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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설국열차'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논평이 등장해 있습니다. 영화 속 상징들에 대해 온갖 종류의 해석을 한 리뷰들에서부터, 봉준호 감독 본인이 나서 '그건 이런 의도'라고 해석한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관련된 읽을 거리가 넘쳐납니다.

 

이 글은 이 영화의 미덕을 칭찬하기 위해 쓰여진 글은 아닙니다(그런 글들은 이미 너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깨시민을 옹호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할 생각도 없습니다. 본격적인 상징 해석도 아닙니다. 요나가 성경에 나오는 그 요나를 뜻하는 거라든가, 불의 등장이 인류의 문화 발달 단계를 의미하는 거라든가 하는 얘기를 원하는 분들은 다른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보면서 조금 껄끄러웠던 부분, 그리고 어딘가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써 봤습니다. 스포일러가 닥치는 대로 노출되어 있으니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보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줄거리 생략.

 

 

 

 

1. 왜 열차인가.

 

만약 별도의 연료 지원 없이도 영원히 멈추지 않는 영구기관이 있다면, 그리고 그걸로 얼어붙은 지구에서 인류 문명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면, 그 수단을 열차로 선택하는 건 정말 바보같은 짓입니다.

 

당연히 정지된 상태에서 이 영구기관의 에너지를 이용해 뭔가 해 보는게 훨씬 효율적이겠죠. 기차를 쓰면 외부인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웬만한 배리어만 친다면 어차피 설정이 온 세계가 다 얼어붙은 상황인데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열차다. 물론 '왜 열차인가'는 기차를 리드하는 인물 윌포드(에드 해리스)를 '기차에 미친 사람'으로 설정한 것으로 어느 정도 해명이 가능합니다. 미친 사람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일단 '왜 그 영구기관의 기술을 윌포드만 갖고 있느냐'는 질문 역시 그렇습니다. 미친 사람이라는데 뭘 따지겠습니까.)

 

다소 찜찜하긴 하지만 미쳤다니까 넘어갑니다.^

 

 

 

 

2. 혁명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이 열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고전적인 혁명 이야기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간단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맨 뒷칸의 승객들은 고전적인 시각에서 볼때 '착취당하는 민중'이 아닙니다. 이들은 기차가 달리게 하는 데 어떤 노동력을 제공하지도 않고, 그냥 윌포드로부터 열차 공간과 식량을 제공받을 뿐입니다. 영화 속 논리에 따르면 어쩌다 어린이 한두명과 바이올린 연주자 정도를 얻어간 듯 한데, 역시 영화 속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들의 혁명에서 가장 큰 명분은 무엇일까요. '인류의 유일한 생존 공간이 기차 안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기차 안의 자원을 동등하게 공유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 안에서도 언급되듯, 맨 뒤칸 사람들은 이 기차와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로, 우연히 윌포드의 선의(?)에 의해 승차한 - 타지 않았으면 동사했을 -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일행이 원하는 것은 결국 '휴머니즘의 차원에서, 열차 안의 자원을 모든 사람이 공유, 생활의 질이 다 같이 떨어지더라도 전체 인원의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자'는 것인데, '앞칸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뒷칸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혁명(?)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커티스는 "앞칸에 도달하면 (윌포드를 포함해) 거기 있는 자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대사는 봉준호 감독에게 이들이 꿈꾸는 '체제 전복'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는 별로 없음을 읽을 수 있게 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계급갈등에서 오는 혁명 이야기라기 보다는 '남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의 설정대로라면, 커티스 일행은 '왜 앞칸 인간들만 잘 먹고 잘 사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대체 왜 윌포드는 도움될 것 하나 없는 뒤칸 인간들을 프로틴 바를 먹여 가며 기차에 싣고 다니는가'를 궁금해 했어야 할 듯 합니다.

 

사실 혁명의 성공 가능성이라는 것도, 윌포드 일행이 최초의 소요가 일어난 순간 귀찮은 뒤칸을 아예 떼어 내 버리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뭣 때문에 윌포드는 적잖은 경비 인력을 희생시켜가며 정기적으로 소요를 일으켜 온 뒷칸을 유지해 온 것일까, 거기에 대해 커티스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제게는 참 이상했습니다.)

