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사실상 존엄사 인정'이라는 헤드라인을 본 순간 제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마지막 대목이었습니다. 요즘 존엄사, 존엄사 하지만 참 귀에 설게 들립니다. 예전에 쓰던 안락사라는 말과 뭐가 다른지 헛갈리시는 분도 많을 법 합니다.
존엄사로 부르건 안락사로 부르건,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떡밥인 건 분명합니다. 말을 바꿔 놓고 보면 이런 죽음은 일종의 자살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걸 돕는 사람은 넓은 의미의 살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격하게 보자면 의료진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의료 윤리 위반이기도 합니다. 이런 떡밥을 덥썩 물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긴 합니다만, 아무튼 거기에 대해 쓴 글입니다.
전문가 분들의 지적이나 충고를 환영합니다.
아래 글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 어디선가 들어 보신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혹시 이 영화를 보려고 계획중인 분이 있다면 그냥 지나가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제목: 존엄사
2004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장애인 인권단체로부터는 극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늙은 권투코치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딸처럼 아껴온 선수가 사고로 목 아래 전신마비에 빠지자 독극물 주사로 안락사를 돕는다. 극중에선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 행위였지만 장애인 단체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장애인들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항의에 나섰다.
서울대병원이 18일 사실상 존엄사를 인정하는 방침을 발표해 한바탕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오랜 논쟁거리였던 안락사(euthanasia)라는 말 대신 언젠가부터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말이 쓰이지만 두 용어의 혼동으로 인한 혼란도 만만찮다. 엄밀히 말해 두 용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안락사는 '치료 방법이 없어 더 이상의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직·간접적 방법으로 고통 없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 '적극적인 안락사'는 독극물 주사 등으로 환자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이며, '소극적 안락사'는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맞는 것을 가리킨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지난 2005년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모두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 연구자들도 이번 서울대병원의 조치를 비롯해 국내에서 사용되는 존엄사의 의미를 소극적 안락사로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1997년 발효된 미국 오리건주의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은 6개월 이내 시한부 생명을 진단받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독극물 투여를 허용하고 있다. 보수파인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2001년 약물 관리법을 이용해 이 법을 무력화시키려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2008년 현재 이 법의 적용을 받아 삶을 마감한 환자는 400명을 넘어섰다.
여기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촉발된 논쟁은 이미 존엄사와 관련된 논의가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한계를 넘어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권리'를 과연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느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존엄사 논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좀 더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각계의 지혜가 모이기를 기대해 본다. (끝)
글자 뜻으로만 풀이해도 '존엄사'란 '죽는 순간 만큼은 인간의 존엄성(dignity)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이미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의료진이나 가족의 의무감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그저 연장하고 있을 뿐이라면 과연 그게 인간을 위한 것이냐는 의문이 떠오를게 당연합니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 이런 경우, 저런 경우, 경우에 따라 생각할 거리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환자가 이미 의식이 없다면? 가족이 치료비 때문에 살 수 있는 환자의 치료 중단을 요구한다면? 환자의 잔여 수명이 1년이 넘게 예측된다면? 암이 아닌 다른 불치병이라면? 환자가 뇌손상으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이런 경우들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준비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존엄사에 대한 '대표 입장'을 갖게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이후 의료계가 "존업사 입법의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카톨릭 생명윤리위원회는 곧바로 "추기경의 죽음을 존엄사로 매도하려는 세력에게 경고하며, 이것이 안락사 허용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고 성명을 냈습니다.
엄밀히 말해 국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존엄사의 개념에 비치면 김 추기경의 마지막 길은 존엄사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걸 '매도'라고 표현하는 것은 굳이 국내에서 통용되는 존엄사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이기도 하죠. 물론 자살을 엄금하고 있는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어쩔수없는 선택이라고 보입니다만.
가끔 사람들은 '존엄사'나 '안락사'라는 말에서, 도저히 후송 불가능한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동료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는 병사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에 나온 죽음의 형태는 아마도 이쪽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가장 끔찍한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오래 전에 들은 얘기로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을 시도한 사람 가운데 뇌손상만을 입고 살아남아 침을 질질 흘리며 세살짜리 아이 수준의 지능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사람도 있다더군요.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온 몸이 전신마비로 꼼짝할수 없는 상태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도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라면 정말 참담한 심경일 겁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결말에 장애인 인권 단체들이 반발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학에 가고, 책을 저술하고, 석학이 되는 사람도 있다"며 "이런 영화의 결말은 그런 악조건에서도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용기를 꺾는 것"이라는 생각인 것이죠. 호킹 교수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을 개인의 결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로 남겨 둘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여기에 대해서도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답은 없을 듯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한 당사자의 입장, 또 옆에서 바라보는 가족의 입장, 의료진의 입장이 어차피 다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상황을 다 감안하면 카이자르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과연 어떤 죽음이 이상적인 죽음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답니다. 이때 카이자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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