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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길 바라. 나보다 너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 있을거야." 가끔 드라마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대사지만, 현실에서의 이 말은 주로 "이제 네가 지긋지긋해"라는 말의 '고운 말'로 사용되곤 합니다. "어딘가에 네 짝이 있겠지만 난 아니다"라는 뜻이죠.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의 첫번째 시사회는 다른 바쁜 일로 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시사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을 체크했죠. 첫번째 사람에게 어땠냐고 물었습니다. 평소 영화를 냉철하게 보고, 특히 이런 멜러 영화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후배였죠. 그런데 "나쁘지 않다"는 의외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두번째 사람에게 물었을 때엔 놀랄만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번 사람은 업계에 종사한지 10년이 넘은 노련한 여자 관계자. '어땠냐'고 묻자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끝나고 여자 화장실에 갔더니 여기자들이 눈이 벌겋더라. 몇몇은 그때까지도 훌쩍거리고, 내가 들어가니까 다들 민망해하면서 시선을 피하던 걸." 다른 여자 후배 기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도 좀 찡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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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어떤 영화 제작자도 기자 시사회의 반응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객들보다 냉정하기 때문이죠. '가문의 영광'도 기자 시사회때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정준호 등 배우들이 무척 불안해 하자 제작자는 "야, 이 사람들은 정상이 아니야(?)^^. 진짜 반응을 보려면 일반 시사회때 봐야 돼"라고 안심을 시켰다는군요. 그리고 이 영화는 실제로 '터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자들도 울었다니, 관심이 안 갈 수 없는 얘기더군요. 그래서 부리나케 영화를 봤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뮤직비디오와는 많이 다릅니다)

케이(권상우)와 크림(이보영)은 고교시절부터 단짝처럼 지내던 사이. 서로 부모 형제 없이 외톨이인 둘은 케이의 부모가 남긴 집에서 남매처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러다 케이는 라디오 PD가 되고, 크림은 작사가가 되죠. 두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케이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바로 옆 스튜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치과 의사 닥터 차(이범수)에게 크림이 관심을 보입니다. 하지만 닥터 차에게는 집안에 맺어준 약혼녀(정애연)가 있습니다. 케이는 약혼녀와 닥터 차를 헤어지게 해서라도 크림이 닥터 차와 결혼하게 해 주려고 애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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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었을 때에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지는 줄거리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와 맺어주려고 애쓰는 남자? 물론 영화를 보지 않아도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남자가 불치병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겠죠. (물론 스포일러도 아닙니다. 둔한 분들도 영화를 10분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치병이라도 이런 진행은 지독하게 비현실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성패는 자명합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스토리가 관객들에게 그럴법하게 여겨지게 포장되어 있다면 성공이고, 아니라면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거겠죠. 과연 원태연 감독은 이 한편의 뮤직비디오같은 스토리를 어떻게 구성했을까요.

아마 영화를 보기 전의 기대는 다들 비슷할 겁니다. 권상우 주연의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라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심 저의 첫번째 반응은 '이 뭥미?'였습니다. 영화가 원태연 시인의 영화 데뷔작이 될 거란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권상우가 또 가시밭길을 가는구나'라고 생각했죠. 권상우가 '너는 내 운명'의 박진표 감독과 함께 영화를 찍을 기회가 무산된 직후라서 더욱 그랬을 겁니다. 검증된 4번 타자를 빼고 무명 신인을 대타로 내는 감독을 바라보는 심정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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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원감독은 괜히 스타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신인답지 않게 노련했습니다. 우선 이 영화는 케이의 시선으로 사건의 진행을 죽 서술해준 다음, 이번엔 크림의 시선으로 같은 사건에서 케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정리해줍니다. 마무리는 닥터 차의 몫입니다.

케이의 시선으로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상당히 답답해합니다.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하지만 그 뒤로 크림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면 왠지 이 이야기를 납득해야만 한다는 묘한 설득을 당하게 됩니다. 아, 그렇다고 말이 안 되던 스토리가 갑자기 말이 된다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말이 안 되는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걸 꼭 짚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 되는 겁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원태연 시인, 아니 원감독의 설득력은 본 사람으로 하여금 '그래, 저런 스토리가 실제로도 가능할거야'라고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얘기가 사실이었으면(혹은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라고 기대(또는 개입)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죠.

일각에선 사랑이 뭐냐는 질문에 양치질이라고 답하는 권상우의 말("남들이 안 볼 때엔 양치질 안 하세요?" - 언제나 하고 있다는 뜻) 같은 감각적인 대사가 원감독의 장점이라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엔 그 이상의 기획력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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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동안 수많은 액션 느와르에 출연했지만 아직 권상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이런 식의 감성적인 멜로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형편없는 진행과 플롯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천국의 계단'이 4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히트한 것은 결국 권상우의 얼굴이 그런 말도 안되는 스토리를 극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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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영도 어느새 늘어난 주름살이 좀 아쉬움을 남깁니다만 탄탄한 기본기를 이용해 훌륭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범수 역시 흠잡을 데는 하나 없지만 역할이 너무 축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뮤직비디오에서 더 큰 활약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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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통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을 배우는 정애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4년 영화 '아홉살 인생'에 피아노 선생님 역으로 출연했을 때부터 '흔치 않은 느낌의 좋은 마스크'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새 세월이 꽤 흘렀군요. 이 영화에서는 쉬크한 느낌의 사진작가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 냈습니다. 단지 이런 마스크의 캐스팅 범위가 한국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커플을 괴롭히는 부잣집 딸 이미지로 너무 한정되어 있는 듯 해서 좀 더 넓은 도전을 위해선 본인의 노력도 꽤 따라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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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배우로는 가수 이승철 역의 이승철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과 함께 일했던 관록의 배우 출신답게 매우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누가 뭐래도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는 '한폭의 뮤직비디오'같은 영화입니다. 이런 스토리에 진력이 나고 몸서리가 쳐 지는 분들도 많겠지만, 같은 재료라도 주방장의 솜씨에 따라 사뭇 달라지는 법입니다. 제가 보기에 주방장의 솜씨는 A급입니다.

 

화이트데이에 저녁 식사 시간까지 함께 할 일이 필요한 연인들이라면 매우 좋은 선택이 될 듯 합니다. 40대 이상의 관객들이라면... 반응이 매우 궁금합니다.


p.s 주제가는... 빨리 연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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