 

 

 

 

 

3. 은유와 액션 월드 사이

 

'설국열차'에서 기차는 모든 사람이 다 아다시피 거대한 상징입니다. 이런 기차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주인공 일행이 휘젓고 다니는 각 열차 칸의 의미 등등은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뭐 영화 설정상으로 1000개의 칸이 있다고 하니 꼭 필요하지만 비쳐지지 않은 칸(예를 들어 앞칸 사람들이 먹는 스테이크를 공급하기 위한 육류 육성 칸 - 또는 인조 고기 생산을 위한 공장 칸) 들도 꽤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커티스 일행이 지나치는 대부분의 공간, 학교나 기타 앞칸 승객들을 위한 생활공간 등은 모두 리얼리티보다는 상징을 위한 공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액션들은 필요 이상의 리얼리티를 강요합니다. 몽둥이와 칼, 살과 뼈가 마주치는 대결의 현장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리얼한 액션은 수시로 리얼리티와 단절된 상징적인 공간과 맞닥뜨립니다. 예를 들면 앞칸에서 열심히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추격하던 분노한 앞칸 승객들은 어느 순간에 증발해 버립니다. 또 뒤칸으로부터 성화를 봉송(?)해 앞칸에서의 싸움을 이끄는 장면은 그동안 통과해 온 열차의 길이나, 이들이 통과해야 할 터널의 길이를 생각할 때 도대체 얘깃거리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소한 부분들, 어디까지를 상징의 세계로 보고 어디부터를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리얼리티의 세계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에서는 식구들이 식사하는 장면 가운데 딸 고아성의 유령이 나타나 식구들이 주는 밥을 먹는 장면이 갑자기 삽입됩니다. 리얼리티의 세계 안에 불쑥 등장한 은유의 세계인 것이죠. 이 장면이 별 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영화 전체가, '어쨌든 이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리얼리티의 세계였기 때문인 것이죠. 하지만 '설국열차'는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가 너무 자주 교차하면서 상당 부분 설득력을 떨어뜨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불편함을 털어놓은 데에는 이런 이유도 상당히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4. 종교의 역할

 

이 영화에는 두 번, 사람의 머리 위에 신발을 얹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의 신분과 위치에 대한 비유로 사용됐습니다.

 

선종 불교의 지혜를 담은 '벽암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남전참묘南泉斬描'와 '조주대혜趙州戴鞋'라는 두 가지 화두가 나옵니다. 큰 스님인 남전이 두 법당의 승려들이 고양이 한마리를 놓고 서로 싸우는 광경을 보고 "누구든 이 고양이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이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아 스님은 고양이의 목을 쳐 버립니다. 뒤늦게 절로 돌아와 이 소식을 들은 제자 조주는 스승 남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신발을 집어 머리 위에 얹은 채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를 본 남전은 "조주가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렸을 것을..."하며 탄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난해한 화두입니다. 해설서들을 봐도 분명한 해석이 되어 있지 않지만, 오히려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면 오히려 선불교의 화두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무튼 신발을 머리에 얹는다는 것은 가치의 전도를 말하는 것이며, 이렇게 전도된 가치를 갖고(살생금지의 계율에 대한 금지를 깨 가면서) 누구에게 진리를 전달할 수 있겠느냐는 힐난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 화두가 과연 '설국열차' 속의 장면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지는 생각하기 나름인 듯 합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대표작 '금각사'에서 이 화두를 사용했듯, 근본적인 가치의 전도를 위한 소도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 외에도 두어 장면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저 불쌍한 애욕에 물든 중생들에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기차 운영자(=부처?)의 길'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그랬고, 또 길리엄(존 허트)이 맨 뒷칸에서 행했다는 자비행의 모습이 그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 살을 베어 이웃을 먹인다는 장면도 - 뭔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혜숙선사와 구담공의 고사를 연상시킵니다 - 종교적인 가치 없이 설명하기 참 힘든 부분입니다. 이런 자기 희생을 통한 감화와 리더십의 획득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길리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항목에서 계속)

 

아무튼 이런 시각에서 보면 '설국열차'는 종교의 허구성과 위선을 정면으로 지적하는 영화가 됩니다. 윌포드가 주장하던 초월자의 시점이나, 길리엄의 희생이나, 결국은 지배자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니까요.

