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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퀴즈가 좋다'로 잘 알려진 포맷의 '후 원츠 투 비 어 밀리어네어(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는 온 세계 만방에서 리메이크된 퀴즈쇼입니다.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 퀴즈 프로그램은 인도에서도 초절정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입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 자말이 도전하는 것이 바로 이 퀴즈쇼죠. 인도에서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Kaun Banega Crorepati'고 열 개의 문제를 연속으로 모두 맞추면 도달할 수 있는 상금은 2천만 루피(시작할 때에는 1천만 루피였다는군요)입니다. 1루피가 30원 정도 하니까 약 6억원인 셈입니다.

인도 갑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갑부라고도 하지만 흔히 인도 서민의 한 가족 한달 생활비가 1000루피 정도라고들 하는데, 거기 비하면 정말 팔자 고칠 거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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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대로 왕년에 그래도 각종 퀴즈쇼에 한 15회 정도 출연해 봤고, 지난해에는 퀴즈 프로그램도 하나 진행해 본 사람으로서 '퀴즈쇼 영화'로서의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대해 쓰는 글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화 리뷰의 탈을 쓰고 있는 만큼 줄거리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뭄바이의 빈민가에서 자라나 학교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한 자말(데브 파텔)이 어느날 2천만 루피의 상금이 걸린 퀴즈 쇼에 등장합니다.

('대체 퀴즈인이 뭐냐'는 질문이 나와서 약간 덧붙였습니다.)

퀴즈를 풀어나가는 동안 그의 어린 시절이 문제 풀이와 함께 조명됩니다. 형 살림과 함께 뭄바이 빈민가의 이슬람계 주민으로 살아온 자말은 어린 시절부터 온 몸으로 인도 사회의 모순을 경험합니다. 힌두-이슬람계 주민의 갈등 폭발로 어머니를 잃고, 어린이들을 이용한 앵벌이 조직에 속해 있기도 하고, 타지 마할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엉터리 가이드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역시 고아 소녀인 라티카(프리다 핀토)를 만나게 되지만 운명은 두 사람을 쉽게 재회하게 하지 않습니다. 과연 자말은 라티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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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보일이 만든 이 영화의 위대성은 퀴즈라는 게임의 양식에 자말의 인생사와 급격한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인도의 변화상을 한 사발에 제대로 풀어 넣어 관객이 한 방에 후루룩 마셔 버릴 수 있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원작 소설의 플롯이 워낙 잘 되어 있다는 사람도 있던데 그건 책을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

물론 너무 간편하게 '후루룩' 마실 수 있게 한 덕분에, 그 사발 속에 어떤 재료들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르고 들이키는 관객도 꽤 있었을 겁니다. 사실 그냥 마셨어도 맛만 있었다면 아무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재료 각각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훨씬 더 음식 맛을 즐길 수 있었겠죠.

예를 들어 자말의 직장은 다국적 기업의 콜센터입니다. 영미권의 수많은 대기업들은 국내 고객들을 상대하는 콜센터도 인도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건비가 싸고 영어 사용 인력이 풍부하기 때문이죠(한국 기업들의 콜센터도 상당수가 연변 지역에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바다 건너에서 자신들의 컴플레인을 처리한다는 것은 고객들의 회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죠. 그래서 이들은 전화를 걸어 오는 고객들과 같은 지역에서 거주하는 척 하기 위해 '연기하는 법'까지도 교육을 받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정경이 꽤 실감나게 묘사됩니다만, 이런 정황을 모르는 분들은 '쟤네 뭐하는 거야?'라고 어물어물 넘어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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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뭄바이 시내에 쑥쑥 올라가고 있는 고층건물과 그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빈민가를 동시에 보여주는 대니 보일의 시선을 향해 '세계화 속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평자가 대니 보일의 영화를 이 한편밖에 보지 않았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최소한 '트레인스포팅'에 그려진 스코틀랜드만 봤더라도 이런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에 '비치'에 그려진 태국의 서구 관광객들을 보면, 현대 인도의 우스꽝스러운 모순들을 들춰내는 대니 보일의 손길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구와 동양, 개발과 미개발 사이를 자유자재로 쑤시는 '대니 보일식 인류학'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요.

