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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온 세상이 기억하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리처드 닉슨. 그런 그에게 전혀 뜻밖의 인물로부터 인터뷰 제의가 들어옵니다. 인터뷰 제의를 해 온 사람은 장난스러운 토크쇼 진행으로 명성을 얻은 데이비드 프로스트(마이클 쉰이 연기합니다).
지구 최강국의 대통령으로서, 그 이전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의 부통령으로 10여년간 세계 정세를 좌우했던 노 정객 닉슨(프랭크 란젤라)은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떳떳함을 국민들에게 해명하고, 재기의 기회를 얻으려는 욕심에 인터뷰를 수락합니다. 프로스트 정도의 풋내기는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다는 확신 또한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뒤늦게 이 인터뷰가 자신의 방송 인생을 좌우할 수 있음을 깨닫고 전력을 다해 닉슨을 인터뷰합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닉슨 또한 유감없는 관록으로 여기 맞서죠. 과연 두 사람의 커리어가 달린 이 인터뷰는 누구의 승리로 끝날까요?
론 하워드 감독의 '프로스트 vs 닉슨(Frost/ Nixon)'은 처음 시놉시스만 들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박진감을 보는 이에게 제공하는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인터뷰라는 것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치열한 대결인지를 보여줍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한때는 1주일에 6회씩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일상적인 인터뷰들과, 상대방으로부터 들어야 할 말이 있고 준비할 자료가 있는 인터뷰와는 레벨이 다르죠.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터뷰는 데이비드 프로스트라는 한 방송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자, 미국 저널리즘의 역사에 남을 경험입니다. 이 인터뷰 이전의 프로스트는 언제 프로그램이 편성에서 밀려날 지 알수 없는 고만고만한 수많은 방송 진행자 중 한명이었지만, 닉슨의 본질을 꿰뚫은 이 인터뷰 이후 세계적인 셀러브리티가 되고, 영국 왕실로부터 OBE를 수여받고, 부와 명성을 한번에 꿰차게 됩니다. 시장의 논리가 미디어 업계까지도 지배하는 영-미의 상황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사실 우리나라라면 여러가지로 이런 과정이 힘들어 질 겁니다. 닉슨 정도의 명망가가 3대 지상파 네트워크도 아닌, 프로스트같은 독립방송업자(혹은 군소 외주 프로덕션)의 인터뷰 제의에 응할 리도 만무하고, 인터뷰를 한들 콧대가 설악산 대청봉인 지상파에서 그 프로그램을 거액을 내고 사서 방송해줄리도 없습니다("돈을 달라구? 공짜로 틀어달라고 빌어도 틀어줄까말깐데...").
뭐 얼마쯤 실비를 낼 수도 있겠지만, 프로스트처럼 이것 '한방'으로 갑부가 되는 건 꿈도 꾸기 힘든 얘깁니다. 방송사에 적을 둔 사람이 이런 성과를 거둔다면 간부 승진 정도는 기대해도 좋겠지만 외부인이라면 뭐 그냥 유명해지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겁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미국 얘기고, 프로스트와 닉슨은 동상이몽을 품고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초반은 닉슨의 페이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닉슨에게 혐오감을 품고 있어 "절대 손을 내밀어도 악수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던 자료 조사원이 닉슨과 대면하는 순간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부르며 악수에 응하는 모습입니다. 그만치 대통령의 포스가 강했다는 것이죠. 닉슨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게 자신의 논리로 인터뷰를 리드해갑니다. 과연 그 결과는?
영국풍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 타이틀과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감독 론 하워드라는 이색적인 조합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스포츠 영화의 문법으로 풀어갔다는 점에서 일단 가장 눈길을 끕니다.
수많은 스포츠 영화들은 누가 봐도 별볼일 없는 패자(underdog)이 절대적인 강자를 만나 승리하거나 승리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스토리를 통해 관객의 감동을 이끌어 냅니다. 격투기라면 '록키' 시리즈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고, 기록 종목이라면 '쿨 러닝'도 이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겠죠. 다윗과 골리앗의 격돌 이후 수없이 많은 이야기꾼들이 이 구도에 도전했지만 성공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 든 두 작품은 이 구도가 주는 상투성에서 최대한 벗어난 걸작으로 꼽히는 것이죠.
아무튼 이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에서 방송 인터뷰, 혹은 그 가운데 벌어지는 토론은 스포츠와 마찬가지입니다. 백전노장인 챔피언 닉슨과 야심만만한 무명 도전자 프로스트가 카메라가 지켜보는 링에서 자신의 온 지혜와 힘을 다해 겨루는 것이죠. 인터뷰는 본래 격투기와 비슷합니다. 격투기중에선 온몸을 다 쓰는 이종격투기보다는 복싱의 특징을 갖고 있죠.
이런 구도의 영화라면 자연히 도전자가 철옹성같은 챔피언의 가드를 뚫고 한방을 날리는 순간, 관객은 환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론 하워드 감독은 그런 관객의 속성을 꿰뚫고 있죠. 그래서 별다른 액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스트 vs 닉슨'은 박진감넘치는 볼거리를 관객에게 제공합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록키'의 사운드트랙이 울려퍼져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작품입니다.
실제 사건과 실제 인터뷰를 영화화한 것이므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실존인물입니다.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바로 데이비드 프로스트의 오늘날이죠. 저 인터뷰를 통해 스타가 된 프로스트는 현재 알 자지라 방송(!)의 영어 채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지난번 '발퀴레'관련 포스팅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이스라엘에서의 바그너 연주와 이스라엘-아랍 청소년의 공동 오케스트라 활동 등에 대해 물어보던 토크쇼 영상을 퍼온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쇼의 진행자가 이 '프로스트/닉슨'의 실제 주인공인 데이비드 프로스트입니다. 쇼의 정확한 제목은 'Frost over the world'입니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주목한 인물은 샘 록웰이 연기한 제임스 레스턴 주니어입니다. 언론계 전공자나 종사자들이라면 친숙한 이름이죠. 뉴욕 타임즈 편집국장을 역임한 20세기 최고의 미국 언론인으로 불리는 제임스 레스턴과 이름이 같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첫 부분에 "아버지가 닉슨 하야 방송을 보라고 전화해서 봤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 아버지가 바로 제임스 레스턴이었던 겁니다. 영화 뒷부분에서 레스턴 주니어가 닉슨과 대면하고 서로 소개하는 장면에서 "제임스 레스턴"이라는 이름을 댔을 때, 닉슨이 "그 제임스 레스턴과 어떤 관계냐"고 물어봤더라면 더 자연스러울 걸 그랬습니다. 닉슨이야말로 아버지 레스턴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죠. (뭐 영화의 흐름상 거기서 그런 군더더기를 달 필요는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보신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짧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론 하워드는 이 영화에서 관객의 호흡을 앞지르는 신공을 발휘합니다. 닉슨의 하야 원인이 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사전 지식 또한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두 파이터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훌륭한 스포츠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듯 즐기면 어느새 122분짜리 영화가 끝나 있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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