 

 

 

 

5. 길리엄의 배신

 

길리엄은 윌포드에 의해 파견된 언더커버 요원입니다. 그의 역할은 일단 무질서가 지배하던 뒤칸 인간들 사이에 사랑과 인류애를 되찾게 하고, 일정 수준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윌포드와의 사전 협의에 따라 일정 수준의 희망을 지속적으로 부여합니다.

 

즉 '언젠가는 혁명에 의해 우리도 앞칸을 차지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윌포드는 뒷칸 승객들이 일정수 이상의 개체수를 보존하면서 소멸하지도 번성하지도 않는 수준으로 유지되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위에서 말한 어린이나 바이올리니스트의 공급원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설국열차'의 설명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길리엄은 윌포드를 배신합니다. 그들에게 허용되었어야 했던 진출선을 넘어, 물 공급 칸을 넘어 진격하는 것이죠. 그리고 커티스에게 말합니다. "윌포드를 만나면 말할 기회를 주지 말고 죽여" 라고. 이 말은 곧, 윌포드가 커티스를 만나면 '나와 길리엄은 본래 같은 편'이라는 말을 하고 설득에 나설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한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길리엄은 왜 윌포드를 배신한 것일까요. 기존 사회의 질서 유지에 이바지하던 종교의 몇몇 지도자들이 체제 전복에 나섰던 전례는 적지 않습니다. 이른바 민중신학에 뛰어든 남미 카톨릭 신부들을 연상시키는 모습입니다.

 

 

 

 

 

6. 제3의 선택은 있나

 

윌포드의 '체제 유지를 위한 노력'에 설득되기 직전, 커티스는 그런 체제 유지가 어린이들의 희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대체 인류는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린이들의 희생이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기차를 멈추고 절멸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합리적으로' 어린이를 희생시키는 방안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요. 즉 '인류의 소멸을 전제로한 인도주의의 실현'과 '소수의 희생을 통한 인류의 유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의미 있는 실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실제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각자는 어떤 선택을 할지 매우 궁금합니다만, '설국열차'는 여기서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남궁민수(송강호)가 주장하는 '기차 밖에서의 삶'입니다.

 

'인도주의자'에겐 참 다행스러운 선택이지만, 선택지를 하나 더 늘려도 사실 선택은 어렵습니다. 1) 어린이들을 몇 희생시키더라도 인류 문명의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다 2) 어린이를 몇 희생시키느니, 인류 공멸이 더 도덕적으로 옳다 3) 둘 다 피하고 싶으니 기차를 세우고, 비록 가능성은 미지수지만, 기차 밖에서 새로운 문명을 세우는 쪽을 선택한다.

 

여러분의 선택은 어떻습니까?

 

 

 

 

7. 결말은 희망?

 

이 부분은 사실 좀 실망스럽습니다. 심하게 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백곰이 - 비록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단 한마리의 백곰이라 해도 - 17년 동안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건 17년 동안, 생태계의 최고 포식자인 백곰 한 마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했던 먹이들의 생태계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시 말해 백곰의 먹이인 바다표범이 있었다면, 바다표범을 먹여살리기 위한 물고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물고기가 있으려면 플랑크톤과 얼지 않은 바다가, 그리고 플랑크톤을 위해선 광합성을 위한 햇살이 있었을 거란 얘기죠.

 

2013년 현재 인류의 과학 기술 수준으로 볼 때, 백곰이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다면 인류가 절멸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100분1로 줄든, 1000분의 1로 줄든 절대 불가능하지 않겠죠. (위의 운행도를 보면 설날이 며칠 지난 뒤, 설국열차는 아프리카나 아랍 어딘가 정도를 지나고 있을 겁니다.^^)

 

아무튼 다 그렇다 치고, 남궁민수가 생각한대로 기차 밖에서의 삶이 가능하다 칠 때, 그 조건은 '기차 안에 있는 물자와 에너지를 동원해 밖에서 살아남는 것'일 겁니다. 영화의 결말처럼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고, 소녀 티를 못 벗은 여자 하나와 어린이 하나가 달랑 살아남아서 눈밭 위에 에덴을 건설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백곰의 한끼 식사가 되는 것이 더 가능성 높은 결말은 아닐까요.

