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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양 살다가 확

주다스 프리스트, 너무 늦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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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장발족을 숭앙했던 사람으로서 누군들 이 큰 형님들을 감동으로 맞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제목에 쓴 아쉬움이 앞서는 공연이었습니다.

롭 핼포드. 57세. 정말 글자 그대로 '낼모레 환갑'입니다. 마지막 앵콜인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g'을 부를 때 태극기를 감고 나온 핼포드는 중간에 태극기에 열렬한 키스를 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고, 모터사이클 위에 태극기를 걸어 둘 때도 행여 바닥에 떨어질세라 아주 조심 조심 다루는, 마초 패션의 원조답지 않은 세심함을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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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두르고 나오기는 지난번 듀란듀란 때의 사이먼 르 본에 이어 국내에서 공연하는 록스타들의 단골 세리머니가 될 것 같습니다. 오지 오스본의 내한(2002년 2월22일이군요) 때 기타리스트 잭 와일드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갑자기 미국 국가를 연주하다가 '우-'하는 야유를 들을 때와는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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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20분 정도 늦은, 비교적 양호한 시간에 시작했습니다. 사실 '노스트라다무스' 앨범을 들어 보지 않은 터라, '앞의 한시간 정도는 노스트라다무스 수록곡들로, 뒤의 한 시간 정도는 팬들을 위한 올드 넘버 위주로 달리겠지'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는데, 예상은 많이 빗나갔습니다.

신곡들 위주의 공연이 30분 정도 이어지다가 갑자기 핼포드가 '브리티시 스틸! 브레이킹 왓?'을 외치더군요. 반사적으로 몸이 일어섰습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라이브를 상징하는 곡 중 하나인 'Breaking the law'였습니다.



사실 이날 관객들은 생각보다 젊었습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가 대세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20대가 많더군요. 하긴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페인 킬러(Pain Killer)'를 통해서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를 알게 됐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날 관객들도 두 종류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페인 킬러'로 주다스 프리스트를 알게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현재의 주다스 프리스트를 대표하는 곡이 '페인 킬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 앨범은 주다스 프리스트가 결성 20년을 맞은 1990년에 나온 앨범이죠. 이 앨범에 지나치게 의미를 두는 건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화려한 전성기를 너무 무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앨범의 진짜 의미는 '한때 세계 최고였던 밴드', 그리고 '전성기를 막 지난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었던 밴드'가 새로운 시대의 음악에 적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팬들로선 정말 감격적인 순간인 거죠.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요즘 우리 인기가 옛날같지 않다던데?"
"우리 시대(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가 지났대. 요즘은 스래시(Thrash)라는게 유행이야."
"스래시? 그게 뭐냐?"
"그러니까 기타 소리도 이렇게 이렇게 하고, 드럼도 요래요래 한 그런..."
"그래? 아, 그러니까 기타도 이렇게 이렇게?"
"...어, 우리도 되네?"
"그럼 되지. 야, 그거 못해서 안하는 줄 아냐?"

네. 그러니까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보다도 결성 연도가 겨우 2년밖에 뒤지지 않는, 블랙 사바스의 겨우 1년 후배인 '형님들'이 1990년에도 시대에 뒤지지 않고 엄청난 스피드와 파괴력을 자랑하는 명곡을 내놨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겁니다. 물론 신세대 드러머인 스콧 트래비스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아무튼 이 앨범으로 주다스 프리스트는 "우리 아직 안 죽었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사실 어제 공연을 보고 나서 이 'Pain Killer'에 대해 실망하신 분들이 꽤 될 걸로 생각합니다. 당연하죠. 엄밀히 말하면 주다스 프리스트는 어떤 라이브에서도 이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밴드나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Queen의 경우 어떤 라이브에서도 Bohemian Rhapsody는 앨범 레벨로 소화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Pain Killer'가 신곡이었던 1990년 공연 때에도 그 재현은 이 수준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고음을 뽑아내기 위해 있는 한껏 몸을 움추린 핼포드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죠.



