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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볼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각양각색입니다. 주인공을 보고 고르는 사람(통계에 따르면 모든 조건 중에서 남자 주인공을 기준으로 고르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감독을 보고 고르는 사람, 또는 특정 제작사(예를 들자면 전성기의 골든 하베스트나 워킹 타이틀)의 영화를 선호하는 사람 등등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겠지만 제게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은, 실망하든 만족하든 '돈이 없으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어쨌든 보고 나서 말을 해야 하는' 감독에 속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제임스 카메론이 그렇듯 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선생의 '벼랑 위의 포뇨'가 18일 국내에서도 개봉됩니다. 2004년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 4년만이지만, '하울'은 원작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야자키의 오리지날 스토리로 된 작품은 2001년의 '센과 치히로의 모험' 이후 7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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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간단한 줄거리를 보자면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다섯살 소년 소스케는 벼랑 위의 집에서 선장인 아버지 고이치, 양로원에서 일하는 엄마 리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바닷가에서 놀던 소스케는 사람의 얼굴을 한 빨간색 붕어 한마리를 발견하고, 포뇨라는 이름을 붙여 친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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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히로가 성장한 듯한 씩씩한 엄마 리사)

하지만 포뇨의 아버지 후지모토는 인간 세상이 싫어 바다에서 살기로 결심한 마법사. 후지모토는 갖은 수단을 다해 포뇨를 바다로 다시 데려옵니다. 하지만 포뇨는 육지로 나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죠. 결국 포뇨는 수많은 동생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실험실에 침투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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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의 아빠인 마법사 후지모토)

'벼랑 위의 포뇨'는 한폭의 예쁜 동화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은 작품입니다. 그만치 어린 관객들을 의식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띕니다. 예쁜 화면, 너무나도 앙증맞고 귀여운 캐릭터, 동화적인 전개 방식과 일체의 비극이나 희생을 배제한 플롯 등등이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위한 맞춤형 작품으로 결실을 맺은 셈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또 작품을 볼작시면 은근히 미야자키 선생이 뿌려 놓은 떡밥이 눈길을 끕니다. 그냥 그림만 보기에 심심한 어른 관객들을 위해 생각할 거리를 주자는 심산이겠죠. 뭐 당연히 이 작품의 포스터만 봐도 생각나는 '인어공주'나 '니모를 찾아서'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인어공주'의 막내 공주는 다리가 생긴 뒤에도 땅을 밟을 때마다 면도칼 위를 걷는 고통을 느꼈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포뇨는 착한 제작자를 만난 덕분에 아무 통증 없이 땅 위를 달립니다.

그런데 아버지 후지모토는 자신의 장녀(포뇨)를 브륀힐데라고 부릅니다. 딸이 브륀힐데 라면 아버지 후지모토는 자동적으로 보탄(오딘)이 되고, 그 수많은 일본 명란젓 광고에 나오는 것 같은 꼬마 동생들은 발퀴레가 되는 거죠. 네. '벼랑 위의 포뇨'와 '니벨룽의 반지' 사이에는 제법 깊은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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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의 동생들, 왠지 다음 사진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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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명란젓 광고입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


이런 관계에 대한 추정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생명의 물을 마신 포뇨가 거대한 물고기로 변한 동생들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수면을 향해 솟구칠 때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유명한 '발퀴레의 기행'과 아주 흡사한 연주곡이 울려퍼집니다. 변주곡이라고 해야 할지도.

푸르트벵글러의 기악곡 버전 '발퀴레의 기행'입니다. 본래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중 2부에 해당하는 '발퀴레' 3막에 나오는 곡인데, 여기서는 발퀴레 역을 맡은 소프라노들의 목소리가 빠져 있습니다. 뭐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신 분이라면 너무나 귀에 익었을 곡이죠.



 
바그너의 장대한 4부작 '니벨룽의 반지'의 근간이 되는 '니벨룽의 노래' 신화에 비쳐 보면 소스케 역시 지그프리트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죠. 브륀힐데는 아버지인 주신 보탄의 명을 어긴 죄로 봉인당하고, 난관을 돌파하고 그녀를 찾아올 만한 영웅을 만날 때까지 잠자는 신세가 되죠. '벼랑 위의 포뇨'에서도 후지모토는 포뇨를 공기방울 안에 가둬 둘의 만남을 방해하지만, 결국 포뇨의 엄마인 바다의 여신의 뜻에 따라 둘을 다시 만나게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듯 하여 색깔로 가려 놓겠습니다. 감수하고 보실 분이나, 이미 영화를 보신 분만 보시기 바랍니다. 마우스로 긁으면 글자가 보입니다.)

'니벨룽의 반지'의 마지막 4부 제목은 '신들의 황혼'입니다. 이 '황혼'은 북구 신화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라그나로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들이 자신의 역사를 일궈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신화에서 주인공 지그프리트와 브륀힐데는 비극적인 운명을 마치고, 그것이 신화의 종결을 상징하지만 포뇨와 소스케는 행복한 결합을 통해, 바다의 힘으로 인간들의 문명에 종지부를 찍으려던 아버지 후지모토로부터 인류 문명을 보호합니다. 어쨌든 '인류 문명의 재개'를 뜻한다는 의미는 통한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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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란맘마레)

포뇨의 엄마 이름은 '그란맘마레'라고 되어 있죠. Grandmom와 프랑스어로 바다를 뜻하는 mare의 합성어입니다. '바다 할머니' 정도가 되겠군요. 대강 봐도 농경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서 숭상해온 대지의 여신(大母神, Magna Mater)의 해양판에 해당하는 바다의 여신입니다. 과문한 탓인지 바다의 주신을 여신으로 설정한 신화는 그리 접해보지 못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소스케의 아빠 고이치가 탄 배의 선원들에겐 '관세음보살'로 보이죠.

어른 관객들에게는 소스케와 포뇨가 함께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은 활짝 열려있는 진행형이긴 합니다만, 미야자키 선생은 두 어린아이가 기존의 주인공들처럼 어려움을 겪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듯 합니다.

아무튼 일본에서도 이 작품은 엄청난 흥행 성과를 거뒀고, 어린이들은 미칠듯이 좋아했지만 어른들은 '좀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뒤로 갈수록 너무나 단순해지면서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플롯 상의 문제들(대체 왜 소스케 엄마와 포뇨 엄마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밀담을 나눠야 하는지 등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돼기도 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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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저는 심심해서 해 본 짓이지만, 사실 '벼랑 위의 포뇨'같은 영화를 보면서 이런 저런 신화와 연관을 지어 보는 건 상당히 바보같은 짓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냥 스크린에 지나가는 곱고 귀여운 형상들을 보면서 가벼운 유머에 미소지으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혹시 옆에 앉아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어린이들이 보이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의 메시지요? '벼랑 위의 포뇨'에서 받을 만한 메시지라면 이미 수십년 전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의 토토로'에서 충분히 다 받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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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미야자키는 소스케 캐릭터에 대해 "아들 고로가 다섯살 때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 고로'가 바로 욕을 엄청나게 먹은 '게드 전기'의 감독이죠.

주제가, 마냥 신납니다.^^ 정말 중독성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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