 

문제의 백곰이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으로 보여지는 것이 영화의 의도였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과연 이것이 희망의 표상인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생깁니다.

 

 

 

 

8. 설국열차는 성공했나.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들에게 끝없이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드는 데는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일단 저 자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설국열차'는 대단히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마더' 수준의 알듯 말듯한 수수께끼를 즐겼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나 뻔한 알레고리와 다소 무리한 결말을 가진, '또 한편'의 디스토피아 영화로 느껴졌을 듯 합니다. 반면 '괴물'을 본 절대 다수의 관객들이 기대한 가족의 승리와 시원한 결말은 이 영화에 없었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잔뜩 제공했다는 점에선 환영할만한 영화였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이 '설국열차'의 티켓을 사면서 그런 것을 기대할 지는 의문입니다. 다른 한 쪽에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가진 미덕들 - 세계적인 명배우들의 호연, 각각의 기차 칸들이 가진 미장센의 미학, 자잘한 비유들이 가진 정답 찾기 놀이 - 를 이야기합니다만,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를 향해 그려진 '봉준호 기대 곡선'은 이번엔 약간 아래로 향했다고 말해야 할 듯 합니다.

 

 

 

 

댓글
  • 프로필사진 리뷰 잘봤습니다~ 잘 짜여있고 좋은 리뷰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아쉽고 혼동되거나 꺼림직한 부분들을 잘 정리해주셨네요 영화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참고가 되었네요 ㅎㅎ

    그런데 한가지 잘못 알고 계신게 있네요ㅠ
    원작에서는 1001칸이라지만 영화속에서는 60개의 칸으로 칸당 25m 정도 밖에 되지않습니다~ 그러니 횃불을 들고 꼬리칸에서 물공급 칸으로 오는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죠(솔직히 영화속에서 열차칸 수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부분에서 또한 불친절했죠..) 여튼 이점 다시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3.08.11 15:34
  • 프로필사진 송원섭 그런 설정이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60칸이면 지구 문명의 축소판을 집어넣기엔 좀 턱없이 부족하군요.^^ 앞칸 승객들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생산기반이 들어간다 치면 거주공간은 10칸 내외일텐데... 뭐 이런 식의 리얼리티를 이 영화에서 기대하면 안되겠지만 말입니다.
    2013.08.13 10:10 신고
  • 프로필사진 ㅈㅇㅇ 뭔소리세요 60개 칸으로 1.5km입니다.
    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306261747461&mode=sub_view
    2013.08.23 23:00
  • 프로필사진 앞구정 피터린치 설국열차 아직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읽었습니다. 리뷰 읽고나서 느낀점은 영화를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잘 짜여진 리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2013.08.12 06:52
  • 프로필사진 송원섭 감사합니다.^ 2013.08.13 10:10 신고
  • 프로필사진 하빈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리뷰의 두 번째 챕터인 '혁명에 대한 오해' 부분에 대한 제 의견이 혹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댓글을 답니다.

    일단 혁명의 당위성은 CW-7이라는 물질이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구는 이 CW-7이라는 물질때문에 빙하기에 접어들었고 그 물질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세계 각국의 지배층들이었습니다. 즉, 세상의 지배층들이 피지배층들의 삶의 터전을 앗아갔다고 할 수 있겠죠. 열차 앞칸을 구성하는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임의로 예상해보면 세계 각국의 지배층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때문에 꼬리칸의 사람들은 열차 자체를 저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윌포드가 꼬리칸을 떼어놓지 않았던 것은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했던 말들을 통해 유추가능해 보입니다. 윌포드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처음부터 꼬리칸의 존재를 예상한 것 처럼 이야기하며(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적절한 인구수를 위해 너희가 필요하지'라는 식의 대사가 있었던 것 같네요) 또한 앞칸의 질서 유지를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합니다(이 부분은 7인의 반란같은 과거의 반란들을 이야기하면서 나왔던 것 같네요). 즉, 폐쇄된 공간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꼬리칸을 이용해서 간간히 공포를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건 저의 과대해석인데 그런 반란을 통해 앞칸의 불순분자들도 제거했다고 생각됩니다).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의 특성상 외부세계에대한 동경이 존재할 텐데 이런 부분을 꼬리칸의 반란자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외부세계의 위험성을 알려주기도 한 것 같네요.