제목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퀴즈 얘기를 하겠습니다. 잘 알려진 이 퀴즈의 방식은 그야말로 운과의 싸움입니다. 복수의 출연자가 있고, 출제된 총 20개의 문제 중 10개를 맞추는 것과 혼자 출연해서 오로지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10개의 문제를 모두 맞추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주제나 범위도 없이 무차별로 주어지는 10개의 문제 중 모르는 문제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얘긴데, 그건 정말 하늘이 돕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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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퀴즈 대회에 나가는 사람은 대개는 자신의 상식 수준이 일반인들보다는 꽤 높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방대한 지식의 바다에서 보면 퀴즈왕이나 일반인이나, 그 차이는 고등어와 참치 정도쯤이나 되려나요. 태평양 전체를 기준으로 할때 고등어 한 마리와 참치 한 마리의 비중 차이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포맷의 퀴즈는 절대적으로 운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식 '후 원츠 투 비 어 밀리어네어'의 제작자들은 문제의 수준을 유치할 정도로 낮췄습니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수의 참가자가 몰리고, 진짜 운은 그 많은 출연자 중에서 선발돼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느냐에서 먼저 시험을 받습니다. (영화에서 자말은 콜센터에서 일한 바람에 전화 신청에서 당첨되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참가 신청자 수가 어마어마할텐데 어떻게 자말이 거기 나갈 수 있느냐'는 비판을 피하자는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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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자말이 비정상적으로 문제를 잘 맞추는 바람에 경찰까지 동원돼 조사를 벌인다는 설정이 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이 영화 속 퀴즈 쇼의 문제들은 초보 수준입니다. 세계 관객들은 모르지만 인도인에게 '라마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이라는 문제는 '환웅의 명에 따라 곰과 호랑이가 동굴 안에서 먹은 식물은' 수준의 문제라고 봐야겠죠. (아무리 자말이 힌두계 아닌 이슬람계로 묘사돼 있다 해도 이 정도는 알아야 할 겁니다.^)

게다가 마지막 문제. 2천만 루피가 걸린 마지막 문제 치고는 지나치게 쉽지만, 이건 퀴즈 참가자들의 심리를 아는 연출입니다. 누구에게나 '그건 잘 모르겠는데 찾아 봐야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게 되는 지식의 단편이 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의 전편 격인 로씨니의 오페라 제목이 뭐더라' 하고 생각만 하고, 찾아 보지 않았는데 희한하게도 그 문제가 결정적일 때 딱 출제됩니다. 이건 퀴즈인의 악몽이라고 할 수 있죠. 알았다가 잊어버린 거라면 더 죽을 맛입니다.

아무튼 마지막 문제를 앞둔 자말의 행태는 퀴즈인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는 퀴즈인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으로, 모든 퀴즈를 로또와 동일시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어떤 만행인지는 차마 밝힐 수 없으니 영화를 보시길). 영화의 맨 앞부분에서 대니 보일은 관객들에게 퀴즈를 냅니다. 네 개의 보기는 '1. 사기를 쳐서   2. 운으로    3. 천재라서   4. 운명이니까(혹은 대본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입니다. 이 네 개의 보기 중 어느 것이 답인지 알려 주기 위한 장면이라고나 할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역시 영화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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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방황했던 대니 보일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특기인 유머감각은 더욱 살리고, 치기 어린 비판의식은 매끄럽게 다듬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솜씨를 자랑합니다. 캐스팅상의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자말 역의 데브 파텔이 아무리 봐도 빈민가 출신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인데(아니나 다를까, 역시 영국 출신의 인도계 배우더군요), 뭐 영화의 흥행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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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자말이 풀어가는 문제의 답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자말이 생존을 위해 현장에서 배운 것이라는 사실에 필요 이상으로 감동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짜 인생에서, 누군가 '내가 직접 경험을 통해 어렵게 배운 것들'만으로 통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겠죠. 자말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다는 설정이 이 영화의 판타지적 성격을 덮어 주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는 퀴즈 쇼와 조명을 이용한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됩니다. 혹시라도 이 영화에서 아카데미상이 그동안 편애해 왔던 묵직한 메시지를 기대했던 분이라면 미리 실망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려야 할 듯 합니다. 하지만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한 편의 재미있는 영화를 찾는 분이라면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치 대중적인 영화입니다.

단 퀴즈 쇼 묘사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야구 영화에서 야구 경기 묘사가 엉망인 것과 비슷한 비중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대다수 관객들에겐 그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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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문제의 답 중 하나인 인도의 톱스타 아미타브 바흐찬은 사실 인도판 '후 원츠 투 비 어 밀리어네어'의 오리지널 사회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이슈와라 라이의 시아버지이며 자신, 아내, 아들, 며느리까지 모두 인도의 톱스타인 연예계 명문가의 가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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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 참, 이 장면에서 * 역으로 동원된 건 초콜릿과 땅콩 버터라는군요. 이 정도면 그리 심한(?) 아동 학대는 아니라고 봐도 되겠죠?




** 예전에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아역들에 대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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