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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좀 하다가/드라마를 보다가

미워도, 하늘이시여, 다시 한번?

KBS 2TV '미워도 다시한번'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결국은 근친상간 테마의 드라마였던 거죠. 박상원-최명길 부부의 아들 정겨운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박예진이 사실은 자신이 박상원-전인화 사이의 불륜에서 태어난 딸이란 걸 알게 된 거죠. 죽은 걸로 알려져 있던 이들 커플 사이의 첫 딸이 살아서 자라난 거였습니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공포영화 수준으로 죽었던 사람이 반드시 되살아나는 막장 드라마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정겨운-박예진이 모두 박상원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아예 여기서 끝나 버려야겠죠. 다행히도(?) 정겨운은 최명길이 박상원과 결혼하기 전, 옛 애인인 화가 선우재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정겨운과 박예진 사이의 혈연은 아슬아슬하게 꼬이지 않고 비껴 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게 아니겠지만, 이런 진행 왠지 너무 낯익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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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안방극장을 흥분시켰던 '하늘이시여'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남자주인공 이태곤은 여주인공 윤정희와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결혼을 하죠. 그런데 자신의 어머니 한혜숙이 사실은 윤정희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한혜숙은 이태곤이 태어난 다음 그의 아버지와 재혼한 계모이기 때문에 자신과는 혈연이 닿지 않지만, 윤정희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한 순간에 친어머니로 둔갑하는 순간입니다.

윤정희의 아이를 두고 이태곤의 여동생인 이수경이 하던 대사가 걸작입니다. "그럼 얘는 내 친조카야, 외조카야?" 이 사실을 윤정희에게 알린 못된 계모 박해미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던 이태곤이 화장대 거울을 깨던 소란스러운 장면만 기억에 남지만, 아무튼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틀어 놓으면 또 보게 되는 중독성 강한 막장 드라마였죠.

시아버지가 친아버지가 된 박예진, 시어머니가 친어머니가 된 2005년의 윤정희. 그대로 베꼈다는 평을 피하기 위해 살짝 성별을 바꿔 가는 패턴도 고전적인 스타일을 따랐습니다. 정말 '미워도 하늘이시여 다시한번' 혹은 '하늘이시여, 미워도 다시한번' 이라는 제목을 붙여야 딱 어울릴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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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전개는 새롭거나 특이한 건 아닙니다. 문득 오래 된 서양 농담이 생각납니다. 한 청년이 사귀던 아가씨를 데려가 아버지에게 결혼 승락을 받으려 합니다.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 흡족한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아가씨의 출신 내력과 부모 이름을 듣더니 갑자기 얼굴이 흐려졌습니다. 서둘러 아가씨를 돌려보낸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미안하다. 아들아. 그 아가씨의 어머니는 예전에 나와 사귀던 사람이란다. 우리가 불륜의 만남을 갖던 시기에 저 아가씨의 아버지는 해외 체류중이었지. 태어난 달을 보니 저 아가씨는 분명 내 딸이다. 너희는 남매가 되는구나. 이뤄질 수 없는 사이니 어서 잊도록 해라."

비감한 마음을 견딜 수 없던 아들은 그날로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웠습니다. 병이 깊어져 사경을 헤메던 아들에게 병상을 지키던 어머니는 고민이 있어 보이는 아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몸을 해치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르던 아들은 결국 어머니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놔 버리죠. 하지만 어머니는 얘기를 다 듣고도 냉소를 지을 뿐입니다.

"걱정마라, 아들아. 너도 네 아버지 아들이 아니야. 너희는 결혼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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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이야기를 자기 작품으로 가장 먼저 승화시킨 사람은 무협의 거장 김용 선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의 작품 '천룡팔부'를 보신 분이라면 무슨 뜻인지 금세 이해하실 걸로 믿습니다.

'천룡팔부'는 한 세대를 풍미한 무협지의 주인공이 가장이 되어 아들을 낳은 다음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협지의 장르 파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초반의 '미워도 다시한번'을 보고 중년 스타들의 연기력에 혹해 '명품 드라마' 운운 하셨던 분들이 이제 이 드라마의 본질을 보시고 충격을 받지나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정겨운이라는 새로운 연기파 배우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으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김종창이라는 명 연출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중견 연기자들의 호연이야.. 그 분들이 연기 잘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대한민국에 있었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