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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양 살다가 확

라디오 신청곡, 함부로 하면 안된다

2주 전 주말의 일입니다. 운전을 하고 가디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을 듣고 있는데, 대략 이런 사연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대단히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분이었는데, 나이가 드시더니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고 계시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공연까지 같이 보러 가셨다. 두 분이 사이 좋게 해로하셨으면 한다."

그리고 사연을 보낸 사람(그 부부의 딸)은 부모님이 함께 들으시라면서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신청했습니다. 어어, 왜 하필 신청곡을 그 노래로? 하는 사이에 벌써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DJ나 PD가 제지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만 노래가 나오더군요.

이 노래를 아시는 분들은 다 악 소리를 냈을 겁니다. 가사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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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고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딸아이 결혼식날 흘리던 눈물 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가네 흰머리가 늘어가네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여기까지는 뭐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젭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올 그 먼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그렇습니다. 이 노래는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을 맞은 어느 노인의 애절한 노래였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오래 오래 함께 행복하게 사시란 노래가 아니었죠. 제목만 보고 가사 내용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탓에 착한 따님이 불효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짓궂은 친구들이 일부러 결혼식 피로연 같은 데서 임지훈의 '사랑의 썰물'이나 윤종신의 '너의 결혼식'같은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노래를 결혼식 축가로 신청하는 사람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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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더 오래된 고전인 트윈 폴리오의 '웨딩 케익'이란 노래는 결혼식 신청곡으로 종종 등장했습니다. 장난기 있는 DJ들은 친구들이 보낸 신청곡 사연은 다 읽어 준 뒤, "제가 이 노래를 틀어 드리면 10년 우정이 끝장 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노래로 바꿔 틀어 주곤 했죠.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잠못 이루고 깨어나서 창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사람은 간곳이 없고 외로이 남아 있는 저 웨딩케익
그 누가 두고 갔나 나는 아네 서글픈 나의 사랑이여
이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않는 사람에게로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가네 그대 아닌 사람에게로
이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사랑치 않는 사람에게로
마지막 단 한번만 그대 모습 보게하여 주오 사랑 아...


아픈 내마음도 모르는 채 멀리서 들려오는 무정한 새벽 종소리
행여나 아쉬움에 그리움에 그대 모습 보일까 창밖을 내다봐도
이미 사라져 버린 그모습 어디서나 찾을 수 없어
남겨진 웨딩 케익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네
남겨진 웨딩 케익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네 음...

...네. 특히나 신랑 되시는 분이 이 노래를 들었으면 참 심경이 묘했을 겁니다. 신부의 친구들이 결혼 축하곡이라고 신청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이 노래라니. 이건 무슨 경고도 아니고 암시도 아니고 그냥 지금이라도 결혼 취소하라는 노래군요.

이 노래는 Cornnie Francis의 'Wedding Cake'를 그대로 가져다 가사만 붙인 노랩니다. 이 시절에는 도대체 저작권이란 개념이 없어서 그냥 작곡자 란에 '외국곡'이라고 써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원곡의 가사는 저 가사와 정 반대 방향으로 '새로 출발하는 커플의 행복'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죠.

원곡은 이렇습니다. (트윈폴리오의 곡은 없더군요.)




어버이날에도 비슷한 노래가 있습니다. 사실 god의 '어머님께'에서도 어머니는 마지막에 일어나지 못하시죠. 이 노래에 흐르는 모자간의 끈끈한 사연은 참 눈물겹지만 어버이날 축하곡으로 듣기엔 너무 청승맞은 것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이 노래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습니다.요즘 분위기에 맞는 어버이날 축하곡은 테이의 '어머니'나 박효신의 '1991년 어느 추운 날에'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을 챙기고 싶은 분들은 싸이의 '아버지'나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절대 신청해선 안 될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최성빈, 혹은 F&F의 '사랑하는 어머님께'입니다. 이 노래가 아직도 가끔 어버이날 라디오에서 선곡된다는 건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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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이렇게 흘러가기 때문이죠.

어머님 죄송합니다.
이 글을 읽으실 때쯤 전 그녀와 함께 멀리 떠나있을 꺼예요.

어머니와 그녀를 사이에 두고 많이 고민했지만 저의 현실은 그녀를 버릴 수 없어요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그녀에게서 배웠으니까요
저 몰래 어머님이 그녀를 만나 심한 말 하신 걸 알고 그녀에게 갔었죠
조그만 자취방에 그녀는 고열로 의식을 잃은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죠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뛰면서 전 정말 죽고 싶었죠

이제껏 무책임한 저의 행동은
순결했던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기에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를 이렇게 만든 건 모두 나의 잘못이야
용서해 너의 몸이 낫는 대로 우리 멀리 떠나자 아무도 없는 곳에
어머님 용서하세요 그녀에게 저밖에 없는데 그녈 버릴 수는 없어요
언젠가 우리 모두가 다시 뵐수 있는 날까지 건강하시기를

저희는 지금 기차 안에 있어요
떠나기 전에 우리는 그녀가 다니는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도 올렸어요
그리고 신부님 앞에서 그녀와 전 눈물로 약속했죠 후회하지 않겠다고
어머님 저는 그녀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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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에 나오는 황당무계한 신청곡들을 들은 DJ들이 정말로 틀어주고 싶었을 노래는 아마도 이 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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