    이 만큼 글쓰기도 힘든데 요 위에 긴 리뷰를 재밌게 써주신 글쓴이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3.08.12 15:42
  • 프로필사진 송원섭 동의합니다. 제가 윗글에 '윌포드의 선의(?)'라고 물음표를 붙인 것은 이게 진짜 선의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태운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 것입니다. (물론 열차 앞칸 사람들이 CW-7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글 제목의 '오해'란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 속의 혁명을 원론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오해한다'는 뜻으로 쓴 것입니다. 영화의 얼개를 보면 볼수록 이 영화 속의 '혁명'은 그런 전통적인 의미의 '혁명'과는 많이 다르다는 얘기였습니다.

    앞칸에도 불만분자가 있었을 거란 지적이 흥미롭습니다. 하긴 송강호가 갇혀있던 감옥이 바로 그런 세력을 대비한 것이었겠죠.^
    2013.08.13 10:16 신고
  • 프로필사진 seba1230 그런데 제가 궁금한것은
    시간의 흐름입니다.
    도저히 잘 모르겠더라구요.
    얼마의 시간을 거쳐서 엔진칸에 도달했는지...
    하루? 열몇시간?
    그리고 밖의 환경이 살수 있을만큼 나아졌다면
    저위 사진에도 있는 애기 아빠....팔이 그렇게 깡깡 얼었을까요?
    그로부터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나왔던 것일까요?
    2013.08.13 15:34
  • 프로필사진 송원섭 1월1일 지나고 길어야 2,3일 안에 일어난 일들 아닐까요.^

    사람이 살수 있고 없고는 주간과 야간의 온도 차이 등 변수가 많을 듯 합니다. 시베리아처럼 겨울 기온이 영하 20~30도인 곳에서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으니 말이죠. 야간+영하 20도+세찬 바람을 감안하면 충분히 동태가 되지 않을까요...
    2013.08.14 09:43 신고
  • 프로필사진 드와잇 공감합니다. 이런 리뷰 드디어 찾았네요.
    이번 영화는 상징적으로는 아주 많고 다양하고 재밌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결론적으로 영화상에서 보여져야 하는 이야기가 오히려 뒷전였던 것 같아요.
    영화상 스토리도 짜임새있게 잘 진행이 되고 상징적인 것들도 멋드러지게 해석이 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봉준호 감독 말대로나 영화 칸 하나 하나가 시퀀스다 뭐 이런 얘기를 했는데 그 말이 곧 영화 스토리를 따로 따로 만들어다가 늘어놓기만 한거였다면 그 말이 맞다고 해주고 싶네요 ㅎㅎㅎ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 상당히... 봉준호스럽지 않았습니다. ㅎ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헐..." 이랬던 게 기억이 납니다 저도 그 중에 한 명 였고...
    한국사람은 이상하다. 끝이 열린 결말인걸 이해 못하는 수준 낮은 어쩌고 하는데 ㅎㅎ
    비단 그것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 영화입니다...
    네이버 리뷰를 보고 그제서야 다양하게 볼 수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리뷰 올린 사람들이 설국열차 관련 알바를 하는 사람들인가 의심을 했었습니다.
    이 이야기 전개도 어색하고 개연성 없는 영화를 상징적으로 술술 풀어내다니... 싶었으니까요
    2013.08.13 22:22
  • 프로필사진 송원섭 봉감독 팬들에겐 오히려 상징들이 너무 선명해서 풀어나가는 재미가 떨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아무튼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강도가 영화의 다른 요소들이 활짝 펼쳐지는 데 방해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2013.08.14 10:08 신고
  • 프로필사진 .... 좋은 글이네요. 저도 설국열차보고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으니 알바라도 시켜서 관객수 늘리기에 열중한 영화라는 느낌도 드네요. 2013.08.16 15:57
  • 프로필사진 송원섭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2013.08.18 21:35 신고
  • 프로필사진 제 생각 마지막 장면에서 남궁민수가 커티스에게 질문을 합니다.
    왜 맨앞의 문을 열려고 하는지... 정작 내가 열어 주고 싶은 문은 앞문이 아니라 기차 옆문이라고 하며 폭파의 열쇠인 성냥을 커티스에게 넘김니다. 즉 마지막의 모든 결정은 커티스의 의지에 달린것입니다. 커티스는 지난 시간 자신이 인육을 먹어야만 했던 상황과 맨 마지막 칸에서 격은 모든것에 대해 윌포드에게 따지기 위해 앞문을 가려한다고 한것 같습니다. 그때 앞문이 스스로 열리고 커티스와 윌포드의 대면이 시작되죠. 윌포드는 기차 운영에 관한 자신의논리를 설득함과 동시에 맨 앞칸을 커티스에게 넘길테니 스스로 운영해 보라고 하죠. 커티스가 고심을 할때 바닥에서 아이들의 비인간적인 노동착취를 목격하게되고 그 아이를 위해 자신의 팔을 희생한뒤 결단을 내린것이죠. 이 기차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열차가 파괴될것이란 알면서도 요나에게 성냥을 넘겨줍니다. 결과적으로 2명이 살아 남았지만 결론은 이런 비인간적인 세상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이 메시지 이지 새로운 세상의 출발이 핵심이 아니란 것입니다.
    2013.08.16 20:39
  • 프로필사진 송원섭 물론 제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런 해석도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한데 그렇다면 백곰의 등장은 무슨 의미일까요? 2013.08.18 21:22 신고
  • 프로필사진 갈갈이 2번 혁명에 대한 오해부분에서 '휴머니즘의 차원에서, 열차 안의 자원을 모든 사람이 공유, 생활의 질이 다 같이 떨어지더라도 전체 인원의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자'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혁명의 정당성이 쉽게 부정되기에는 윌포드의 선의가 선의가 진짜 선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혁명의 정당성은 성립합니다. 윌포드의 진짜 목적은 꼬리칸에서 지속적으로 낳게될 아이들을 엔진의 부품으로 활용하거나 앞칸의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공급처로 남겨두고 숫자가 늘어나면 살처분하는 용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진짜 필요없다면 애초부터 태우지 말았거나 꼬리칸을 떼어버리면 그만이지 굳이 단백질 블록을 먹여가면서 골칫거리를 유지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즉, 공장의 부품 내지는 사육 이외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커티스가 "앞칸에 도달하면 (윌포드를 포함해) 거기 있는 자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햇다고 했는데 영화를 두번 봤는데 윌포드를 죽이겠다고는 했지만 앞칸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 데 이건 나중에 제가 다시 확인해봐야겠군요.

