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해운대'때 얘기했지만 예고편만 놓고 봤을 때 올 여름 한국영화 3총사의 기대 순위는 '국가대표', '해운대', '차우' 순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까놓고 보니 '해운대'와 '차우'가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대체 왜 예고편을 그렇게밖에 못 만들었나 의아할 지경이더군요. 그리고 그와 함께, 그렇다면 과연 '국가대표'는 어떨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가끔씩, 예고편은 환상적인데 본편은 영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막상 본 영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막상 진짜 스키 점프 장면이 시작된 뒤로는 시계 볼 생각도, 영화 끝나고 뭘 할까 생각도, 그 시점까지 영화의 앞부분에서 뭐가 좋았고 뭐가 안 좋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우생순'을 포함해서, '록키'를 포함해서 이렇게 가슴 벅찬 스포츠 신은 처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을 되새겨보려니 가슴이 뜁니다.
스토리라인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그리 벗어나지 않습니다. 미국에 입양돼 주니어 시절 알파인 스키 대표선수까지 지냈던 헌태(하정우)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어머니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방코치(성동일)의 꼬임에 넘어가 난데없이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됩니다.
하지만 방코치가 모아들인 선수들은 오합지졸. 고교시절 약물파동으로 스키 입상을 취소당한 흥철(김동욱)과 그 뒤를 따라다니기만 하던 파파보이 재복(최재환), 그리고 가난이 유죄로 군대를 안 가기 위해 운동을 결심한 칠구(김지석)까지 간신히 4인 1조, 스키점프 단체전에 나갈 수 있는 한 팀이 꾸려집니다.
여기에 방코치의 딸이며 섹시하지만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인 수연(이은성)이 갑자기 끼어들면서 훈련은 코믹하게 진행됩니다.
훈련 과정은 '쿨 러닝'을 보신 분이라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원지의 폐허에서 사용되지 않는 워터슬라이드를 점프대 대신 이용하기도 하고, 사철 눈이 내리지 않는 한국의 특성상 흘러내리는 물을 대체품으로 이용합니다. 자동차 위에 스키부츠를 고정시키는 위험천만한 장면도 연출됩니다.
마냥 동화 속 이야기같은 '쿨 러닝'과는 달리 이 영화는 '어른들의 세계'에도 한 발을 걸칩니다. 사실 이런 과정이 이야기들에는 점수를 많이 줘 봐야 5점 만점에 3.5점 정도 이상은 주기 힘듭니다. 이야기는 때로 무리한 진행을 보이기도 하고,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중간에 튀는 듯한 부분도 몇 번 있습니다. 게다가 심각한 장면을 강제로 해소하기 위해 갑작스레 코미디로 전환하는 장면들은 그리 효과적이지도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30분,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이들 선수들의 경기 장면은 그동안 약간 위태롭게 보이던 이 영화의 앞부분을 싹 잊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감히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한국 영화의 클라이막스 가운데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장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 박상민이 혼마찌에 단신으로 쳐들어가 벌이던 격투 신 이후로 이렇게 피가 끓어오르는 장면은 처음입니다.
이런 강력한 클라이막스 덕분에 '국가대표'는 올해 한국 영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 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CG의 도움이 컸겠지만, 수만의 관중 앞에서 펼쳐지는 스키점프의 박력과 정교한 스토리의 배치는 김용화 감독의 역량을 다시 한번 높이 평가하게 해 줍니다. 꽤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 영화의 스키 점프 신은 한국 스포츠 영화, 아니, 한국 영화 전체를 꿰뚫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 중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로 따지자면 수훈갑은 하정우보다는 김동욱입니다. 물론 하정우가 맡은 캐릭터의 개연성이 좀 부족했다는 점을 먼저 꼽아야겠지만, 아무래도 하정우보다는 김동욱의 영화라는 쪽이 맞을 듯 합니다.
그 밖의 배우들에게선 이들과 비교할만한 비중을 두기 힘듭니다. 특히 이은성이 좀 더 좋은 연기를 보였다면 영화는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었을 겁니다. 여배우 조련에 꽤 뛰어난 걸로 알려진 김용화 감독도 이렇게 손을 들었을 정도면 앞으로 이은성은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더욱 볼만하게 만드는 요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주제가로 쓰인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입니다. 지난해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하지 못한 점이 안타까웠는데,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지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국가대표'는 이게 전부인 영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얘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영화 줄거리의 세세한 부분을 건드리게 됩니다. 그게 싫으신 분들은 아래로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어쨌든 약간 정리해서 얘기하자면, 오락 영화로서 '국가대표'는 강추작입니다. 사소한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라스트의 박진감이 모든 것을 보상해 줍니다.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그럼 나머지는 안 보셔도 될 얘기들. (그런데 써놓고 보니 제목에 해당되는 부분은 이 아래쪽에 다 있군요. 죄송...^^)
영화의 맨 첫 부분. 어머니를 찾아 한국에 온 헌태-바비는 TV의 아침 방송에 나가 사연을 얘기합니다. 헌태가 "함께 입양된 여동생이 결혼해 아기를 낳았는데 너무 귀엽다"고 말하자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다가, 갑자기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헌태의 얼굴 뒤 화면에 여동생 가족의 사진이 나오는데 남편이 흑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헌태는 사람들이 왜 웅성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헌태는 "이 나라가 나를 3천만원에 외국에 팔았어! FUCKING KOREA!"라며 분노를 토로하기도 합니다. 영화 앞부분에서 헌태가 말하는 '우리 나라'는 미국입니다. 또 재복이 임신한 연변 처녀 순덕이와 결혼하겠다고 말하자 재복의 아버지는 "우리집 독자인 놈이 중국년과 결혼을 한다고?"라며 용납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런 일련의 장면들이 보여주려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한국인들의 이중성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죠. 외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본을 제외한 여타 아시아 국가 사람들이나 흑인들에 대해서는 경멸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주는 대다수 한국인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이 영화는 주인공인 스키점프 선수들을 지나치게 사회적인 약자로 몰아가려는 무리한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들에게 '나라'와 '어른'들은 줄곧 거짓말을 하고, 무책임하고, 여차하면 자신들을 버리려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식의 배치가 보여주는 것 역시 자명합니다. '세상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 벌떡 일어선' 주인공들을 더욱 영웅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죠.
하지만 문제는 이런 시도들이 영화 '국가대표'의 발랄한 스텝과 그리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끔은 이런 부수적인 요소들이 잘 흘러가는 영화에 짐이 되는가 아닌가 아슬아슬할 때도 있습니다. 다행히, 아주 거슬릴 정도는 아닙니다.
김용화 감독이 왜 이 영화에 이런 부수적인 요소를 넣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생각 있어 보이기 위해서'라면 대단한 위험을 감수한 셈입니다. 정말 다행히도 이런 요소들이 영화를 크게 해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보실 분들에게도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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