물론 음질이 괴악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략 음 높이는 맞춥니다. 하지만 최근 라이브에서는 역시 이 노래를 제 음으로 따라 하다가는 핼포드가 무대에서 쓰러질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앞섭니다. 1998년에 이미 라이브에서 이 노래는 이 이상 안 된다는 한계를 보인 모습입니다.



사실 핼포드가 부를 수 없는 노래를 억지로 꾸며 부른 건 아닙니다. 1982년, 'Sinner'의 라이브를 들어 보면 'Pain Killer'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죠. 어제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21일 공연은 전반적으로 공연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본 공연 마지막 곡인 'Pain Killer'를 마친 시간이 공연 시작 70분 정도가 지난 8시 30분. 그러고 나서 앵콜로 4곡을 더 불러도 9시 이전에 공연이 끝났습니다.

'Hell Patrol', 'Breaking the law', 'Electric Eye', 'Sinner', 'Hell bent for leather' 'Green Menalish' 등등 오랜 추억을 되새기게 해 주는 노래들이 여러 곡 등장했지만 올드 팬들에겐 역시 아쉬움이 앞섭니다. 라이브에서 분위기 돋구는 데 최고인 'Turbo Lover' 같은 노래를 비롯해서 적어도 한시간은 빼곡 메워져야 할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우수수 빠져 있었다는 건 영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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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큰 형님들의 체력이 꽤 부담이 됐겠죠. 특히 핼포드는 57세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여전한 강철같은 목소리를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몇몇 곡들은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한 10년만 일찍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넘칩니다. 연주는 나이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다지만, 록 보컬은 1,2년이 다르기도 하죠. 무대에서 걸어다니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만...^

뭐 Before the Dawn을 못 들어서 아쉬워 할 분들도 꽤 있겠지만(솔직히 저는 80년대에도 저 노래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지금까지 알려진 라이브에서 저 노래를 한 적이 없습니다. 국내에서 베스트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한국 담당자가 간청을 해서 한국반에만 저 노래를 넣곤 했죠. 이번에도 당연히 국내 공연 주최사는 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우리가 그런 노래도 불렀나" 수준의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형님들의 모습을 실제로 봤다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젠 또 어떤 팀의 공연을 기다려야 할까요? GNR을 기다리시는 분들도 많던데 저는 이 형님들을 첫 손에 꼽겠습니다.

단순-무시-과격의 대명사였던 아이언 메이든의 'Where Eagles Dare'입니다.



한때 주다스 프리스트와 함께 이 세계를 양분했던 아이언 메이든은 놀랍게도 2001년,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린 'Rock in Rio'를 통해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신곡이 큰 반응을 얻거나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라이브에서 위력을 통해 빈 날짜가 없을 정도로 공연에서는 성황을 이루고 있죠. 이런 말 하긴 좀 미안하지만 한때 라이벌인 주다스 프리스트보다 공연 개런티는 몇 배 비싼 팀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도 핼포드보단 젊다지만 브루스 디킨슨도 올해 50세. 더 나이먹기 전에 한번 와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곡. 이 곡은 한때 '취향 감별곡' 으로 사용됐습니다. 1980년대에는 이런 말이 있었죠. "'Run to the Hills'를 듣고도 뭔가 가슴 속에서 불끈 하고 치미는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헤비메탈 취향이 아니다. 앞으로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없으니 이쪽은 아예 안 듣는게 좋겠다."

바로 그 노랩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떨까요. 여태 헤비메탈이라면 질색을 했던 분들이 특히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p.s. 롭 핼포드의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 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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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밝은 분들은 기억하시겠죠. 게리 니큰스(Gary Nickens)라고 '나쁜 녀석들 2'와 '아일랜드' 등의 영화에 나왔던 단역 배웁니다. 수염과 체격 때문에 기억에 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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