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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의 어느날, 미국을 보호해온 히어로 집단 왓치맨 Watchmen의 일원 코미디언(제프리 딘 모건)이 괴한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역시 왓치맨의 한 사람인 로어셰크(재키 얼 헤일리)는 이 사건 뒤에 만만찮은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하지만 이미 현역을 떠나 은퇴해 있던 나머지 멤버들은 그리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왓치맨의 대표격인 닥터 맨해튼(빌리 크루덥)은 구 소련의 군비 확장으로 인한 인류 말살의 위협을 막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 세세한 인간사에 관심을 돌리려 하지 않죠. 또 전 사회적으로도 핵전쟁의 불안감이 세상을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코미디언의 죽음은 쉽게 묻힙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멤버 오지맨디아스(매튜 굿)의 살해 시도 사건이 벌어지고, 결국 물러나 있던 와치맨 멤버들은 현역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듯, 음모의 규모는 엄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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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 Watchmen'은 지금까지 보던 슈퍼 히어로 영화들 중 가장 현실과의 경계가 엷은 작품이었습니다. 다른 히어로 영화들, 예를 들어 '배트맨'이 고담이라는 뉴욕을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를 무대로 하는 등 어느 정도 현실과 코믹스(혹은 그래픽 노블) 사이에 선을 그어 놓고 시작하는 반면, 왓치맨은 적극적으로 현실을 끌어들인 대체 역사물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진짜 역사와 '왓치맨' 사이의 거리는 월남전을 계기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2차대전의 승전과 케네디 암살까지는 실제 역사와 차이가 없죠. 하지만 월남전에 초인중의 초인 닥터 맨해튼이 투입되면서, 미국은 승전국이 되고 지긋지긋한 월남전의 악몽에서 벗어납니다. 승리한 대통령 닉슨에게 워터게이트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닉슨은 5선까지 성공하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군림합니다.

닥터 맨해튼과 왓치맨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사실 너무도 자명합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누가 봐도 미국을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 놓은, 군부를 포함한 국가 지도 세력에 대한 은유입니다. 특히 그 핵심에 서 있는 것은 핵무기를 포함한 최강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닥터 맨해튼입니다. 닥터 맨해튼이라는 이름에서 2차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연상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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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또 다른 분위기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지속되는 한 핵무기의 전능한 파괴력은 인류의 말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지미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한때 군축과 데탕트가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극우파인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다시 한번 전쟁 발발의 위기감을 부추깁니다.

어느 쪽이든 핵전쟁을 일으키면 양쪽 모두 파멸을 면치 못한다는 위기감, 즉 '공포의 균형'이 세계 정세에서 유일하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이론이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미국의 핵 배치에 반대하는 데모대가 '죽음보다는 공산주의가 낫다'는 구호를 외쳤고, 미국은 여기에 맞서 '공산주의는 죽음이다(스탈린 치하에서의 대숙청을 예로 듭니다)'라는 프로파간다로 맞서던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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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왓치맨'은 바로 이 시기, 핵무기를 알게 된 인간이 스스로 인류의 미래를 말살시켜 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비관이 팽배해 있던 시절의 소산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불안감은 꽤나 기우였던 셈이죠. 이 작품이 나오고 몇년 가지 못해 무리한 군비경쟁의 결과로 소련은 패망해 지금의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민족 국가로 흩어졌고, 엄청난 규모의 핵군비는 대량으로 해체됐습니다. 일부 남은 자투리 핵탄두가 중앙아시아의 암시장을 떠돈다는게 가끔 액션 블록버스터의 소재로 쓰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왓치맨'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핵전쟁의 공포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건 뭥미'라는 반응을 낳을 만도 합니다. 물론 80년대의 세계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 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40대 이상의 구세대가 보면 재미있을만한 요소도 꽤 있습니다. 리처드 닉슨을 비롯해 미국 극우파의 상징인 패트 뷰캐넌, 크라이슬러 자동차 신화의 주역 리 아이아코카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실명으로 출연 - 물론 닮은 대역이 -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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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인정하듯 잭 스나이더의 손맛은 여전합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강렬한 액션과 깔끔한 화면, 그리고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영상은 충분히 현대 관객들의 수준에 맞춰진 것이죠. 사실 이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우려의 소리도 높지만 이미 1분에 50명씩 테러범들을 쏘아 죽이는 '둠'같은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자라난 세대에게 이 정도의 영상으로 폭력성을 말한다는 건 농담에 가깝죠.

