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에서 '여배우 노출'이라는 검색어를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아닌 두 개의 명사인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수많은 사설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아주 어려서는 '겨울여자'라는 영화가 '야하다'고 소문이 났더랬습니다. 제법 크고 나서는 실비아 크리스텔의 '개인교수'가 화제를 뿌렸고, 한국 영화로도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이 일단 개봉을 했다가 재검열로 주요 부분들이 삭제되는 홍역을 치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퇴폐적인 대중문화'를 벌레 보듯 하던 군사 문화의 잔재가 여전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6.29 이후에는 '매춘'이라는 영화가 또 대대적인 화제를 뿌린 이후 한국 영화계는 최소한 노출에 대한 한 검열기구로부터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됐습니다. 어떤 공공기관도 '음란, 퇴폐'를 이유로 노출를 막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만 들어가도 '야동'과 '야사'가 넘쳐 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여배우 노출'이 화제가 되고, 주요 검색어가 되고 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체 왜 아직도 이런 겁니까?
[두루두루] 아직도 여배우 노출이 화제가 되다니
누드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 중에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프리네의 재판'이라는 것이 있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유명한 창부 프리네는 엘뤼시스의 포세이돈 축전에 참가한 대중들 앞에서 옷을 벗은 죄로 고발되어 사형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신성한 축전에서 나체를 드러낸 것이 신성모독이란 이유에서였다.
이때 변호를 맡은 프리네의 연인 히페리데스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배심원들 앞에서 프리네가 입고 있던 옷을 잡아당겨 그녀의 나신을 노출시켰다. 판결은 무죄. 이토록 아름다운 누드를 드러내는 것은 모독은 커녕 오히려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라는 데 모든 이가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Jean Leon Gerome, Phryne before the Areopagus
최근 개봉된 몇몇 한국 영화들에서 여배우들의 노출이 화제가 됐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의 손예진이나 '미인도'에서의 김민선의 누드 열연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 강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대중의 관심은 뜨겁다.
사실 이 정도가 화제가 된다는 건 한국 영화계가 그동안 얼마나 노출에 대해 보수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로 여길 만 하다. 최근 기억할만한 노출신이 별로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돈이다. 제작자들이야 굳이 영상물등급위원회를 자극해 18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아 봐야 청소년 관객들만 잃을 뿐이고, 배우들도 '노출하는 배우'라는 평판이 나면 CF 이미지에 손해를 입는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 있는게 현실이다.
여기에 유독 노출에 민감한 한국 언론이나 평자들의 시선도 한몫을 한다. 세계 어느 나라나 영상물에 대한 규제의 두 축은 신체 노출과 폭력이다. 하지만 한국 영상에서 허용되는 폭력의 수준과 노출의 수준을 비교하자면 엄청난 불균형이 드러난다. 폭력에는 엄청나게 관대하지만 노출에 대해선 조선시대를 갓 벗어난 수준이라고나 해야 할까.
이런 불균형은 미국식의 검열 기준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지만 세상엔 반대 의견도 있다. 유럽식을 따르면 나신은 그냥 보여주지만 권총이나 무기에는 모자이크를 하는게 오히려 정상이다. 누드 보다는 폭력이야말로 미성년자들의 정서에 해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관객들의 인식이 시대에 따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미 9년 전에 나온 '해피엔드'에도 한참 못 미치는 '노출 연기'가 새삼 화제가 되고 저속한 호기심과 흥행의 관건이 되는 건 혹시 한국 사회의 정서적 퇴행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성숙도가 기원전 4세기 아테네 배심원들만도 못하대서야 될 말인가. (끝)
Grottger Artur, Fryne
프리네(Phryne)는 창부였지만, 개같이 번 돈을 정승같이 쓴 걸로도 유명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으로 무너진 테베의 성벽을 개축하는데 아낌없이 성금을 보내, 개축된 성벽에는 '알렉산더가 허물고, 프리네가 다시 짓다'라는 표문이 붙여졌다는군요.
프리네가 엘뤼시스 축전 행사장에서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당시 유명한 화가 아펠라스는 거품 속에서 태어나는 비너스를 형상화한 작품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 비너스의 탄생(Aphrodite Anadyomene)은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좋은 소재가 됐죠.
(딱 이 그림은 아니지만, 이런 풍의 그림이었을 겁니다.
이 그림은 폼페이 유적에서 나온 로마 시대의 '비너스의 탄생'.)
유명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도 바로 아펠라스가 그린 프리네의 후손 뻘 되는 그림일 겁니다. 이밖에 서양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도 프리네를 모델로 자주 아프로디테 상을 조각했다는군요. 프리네 이야기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듯 합니다. 특히나 자유 사상이 만개한 19세기 화가들은 너도 나도 프리네 이야기를 화폭에 옮겼습니다.
Genrich Ippolitovich Semiradsky, Fryne on Eleusis
아무튼 프리네 얘기는 좀 과장도 섞인 듯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누드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아울러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영상물에 대한 대표적인 두 가지 규제, 즉 성적 노출과 폭력성 노출에 대한 규제 사이에 제법 큰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점은 언젠가 한번 짚고 넘어갈 만한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별로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카지노 로열'에서 본드걸 역할을 했던 에바 그린은 '마지막 황제'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만든 노출 심하기로 유명한 영화 '몽상가들'에 출연한 뒤, 미국 언론과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섹스와 폭력에 대한 시각 차이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인터뷰라고 생각해 인용합니다.
(출처는 http://findarticles.com/p/articles/mi_m1285/is_4_35/ai_n16359912/pg_2?tag=artBody;col1)
기자: '몽상가들'이 나왔을 때 누드 때문에 엄청난 법석들을 떨었다.
에바 그린: 미국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영화에서 엄청나게 많은 살인 장면이 나오고, 당신은 다섯 살 때부터 팝콘 등등을 먹으면서 그걸 맘대로 볼 수 있지 않았나. 하지만 누드는... 아마도 미국에는 대단히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난 잘 모르겠다.
기자: 그 영화가 프랑스에서 처음 나왔을 때에는 별 반응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에바: 그렇다. 전혀 없었다. 오직 미국에서만 그랬다. 미국인들의 섹스 강박관념 때문이다.
NFC: When The Dreamers came out there was a big hoopla because of the nudity.
EG: So many movies in America have so much killing in them, and you can see them when you're 5 years old, sitting there happily eating your popcorn and everything. But with nudity ... maybe there are a lot of religious people in America, I don't know.
NFC: I don't remember an outcry in France when the film came out.
EG: No, not at all. It was only in America. Be cause they're obsessed with sex.
솔직히 '아내가 결혼했다'고 '미인도'고 한국 유사 이래 볼 수 없었던 수준의 노출이 있던 것은 절대 아니고 보면(더구나 전에도 말했지만 '아내가 결혼했다'의 노출이란 건 장난 수준입니다), 온갖 매체의 호들갑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수준입니다. (두 영화가 절대 망하면 안된다는 충정에서 나온 자발적인 붐 조성이라면, 몰이해를 사과드립니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선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참 충격적입니다. 그리 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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