병법의 대가 오자(오기)의 죽음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궁의 문을 밖에서 잠그고 아무도 나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한달이 지나 굶어 죽은 무령왕과 장남의 시체가 다 썩어 없어진 뒤에야 문을 열어 통곡을 하며 장사를 지낸 겁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맞지만 무령왕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은 스스로 후계자를 잘못 고른 결과이니, 인조 자신이 강빈을 죽여야 하는 이유로는 매우 궁색합니다. 그리고 무령왕과 자신을 비교한 것은 소용 조씨 소생의 숭선군을 세자로 봉하겠다는 이야기로도 들립니다만, 결국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시선에선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겠지만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에겐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행여라도 소현세자의 자손이 왕위를 차지하는 날이면 그들 자신은 물론 일가친척의 생명 또한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비정함은 효종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른 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홀로 남은 어린 조카 석견을 경안군으로 봉하고 서울로 불러 올렸지만, 형수 강빈의 억울함을 회복해주는 것은 딱 잘라 거절했다. 오히려 상소를 올려 강빈의 신원을 촉구한 김홍욱을 잡아다 때려 죽이기도 했다. 아무리 조카가 가엾어도, 그들에게 '역적의 자손'이라는 죄를 씻어 주고 나면 자신의 후손들이 계승할 왕좌가 불안해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경안군은 1665년 만 21세로 죽었다. 두 아들을 낳아 후사를 이었으나, 맏손자 밀풍군은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했다. 소현세자와 그 후손들에게 조선은 더없이 잔혹한 나라였다. (끝)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은 뒤, 세 아들이 남았습니다. 인조가 서둘러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 소현세자가 죽은 뒤 왕위 계승 서열에서 각각 1,2,3위가 될 왕손들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게 된 이상 효종의 왕위 계승 경쟁자일 뿐입니다. 1647년, 이들은 처음엔 각각 흩어져 귀양을 갔다가 '서로 모여 살게 하라'는 인조의 은혜(?)로 제주도에 모입니다.
1648년, 석철이 13세의 나이로 가장 먼저 죽고 곧이어 둘째 석린도 숨을 거둡니다. 공식적인 원인은 풍토병. 하지만 인조와 김자점이 배후에 있을 것이라는 의혹은 당시에도 일었다고 합니다.
석철이 죽기 전 청나라 장수 용골대(병자호란 때 선봉장이었던 당대 청의 대표적인 장군입니다)가 조선 조정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고아가 되어 형편이 딱하다고 하니 내가 데려가 기르면 어떻겠는가."
용골대와 소현세자는 심양 시절에 꽤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실록에 남은 기록은 주로 조선을 무시하는 용골대에게 소현세자가 맞서 싸운 내용이지만, 그렇게 자주 대면을 했으니 꽤 교분이 쌓였을 법 합니다. 하지만 인조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면 이 말은 매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네가 아무리 둘째를 왕으로 세웠다지만, 맏손자는 우리 손에 있다. 네가 삐딱하게 나오면, 언제든지 왕이 될 수 있는 후보를 우리가 데리고 있다.
더구나 그 손자가 잔혹하게 부모를 죽인 할아버지를 곱게 볼 리가 없죠. 오죽하면 석철의 죽음을 전하는 실록에 "용골대가 그런 말을 했으니 모든 사람들이 이제 석철이 온전하겠느냐고 걱정했는데 이렇게 죽었다"는 말이 다 나오겠습니까.
(先是, 龍骨大之來也, 以取養石鐵爲言, 人皆謂其必 不保全, 至是卒)
그 뒤로 왕위는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집니다. 숙종의 친위세력은 숙종을 가리켜 '삼종의 혈맥(三宗之脈)'이라고 떠받듭니다. 그러니까 3대가 모두 국왕의 정궁(정식 왕비)으로부터 태어난 왕자들로만 이어진 혈맥이라는 것이죠. 그게 뭐 대단하냐 싶겠지만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세조-단종까지 이어진 초기 4대를 제외하면 정궁 소생의 왕자들로만 왕위가 이어진 예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효종은 즉위와 함께 아버지의 세력이던 인조 반정 공신들을 싹 청소하고, 북벌 이데올로기와 함께 정통성을 확보해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뒤 3대에 걸쳐 자신의 후손들이 왕 노릇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공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형의 자손들이 세상에 나올 수 없도록 형수 강빈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가의 자손은 두 가지 면에서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위를 지키고 있는 쪽에서 볼 때도 잠재적인 경쟁자요, 정권을 뒤집어 엎으려는 음모가 쪽에서는 옹립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입니다.
사실 광해군 시절의 능양군(인조)처럼 반란군과 사전에 교감이 있던 경우도 있지만, 뒷날 김자점의 난(?)에 함께 거론된 숭선군이나 소현세자의 증손자로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밀풍군의 경우엔 다들 "그들이 일방적으로 옹립하려 한 것일 뿐 직접 관련은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숭선군은 살아남았고 밀풍군은 죽음을 당했죠. 이들의 생사는 정말 그때 그때 운에 달렸다고 할 정도로 달랐지만, 특히나 밀풍군의 죽음에는 '한이 많은 소현세자의 자손'이라는 면도 꽤 작용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무튼 이건 먼 뒤의 이야기. 당장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운명, 이어지는 소용 조씨(김현주)의 악행은 아직 한참 더 '꽃들의 전쟁'을 통해 펼쳐질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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