그렇다고 해서 스나이더의 원초적 폭력성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생각하지 마라, 그냥 즐겨라'라는 수준에서 조금도 더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 영화의 철학적 메시지나 심오함에 대한 논설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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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는 '어쩌면 스포일러'인 내용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영화를 보겠다는 분들은 건너뛰시고, 영화에 대한 입장이 궁금하신 분은 마지막 문단만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원작의 마니아가 아닌 일반 관객들에게 있어 가장 난감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결말 부분입니다. 음모의 전모가 밝혀지는데 그 음모의 내용에 주인공 중의 주인공인 닥터 맨해튼은 너무도 쉽게 수긍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닥터 맨해튼은 누가 뭐래도 신의 캐릭터입니다. 신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그에게서는 인도-힌두 신화 혹은 불교의 영향이 짙게 느껴집니다. 절대적인 평화를 기원하기도 하지만, 인간사의 사소한 문제에는 이미 초탈해버린 면이 그렇습니다. 전체 우주의 차원에서 인류 하나가 멸종하거나 말거나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화성으로 날아가 순식간에 수백미터 높이의 구조물을 뚝딱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은 이 영화의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있는데 핵전쟁 따위를 고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앞부분에 고의적으로 "소련의 핵탄두는 5만개나 된다. 닥터 맨해튼이라 해도 그 모두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99%를 막는다 해도 나머지 1%만 목표에 적중하면 인류는 끝"이라는 대사가 들어 있지만 영화의 다른 부분에서 보여주는 닥터 맨해튼의 능력은 5만개 아니라 500만개의 핵탄두가 날아온다 해도 그걸 모두 초콜렛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수준으로 보입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쉽게 러시아 어딘가로 날아가 소련의 전략 미사일 발사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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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든 것을 초월해 있던 듯한 닥터 맨해튼은 한편 자신의 내면에서는 초등학생 수준의 번민과 판단 실패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가 결론적으로 선택하는 내용은 관객을 아연실색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작가의 편의에 의해 주인공이 지나치게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강대한 힘과 거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판단력과 지성, 이 두가지를 겸비한 닥터 맨해튼이 바로 미국의 현주소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건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의 결론에서는 서구인의 정신적인 취약성이 짙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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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팬들이라면 생각이 다르겠지만, 이 '왓치맨'에서 어떤 철학적인 심오함이나 깊이를 찾기는 힘듭니다. 그저 남아 있는 것은 80년대 한때 유행했던 인간의 판단력에 대한 혐오 정도일 뿐입니다. 그나마도 지금에 와선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니 어디서 이 작품의 위대함이나 통찰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왓치맨'이 주는 교훈은 한 시대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통찰은 10년도 못 가 뒤집힐 수 있다는 데 대한 경계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왓치맨'이 그 당시, 혹은 1990년대쯤에 영화화됐다면 이보다는 훨씬 설득력있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무엇이 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 줄까요. 그저 원작을 재미있게 보았던 팬들의 동호회용 영화로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뿐입니다.

잭 스나이더의 팬들이라면 여전한 파괴와 살육, 그리고 입가심으로 슈퍼 히어로들의 정사신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걸로 만족하실 분들이라면 얼마든지 보셔도 좋겠죠. 하지만 오랜만의 슈퍼 히어로 무비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데이트를 생각하셨던 분들이라면 다른 영화를 고려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p.s. 마지막으로 원작 팬들께 질문:

1. 코미디언이 실크 스펙터를 강간하려 할 때 제압하는 캐릭터는 누굽니까?

2. 영화에선 케네디 암살의 범인이 코미디언으로 보이던데, 원작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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