    그래서 이러한 논리가 체제전복의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고 계급갈등의 혁명이 아니라 남보다 더 잘살겠다는 인간의 기본욕구 정도수준으로만 해석한것은 결코 동의 할 수 없네요. 귀찮으면 꼬리칸을 떼어버리면 그만인데 사육하면서 애들을 데려가는데에 대한 민중 혁명이 단순 상대적 욕구불만으로 폄하될순 없는것 같습니다. 이건 봉준호감독의 의도나 인터뷰와도 다소 어긋나기도 하구요. 텍스트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경우에는 좀더 단순하게 민중혁명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상징된다고 보지 영화가 혁명에 정당성까지 규정하고 있진 않다고 봅니다.

    '일도하지않고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혁명을 할 권리가 있는가?' 라고 물을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무임승차 했다고 비인간적으로 사육하고 살육하고 갈취해도 되는가?" 라고도 물을 수가 있는 것이며 오히려 영화의 무게중심은 뒤쪽에 있다고 볼 수 있죠. 왜냐면 시스템유지의 정당성이 아동착취라는 진실앞에 무너저 버렸고 열차를 파괴했다는 것은 결국 이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2013.08.17 02:12
  • 프로필사진 송원섭 커티스가 체제 전복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씀하신 영화 뒷부분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커티스가 열차의 주도권을 잡는다 해도 결국 누군가는 부품 역할을 해야 열차가 지속적으로 운행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 역할을 누군가와(예를 들어 그동안 잘 먹고 잘 산 앞칸 사람들과) 바꾼다고 해서 시스템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이 부분이 바로 일반적인 계급혁명의 논리와는 상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윗글 6항에서는 그 다음 차원의 문제, 그러니까 '현재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즉시 기차를 세우고 다 같이 얼어 죽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인가'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013.08.18 21: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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