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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민 주연의 탐정 시대극 '그림자 살인'이 2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아직 본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관객 100만을 동원했고, 이번 주까지는 꽤 좋은 성적을 기대할 만 한 상황입니다.

을사조약과 고종 황제 폐위 사이의 어느 시점, 대한제국 시대의 한성을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영화가 흥행 호조를 보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영화 속 유머의 성공?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허점 없는 짜임새? 화려한 액션? 어느 이유를 하나 꼭 집어 내기보다는, 자꾸만 SBS TV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해 예능인으로서의 변신 가능성을 뽐낸 황정민의 공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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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905년에서 07년 사이의 어느 날, 내부대신의 아들이 의문의 실종을 당합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인턴 쯤 될 의사 견습생 광수(류덕환)는 얼마 전 자신이 주워다 쓴 해부용 시체가 바로 대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인 혐의를 벗기 위해 시중의 명탐정 진호(황정민)에게 진범을 찾아 달라고 의뢰합니다.

진호는 (당대에 도저히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기 힘든) 여류 발명가 순덕(엄지원)이 만들어 준 갖가지 과학적 수사 도구들을 활용해 수사에 착수합니다. 그러는 사이 두번째 희생자가 등장하고, 진호는 사건 뒤에 커다란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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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개봉 시기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일단 영화를 꽤 보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영상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모던 보이', '라듸오 데이즈', 뭐 좀 넓게 잡으면 '놈놈놈'이 보여줬던 일본 풍이 가미된 이국적인 분위기의 도시 그림은 이제 더 이상 신기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또 이 영화가 규정하고 있는 시공간은 1910년 이전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이지만, 아무리 봐도 복색이나 거리는 1930년대 이후, 그러니까 일제에 의한 근대화가 꽤 진행된 다음의 상태로 보입니다. 1907년 치고는 너무나 세련되어 보이죠.

뭐 관객이 그런 데 신경 쓸 이유는 없으니 넘어갑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수사하고 있는 것은 두 건의 연쇄 살인사건인데, 관객이든 제작진이든 모두 일련의 사건들의 진짜 범인은 '조선을 삼키려는 일제의 음모' 여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물론 얼마든지 그 밖의 결과도 상상할 수 있지만, 이 영화를 20분만 보면, 이 영화의 결말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찾아옵니다). 그러다 보니 수사는 은근히 겉돌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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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영화의 플롯에 반드시 필요하다기 보다는 '야, 이런 영화면 당연히 이런 장면이 나와야 하지 않겠어?'라는 식의 클리셰들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자면 삿갓 쓴 남자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진호와 광수가 벌이는 복잡한 거리의 추격 신입니다. 사실 성룡 형님의 수많은 작품들에서 '본' 시리즈의 맨다리 추격전까지 섭렵한 관객들에게 이런 골목 추격전이 신기하게 보일 리는 만무합니다. 물론 제한된 세트 안에서 이 정도의 박진감을 내는 장면을 보여줬다는 건 꽤 칭찬받을 일이겠지만, 제작진은 과연 이 장면이 영화의 흐름에 반드시 필요했던 것인지, 아니면 박대민 감독이 '이런 장면을 꼭 한번 찍어 보고 싶어서' 들어간 것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영화의 흐름과 이 장면이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이 되려면 이 삿갓 쓴 인물은 뒤에 나오는 서커스단 단장(윤제문)이거나 그 주변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호와 광수는 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수사중이라는 사실이 이미 노출된 셈이죠. 하지만 진호와 광수가 수사를 위해 서커스 공연장을 찾아 갔을 때, 이 둘을 알아보고 경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범인' 조차도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죠. 실컷 경주까지 벌이고 나서도 못 알아볼 정도면 대체 감시는 왜 한 겁니까.

이런 식의 진행이라면, 들인 공이 아깝긴 하지만 결국 그 삿갓맨과의 추격전은 통째로 들어 내도 영화의 흐름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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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들어가자면 플롯의 허점은 계속 쏟아져 나옵니다. 영화 첫 장면, 의생 광수는 자연스럽게 사지가 묶인 시체의 포승을 풀어 수레에 싣고 갑니다. 아주 태연하죠. 하긴 조선시대에는 역병에 걸려 죽은 시체를 자연스럽게 시구문 밖에 내다 버렸다고도 하죠. 우호적으로 생각해서 그 풍습이 구한말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냥 시체도 아니고, 묶여 있는 시체라는 건 이미 범죄를 전제로 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그런 시체를 그렇게 태연히 가져갈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허점들은 눈에 그리 잘 띄는 편은 아닙니다. 첫째로는 다소 복잡한 시대상(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일제시대인데 왜 황제폐하가 나오냐?"고 궁금해 하더군요)이나 용어에 이해의 한계를 느낀 관객들이 대충 넘어가자는 태도("뭐 그런게 있었나보지")를 취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가능한 한 최대한 속도감을 살린 편집이 그런 허점에 주목할만한 시간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 자, 자세한 건 넘어가고 일단 결말을 향해 달리자"라는 작전이 꽤 먹혀 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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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주인공의 연기는 훌륭합니다. 엄지원의 경우 배역이 너무 작아(원래 작았는지, 편집 과정에서 작아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캐릭터가 낼 수 있었던 풍성한 효과가 사라진게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황정민이나 류덕환이야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배우들이죠. 류덕환의 캐릭터가 너무 바보 연기로 일관하는 것 정도는 애교로 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수많은 허점들을 우수수 뿌린 채 결말을 향해 돌진하기만 하기 때문에,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영화의 힘은 점점 떨어집니다. 이 영화 속의 야심찬 트릭은 서커스 단장의 알리바이를 설명해 주는 데에도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맥없이 벗겨져 버리고 말죠. 애당초 미스터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진은 여러 모로 흡사한 윌 스미스 주연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의 흥행 실패에서 좀 더 많은 걸 배웠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뭘 더 바라냐는 얘기가 나올 법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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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음 작품을 위해 고칠 부분은 고쳐져야 합니다.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박대민 감독의 다음 작품 때에도 '패밀리가 떴다'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다는 보장은 없을테니 말입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신선하고 정교한 작품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자 살인'의 스피드로 볼 때 더 좋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은 충분해 보입니다.

코믹 액션 영화에 도대체 얼마나 정교한 플롯이 필요하냐고 반박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곧 개봉할 '7급 공무원' 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만든 코믹 액션 영화는 이런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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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영화에서 궁금한 점 중 하나는 무라타 '총감' 이라는 인물의 정체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로 인해 1905년 을사조약으로 설치된 통감을 '총감'으로 표기한 줄 알았습니다. 취임 1주년 기념식에 황제가 초청받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당연히 통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행동거지나 위세를 보아 이 무라타는 거의 통감급의 인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통감이라면 이토 히로부미여야 할테니 실제 역사에 혼선이 오겠죠? 그래서 굳이 '총감'이라는 이름으로 슬쩍 바꿔 넣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통감이 아니라 진짜 '총감'이라면, 총감이라고 불릴 만한 직위로는 경시총감(경찰 총수)이 있겠더군요. 하지만 한국에 경시총감이라는 자리가 생기고, 그 자리에 일본 사람이 취임한 것은 1907년 7월의 일입니다. 경무고문을 맡고 있던 마루야마라는 사람이 초대 경시총감이 됐죠. 그런데 그 7월, 고종 황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폐위됐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무라타 총감의 취임 1주년이 영화의 배경이라면, '황제 폐하'는 이미 야인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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